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곁에 남겠습니다
(62/135)
62화. 곁에 남겠습니다
(62/135)
62화. 곁에 남겠습니다
2022.11.01.
레니샤가 바라던 대로 엄숙한 장례식이었다.
예의에 어긋난 것은 하나도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장례식을 주도한 이는 솔레인이었다.
솔레인은 죽은 공작 부부의 장례식을 주관할 수 있게 해달라는 의지를 강력하게 표명했다.
솔레인은 공작 부부에 대한 정이 깊은 이였다.
“이제는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시는 두 분께서 신의 곁에서 편안한 영면에 드시기를.”
솔레인의 목소리는 물기에 젖어 있었다.
두 사람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길이었다.
레니샤가 멍하니 그것을 응시했다.
심장이 멎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시는 못 보는 거다.
사실 레니샤가 황성에 들어가고 그들이 전쟁터로 떠난 이후에는 자주 보진 못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다시는 못 볼 거라는 걸 자각하는 건 달랐다.
“레니샤……!”
휘청거리는 레니샤를 카시우스가 부축했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팔을 우악스럽게 붙들었다.
“다시는…… 다시는 못 봐?”
레니샤가 어린아이처럼 물었다.
여태까지 보여왔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레니샤의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다시는 못 보는 거야? 정말로……?”
작게 속삭여지는 말들엔 레니샤의 피눈물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심장이 갈라지는 것 같았다.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간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고 두 사람의 죽음을 꺼내 보지 않았던 것은 이럴 것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마음을 난도질하는 이 상실감을, 슬픔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서.
레니샤의 다리에 힘이 빠졌다.
오로지 카시우스의 힘에 의지해 있는 상태였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어깨를 끌어 품에 안았다.
카시우스의 턱도 단단하게 불거져 있었다.
“나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어…… 내 부모님이, 나를 떠날 거라고…… 날 두고 먼저 떠날 거라고 상상도 못 했단 말이야…… 나는…… 싫어.”
레니샤가 칭얼거렸다.
“싫어! 안 돼…… 어떡해…….”
레니샤가 카시우스를 끌어안은 채로 미끄러졌다.
카시우스가 무너지는 레니샤를 따라 몸을 굽혀 앉았다.
울음소리가 절벽을 가득 메웠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조차 서글픔을 이겨내지는 못했다.
카시우스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이마에 입술을 맞댔다.
“괜찮을 겁니다, 레니샤. 두 분께서는 이렇게 떠나시는 게 아니에요. 언제나, 언제나 레니샤의 곁에…….”
“흐으…….”
숨죽인 울음소리가 레니샤의 입술을 타고 터졌다.
어제의 위엄은 바닥에 내려놓은 채로.
레니샤의 울음소리에 이사벨라와 브릭스턴, 헤일린의 것도 섞였다.
그들을 지켜주던 단단한 울타리를 잃은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사벨라가 숨이 넘어가게 우는 것을 유모가 달래는 소리도 들렸다.
솔레인은 최대한 덤덤하게 장례식을 진행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두 사람의 유골이 담긴 함이 땅에 묻혔다.
레니샤가 달려가 그 위에 엎드렸다.
“이렇게 가면 어떡해요, 아버지…… 어머니, 우릴 두고 이렇게 가면 어떡해…… 이 추운 데서…… 우리 아버지 추운 거 싫어하시는데.”
브릭스턴이 레니샤를 추슬렀다.
사랑받는 막내로 태어난 레니샤는 어릴 적에 부모님의 품을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브릭스턴이 레니샤를 단단하게 끌어안은 채로 말했다.
“제가, 제가 레니샤를 지킬게요, 아버지. 어머니께서 사랑하시는 막내딸 꼭 지키겠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말고…… 걱정 말고 가세요.”
무너지는 건 브릭스턴의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브릭스턴. 나는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니, 필시 그러겠지. 레니샤를…… 그 애를 부탁한다.’
