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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야한 생각이나 하는 (53/135)


53화. 야한 생각이나 하는
2022.09.30.



 
어린아이들의 치기가 서로를 상처 입혔다.

누군가는 로테라를 원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안일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은 로테라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로테라가 그들을 버린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었다.

특히 상황을 모르는 어린아이들은 더했으리라.

모든 화살이 이사벨라를 향한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서툰 얼굴로 위로해주기 위해서 왔다고 말하는 카시우스를 보니 어쩔 수 없이 미소가 맺혔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사벨라도 잠든 것 같으니 우리도 돌아가요.”

레니샤가 그 손을 맞잡았다.

이제는 카시우스의 체온이 익숙했다.

그의 품에서 웅크리고 밤을 보내고 나면 아침이 개운했다.

붉은 뱀의 힘 때문인지 카시우스는 유독 체온이 높은 편이었는데, 그 품에 안겨 있으면 심장까지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모르는 사이에 물들어 결국은 중독되어버린 거다.

레니샤가 피식 웃었다.

스스로가 대단히 잘났다고 생각했었는데 돌이켜 보면 결국 그녀도 똑같은 여자고,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돌아가서 뭘 할 건가요? 어떻게 위로해줄 건데요?”

레니샤가 달콤한 목소리로 물었다.


“……노래는 잘 부르지 못합니다.”

“네?”

카시우스가 진지한 얼굴로 레니샤에게 말했다.


“하녀들에게 효과적인 위로 방법에 대해서 물어봤습니다.”

“그런데요?”

“맛있는 걸 함께 먹는 것도 좋고, 노래를 불러주는 것도 좋고, 편지를 써주는 것도 좋고. 여러 가지를 추천받았는데…… 다른 건 그런대로 흉내 낼 수 있을지 몰라도 노래는 못할 것 같습니다. 레니샤는 어떤 게 가장 좋습니까?”

노래는 부르지 못하니 그걸 피해서 골라봐라?

애초에 그렇게 성실하게 위로하는 방법을 찾는 것조차 귀엽다는 걸 이 남자는 모르는 걸까.

평생 이렇게 몰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레니샤에게만큼은 말이다.


“나는…… 카시우스의 품이 가장 좋아요.”

카시우스가 걸음을 멈췄다.

볼을 붉힌 채로 레니샤를 힐끗 보는 금안이 수줍은 빛을 띠고 있었다.


“커흠. 그건…….”

“그건?”

“큼. 밤이 아직 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요?”

“저, 저녁도 못 먹은 걸로 알고 있는데…….”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카시우스?”

레니샤가 놀란 표정을 꾸며냈다.

카시우스가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전부 이해했다.

레니샤의 말뜻이 그렇게 들릴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완전히 그런 마음이 없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카시우스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레니샤에게 스며들어 있었다.

카시우스는 레니샤의 일상이 된 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카시우스만 보면 왜 이렇게 놀려먹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지.


“나는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레니샤? 나는, 아니. 그럼 무슨 뜻으로……?”

“그냥 이렇게 끌어안고 싶다는 거였는데.”

레니샤가 카시우스를 꼭 끌어안았다.

복도고, 다른 이들이 보고 있다는 것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하녀들이 사이좋은 공작 부부 앞에서 고개를 모로 돌렸다.


“그런데 카시우스가 그런 뜻으로 받아들였다면…… 나는 괜찮아요. 카시우스를 이해해요.”

“레니샤! 나는, 나는…… 나는 그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카시우스가 당황한 얼굴로 말하다 심호흡했다.

그는 쉽게 당황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절대로 마음을 쉽게 드러내는 사람도 아니다.

어리숙했다가는 전쟁터에서 코 베이기 십상이었다.

속마음을 감출 줄 알아야만 진정한 기사가 될 수 있었다.

전쟁터에서는 기사로서 칭송받는 카시우스인데 대체 왜 레니샤만 앞에 두면 이런 머저리가 되어버리는 건지.

카시우스가 혀를 살짝 깨물었다.

