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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카나리아의 절망과 희망 (59/135)


59화. 카나리아의 절망과 희망
2022.10.21.



 
레니샤가 얼굴을 문질렀다.

심장이 저미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누군가 살을 베어낸다고 해도 지금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으리라.

잠들어 있었던 죄책감이 깨어나 발작하는 기분이었다.

모두가 레니샤에게 괜찮다고 말한다.

공작 부부 또한 죽는 그 순간까지 레니샤를 원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레니샤는 여전히 그녀를 원망하고 있었다.

악몽에서 벗어나고 숨을 쉴 수 있게 되고.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레니샤는 과거의 자신을 미워하고 있었다.

레니샤만 아니었다면 그녀의 가족들이 이런 일을 겪었을 리가 있겠는가.

모든 일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레니샤가 있었다.

이 모든 일의 판을 짜고 패를 움직이면서도 레니샤는 한 번도 죄책감을 놓아본 적이 없었다.


“살아 있어 줘서 고맙구나, 아가. 엄마가 미안해.”

“내가 미안하다, 이사벨라. 내가 너를 지키지 못해 아프게 했어.”

색이 변해버린 아이의 눈가를 연신 쓸면서 브릭스턴과 헤일린 또한 울었다.

레니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지켜보는 것이 레니샤의 몫이다.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을 되돌려주는 것.

렉서스의 모든 것을 빼앗아주리라.

그 첫 시작은 레니샤였다.

레니샤는 렉서스가 그녀를 자신의 소유물로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레니샤는 렉서스의 곁을 순순히 떠났다.

렉서스가 레니샤를 버린 게 아니라 레니샤가 렉서스를 버린 거였다.

황후위를 지킬 방법이 왜 없었겠는가.

바라는 게 그 자리가 아니었기에 내려놓은 것이지.

이렇게 하나씩 앗아가 주는 거다.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황위조차도!

***

카나리아가 불안감에 방 안을 서성거렸다.

투리엘이 연락을 주겠다고 약속해놓고는 어떤 연락도 없었다.


“내가 뭘 잘못한 건 아니겠지?”

바바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폐하께서는 그저 공작 부인에게 편지를 쓴 것뿐이잖아요.”

“그렇지, 그건 맞는 말이지.”

바바라가 카나리아를 다독였다.

레니샤를 내쫓으면 황성의 모든 것이 카나리아의 것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이 황성에 어울리는 주인은 레니샤 아니면 카나리아뿐이라고.


“결혼식도 하시잖아요!”

“결혼식?”

카나리아가 헛웃음을 흘렸다.

온갖 핑계를 대면서 결혼식을 미루던 렉서스가 드디어 결혼식을 명했다.

그래봐야 카나리아와 렉서스 단둘이 가서 단출하게 식을 올리는 게 전부였다.

카나리아가 이를 악물었다.

배를 감싸는 손길은 악에 받쳐 있었다.

이 자리를 가지고 싶어 모든 것을 바쳤고 그렇게 가지게 된 자리였는데.

오히려 예전만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렉서스는 카나리아의 임신을 빌미로 그녀를 찾아오지 않은 지 꽤 되었다.

사랑 넘치는 평범한 부부를 상상한 건 아니었다.

렉서스는 종종 폭력적이었고 자기 멋대로였다.

그리고 카나리아를 언제든지 안고 버릴 수 있는 새장 속 새 정도로만 여기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그 자식 마음속에는 레니샤밖에 없어. 그 미친놈이 요새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

카나리아가 울먹이며 바바라를 노려보았다.

바바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성 밖에 레니샤 부인을 데리고 올 저택을 짓고 계시죠.”

황성을 단체로 당황하게 한 사건이었다.

며칠 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렉서스가 제도에 빈 부지를 찾아 화려한 저택을 짓겠다고 말했다.

시키는 대로 할 줄만 아는 렉서스의 보좌관들은 아침이 밝자마자 렉서스의 입맛에 맞는 땅을 사들이는 데 성공했다.

렉서스의 행보에 궁금증을 품은 후작이 물었다.

그 땅을 무엇에 쓰시려 하시냐고.

