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선택을 해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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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선택을 해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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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선택을 해야 할 때
2022.11.04.
문밖에 서 있었던 카시우스의 눈빛에 날이 섰다.
메테오의 선언이 카시우스의 마음을 긁어내렸다.
레니샤의 곁에 메테오가 남는다.
메테오가 레니샤를 보는 눈빛이 익숙했다.
카시우스가 입술을 꾹 물었다.
레니샤는 카시우스에게만 빛나는 보석이 아니었다.
레니샤는 누구의 눈에나 빛나는 보석이었던 것이다.
카시우스가 제 손에 들린 작은 꽃다발을 차갑게 응시했다.
카시우스는 레니샤의 마음을 달래고자 제 손으로 피운 꽃을 가지고 왔는데 메테오는…….
“이곳에 남아 샴디르의 뜻을 보태겠습니다.”
“메테오 왕자, 그건 그리 쉽게 이야기할 문제가 아닙니다. 왕자가 남는다고 하면 황제가 우리를 주시할 겁니다.”
“캘리엇 백작은 예정대로 나의 일행을 샴디르로 가는 길로 안내할 겁니다. 그들은 나로 위장한 이와 함께 샴디르로 갈 것이고 거기서 준비를 마친 이후에 다시 힐로샤인으로 올 수 있습니다.”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요?”
“예.”
메테오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카시우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메테오는 레니샤의 도움이 되겠다고 말하는데, 샴디르를 레니샤의 뒤에 세우겠다고 말하는데 카시우스는 고작 꽃다발뿐이었다.
카시우스가 꽃다발을 쥔 채로 뒤로 물러섰다.
“공작 각하?”
“이걸 레니샤에게 전해주게. 바쁜 것 같더군.”
꽃다발을 린데이에게 전한 카시우스가 밖으로 나왔다.
메테오는 레니샤에게 힘을 보탰다.
그렇다면 카시우스는 레니샤를 위해서 실질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카시우스가 천천히 몸을 돌려 황성이 있는 방향을 응시했다.
렉서스의 목을 꺾어 그 자리를 레니샤의 발밑에 가져다 놓을 수 있다면……!
마음이 들썩였다.
***
투리엘은 카나리아와의 약속을 지켰다.
카나리아가 귀부인들을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준 것이다.
투리엘이 준비한 야회에 귀부인들은 대다수 기쁜 마음으로 응했기에 그 자리에 카나리아를 넣어준 것이다.
카나리아가 심호흡하고는 배 위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적법한 황후다.
그 누구도 신전이 인정한 권리를 무시하진 못한다.
카나리아가 사각거리는 잔디 위를 사뿐사뿐 걸었다.
“오랜만이로군.”
카나리아가 최대한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여 있던 귀부인들이 고개를 돌려 카나리아를 보았다.
긴장감이 맴돌았지만, 카나리아가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섰다.
“아.”
귀부인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투리엘은 친절한 지지자는 아니었다.
카나리아가 그녀의 능력을 보이는 만큼만 돕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카나리아는 오늘 이 자리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바바라의 도움을 받아서 치장을 정하고 사교 교양 도서를 읽었다.
하녀 출신이라는 모욕을 피하기 위해서 며칠 밤낮을 고생한 것이다.
투리엘이 만들어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많은 일이 있었지요.”
“하녀가 황후가 되었으니…….”
작은 속삭임 소리가 카나리아의 귀에도 꽂혔다.
카나리아가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어떤 이야기를 듣더라도 그녀의 속내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
잘못하다가는 투리엘도 떨어져 나갈 수가 있었다.
“이런 자리를 진즉에 가졌어야 했는데. 내가 아이를 가져 안정을 취하느라고 늦어졌군.”
카나리아가 애석하다는 듯이 웃었다.
“물론, 황손이 가장 중요하지요. 온 제국이 기다리고 있는 아이 아닙니까. 히엔트리의 미래가 되실 분인데요.”
말은 공손하고 다정하지만 그 눈빛에는 날이 서 있었다.
카나리아가 칼칼한 목을 물로 축였다.
“황제 폐하께서 요새 사택을 짓고 계시다지요?”
“그곳에 레니샤 님을 모셔 온다고 하던데. 책임감이 특출나신 분이라서 황후 폐하께서도 걱정이 없으실 것 같네요.”
“그러니까요. 본디 책임감이 특출난 이들이 아이도 잘 키우지요. 황자 전하 걱정은 없으시겠어요?”
잔뜩 비꼬는 어투였다.
카나리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읽었던 모든 교양 서적들이 쓸모가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카나리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그, 그…….”
카나리아가 마른침을 삼켰다.
“……레, 레니샤 부인이 황제 폐하의 은혜를 받아들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받아들이냐의 문제보다는.”
귀부인이 말을 딱 자르고는 카나리아를 향해 눈을 빛냈다.
“전부인을 위해서 사택을 준비하고 있다는 게 문제 아닐까요, 황후 폐하? 문제의 논지를 잘못 짚으신 듯하네요.”
“……황제 폐하께서는 선의로 그런 결정을 하신 거네. 그러니,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아, 그렇죠. 이번에 일테이아가 새로운 작품을 발표한 것 아나요?”
“일테이아가요? 세상에. 제대로 된 오페라를 볼 수 있겠군요. 이번 주제는 무엇이라고 하던가요? 사랑? 신화? 전쟁?”
일테이아의 이야기를 꺼낸 귀부인이 카나리아를 힐끗 보고는 활짝 웃었다.
“주제는 레니샤 님이라고 하더군요. 그분께서 황후 위에 계실 적에 이루셨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오페라래요.”
