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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돌아온 이들 (55/135)


55화. 돌아온 이들
2022.10.07.



 
레니샤가 톡 터지는 레몬처럼 상큼한 웃음을 터뜨렸다.

웃을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인생인데 카시우스 덕택에 웃는다.

어쩌면 카시우스는 레니샤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상징일지도 모른다.


“질투해도 좋아요. 내가 허락할 테니까.”

카시우스가 벌게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마구 문질렀다.

카시우스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캘리엇이 묘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

왠지 모를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레니샤의 미소가 얼마 가지 않아 깨질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메테오가 지금 당장 레니샤를 만나러 오지 못한 것은 브릭스턴과 헤일린을 챙기기 위함이었다.

힐로샤인으로 오는 여정 내내 두 사람은 메테오가 직접 챙겼었다.

캘리엇이 씁쓸하게 웃었다.

저 모습을 보니 먼저 간 아들 부부가 떠오른다.

생때같은 자식을 두고 갔으니 그 속이 얼마나 쓰렸을까.

캘리엇은 귀한 손주를 제도에서 가장 먼 영지에 떼어놓았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가서 만나고 돌아오곤 했다.

아들 부부가 살아있었다면 그 가여운 아이도 지금보다는 좀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곧 메테오 왕자님께서 두 분을 뵈러 오실 겁니다.”

캘리엇 백작이 할 수 있는 말은 한정되어 있었다.

사실 메테오가 어떤 이유로 두 사람을 보호하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모른다.

이건 메테오만이 설명할 수 있는 일이리라.

캘리엇이 그렇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테오가 그들이 있던 곳으로 찾아왔다.

메테오는 피로에 지쳐 있었지만 웃고 있었다.

충분히 누군가의 눈을 홀릴 만큼 매혹적이었다.

가볍게 눈인사를 나눈 후에 메테오가 입을 열었다.

확신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제가 전에 은혜는 반드시 갚겠다고 말씀드렸었던 걸 기억하십니까?”

여전히 레니샤가 황후라도 된 것처럼 예의를 갖춘 채였다.


“기억하고 있어요. 샴디르에서는 항상 저를 위해 분에 넘치는 것을 주려 하시는군요. 저는 이제 줄 게 없는 사람이 되었는데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메테오가 심호흡을 했다.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꿈꿔왔는지 모른다.

레니샤는 렉서스에게 붙들린 새였다.

메테오는 그녀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 타이밍만을 기다려왔다.

레니샤가 힐로샤인으로 온 지금이 적기라고 할 수 있었다.

카시우스가 못마땅한 얼굴로 메테오를 주시했다.

그가 해주지 못하는 것을 메테오가 해주는 게 싫었다.

카시우스만이 레니샤에게 모든 것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카시우스가 입 안의 살을 깨물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 이제 그만 시간 끌어요, 왕자.”

“……브릭스턴 님과 헤일린 님을 찾고 계셨지요?”

그 순간 레니샤의 세상이 바뀌었다.

레니샤가 숨을 참았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손을 붙들었다. 그를 잊지 말라는 듯이.

하지만 레니샤의 시선이 메테오에게 못 박혀 있었다.


“……들은 게 있나요?”

“두 분을 제가 보호하고 있습니다, 레니샤 님. 그리고 두 분을 이곳으로 모시고 왔습니다.”

레니샤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보였다.

브릭스턴과 헤일린.

마음에 돌덩이처럼 얹혀 있는 이름들이었다.


“그들이…… 살아 있었나요? 진짜로?”

“네, 그렇습니다.”

레니샤의 숨이 흔들렸다.

사실은 마음속 깊은 곳에선 두 사람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나마 이사벨라라도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겼었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잔혹하지만은 않은지 브릭스턴과 헤일린도 살아 있다고 한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 만나야겠어요. 내가 직접 눈으로 보고.”

휘청거리는 레니샤를 카시우스가 부축했다.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메테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들께서는 더 이상 어디로도 가지 않으실 테니까요. 레니샤 님이 원하시면 내내 이곳에 머무실 겁니다.”