그에 대한 답변이 걸작이었다.


‘곧 내 아내가 돌아올 테니 그에 걸맞은 저택을 지어줘야 하지 않겠나.’

그 순간 또렷한 렉서스의 눈빛을 모두가 보았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카나리아를 향한 모욕이고 무시였다.

카나리아는 아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징징거리는 카나리아를 보면서 바바라가 말했다.


“그래서 뭐가 달라지나요? 레니샤 부인이 황성으로 돌아오기라도 하나요? 그게 아니면 황후가 되나요? 이미 폐하께서 황후이신데! 이 제국에 황후가 둘일 수는 없어요. 그건 제국이 세워지면서 지켜져 온 법칙이죠. 아무리 황제라고 하셔도 그걸 깨실 수 있을까요? 괜한 걱정으로 신세를 망치고 계시는 거라고요.”

바바라는 신랄했다.

바바라는 높이,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 카나리아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카나리아가 저렇게 징징거리고 손을 놓고만 있으니 무엇을 하겠는가.

실망감이 물씬 들었다.


“마담 투리엘을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부탁도 하셨고, 레니샤 부인께 편지도 쓰셨잖아요. 그렇게 하셨으면 그다음을 하셔야죠.”

“그다음이 뭔데!”

카나리아가 불붙은 눈동자로 외쳤다.

바바라가 그녀를 위로해주고 편을 들어주질 않자 화가 돋았다.


“레니샤 부인께서는 자존심이 대단하신 분이잖아요. 설마 이 자리로 돌아오고 싶으시겠어요? 분명 거절하고 안 오실 거예요. 그러니 레니샤 부인께서 혹할 만한 제안을 하시는 겁니다. 폐하께서 자리를 잡고 무사히 아이를 낳아 황제가 될 수 있게만 해준다면 내어줄 수 있는 것을 생각하셔야지요.”

“레니샤 부인에게 그럴 힘이 있어? 힐로샤인으로 갔잖아. 마담 투리엘이…….”

“마담 투리엘은 레니샤 부인의 사람이지요. 그리고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그런 사람들이 한둘이겠어요?”

바바라가 하녀들에게서 들은 것들을 조심스럽게 풀어놓았다.


“지금 사교계 귀부인들이 둘로 나뉘고 있답니다.”

“둘?”

“네. 한쪽은 레니샤 부인을 따르는 이들이고, 또 다른 한쪽은 황비를 들여서 황성의 질서를 바로잡겠다는 이들이지요.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어느 쪽 손을 잡으셔야겠습니까?”

“당연히…….”

카나리아의 얼굴이 흐려졌다.

황비를 들이는 이야기가 나온다니.

레니샤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황후로 있을 때도 사람들은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렉서스가 정부를 들이는 것을 두고 보고 있을 뿐, 레니샤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았다.

지금 이게 카나리아의 현주소인 것이다.


“황비는 안 돼.”

“그렇습니다! 마담 투리엘이 이제 우리를 돕기로 했으니 그들과의 만남을 주선해달라고 하십시오. 레니샤 부인의 힘이 되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폐하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부인의 편의를 최대한 봐드리는 겁니다.”

“어떤 편의를 봐줄 수 있는데?”

“힐로샤인에 황후궁에 들어오는 예산을 떼어준다든가.”

바바라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마구 내뱉었다.


“힐로샤인을 위한 복지 정책을 하신다든가. 레니샤 부인이 바라는 게 분명히 있을 겁니다.”

카나리아가 혹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보다는 훨씬 더 밝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바바라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카나리아는 마음이 약하다.

지금 저렇게 렉서스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있어도 그가 조금만 잘해주면 다시 풀려서 헤헤거릴 사람이었다.

카나리아는 정에 굶주려 있었다. 렉서스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카나리아에게 그다음을 기대하는 건 힘들었다.

사실 카나리아가 자리를 잡고 그 아기가 무사히 후계위에 오르게 되면 그다음은 정해져 있는 것 아니겠는가.

암살.

황제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거다.

황제가 다른 여자를 들여 새로운 후계자를 만들고 카나리아를 밀어내려 하기 전에.

카니라아가 거기까지 갈 수 있을까?


