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씻고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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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씻고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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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씻고 오겠습니다
2022.09.23.
카시우스가 눈살을 미미하게 찌푸리고는 몸을 떼어냈다.
레니샤로부터 멀어지는 몸짓에 그녀가 놀란 표정을 했다.
카시우스는 레니샤에게 붙어 있으려 노력한 적은 있어도 이렇게 몸을 떼어낸 적은 없었다.
소파에 기대앉아 있던 레니샤가 몸을 바로 세웠다.
반대편에서도 그녀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자리로 옮겨간 카시우스를 레니샤가 불렀다.
“카시우스?”
“……땀 냄새가 납니다.”
“아.”
레니샤가 웃음을 흘렸다.
“왜 그렇게 웃습니까?”
카시우스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땀 냄새라니. 전혀 그런 건 생각도 못 했거든요.”
“그럼……?”
그렇게 비처럼 땀을 쏟았는데 아무런 냄새도 안 날 리가 없는데.
카시우스가 셔츠 소매를 펼쳐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 모습을 보는 레니샤의 웃음이 짙어졌다.
“카시우스, 제도에 갈 일이 생겼는데 함께 갈래요?”
“……우리 두 사람이 한 번에 자리를 비워도 괜찮습니까?”
“어차피 이 주 후의 일인걸요. 그때까지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거예요.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해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 거고요. 솔레인도 있고, 린데이나 테리언 경도 있고요. 지금은 성을 보수하는 일과 대장간을 돌리는 일에 집중해야 하니 그 정도는 믿고 맡길 수 있을 듯한데요.”
“그렇다면 함께 가고 싶습니다.”
카시우스가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레니샤가 왜 제도로 간다는 것인지는 묻지도 않는다.
카시우스는 레니샤를 맹목적으로 믿고 따르고 있었다.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카시우스는 내가 말하면 독약도 삼킬 건가요?”
“제게 독약을 먹일 생각입니까?”
카시우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비유가 그렇다는 거죠. 왜 내가 하는 일에 토를 달지 않아요? 궁금한 것도 없나요?”
“레니샤는 이유가 있으니 그런 일을 하는 거라고 믿습니다. 제도에 반드시 가야 할 일이 있는 것 아닙니까?”
“굳이 가지 않아도 된다면?”
“가야 레니샤의 마음이 편하다면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레니샤가 바람 섞인 웃음을 흘렸다.
순수하고 깨끗한 믿음이 레니샤조차도 정화시킬 것 같은 기분이었다.
황후로 살면서 레니샤는 믿는 법보다 의심하고 계산하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하지만, 카시우스와 있을 때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카시우스는 속내에 다른 것을 숨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레니샤가 계속 허파 빠진 사람처럼 웃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마음이 편안해져서.
그녀를 가득 채우고 있는 독기조차도 카시우스 앞에서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곤 했다.
레니샤가 허물어진 표정으로 미소를 머금었다.
레니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땀 냄새가 걱정된다는 이유로 내외하듯 몸을 가장자리에 붙이고 앉은 카시우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 요조숙녀님.”
카시우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다행히 지금은 듣는 이가 없었다.
카시우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레니샤, 제발.”
“일어서요.”
카시우스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레니샤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순순히 그녀가 시키는 대로 따르는 카시우스를 레니샤가 욕실 쪽으로 잡아당겼다.
“무슨……?”
“땀 냄새가 걱정된다면 씻으면 될 일이지요.”
“그렇긴 한데.”
카시우스가 볼을 붉혔다.
이곳은 레니샤의 침실이었다.
그건 지금 레니샤가 이끌고 들어가고 있는 저 욕실도 레니샤의 것이라는 말이 된다.
“가서 씻, 씻고 오겠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 있나요?”
레니샤가 카시우스를 욕실 안으로 밀어 넣고 그녀도 들어갔다.
딸깍.
문이 닫혔다.