이런 말이나 할 거면 혀가 없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레니샤가 웃음을 터뜨렸다.

카시우스가 당황한 얼굴이 재미있는 모양이다.

요새 레니샤는 카시우스를 놀리는 재미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카시우스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레니샤가 즐겁다면 나도 좋습니다.”

힘이 살짝 빠진 목소리였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손을 도로 붙들었다.


“나는 카시우스가 귀여운 게 좋더라. 생긴 건 귀여워도 생각하는 건 야하잖아요.”

카시우스가 한숨을 또 한 번 내쉬었다.


“원래 그런 간극이 매력 있는 거래요. 야한 요조숙녀라니.”

레니샤의 눈이 생기를 머금은 꽃처럼 반짝였다.

야한 요조숙녀…… 야한 요조숙녀…….

카시우스가 넋을 내놓았다.

이게 맞아……?

의구심이 들었다.

***

캘리엇 백작은 레니샤와의 맹약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레니샤가 떠나기 전에 카시우스를 보내 그에게 그 약속을 되새기게 한 것도.

캘리엇 백작은 레니샤를 위해서 움직여야 했다.

게다가 투리엘이 움직여 보기 좋게 황제의 허가도 받아냈다.

캘리엇 백작은 오랜만에 황성에 입궁했다.

떠나기 전에 황제를 알현하기 위함이었다.

군대를 움직이는 일이었으므로 당연한 절차였다.


“호오.”

렉서스가 입술을 끌어 올렸다.

손에는 잔이 들려 있었다.

렉서스의 앞섶을 적신 액체가 보랏빛인 것으로 보아 대낮부터 술을 퍼마시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캘리엇 백작. 이렇게 얼굴을 보는군. 자네를 보는 게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힘들다지?”

술에 젖어 나른한 목소리였다.

렉서스는 여러모로 대단한 황제였다.

저렇게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며 술이나 마시고 약을 즐겨도 그의 나라는 잘만 굴러간다.

속은 썩어가고 있을지 몰라도 제 목을 보존하고 싶어 하는 겁쟁이들이 렉서스가 해줘야 할 일을 대신 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끝이다.

레니샤가 빠졌지 않나.

렉서스의 나라가 나라꼴을 갖추고 있었던 데에는 레니샤의 공이 컸음을 모두가 알 것이다.

레니샤가 있었기에 민심을 얻을 수 있었고 그 경외를 토대로 황제위를 영위할 수 있었다.

캘리엇은 렉서스의 몰락을 기대하는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캘리엇은 렉서스가 마시는 술도, 렉서스의 자유분방함도 증오스러울 정도로 싫었다.

렉서스가 그의 자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을 때, 그때도 렉서스는 술에 취해 있었다.


“아닙니다, 폐하. 늙고 나니 몸을 먼저 챙기는 것뿐입니다.”

캘리엇이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렇구만. 그래도 황제의 명에는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여주는군. 내가 감사할 일이야.”

렉서스가 짧게 웃었다.


“황성을 지키는 이들은 움직이기 뭣하고, 그렇다고 왕자를 홀로 보낼 수도 없고 말이야. 오랫동안 제국에 체류한 데다가 제국에서 신붓감을 찾고 있었다지 않나? 아쉽게 돌아가는 길이니 왕자를 배웅할 자가 필요했는데 자네가 생각나지 뭔가!”

렉서스가 나른한 목소리로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이미 술을 꽤 마신 듯 취한 기색이 만연했다.

하지만, 보랏빛 눈동자에는 여전히 형형한 광기가 맴돌고 있었다.

캘리엇이 고개를 숙여 분노를 감췄다.


“노신을 잊지 않아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자네의 충정을 내 어찌 잊겠나. 이번에 레니샤를 만나러 가게 되면 자네에게 부탁할 것이 있는데 말이야.”

캘리엇이 실소를 삼켰다.

황제가 레니샤에게 전하라고 했다는 말들은 이미 전해 들었다.

시종이 부끄러운지 볼을 붉힌 채로 말하는 것을 캘리엇도 보았다.

