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터닝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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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터닝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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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터닝 포인트
2022.10.25.
카시우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게 진짜 되네.”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카시우스가 중얼거렸다.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은 하긴 했지만, 정말로 이렇게 경이로운 일을 카시우스가 해내다니.
그는 여태껏 그의 힘을 파괴하는 데만 사용해왔다.
붉은 뱀의 힘은 저주이며, 악이라고만 여겼었다.
그가 힘을 사용하고 남은 잔재는 눈을 둘 데 없이 잔혹하고 처참했다.
카시우스는 그 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건 카시우스에게도 악몽이 되었다.
‘경께서는 우리를 구하신 겁니다. 죽인 자들을 생각하지 마시고 살린 자를 생각하세요.’
몇 번이나 테리언이 그를 위로했지만, 그것이 정말로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었다.
거기에 적응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힘을 가지게 된 이후로 몇 달 내내 시달리던 악몽을 털어낸 것은 이사벨라를 만난 이후였다.
‘살려주셔서 감사해요.’
숨이 끊기기 직전의 연약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그의 목에 쌕쌕 뜨거운 숨을 내쉬던 그날, 카시우스는 모든 악몽을 떨쳐냈다.
어린아이를 홀로 돌려보내지 않고 전쟁이 끝나기 직전까지 데리고 있었던 것은 아이에게 변고가 일어날까 두려웠었던 것도 있지만…….
이사벨라가 카시우스에게 위안이 되었던 것도 있었다.
그가 정말로 누군가를 살리기 위한 일을 하고 있다는 증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카시우스는 그의 힘이 저주가 아니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붉은 뱀의 힘은 용기 있는 자들에게만 주어진다.
그가 죽고 나면 이 힘은 본디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때까지 카시우스는 끊임없이 고뇌하고 실망하고 또다시 이렇게 희망을 품는 것을 반복할 것이다.
“솔레인 님. 확인해보십시오.”
카시우스가 뒤로 물러섰다.
솔레인이 침을 삼키고는 몸을 굽혔다.
거친 손이 푸른 싹이 돋아난 대지 위에 닿았다.
솔레인의 눈동자에서 검은빛이 터져 나왔다.
“검은 뱀을 잠재우고 그 위를 생명으로 뒤덮을 수 있는 자. 붉은 뱀의 힘을 가진 이가 생명이 떠난 땅을 찾았으니.”
솔레인의 것 같지 않은 목소리가 그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솔레인의 손바닥 아래에 검은빛과 함께 붉은빛이 일렁거렸다.
“다시 힐로샤인에도 희망이 피어오르리라!”
힐로샤인.
그것은 땅에 묻힌 검은 뱀의 이름이었다.
홀로 생명을 잡아먹는다는 이유로 척박하고 먼 곳에 스스로를 유폐한 가여운 뱀의 이름.
솔레인에게 그 짙은 외로움이 스며들었다.
검은 눈물이 솔레인의 뺨을 적셨다.
카시우스의 내부에서 힘이 일렁거렸다.
붉은 뱀이 검은 뱀에게 반응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붉은 뱀의 힘이 대지를 파고들었다.
그것은 점점 멀리 퍼져나갔고 검은빛으로 황폐했었던 땅을 초록빛의 생명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공께서 이곳으로 오신 것은 운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탈력감에 젖은 채로 솔레인이 웅얼거렸다.
신의 힘이 빠져나간 몸은 기력을 전부 잃은 듯이 축 늘어졌다.
“힐로샤인은 공을, 아니. 케로스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요.”
케로스.
카시우스가 붉은 뱀의 힘을 얻은 지역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또한, 붉은 뱀의 이름이기도 했다.
툭, 투둑.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푸른빛이 영롱하게 돌고 있는 아름다운 빗줄기였다.
카시우스와 솔레인이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
그들의 머리 위에서 시작된 비구름이 멀리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바다를 지키시는 세일러스께서도 오신 모양입니다.”
솔레인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그간 죽어가는 땅에서 일족을 이끌며 절망 속에서 살아왔다.