‘아버지! 아버지는 레니샤만 자식입니까? 저는 보이지도 않으세요?’
‘네가 왜 안 보이겠느냐.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다고. 하지만, 브릭스턴. 네게는 헤일린이 있고 이사벨라가 있지 않니. 레니샤는…… 그 애는 그 외로운 궁에 혼자 있구나.’
그 마음을 브릭스턴은 이제야 알겠다.
이사벨라를 잃을 뻔하고 그 애를 되찾은 지금에야, 항상 우아했던 레니샤가 무너지는 모습을 본 지금에야.
‘브릭스턴. 너는 내가 아는 것보다 더 강하고 단단한 아이야. 나는 네가 잘 버텨낼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레니샤…… 그 애는 생각보다 더 여리고 물러. 그 애를 혼자 두지는 말아다오.’
레니샤가 이럴 것을 알고 계셨던 거다.
‘브릭스턴, 섭섭해 말아다오. 우리는 너 또한 사랑한다. 이 마음을 다해서. 내가 낳은 첫아이를, 너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니.브릭스턴, 우리 아가. 사랑한다. 우리는 너를 너무 사랑해.’
브릭스턴의 마음을 달래주던 다정한 어머니도 이 상황을 알고 계셨던 거다.
브릭스턴이 거친 손길로 제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문질러 닦아냈다.
사랑받으며 살아왔고 그게 너무나 당연했었던 삶이었다.
브릭스턴과 레니샤가 그렇게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랑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다시는 못 볼 이들을 위해 브릭스턴이 뒤늦은 고백을 토해냈다.
“으아아아아!”
발버둥 치는 레니샤를 번쩍 안아 든 채로 브릭스턴이 물러섰다.
꽃이 뿌려졌다.
생명이 돋아난 힐로샤인에 피어난 첫 꽃은 전부 두 사람을 위해서 바쳐졌다.
장례식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두 사람의 죽음을 애도했다.
깊게 파인 구멍이 꽃으로 반절 정도 찼을 즈음에 그 위를 흙으로 덮었다.
“브릭스턴…… 못 하게 해! 나 아직 못 한 말이 있단 말이야! 나 아직!”
레니샤가 브릭스턴의 어깨를 내리쳤다.
가장 강한 이가 가장 아프게 무너진다고 했었나.
레니샤가 딱 그랬다.
이성을 잃은 레니샤를 브릭스턴이 단단하게 붙들었다.
“레니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브릭스턴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레니샤에게도, 브릭스턴에게도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질 않는 순간이었다.
편평하게 덮인 무덤 위에 새하얀 꽃들이 피어났다.
카시우스의 힘이었다.
그들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지고 이사벨라가 추모시를 읽었다.
엉엉 우는 어린아이의 목소리에 뒤섞인 시는 엉망진창이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떠났다.
모두의 배웅 속에서.
***
메테오는 레니샤가 이곳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메테오는 그가 가지고 있는 정보와 힐로샤인의 상황을 토대로 판단을 내렸다.
레니샤가 황제가 되겠다고 했고 샴디르가 그를 지지할 의사를 표명했으니, 도우려면 제대로 도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힐로샤인은 레니샤가 지내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
무슨 영문인지 하루 사이에 힐로샤인에 돋아난 새싹들을 보았으나, 그것이 전부이지 않은가.
여전히 성은 보수가 끝나려면 멀었고 레니샤는 열악한 환경에서 내내 지내야 한다.
황제가 될 이가 이런 환경에서 지내는 게 옳은가?
메테오는 좀 더 나은 거처를 마련해줄 수 있었다.
힐로샤인에 있는 모든 병력을 옮겨가지는 못하겠지만, 레니샤와 그녀의 가족뿐이라면……!
장례식은 무사히 마무리되었고 레니샤와 미래에 대해서 논의해야 할 때였다.
메테오가 목을 가다듬고 레니샤의 응접실 문을 두드렸다.
