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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폭풍 속으로 (65/135)


65화. 폭풍 속으로
2022.11.11.



 
이번 제도에서는 이뤄야 할 것들이 많았다.

카나리아의 연회에 참석하는 것은 물론, 소리 없는 전쟁이 점점 실체를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누구 하나 죽어야 끝나는 게임이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가 가리키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레니샤의 말대로 제도가 하루가 다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메테오는 소공작 부부와 함께 힐로샤인에 남았다.

메테오를 떼어내고 렉서스가 있는 곳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카시우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레니샤의 곁에 서고 싶어 안달 난 남자들이 훨씬 마음 쓰였다.

렉서스.

레니샤를 뜨거운 눈으로 보던 미친 남자.

캘리엇 백작은 카시우스에게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레니샤 님을 향한 황제의 집착은 비정상적입니다. 논리도 없고 이유도 없지요. 황제가 레니샤 님을 위한 사택을 밖에 짓고 있는 것은 알고 있습니까? 렉서스 황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레니샤 님을 다시 붙잡으려 할 겁니다. 조심하십시오. 가시는 곳은 제도입니다. 눈 깜빡하는 사이에도 코를 베어 가는 곳이지요.’

카시우스의 턱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레니샤와 카시우스는 같은 곳에 있으면서도 다른 것을 보고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카나리아가 마담 투리엘의 의상실을 찾았다.

앙숙이나 다름없던 두 사람이 가까이 지내는 모습을 보고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투리엘이 철새처럼 권력을 따라 옮겨 다닌다고 떠들어 댔다.

그럴 소문이 날 만도 한 것이 카나리아가 투리엘이 만든 옷만을 고집하며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황후가 된 이후에도 투리엘의 의상실을 직접 방문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투리엘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는 궁금할 지경이었다.

정말로 투리엘이 카나리아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건지.

고작 말 몇 마디로 투리엘을 제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여기는 건지!

카나리아가 투리엘을 보고는 생긋 웃었다.

조금씩 불러오기 시작한 아랫배를 손으로 감싸 안은 카나리아는 이전보다는 안정을 찾은 듯했다.


“곧 있으면 레니샤가 제도에 도착할 거야, 마담 투리엘.”

자연스러워진 하대에 투리엘이 실소를 머금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레니샤도 내 초대에 응해 사교 모임에 참석하겠지? 그곳에서 나를 지지해주겠지, 당연히?”

카나리아는 투리엘을 가지면 레니샤도 가질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투리엘이 카나리아를 위해서 귀부인들과의 자리를 계속해서 마련해주고 있었다.

카나리아는 심혈을 기울여 말을 고르고 해야 할 행동을 골랐다.

드레스나 고르던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태도였다.

바바라는 그렇게 변해가는 카나리아를 보면서 기뻐했다.


‘황후로서의 자질을 점점 쌓아가시는 것 같습니다, 폐하! 훌륭한 황후가 되실 수 있을 거예요!’

삐거덕거리던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렉서스도 요새는 얌전했다.

카나리아와 평범하게 식사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아이도 원만하게 자라고 있으니 카나리아가 슬프거나 고통스러울 이유가 없는 것이다.

투리엘이 미소를 머금고 있는 편안한 얼굴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염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레니샤를 지옥으로 떠민 사람 중의 한 명인 카나리아가, 레니샤의 지지를 바라다니.

투리엘이 카나리아를 무감하게 응시했다.


“레니샤가 정신이 없을 듯해서 내가 대신 드레스를 준비해주려고 하네. 자네도 알다시피 귀부인들은 유행에 민감하지 않나.레니샤는 그간 힐로샤인에서 지내면서 도태되었을 것이 틀림없어. 황후가 된 도리로 내가 도와야 하지 않겠어?”

카나리아가 스스로에게 감명받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당하시군요. 그래서 레니샤 님을 위해서 드레스를 주문하신다고요?”

“그래. 이번 드레스코드는 붉은색으로 정했어.”

그 말을 하는 카니리아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투리엘은 카나리아가 과거를 완전히 잊고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붉은색.

그것은 레니샤가 일전에 카나리아를 골탕 먹이기 위해서 사용했었던 색이었다.

투리엘이 서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붉은색, 말씀이신가요?”

“맞아. 레니샤의 드레스와 함께 내 드레스도 새로 제작하려고 해. 렉서스에게도 허락받았지.”

카나리아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지난 저녁 식사를 함께하며 렉서스는 카나리아가 새로운 드레스를 맞추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실상 카나리아에게 배정된 예산은 터무니없을 지경이다.

그것에 대해서 불만을 표해봤자 렉서스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하는 일 없는 황후가 돈을 가져다 쓰면 사람들이 비난한다.’

카나리아는 일단은 지금의 상황에 순응하기로 했다.

드레스 한 벌을 사려 해도 렉서스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삶이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이번에 카나리아가 예상보다 더 큰 금액을 받아올 수 있었던 것은 ‘레니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니샤가 입을 드레스도 맞춘다는 말에 돈을 흔쾌히 내어주던 남자의 얼굴이란.


‘개자식.’

사람들이 속으로 다른 생각을 품고 있듯이 카나리아도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아이만 태어난다면……. 이 아이만…….

카나리아가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카나리아도 뒤로는 렉서스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카나리아의 눈앞에 품에 안은 아기와 관을 쓴 그녀가 황좌에 앉은 모습이 아른아른 보이는 듯했다.

바바라가 해준 말은 카나리아가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속내는 전부 감춘 채로 카나리아가 쾌활하게 웃었다.


“예전에도 레니샤는 붉은색이 특히 잘 어울렸었지. 하지만, 투리엘. 자네도 알다시피 이제는 상황이 많이 바뀌었어. 내가 입을 드레스가 좀 더 화려하고 웅장해야 하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예, 폐하.”