“…….”

레니샤가 힘이 풀려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런 레니샤를 카시우스가 일으켜 의자에 앉았다.

레니샤의 눈물이 툭 하고 터졌다.

그것을 보는 카시우스의 마음이 여러 가지로 복잡해졌다.

레니샤는 카시우스에게 소공작 부부를 찾아달라고 부탁했었다.

하지만, 카시우스는 실패했고 레니샤는 더 이상 그에 대해서 묻지 않은 지 꽤 되었다.

그런데 카시우스가 하지 못한 일을 메테오가 해냈다.

불같은 감정이 일었다.

카시우스여야 했다.

카시우스가 그들을 찾아냈어야 했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침이 그를 불태울 것처럼 뜨거웠다.

질투, 이건 확실하게 질투가 맞았다.

렉서스에 대한 감정이 먼 곳에 있는, 실체가 가깝지 않은 자에 대한 가벼운 질투라면.

이것은 가까이 선 자에 대한 강렬한 질투였다.

카시우스는 그가 메테오를 경계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메테오는 렉서스처럼 미치지도 않았고 능력이 있었으며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도 뛰어난 것 같았다.


“……어떻게 그들을 찾아냈죠?”

“저는 찾아낸 게 아닙니다. 저는 그분들을 구해냈습니다, 레니샤 님. 황제의 기사들이 저택을 습격하기 전에 그분들을 밖으로 빼돌렸죠. 그러니 찾았다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하.”

레니샤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눈물이 폭포수처럼 흐르고 있었다.

브릭스턴과 헤일린이 이사벨라를 구하기 위해서 저택에 남아 시선을 끌다가 그대로 떠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일말의 희망이 부피를 키워 활활 타올랐다.


“건강한가요?”

“네, 두 분 다 무탈하십니다.”

힐로샤인은 레니샤에게 기회가 맞았다.

그녀가 잃었던 것들을 돌려받고 있지 않나.

포문을 연 것은 카시우스였다.

생각했던 대로 카시우스가 레니샤에게 행운이 맞았나 보다.


“……만나러 가겠어요.”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레니샤는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바닥을 딛고 섰다.

심호흡하고는 눈물을 닦아냈다.


“괜찮습니까?”

카시우스의 질문에 레니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에게 지탱할 수 있는 팔을 빌려주었다.

카시우스와 레니샤가 느리게 걸었다.

메테오가 그 앞에 섰다.

메테오가 카시우스를 힐끗 보았다.

메테오를 보는 카시우스의 눈빛이 차갑게 벼려진 데에는 이유가 있으리라.

메테오가 헛웃음을 지었다.


‘나를 질투하고 있어?’

대체 왜.

레니샤를 가진 것은 카시우스지, 메테오가 아닌데.

정말 쓸모없는 질투가 아닐 수 없었다.

메테오가 혀를 작게 차고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성에 황제의 끄나풀이 있을지 몰라 모두에게 비밀로 해두었습니다. 그리고 린데이 시녀장에게만 사실을 알렸고 도움을 받았습니다.”

“적당한 조치였어요.”

마음은 바쁜데 몸이 따라주질 않는다.

레니샤가 휘청거리면서도 고집스럽게 걸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단단히 붙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 이 자리에 설 수 있는 자격이 카시우스에게 있다는 거였다.

카시우스와 메테오의 시선이 몇 번이나 부딪혔다.

두 사람 사이에 강렬한 스파크가 튀었다.


“이곳입니다.”

메테오가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안에서는 어떤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메테오가 오히려 입을 열었다.


“샴디르의 왕자는 곧 왕성으로 돌아간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막내 왕녀가 살고 있지.”

안에서 작은 목소리로 답이 들려왔다.

그러고는 문이 열렸다.

레니샤가 숨을 죽인 채로 모든 것을 응시했다.

문이 열리는 것도 느리게 느껴진다.

지금 이곳의 공기와 온도, 허공의 먼지까지 멎어버린 것 같았다.