시종도 아는 부끄러움을 렉서스는 모르는 걸까?

레니샤가 돌아오면 제도에 자리를 마련해주겠다고?

렉서스가 무슨 심정으로 레니샤에게 질척거리는 건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레니샤를 그 황무지로 몰아낸 것은 렉서스 본인이 아니었나.


“할 수 있다면 레니샤를 데리고 오게.”

렉서스가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그곳에서 레니샤가 얼마나 고생이 많겠어. 안 그런가?”

렉서스가 잔을 바닥에 대충 던져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을 내려온 렉서스가 캘리엇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멱살을 잡힌 채로 고개가 젖혀진 캘리엇이 신음을 참았다.


“생각해보게, 캘리엇. 자네가 늙었다고는 해도 머리는 있지 않나. 레니샤는 내내 제도에서 벗어난 적 없이 고귀하게만 살았어. 그런 곳에서 얼마나 더 버티겠나? 내가 레니샤를 용서하려는 참이야. 호기심에 다른 남자를 볼 수도 있지.”

카나리아와의 결혼을 바로 앞에 두고 있는 렉서스가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렉서스는 조금도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다 용서할 테니 돌아오라고 전해주게.”

짙은 술 냄새가 났다.

황망하게 고개를 돌리는 시종장이 곁눈질에 보였다.

캘리엇이 이를 악물었다.


“노신이 무슨 수로 그분을 모시고 오겠습니까. 폐하께서 명을 내리시면…….”

“내가? 내가 말을 한다고 그 여자가 듣기는 하나?”

렉서스가 광소를 터뜨렸다.

축축하게 술에 젖은 손으로 렉서스가 캘리엇을 밀쳤다.

캘리엇이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았다.


“다들 내가 나빴다고 이야기하지만, 그 여자가 지독한 걸 누가 알아줄까.”

렉서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데리고 와. 그 여자를 내 앞에다가 데려다 놓으란 말이야.”

“폐하……!”

“내가 미쳐버리겠다고!!”

렉서스가 돌연 고함을 질렀다.

머리를 움켜쥔 렉서스가 날카로운 눈으로 캘리엇을 노려보았다.


“그 여자가 자꾸 머릿속에 나타나. 그 빌어먹을 노예 놈하고 더러운 짓을 하면서……!”

렉서스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러니 데리고 와. 더 이상 명예가 실추되지 않도록. 로테라 공작이 내게 그 여잘 부탁했으니 내가 끝까지 돌봐 줘야지.”

캘리엇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종장이 그저 고개를 저어 보였다.

렉서스에겐 아무 말도 들리지 않을 거라는 뜻이었다.

캘리엇이 혀끝을 살짝 물었다.

결국 렉서스는 레니샤를 그리워하고 있는 거다.

레니샤를……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멍청하게도.

***

드디어 출발이었다.

메테오가 긴장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하녀들을 위한 마차 안에는 소공작 부부도 함께 타고 있었다.

캘리엇 백작과도 시선을 주고받았다.

저 마차에 누가 타고 있는지는 캘리엇 백작도 알고 있었다.

투리엘과 접촉한 것은 아주 잘한 선택이었다.

투리엘은 메테오를 위해서 최선의 선택을 해주었다.


“황제가 또 사람을 붙였을 수도 있습니다. 두 분께서는…….”

“최대한 안 내리실 겁니다.”

캘리엇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출발하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백작.”

메테오와 캘리엇 백작의 대화를 마지막으로 일행이 출발했다.

힐로샤인으로 가는 일정이었다.

메테오가 왠지 모를 설렘에 머리를 쓸어넘겼다.

일전의 연회에서 보았던 레니샤의 모습이 머릿속에 남는다.

레니샤는 누군가의 기억에 남을 정도로 아름답고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어디서도 고귀한 빛을 잃지 않을 사람.

힐로샤인에서도 그럴지 궁금했다.


‘만약, 엉망진창이라면…….’

정말로 그러하다면 레니샤와 소공작 부부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는 것도 생각하고 있었다.

죽음을 위장하는 건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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