“세상에. 이거야말로 레니샤 님께서 꼭 보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카나리아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두근, 두근 뛰었다.
눈에 불길이 이는데도 그녀는 어떤 반발도 할 수가 없었다.
그 누구도 카나리아를 위한 오페라를 만들어주지는 않을 테니까!
카나리아가 심호흡하고는 애써 미소 지었다.
“오페라 발표일이 언제라고 하던가? 그때에 맞춰서 레니샤 부인을 초대하는 게 좋을 것 같군. 내가 황후가 되었으니 제국의 귀부인들을 초대해 연회를 베풀어야 하지 않겠나.”
“어머. 그거 좋은 생각이시네요, 폐하.”
귀부인들이 눈을 가늘게 접어 웃었다.
뱀의 것처럼 번들거리는 그들의 눈동자에는 악의가 가득했다.
카나리아를 물어뜯을 것처럼 노려보며 독니를 드러낸 그들 앞에서 카나리아는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카나리아의 편은 없었다.
‘저는 문을 열어드릴 뿐 길을 만드는 것은 폐하의 몫입니다.’
투리엘의 말이 귓가에 멍멍하게 울렸다.
***
“여기가 바로…….”
키엔의 입술이 느리게 움직였다.
루나는 밤낮을 쉬지 않고 걸었다.
키엔은 그에 질 수 없다는 각오로 걷고 또 걸었는데 온 발이 물집투성이가 될 즈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루나는 말이나 마차를 타고는 절대로 갈 수 없는 곳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전쟁터에서 몇 날 며칠을 굴러도 멀쩡하던 발이 온통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험한 길이었다.
아니, 길이 아닌 곳을 걷고 또 걸어서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키엔이 머리 위로 드리운 나뭇가지를 거둬냈다.
깊고 험준하여 인적이 거의 닿지 않는 팔레우스 산.
산 중턱에 이족들의 마을이 자리하고 있었다.
루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 바로 여기야. 고작 이거 걸어온 걸로 그렇게 엄살을 부리나?”
키엔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마을을 바라보았다.
“거기 서어! 너어! 제니타!”
“이것도 못 잡는 거야?”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맑게 터져 나왔다.
식사를 준비하는 냄새, 빨래하는 냄새, 혹은 농사를 짓는 냄새.
생활의 흔적들이 가득 묻어났다.
키엔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심장이 덜컹이는 기분이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향수가 몰려와 눈시울이 붉어졌다.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곳에 이족들은 살아가고 있었다.
“들어와. 장로에게 안내할 테니까.”
루나가 지치지도 않는지 키엔을 마을 안쪽으로 이끌었다.
키엔은 멍하니 그 뒤를 쫓았다.
그의 눈은 마을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신 차려.”
루나가 키엔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제야 제정신이 돌아온 키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여기에 있었던 건가?”
“많은 곳을 떠돌았지. 검투사로 팔려 간 이들도 탈출해서 대부분 이곳에 자리 잡았어. 노예가 된 이들도 마찬가지고. 살아남은 자들하고 합류해서 여기에 이르게 된 거지. 자리 잡은 지는 3년 정도 됐나.”
루나가 간신히 찾은 평화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여기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없어서 나 같은 젊은이들이 제국을 오가고는 있어.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비밀이지.”
덤덤하게 말하고 있지만 여기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겪었을 고난과 고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키엔의 목울대가 울렸다.
“여기야. 안으로 들어가면 장로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너는 안 들어가는 건가?”
“내가 왜.”
루나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장로는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거야. 앞을 내다보시는 분이니.”
“……고마워.”
키엔이 진심을 담아 말하고는 루나가 가리킨 문으로 들어갔다.
덜컹거리며 열린 문 안은 훈기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언젠가는 올 것이라고 여겼었지.”
나른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불안감도 잠재울 수 있을 만큼 온기가 서려 있었다.
“카시우스가 보낸 게지?”
키엔이 놀란 얼굴로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문 뒤에 서 있던 중년의 여자가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샤, 샤, 샤미르?”
키엔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자상이 깊었지만,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이족들의 왕비라 불리는 샤미르.
마지막 샤미르였었던 예니카였다.
카시우스의 어머니!
키엔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사, 살아 계신 줄 알았다면……!”
“히샴께서 죽음을 맞이하시고 간신히 목숨만 부지했지.”
샤미르가 제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카시우스에 대해서는 듣고 있었네. 하지만,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지. 히엔트리 기사단에 몸을 담았으니 말이야.”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키엔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죽었다고 믿었던 자들이 살아 있었다.
샤미르가 돌아왔으니 이제는 히샴도……!
이족들이 과거의 햇살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차올랐다.
“카시우스가 우리를 데리고 오라고 하던가?”
예니카는 태어날 때부터 가까운 미래를 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이기에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었으리라.
키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카시우스 님께서는 힐로샤인에 터를 잡으셨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족들을 위해서 지금까지 달려오셨습니다. 늦어지신 것에 대해서…….”
“그럴 리가 있나.”
예니카가 고개를 돌려 창밖의 창공을 응시했다.
오늘 키엔이 오리라는 것은 이미 보아 알고 있었다.
카시우스가 그들을 부를 거라는 것도, 그리고 그가 가려는 길도 말이다.
히엔트리의 지축이 뒤흔들릴 것이다.
히엔트리의 성을 쓰는 자들이 무너질 것이고 그 자리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닥치리라.
찬란한 금빛을 지닌 바람이 말이다.
“이족들은 이미 준비가 되었네. 우리는 카시우스의 뜻을 따를 걸세.”
언제까지고 도태된 채로 음지에서 지낼 수는 없는 법.
이족들도 선택을 해야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