“메테오입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안에서 들려온 허락에 메테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백한 얼굴에 눈가만 붉었다.
입술에는 핏기가 없었고 간신히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엔 처연함이 맴돌고 있었다.
얼마 전 황제가 되겠노라 선언했었던 레니샤와는 달랐다.
그런데 그 모습이 왜, 메테오의 마음을 두드리는 건지.
메테오가 멍하니 시선을 빼앗겼다.
“장례식에 참석해주셨었다죠. 그날은 제가 정신이 없어서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부모님께서도 기뻐하셨을 거예요.”
“……당연히, 당연히 참석해야 마땅한 일을…… 감사받을 일이 아니었습니다.”
메테오가 목메인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레니샤가 아름답다는 건 알고 있었다.
레니샤가 황후일 시절에도 그녀의 미모로 대륙이 들썩일 정도였다.
그러나, 이렇게 인간적인 레니샤의 모습은 아무나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메테오의 입 안이 말라왔다.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것. 그 또한 필요한 덕목이지요. 하실 이야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레니샤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레니샤 님……!”
“제 가족을 무사히 데리고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메티오 왕자. 그대 덕분에 나는 혼자 남지 않을 수 있었어요.”
레니샤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들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왕자는 샴디르가 은혜를 갚은 것뿐이라고 말하겠지만…….”
레니샤가 말끝을 흐렸다.
레니샤에게는 은혜를 갚는 것 이상의 의미가 되었다.
“고맙습니다, 메테오 왕자.”
“……저도 고맙습니다.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셔서.”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함이 맴돌았다.
예의를 차리고 나니 적막이 찾아온 것이다.
그것을 깬 것은 메테오였다.
“실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말씀하세요. 왕자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내가 최선을 다해 도울 겁니다.”
“……샴디르는 레니샤 님이 가는 길을 지지할 겁니다. 그게 대의에도 맞다고 생각합니다.”
“…….”
“다만, 저는 힐로샤인이 그런 대사를 준비하기에는 척박하고 부족한 땅이라고 생각합니다.”
레니샤가 말없이 메테오의 말을 경청했다.
“그래서 레니샤 님과 가족분들을 제가 모시고자 합니다. 제국과 샴디르 사이의 경계 쪽에 사택이 따로 있습니다. 그곳에서라면…….”
“아쉽지만, 메테오 왕자. 그 제안은 무척 감사한 일이지만 거절하겠습니다.”
레니샤가 생긋 웃었다.
메테오의 심장이 그 처연함에 내려앉았다.
“나는 힐로샤인이 좋습니다. 로테라의 뿌리이기도 하고,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도 많고요.”
“……레니샤 님.”
메테오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대로 샴디르로 돌아갈 생각이 사라져버렸다.
처음에는 소공작 부부와 이사벨라만 찾아주고 나면 돌아갈 예정이었다.
샴디르에서 메테오를 기다리는 가족들이 있었고 그 정도면 은혜도 다 갚는 것이라 여겼다.
앞으로도 레니샤의 든든한 우방이 되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거라고.
하지만, 떠나기 싫어졌다.
이곳에서 메테오는 레니샤를 보았다.
자신의 뜻을 선포하는 레니샤도 보았고 부모님의 죽음 앞에서 무너지던 인간적인 레니샤도 보았다.
가족들과 지낼 때, 그리고 사용인들과 대화를 나눌 때 레니샤가 어떤지도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시우스와 있을 때 레니샤가 어떤지도 보았다.
장난기가 가득한 요정 같았던 레니샤를 말이다.
총천연색의 빛깔로 반짝이는 레니샤다.
카시우스 앞에서만 보이던 그 모습이 탐나기 시작했다.
레니샤가 메테오를 특별하게 여겨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어버렸다.
“……저도 레니샤 님께서 뜻을 이루실 때까지 곁에 남겠습니다.”
섣부른 결정일진 몰라도 진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