“그리고 레니샤가 오면 자네하고 소통할 테니 내가 따로 보고 싶어 한다고도 전해주게. 과거의 사과로 우리 사이의 앙금은 전부 해소된 것 아니겠나.”

레니샤가 정말로 제도로 돌아올 생각이 있는지 그 속을 살펴볼 예정이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번에 새롭게 고아원을 설립하는 일을 내가 맡게 되었어.”

카나리아가 그린 듯이 미소 지었다.

그녀에게도 드디어 후원자가 생긴 것이다.

카나리아에게 손을 밀어주는 귀족이 생겼다.

그녀를 황후로서 인정한다는 뜻이겠지.

가슴에 봄날 바람이 든 것처럼 들떴다.

그 덕분인지 렉서스가 카나리아에게 고아원을 설립하는 일을 맡겼다.

드디어 카나리아도 황후로서의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기분이 한껏 들떴다.


“후작께서 그 일을 도와주시기로 하셨지. 그런데 다만, 투리엘 자네의 조언도 받고 싶어서 말이야. 알다시피 이런 일은 내가 처음이지 않나. 남자와 여자가 보는 시선도 다르고. 이번에 잘 해내서 황제 폐하의 인정을 받고 싶네. 나를 도와줄 수 있겠나?”

후작, 후작이라.

투리엘이 혀로 입술을 훑었다.

카나리아의 들뜬 얼굴이 피로 물드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카나리아는 스스로가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여기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를 향한 가시덤불은 한껏 옥죄어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멍청한 여자.

잡아서는 안 되는 손과 잡아도 되는 손조차 구별하지 못하니 이런 사달이 나지.

분수에 맞지 않을 땐 포기하는 법도 알아야 하는 법이거늘.

그냥 그늘에서 웅크리고 살았다면 그나마 목숨이라도 보전했을지 모르는데.


“그리고 황제께서 이번에 사교 모임을 잘 치르고 나면 사신들을 접대할 수 있게 해주시겠다는군.”

카나리아는 제 손으로 제 목을 조르는 격이었다.

투리엘이 고개를 숙였다.


“성심을 다해 도와드리지요.”

 

***

딸랑.

늦은 밤, 또 한 번 투리엘의 의상실 문이 열렸다.

어둠과 함께 스며든 손님이 익숙하게 자리를 찾아 앉았다.


“레니샤 님……!”

투리엘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레니샤가 떠난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한 세월이 지난 것 같았다.

투리엘이 레니샤의 앞에 앉았다.

환희에 젖은 투리엘을 보며 레니샤가 후드를 벗었다.


“홀로 오신 겁니까?”

“아니.”

카시우스와 그의 기사들이 동행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는 일에는 이골이 난 듯했다.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제도에는 언제 도착하신 겁니까?”

“오늘 새벽이었네. 그대가 저택을 미리 정돈해준 덕분에 편히 쉬다 올 수 있었어.”

“아닙니다, 레니샤 님! 제가 해드려야 하는 일인걸요.”

투리엘이 첫사랑을 만난 소녀처럼 설레는 얼굴로 말했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나는 잘 지냈지. 힐로샤인은 생각보다……. 생기가 넘치는 곳이더군.”

“메테오 왕자는 잘 도착했습니까? 레니샤 님께 드릴 선물이 있다고 하던데요.”

“그 선물은 무사히 수령했네. 그대가 신경 써준 덕분이야.”

“다행입니다, 다행이에요. 사실 오늘 카나리아가 다녀갔습니다.”

“흐음?”

레니샤가 재밌다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레니샤가 자신의 황금빛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붉은색 드레스를 주문하더군요. 자신이 주최하는 사교 모임의 드레스코드로 붉은색을 골랐다면서. 레니샤 님의 드레스도 주문했습니다.”

“하하…….”

레니샤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런 것까지 신경 써주다니. 카나리아도 여유가 생겼군그래.”

“그 드레스를 입으실 생각이십니까?”

레니샤가 느리게 입술을 끌어 올렸다.


“글쎄.”

지치지 않고 레니샤를 자극하는 카나리아가 같잖고 우습다.

여전히 레니샤를 의식하는 카나리아가 어떤 면에서는 가엽기까지 했다.


“후작이 카나리아에게 접근하는 걸 성공했습니다. 고아원 설립과 사신단 맞이를 맡게 될 거라고 하더군요.”

“투리엘에게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을 정도면 꽤 신뢰를 산 모양이군.”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레니샤 님을 위해서라면요.”

레니샤가 천천히 의상실 안을 둘러보았다.

변한 것은 없었다.

그리고 눈앞의 투리엘도.

투리엘이 배신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충직하고 올곧은 충신이었다.

투리엘에게 그녀가 가진 것들을 흔쾌히 맡길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한 번쯤은 시험해볼 가치가 있겠지.


“투리엘. 나는 카나리아의 뜻대로 움직여줄 생각이 전혀 없네.”

“네, 레니샤 님!”

“그날의 드레스코드는 붉은색이 아니라 푸른색. 푸른색이 되어야 하네. 사교 모임에 참석하는 귀부인들에게 푸른색 드레스를 입게 하게. 할 수 있겠나?”

투리엘이 두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투리엘을 시험함과 동시에 레니샤의 영향력을 확인해보는 일이기도 했다.

레니샤는 꾸준히 귀족들에게 그녀의 존재를 깨우치고 깨우쳐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고아원 설립이라고 했나?”

“네, 레니샤 님!”

“카나리아는 자신의 주제를 알 필요가 있어.”

레니샤가 오만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고아원은 지어지지 못할 거야, 투리엘.”

레니샤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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