레니샤도 안에 남긴 채로. 카시우스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레니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셔츠 단추를 전부 풀어냈다.
물이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손길이었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목덜미에 입술을 비비고는 떨어져 나갔다.
레니샤가 제 옷에 달린 리본 끈을 푸르며 나긋하게 속삭였다.
“카시우스. 나머지는 혼자 벗을 수 있죠?”
카시우스의 얼굴이 머리카락과 동색으로 변했다.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
엎드려 누운 카시우스가 숨을 몰아쉬었다.
욕실에서부터 시작해서 침대까지.
레니샤가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카시우스가 베개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레니샤는 아무리 생각해도 세이렌의 핏줄이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사람을 홀릴 수가 있나.
욕실에서 제 손으로 옷자락을 끌어 내리는 레니샤를 보는데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카시우스가 베개에서 고개를 슬쩍 들었다.
잠깐.
레니샤는 대체 이런 걸 어디서 배운 거지?
카시우스가 멈칫했다.
“레니샤.”
이런 건 마음에 담아두는 게 아니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습니까?”
“음?”
나른함에 젖어 눈을 감고 있던 레니샤가 고개를 돌려 카시우스를 보았다.
단단한 어깨 너머로 카시우스의 얼굴이 반쯤 가려 있었다.
고양이처럼 치켜 올라간 금안이 억울함을 품고 있었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뺨을 쓸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전에도, 다른 놈에게 이런 적이 있습니까?”
렉서스의 이름을 입에 담고 싶지도 않았다.
카시우스의 질문에 레니샤가 눈을 깜빡였다.
잠시 멍한 기분이었는데 이해가 되어버렸다.
“질투해요?”
레니샤의 질문에 카시우스가 고개를 돌렸다.
레니샤가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맞지?”
웃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레니샤가 카시우스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뜨거운 카시우스의 탄탄한 등에 레니샤의 차가운 피부가 맞닿았다.
카시우스가 움찔하고 움직였다.
“지금 질투하는 거잖아.”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허리선을 손끝으로 훑어내렸다.
“내가 렉서스에게 이랬을까 봐 속상해?”
“황제.”
“응?”
“렉서스가 아니라 황제라고 부르십시오.”
레니샤의 눈이 곱게 휘었다.
“하하하. 내 남편은 질투하는 것도 귀엽기도 하지.”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어깨에 입술을 꾹 눌렀다.
카시우스가 이를 악물곤 눈을 감았다.
레니샤는 지금 알면서 이러는 거다.
카시우스가 레니샤가 주는 자극을 견디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면서…….
카시우스가 몸을 굴렸다.
레니샤를 아래에 둔 그가 그녀의 뺨을 쥐었다.
레니샤의 위로 그늘이 졌다.
“대답하십시오, 레니샤. 이런 적이 있습니까?”
“카시우스. 당신을 걸고 맹세할게. 나는 황제와 이런 걸 해본 적이 없어. 내게도 당신뿐이야.”
카시우스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바라는 대답을 듣고 나니 꿍했던 마음이 또 사르륵 풀린다.
레니샤가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카시우스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귀여운 내 강아지, 내 남편.”
레니샤가 덩굴처럼 카시우스를 끌어안았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평정을 무너뜨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옳았다.
카시우스는 자꾸 모든 것을 버린 레니샤에게 희망을 지펴 올리는 사람이었다.
레니샤도 사람답게 살 수 있다고, 행복해도 된다고.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고.
카시우스는 레니샤가 버렸던 것들을 자꾸만 불어넣었다.
그래서 놓으려고 했다.
‘부질없는 짓이었지.’
이미 가진 것을 놓을 수 있다는 자만은 하지 않는 게 옳았는데.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뜨거운 살덩이에 제 것을 얽었다.
식었던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다시 예열되었다.
“내겐 당신뿐이야.”