“브릭스턴……!”

레니샤가 탄성처럼 내뱉었다.


“레니샤!”

브릭스턴도 목소리로 높였다.

진실이었다. 브릭스턴과 헤일린은 살아 있었다.

그간 레니샤를 짓누르고 있던 죄책감이 흩어지는 것 같았다.


“살아…… 살아 있었어.”

“그래. 살아 있었어, 레니샤.”

브릭스턴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하곤 팔을 벌렸다.


“한 번 안아보자, 내 동생. 어쩌다가 이렇게 마른 거냐.”

레니샤가 그 품에 고개를 파묻었다.

뒤쪽에서 흐느낌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헤일린인 듯했다.


 
레니샤가 눈물을 참지 못하고 헐떡였다.

심장에 고여 있었던 서글픔을 녹여 내보내듯이.


“나, 나는 두 사람이 죽었다고……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여전하구나, 레니샤.”

브릭스턴을 제외하고는 여기 있는 모두가 처음 보는 레니샤의 모습이었다.

브릭스턴이 레니샤의 등을 쓸어내렸다.


“돌아와줘서 고마워, 살아 있어줘서 정말 고마워.”

“……나야말로 나를 잊지 않고 찾아줘서 고맙다, 레니샤. 그런데 이사벨라는 함께 오지 못했어. 그 애는…….”

“내가, 내가 데리고 있어.”

“……뭐?”

“내가 그 애를 데리고 있어, 브릭스턴.”

이번엔 브릭스턴과 헤일린이 놀랄 차례였다.

헤일린이 브릭스턴을 밀치고 문 앞으로 튀어나왔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레니샤?”

“이사벨라, 그 아이를 데리고 있다고 말했어요.”

헤일린이 끈 떨어진 인형처럼 풀썩 쓰러진 것은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저택에 때아닌 소란이 일었다.

***

헨리가 한숨을 내쉬고는 그에게 달라붙어 있는 하녀를 힐끗 보았다.

대놓고 헨리를 쫓아다니는 하녀를 보건대 레니샤가 시킨 일이 분명했다.

레니샤가 그를 믿지 못하는 이유를 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것을 보면 참 섭섭하다.


“이제 볼일을 보러 가도 되는데.”

“집사장님이 제 필요한 볼일인걸요.”

하녀는 바늘도 들어갈 틈이 없어 보였다.

결국 헨리가 그녀를 쫓아내는 걸 포기하고 제 할 일에 몰두했다.


‘지출이 너무 커. 얼른 생산적인 방법을 찾아내야 해.’

헨리가 가시덩굴 같은 하녀의 감시 안에서 일을 이어 나갔다.


‘오늘 손님들이 오셨다지. 그나마 다 지낼 수 있는 방이 있어 다행이군.’

그리고 손님들이 머무는 기간에 따라서 지출되는 비용도 점점 늘어날 것이다.

헨리가 한숨을 내쉬곤 이마를 꾹꾹 눌렀다.

전체적인 예산이야 레니샤와 카시우스가 결정할 문제이나 헨리에게 주어진 예산을 사용하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그리고 성의 일을 봐주는 하인들의 임금을 챙겨주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영지가 생산적인 일을 시작해야 가문의 자산도 늘어날 수 있어.’

헨리가 보아하건대 지금 힐로샤인도 움직이고 있는 것 같기는 했다.

문제는 무엇을 목적으로 움직이느냐다.

레니샤의 의지가 거기에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황제에게 무엇을 알려야 할지 고민이었다.

사실 렉서스가 가장 반겨야 할 소식은 이사벨라에 대한 것이나…….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어.’

게다가 힐로샤인과 이사벨라에 대해서는 함구하기로 이미 약속을 했었다.

그리고 헨리를 감시하는 저 하녀의 눈 안에서는 무엇도 하는 게 쉽지 않았다.


‘어쩌다가 내가 이 신세가 되어서는.’

헨리가 눈살을 옅게 찌푸렸다. 못마땅한 건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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