언젠가 다시 돋아날 희망을 꿈꾸며.
힐로샤인은 제 형제들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황폐했던 대지를 녹음이 물들이고 있었다.
케로스의 힘이 생명을 틔웠고 세일러스의 힘이 그 생명을 자라게 했다.
힐로샤인의 검은 힘이 대지를 단단히 받치고 그 생명의 토대가 되어주고 있었다.
힐로샤인, 케로스, 마지막으로 세일러스.
태초에 혼돈 속에서 기어나왔다던 세 신의 조화 속에서 빛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카시우스가 탄성을 터뜨렸다.
‘저주일 리가 없지.’
카시우스가 손으로 얼굴에 묻은 빗방울을 쓸어냈다.
‘이렇게 따뜻한 힘이 저주일 리가 없잖아…….’
힐로샤인에 오길 잘했다.
그의 평온은 이곳에 있었다.
카시우스를 힐로샤인으로 이끈 레니샤와 함께.
***
레니샤와 브릭스턴이 놀란 얼굴로 창밖을 응시했다.
힐로샤인의 죽은 땅 위에 새파란 녹색 빛이 돋아나고 있었다.
“이게…….”
브릭스턴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카시우스가…… 이건 분명 카시우스야.”
레니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 부모님을 모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겠다고 약속했어. 이 황폐한 땅에 새싹이 돋게 해주겠다고.”
그리고 카시우스는 약속을 지켰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장대하게.
“힐로샤인은, 희망의 땅이라는 아버지 말씀이 맞았어.”
브릭스턴이 읊조리며 난간을 움켜쥐었다.
이 검은 땅에 묻혀 있는 것은 검은 뱀의 비늘만이 아니었다.
힐로샤인은 생명을 품고 있었다.
“아버지는 지금 이 순간을 알고 계셨던 거야.”
브릭스턴이 재차 말했다.
레니샤가 떨리는 입술을 꾹 물었다.
로테라의 아이들에게 공작은 몇 번이나 말했다.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온다면 힐로샤인으로 가라고.
그곳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레니샤가 힐로샤인의 잠재력을 믿고 이곳으로 온 것도,
브릭스턴이 힐로샤인에 있다는 레니샤를 순순히 찾아온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들의 기저에는 힐로샤인의 낙인이 찍혀 있었기에.
‘로테라의 근원은 힐로샤인에 묻혀 있단다. 우리는 그곳에서 시작해 제도에 이르렀지. 절망스러운 순간엔 힐로샤인을 찾아가렴. 그곳의 땅과 바다, 공기가 너희를 반겨줄 게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브릭스턴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검은빛이 흘러나왔다.
브릭스턴이 몸을 떨며 난간에서 손을 떼어냈다.
슈르륵.
브릭스턴의 뺨에 검은 비늘이 돋아났다가 가라앉았다.
레니샤가 그것을 멍하니 응시했다.
브릭스턴이 몸을 돌려 레니샤를 보았다.
세로로 응축된 브릭스턴의 눈동자에 레니사와 헤일린이 비쳤다.
“……아버지께서 내게 복수할 수 있는 힘을 내어주신 모양이군.”
브릭스턴이 입술을 끌어 올렸다.
“레니샤. 너는 네가 해야 할 일을 해. 나는 너를 위한 기사가 될 테니.”
브릭스턴이 레니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레니샤의 치맛자락에 입을 맞춘 브릭스턴이 속삭였다.
“내가 바라고, 네가 바라는 대로. 이 나라의 황제가 되어줘, 레니샤.”
황제.
레니샤가 은밀하게 품고 있었던 꿈.
레니샤가 바랐던 것은 황후의 자리가 아니었다.
그녀의 바람은 그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었다.
처음부터 렉서스와 레니샤는 한데 어울릴 수 있었던 족속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레니샤가 바라는 것을 렉서스가 가지고 있었으니.
어쩌면 이 모든 비극은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순간 번개가 하늘을 갈랐다.
레니샤가 아주 어릴 적, 마음속에 황금빛 찬란한 관을 담았을 때부터.
그건 처음 황성에 들어갔던 날이었다.
