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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지금은…… 안 돼요 (57/135)


57화. 지금은…… 안 돼요
2022.10.14.



 


“정말 이래도 돼?”

제인이 불안한 얼굴로 헬레나에게 물었다.

헬레나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두려움으로 질식할 것 같은 건 헬레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헨리가 레니샤의 앞길에 방해물이 될 거라는 생각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헬레나가 손바닥에 찬 땀을 겉옷에 문질러 닦아냈다.

헨리에게 붙어서 감시하다 보니 그의 생활 습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안 되는 건 없어. 그러면 집사장이 소공작 부부에 대해서 황제에게 알리는 건 옳은 일일까? 이 세상에 완벽한 선함은 없어, 제인.”

헬레나가 제인의 불안을 다시 한번 다독여 주었다.


“우리는 우리 모두를 지키는 거야.”

“레니샤 님께 말씀드리지 않아도 돼?”

헬레나가 레니샤를 떠올랐다.

레니샤는 밤하늘을 고고하게 비추는 달과 같은 사람이었다.

점점 커지는 심장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집사장이 레니샤 님께 피해를 주는 건 싫어. 그분이 그 사람으로 인해서 힘들어지는 건 더 싫어. 레니샤 님은 충분히 불행하셨어.”

“그건 그래.”

제인이 헬레나의 손을 붙들었다.


“나는 널 믿어, 헬레나.”

 

***

아침에 일어나 헨리는 찬물을 한 컵 정도 마시곤 했다.

기관지가 본디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 힐로샤인에 오고 나서는 더 심해진 기분이었다.


“후우.”

힐로샤인은 이상한 곳이었다.

레니샤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온 것인지는 아직도 밝혀내지 못했다.

레니샤는 헨리를 철저히 감시하며 그가 힐로샤인에 접근할 구실을 차단하고 있었다.


“믿지 못하시는 게지.”

헨리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평생 모시겠다고 마음먹었었던 렉서스는 그를 내쫓았다.

폐위한 황후의 감시를 맡기며.

그런데 이렇게 역으로 감시나 당하고 있는 처지라니.

레니샤는 속을 전부 내보이지 않는 인물이었다.

헨리에게 저택을 관리하는 일을 맡겼을 때는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황성에서와 마찬가지로 레니샤는 여전히 헨리를 신뢰하지 않는다.

애매한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이 일 때마다 속이 바짝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헨리가 찬물을 가득 담아서 마셨다. 어느 정도 갈증이 가시는 듯했다.

연거푸 물을 마시던 헨리가 눈을 깜빡였다.

이상하게 다시 졸음이 오는 기분이었다.

시간을 보아하니 평소보다 이르게 일어난 게 문제인 듯했다.


‘조금 더 자도 되겠지.’

헨리가 머리를 젓고는 침대에 누웠다.

오늘 해야 하는 일들을 셈하다 보니 금세 졸음이 쏟아졌다.

***



“레니샤 님! 큰일 났습니다!”

창백하게 질린 린데이가 아침 일찍 달려와 레니샤에게 말했다.

이제 막 어젯밤의 여운과 피로를 쫓아내고 있던 레니샤가 눈을 깜빡였다.

린데이는 절대로 경거망동하지 않는 이였다.

저런 반응을 보일 때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 터다.


“무슨 일인데 그리 다급한가?”

레니샤가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하루도 길 예정이었다.

이사벨라가 제 부모를 오랜만에 만나는 날이었다.

몸의 피로보다는 심적인 피로가 심히 우려되는 하루였다.

그런데 아침부터 큰일이라니.

레니샤와 함께 선룸에서 식사하고 있던 카시우스도 눈썹을 들어 올렸다.

카시우스는 레니샤의 평온을 해치는 자들이 싫었다.

그리고 이런 짧은 시간조차 그에게 집중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일들이 조금 싫었다.

조금, 아니면, 많이……?

스스로의 쪼잔함에 카시우스도 종종 놀랄 지경이었다.

린데이가 말하는 큰일이 정말로 별일 아니기를 카시우스가 살짝 바라보았다.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린데이에게 귀를 활짝 열고 있던 카시우스가 입술을 슬쩍 물었다.

그런 카시우스의 마음은 조금도 모를 린데이가 말했다.


“집사장님께 변고가 생겼습니다. 금일 아침부터 눈이 보이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레니샤가 몸을 반쯤 일으켰다. 카시우스의 눈빛도 얼어붙었다.

그의 바람은 산산조각 나버렸다.

집사장은 황제의 사람이었다.


“눈이 보이질 않는다고?”

“지금 의사가 진료 중이기는 한데 시력이 회복되진 않을 것 같다고 합니다.”

“그 사유는?”

“아무래도 독이 아닐까 하온데…… 이 일에 대해서는 일단 집사장에게는 함구하려고 합니다.”

레니샤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처리했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후 결정하겠네. 지금 집사장은 어떤 상태지?”

“모든 사물이 흐릿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사람의 형체만 구별할 뿐 그것이 전부라고…… 집사장이 그렇게까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레니샤가 도로 자리에 앉았다.

느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생각을 정리했다.


‘너무 타이밍이 공교로워.’

그렇다면 이 일을 벌인 것은 레니샤의 사람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이 성안에는 여러 모략들이 뭉쳐 있었다.


‘내가 놓친 게 뭐지?’

헨리는 브릭스턴과 헤일린에게 있어서 분명 걸림돌이 되었을 거다.

레니샤도 손을 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움직이기도 전에 누가…….


“레니샤.”

카시우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레니샤를 불렀다.

레니샤가 느리게 고개를 돌려 카시우스에게로 시선을 두었다.