레니샤의 달콤한 속삭임에 카시우스는 어쩔 수 없이 정복되었다.
***
렉서스가 실실 웃으며 제 앞에 선 외무대신을 응시했다.
“샴디르의 왕자가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은 나도 알고 있소. 그런데 그게 어쨌다고?”
“샴디르는 히엔트리의 강력한 우방입니다. 왕자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보호하는 게 맞습니다.”
“아하. 그래서 외무대신께서 직접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여서 이리로 오셨구만.”
렉서스가 박수를 쳤다.
“옳은 말이야. 메테오 왕자에게 일이 생기면 우리는 곤란하지.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건가?”
“캘리엇 백작으로 하여금 메테오 왕자를 호위하도록 하심이 옳을 듯싶습니다.”
“캘리엇 백작? 자네하고 사이가 좋지 않은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것과는 별개로 히엔트리를 위해서 일해야 하니까요.”
눈을 가늘게 뜬 렉서스가 외무대신을 살폈다.
캘리엇 백작은 렉서스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앞에 선 자는 오히려 레니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레니샤가 황후가 되고 렉서스가 황제가 되면서 그가 밀던 황자가 고꾸라졌다.
그 덕에 황자비였던 외동딸을 잃어야 했다.
그렇다고 캘리엇 백작이 레니샤와 어떤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캘리엇 백작은 본디 세상을 홀로 살아가는 고고한 늑대 같은 사람이었다.
캘리엇 백작이나, 외무대신에게 다른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차라리 공개적인 것이 나을 수도 있겠지.’
메테오의 뒤에 붙일 이들을 이미 구해두었던 렉서스가 혀로 입술을 훑었다.
저들의 말에는 허점이 없었다.
메테오가 여기서 무슨 일을 하고 돌아다니던 간에 그는 제국의 손님이었다.
그를 안전하게 보호해서 돌려보내는 것 또한 황제로서 해야 할 일이었다.
“자네 말이 옳은 것 같군. 캘리엇 백작에게 공문을 보내게. 메테오 왕자가 돌아가기 전에 힐로샤인을 들르고 싶다고 하니 그 길을 호위하게 해. 그리고 메테오 왕자가 무사히 출국하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오라는 명을 내리게.”
“예, 폐하.”
렉서스가 빙긋 미소 지었다.
“자네들이 있어 든든하군. 내가 이번 주말에는 결혼식이 있지 않나? 겨우 이틀 남았지.”
“축하드립니다, 폐하.”
“자네들을 초대하지 못해서 아쉽군.”
정상인처럼 말하고 있지만 렉서스의 눈동자에 돌고 있는 광기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외무대신이 렉서스와 눈을 피하기 위해서 고개를 더욱 조아렸다.
속내를 파헤칠 것 같은 눈빛이었다.
“카나리아를 어여쁘게만 여겨주게. 가여운 사람이지 않나?”
렉서스가 애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 말에 돋힌 가시를 외무대신이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다.
황후가 될 사람을 어여삐만 여겨달라니.
정말로 황후를 노래하는 새로 만들 작정인 것이다.
새장 속에 갇힌 새는 당연히 가엽다.
렉서스가 외무대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아. 그 김에 캘리엇 백작에게 레니샤의 안부를 물어달라고 전해주겠나? 내가 레니샤를 챙겨야지. 이제 레니샤에게 남은 건 나뿐이지 않나.”
렉서스가 차갑게 미소 지었다.
칼날을 머금은 것 같은 그 얼굴에 외무대신이 침을 삼켰다.
“그깟 노예 기사가 레니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겠어. 캘리엇 백작에게 전하도록 하게. 레니샤가 힘들고 괴롭다면 제도에서 지낼 수 있게 해주겠다고 말이야.”
조롱기가 가득한 어조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렉서스가 초조해 보이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예, 폐하.”
“레니샤가 보고 싶군.”
대체 무슨 의도인지 알 수가 없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