***
“쉿, 레니샤.”
이제 막 5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라 마차에 숨어든 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이대로 마차에 태워두면 편할 것이나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아이를 그대로 두고 가는 것도 불안했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맡기기엔 로테라가 가진 위치가 너무 위협적이었다.
누구나 가지고 싶어 하는 로테라다.
레니샤에게 나쁜 마음으로 접근하거나, 해코지를 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아이를 데리고 돌아갈 수도 없고.
지금 로테라 공작이 앞두고 있는 회의는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로테라 공작이 한숨을 내쉬고는 레니샤의 손을 붙들었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앉은 로테라 공작이 조곤조곤히 말했다.
“이 아비 뒤만 쫓아와야 한다. 손은 절대로 놓지 말고.”
레니샤가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니샤, 잘할 수 있어요.”
씩씩한 딸아이의 머리를 로테라 공작이 쓰다듬었다.
“그럼. 우리 레니샤는 얼마든지 잘할 수 있지.”
레니샤가 동그란 눈을 접어 웃었다.
로테라 공작이 아이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절대로 누군가의 눈에 튀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약속할 수 있겠니?”
또래보다 훨씬 조숙하고 똑똑한 아이다.
로테라 공작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아이가 충분히 인지할 거라고 여겼다.
레니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
로테라 공작이 아이의 머리를 한 번 더 쓸어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중앙 귀족들이 한데 모였다.
알현실에 가득 찬 이들의 시선이 레니샤를 한 번씩 스치고 지나갔다.
레니샤가 어깨를 움츠리는 대신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레니샤의 눈에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황금색 의자가 보였다.
빛을 받아 그 무엇보다 빛을 발하고 있는 그것이 고귀하게 보였다.
레니샤 평생 본 것 중에 가장 아름다운 거였다.
“아버지.”
레니샤가 공작의 손을 잡아당겼다.
초르파 평야를 두고 벌어질 전쟁에 대해서 논하는 자리였다.
대부분 중앙 귀족들은 평화 협정을 바랐고 일부가 그에 반발해 전쟁을 주장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공작은 평화 협정 쪽에 손을 들어주었다.
“아버지이.”
레니샤가 공작을 다시 한번 불렀다.
로테라 공작이 고개를 아래로 내려 아이를 보았다.
얌전히 있던 아이가 그를 갑작스레 보채니 놀란 표정이었다.
그런데 정작 레니샤의 시선은 어딘가에 못 박혀 있었다.
공작이 레니샤의 시선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황제의 자리.
중년의 황제가 앉아 있는 황금색의 찬란한 의자.
레니샤가 그것을 보고 있었다.
“레니샤……?”
로테라 공작이 불안한 음성으로 아이를 불렀다.
“저걸 가지고 싶어요.”
레니샤가 또렷하게 말했다.
그나마 소란스러운 곳이라 그 말을 들은 것은 로테라 공작밖에 없었다.
로테라 공작이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레니샤의 손을 잡아 아이를 옆으로 숨겼다.
“아버지?”
레니샤가 이상하다는 듯이 로테라 공작을 보았다.
레니샤가 가지고 싶다는 건 무엇이든 쥐여주는 아버지였다.
그런데 지금은 무언가 두려움에 질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쉿!”
공작이 레니샤에게 날카롭게 말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는 게 좋겠구나, 레니샤.”
레니샤가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어린 얼굴은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로테라 공작이 두려움에 질린 시선을 황좌로 던졌다.
레니샤가 바라는 저 자리.
‘기어이 예언이…….’
레니샤를 둘러싼 어두운 운명이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까워 보였다.
***
그날의 기억이 선명했다.
공작이 두려워했었던 이유를 지금은 분명히 안다.
황제의 자리를 꿈꾸는 딸아이라니. 누구라도 두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로테라 공작은 레니샤를 품어 키웠고 지금에 이르게 했다.
‘아버지.’
레니샤의 서늘한 시선이 브릭스턴의 위에 꽂혔다.
‘이 또한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일이 맞나요?’
레니샤가 붉은 입술을 사려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