“……지난 새벽 은밀하게 저택을 빠져나갔다가 돌아온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게 누구였죠?”

카시우스로서는 가볍게 넘겼던 일이었다.

레니샤도 사용인들의 행동에 제약을 두는 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판단을 내리는 이였지.

카시우스가 말했다.


“헬레나와 제인. 그 하녀들이 자리를 비웠습니다.”

카시우스가 느릿하게 말했다.

린데이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창백해졌다.

레니샤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헬레나와 제인. 그 아이들은 레니샤가 황성에서부터 데리고 온 아이들이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던 이들이…….


‘예상도 하지 못했어.’

그 아이들이 왜?


“린데이. 그 아이들을 지금 당장 데리고 오게.”

“예, 레니샤 님!”

린데이가 망설이지 않고 선룸에서 빠져나갔다.

레니샤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무슨 생각을 합니까?”

카시우스가 레니샤에게 물었다.


“음. 그 아이들은 충정으로 똘똘 뭉친 아이들이에요, 카시우스. 절대로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준 아이들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런 단독 행동을 허락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레니샤가 빙긋 웃었다.

그 미소가 서늘하기만 했다.


“화가 난 겁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기도 해요.”

“그런데 기뻐 보이는 것도 같습니다.”

“또 어떤 면에서는 그게 맞아요. 그 애들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카시우스는 레니샤의 복잡한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군법에 따르면 이런 짓을 한 자들은 사형에 처합니다. 그들이 어떤 의도로 그런 일을 했든 간에 불복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사령관이 대국을 준비함에 있어 문제가 될 수도 있고 그게 피해를 끼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판단하고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건 사령관뿐이어야 합니다.”

“카시우스는 이 일을 옳지 않다고 여기는 거군요.”

“맞습니다.”

레니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일으킨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이마에 키스했다.

가볍게 닿고 떨어진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카시우스, 내 강아지. 당신 말은 이해했어요. 하지만, 나는 그 애들을 처벌하지 않을 거예요.”

“어째서입니까?”

“지금 나는 확실히 불리한 상황이에요. 렉서스와의 전쟁을 앞두고 내 사람을 줄일 수는 없어요. 맹목적으로 충성적인 그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뻔하거든요. 헨리가 렉서스에게 이곳의 상황을 전하는 걸 막고 싶었겠죠. 렉서스의 사람이라 죽이지는 못하고 나름의 수를 생각했을 거예요.”

카시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니샤는 항상 옳다.

그리고 이곳은 레니샤의 전쟁터였다.

레니샤가 판을 짜는 대로 움직이는 게 맞다.

카시우스가 망설이다가 레니샤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녀의 손목에 뜨거운 입술을 가져다 대며 카시우스가 속삭였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레니샤가 피부 위에서 움직이는 얇고 뜨거운 표피에 놀란 얼굴로 웃었다.


 
카시우스는 종종 대단한 응용력을 보이곤 했다. 지금처럼.

새하얀 이가 레니샤의 피부를 살짝 짓이기고 떨어져 나갔다.

흰 피부가 붉게 달아올랐다.

카시우스가 그 위에 입술을 다시 맞추고는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내게도 자비로울까요?”

“그게 무슨 말이죠?”

레니샤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카시우스의 커다란 손이 레니샤의 손목을 타고 느리게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레니샤가 식탁 위를 다른 손으로 짚었다.

그리 넓지 못한 식탁 위로 레니샤의 몸이 아슬아슬하게 걸쳐졌다.


“카시우스, 위험……!”

이대로라면 음식과 함께 나뒹굴게 될지도 모른다.

레니샤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기 무섭게 카시우스가 노련하게 움직였다.

항상 레니샤 앞에서는 조심스럽고 느리게 움직이던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늘씬하고 우아한 짐승처럼, 그러나 빠르게 레니샤를 낚아채 그의 무릎 위로 앉혔다.

불식간에 일어난 일에 레니샤는 어떻게 된 건지 확인도 할 수 없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쇄골에 입술을 비볐다.


“당신이 당신 사람들에게 자비로운 것처럼 내게도 자비로워질 수 있겠냐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레니샤가 눈을 홉떴다.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빠듯하게 끌어안았다.

카시우스 스스로도 왜 자꾸 이렇게 형편없이 변해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레니샤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었다.

레니샤를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곳에 가둬두고 그만 보는 거다.

별의별 못난 생각들이 휘몰아쳤다.

불안했다.

렉서스도, 그리고 메테오도.

자꾸만 레니샤를 넘보는 모든 시선이 불안했다.

레니샤가 말만 했더라면, 필요로 했더라면 카시우스가 직접 그 일을 해줄 수도 있었다.

헨리 하나 죽여 없애는 것쯤이야 뭐가 어렵겠는가.

그런데 레니샤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너무 많았다.

카시우스보다 빠른 이들도 많았고.

카시우스가 느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뜨거운 숨결이 레니샤의 피부에 스며들었다.

레니샤가 제 단전에 와닿는 단단함에 볼을 붉혔다.

그의 어깨를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할 때, 그러니까 이런 순간에 항상 내 곁에 있어 줄 수 있겠습니까?”

카시우스의 금안이 집착적으로 반짝였다.

레니샤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카시우스의 체온은 다른 이들보다 뜨거운 편이다.

그 체온이 레니샤를 태워버릴 것 같았다.

카시우스의 뺨에 붉은 비늘이 우수수 돋았다가 사라졌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허리를 좀 더 당겨 안았다.


“네?”

레니샤, 네 잘난 혀를 움직여.

레니샤가 스스로를 타박했다.

카시우스를 당황하게 하는 쪽은 항상 레니샤였다.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지금은 안 돼요.”

레니샤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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