‘못 간다면 가게 해야지.’

저 배 속의 아이를 만들기 위해서 바바라가 어떤 노력을 했던가.

바바라, 그녀의 연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지 않았던가.

신원이 확실한 사람이 필요했고 입이 무거운 자여야 했다.

바바라가 아는 자 중에, 그것도 황제의 머리 색을 닮은 남자는 그뿐이었다.

바바라가 직접 그에게 독약을 건넸다.

그렇게 잡은 기회였다.

모든 걸 걸었으니 모든 걸 얻고야 말리라.


“그러니 결혼식 준비부터 하십시오. 그다음에 마담 투리엘에게 찾아가는 겁니다.”

“네 말대로 하는 게 좋겠어.”

카나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바바라.”

 

***

카시우스가 멈춰 선 곳은 절벽 끝이었다.

힐로샤인의 땅이 끝나는 곳.

그 아득한 절벽 아래에는 감히 인간의 감각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깊은 바다가 위치해 있었다.


“……이런 곳이 있었나?”

“네, 각하.”

카시우스의 길 안내를 맡은 솔레인이 고개를 숙였다.


“힐로샤인의 끝이라고 불리는 곳이지요. 저 검은 바다는 검은 뱀이 죽으며 흘린 마지막 피라고도 불립니다.”

카시우스가 덤덤히 그것을 보았다.


 
장엄한 아름다움은 두려움을 일게 할 정도였다.

사람을 홀리게 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곳에 돌아가신 두 분께서 자리를 잡으면 어떨까.”

“……좋아하실 겁니다. 선대 공작께서 좋아하시던 곳이었습니다.”

“공작께서?”

“예, 그렇습니다. 이곳에 서면 가슴이 뛰신다고 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는 것 같다고도 하셨지요. 마치 미래와 같다고.”

“미래라…….”

카시우스는 그 말을 알 것도 같았다.

공작이라고 두렵지 않았을까.

이 자리는 책임지고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공작은 딸을 지키는 선택을 했었다.

스스로를 내버리는 대신에.


‘그도 사람이었구나.’

레니샤는 자리를 고르는 것을 카시우스에게 맡겼다.

카시우스는 공작과 공작 부부를 위해서 최고의 장소를 고르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이곳이 맞다고 생각했다.

공작은 이곳에서 미래를 내다보았다고 했다.

공작이 그린 미래를 레니샤가 만들어갈 것이다.

이곳은 절벽임과 동시에 힐로샤인에서 가장 높은 곳이기도 했다.

공작 부부는 레니샤를 내내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로 하지.”

카시우스가 말에서 훌쩍 내렸다.

풀 한 포기 없는 황무지에는 검은 뱀의 힘이 가득했다.

바다를 곁에 두고 있어서 그런가 다른 곳보다 검은 뱀의 힘이 기승을 부리는 느낌이었다.

카시우스가 허리를 숙여 바닥을 짚었다.

손바닥 아래로 꿈틀거리는 힘이 느껴졌다.

카시우스가 느리게 힘을 불어넣었다.

붉은 뱀의 힘이 몸을 뜨겁게 만들었다.

피부 위로 붉은 비늘이 돋아나고 머리가 기운에 휘날렸다.

금안이 세로로 응축되고 흰 자리가 사라진 자리에 검은자위가 드러났다.

날카롭게 돋아난 손톱이 바닥을 파고들었다.

카시우스가 이를 악물었다.


“후우…….”

새빨간 힘이 땅속을 파고들었다.

그 경이로운 장면을 솔레인이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붉은 뱀과 검은 뱀은 사이가 좋지 않은 형제였단다. 하지만, 형제라 함은 사이가 좋을 때도 있고 안 좋을 때도 있지 않니? 두 뱀은 사이가 좋지 않다가도 어울릴 때는 그렇게 죽이 맞아서…….’

어릴 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처음에는 반발하는 듯 보였던 힐로샤인의 땅이 천천히 붉은 뱀의 힘을 품기 시작했다.

황폐했던 땅 위에 새파란 잎이 돋아났다.

힐로샤인에서 오랜만에 맡는 생명의 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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