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살아남은 이들 (48/135)


48화. 살아남은 이들
2022.09.13.



 
레니샤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똑.

레니샤의 쇄골 사이로 떨어진 땀방울이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레니샤가 느리게 몸을 움직일 때마다 카시우스가 뜨거운 숨을 터뜨렸다.

레니샤 손바닥 아래에서 카시우스의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그 소리가 레니샤의 몸을 울리는 듯했다.

멀리서 북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커다란 손바닥이 레니샤의 허리를 붙들었다.

레니샤가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흘렸다.


“레니샤…….”

무엇보다도 레니샤를 달뜨게 하는 건 그녀를 부르는 카시우스의 목소리였다.

평소에도 카시우스의 목소리는 낮은 편이었는데 이럴 때면 조금 더 낮아졌다.

그 간극이 레니샤의 아랫배를 간질간질하게 만들었다.

레니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치솟았다.

카시우스의 열기가 레니샤까지 불태우는 것 같았다.

미끌어지는 레니샤를 카시우스가 받쳐주었다.

힘이 풀려 앞으로 쓰러지는 레니샤를 카시우스가 온 힘을 다해 끌어안았다.

레니샤가 숨을 몰아쉬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아직 풀려나지 못한 열기가 날뛰고 있었다.

***

레니샤와 카시우스가 떠난 지 어느새 10일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메테오가 샴디르에서 떠나온 시간이 그만큼 길어졌다는 의미와 같았다.

이제 히엔트리의 중앙 귀족들은 메테오가 이곳에 정착하려는 것인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종종 사교 모임이나 즐기며 의도를 드러내지 않는 메테오가 신붓감을 찾으려는 건 아니냐는 이야기도 오가고 있는 걸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메테오의 의도는 그렇게 순수하지 않았다.

메테오가 등불을 들고는 심호흡을 했다.

주변을 둘러보는 메테오의 눈빛은 어두웠다.

이곳에 누군가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조심하게 된다.

메테오가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샴디르의 막내 왕녀가 곧 결혼을 한다더군요.”

안쪽에서 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상대는 히엔트리에서 온 공작이라더군요.”

메테오가 빠르게 대답했다.

끼이익. 문이 열렸다.

벌어진 문틈으로 들어간 메테오가 문을 도로 닫았다.


“후우. 벌써 몇 달째 이 짓을 하고 있는 데도 간이 떨리는군요.”

“……우리를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계시다는 것을 압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웃음을 머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메테오 왕자님.”

“다행히 무탈하신 것 같군요, 브릭스턴 로테라. 그리고 헤일린 노바 로테라.”

메테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사라진 브릭스턴과 헤일린이 메테오의 눈앞에 있었다.

샴디르의 메테오가 숨기고 있는 비밀은 바로 이것이었다.

실종되었다고 알려진 로테라의 후손들을 데리고 있다는 것!

샴디르는 원수는 10배로, 은혜는 100배로 갚는다.

레니샤로부터 받은 은혜를 제대로 갚지 못했다.

이 두 사람의 목숨으로 막내 왕녀의 목숨값을 치를 예정이었다.

로테라가 결국 벼랑 끝에 몰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입수한 샴디르의 국왕은 메테오에게 이번 임무를 맡겼다.

소공작 부부를 구출하고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

그리고 추후 상황에 따라서 레니샤와 그들을 만나게 해주는 것까지.

사실 메테오가 비밀리에 입국한 것은 1년 전의 일이었다.

격동하는 렉서스의 기분에 따라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고 있는 로테라의 명운을 지켜보고 이들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메테오는 시기적절하게 이들을 구해내는 데 성공했다.

렉서스의 사람들이 밀어닥치기 직전에 빼낸 것이다.

아쉬운 것은 이사벨라를 구하지 못했다는 것뿐.


“이사벨라는 찾았나요?”

헤일린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메테오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흔적이 끊긴 이후로는 무엇도 찾을 수 없습니다, 부인.”

“아……. 이렇게 저희를 구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라는 걸 알아요, 메테오 왕자님. 그래도 다시 한번 간곡히 부탁드릴게요.”

“당연한 일입니다. 저는 로테라에 은혜를 갚기 위해 왔고 이사벨라가 살아 있다면 반드시 두 분의 곁으로 데려다줄 겁니다.”

헤일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왕자님.”

“곧 두 분께서는 힐로샤인으로 가게 되실 겁니다.”

“왕자님도 함께 가십니까?”

“예. 황제에게는 돌아가기 전에 레니샤 부인께 인사를 드리려 한다고 하려 합니다. 샴디르의 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으니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그리고 저희는 돌아가는 척하곤 음지에서 이사벨라의 행적을 쫓을 예정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네, 힐로샤인입니다. 그곳은 황제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이라더군요.”

“황무지니까요. 무엇도 없는 곳에 눈을 심어둘 이유는 없었겠지요.”

브릭스턴이 무겁게 말했다.

그곳의 비밀에 대해서는 브릭스턴도 알고 있었다.

땅에 묻힌 검은 뱀 덕분에 풀도 제대로 자라기 힘든 곳이었다.

힐로샤인에서 먹고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곡식을 밖에서 사와야 했다.

그렇게 자생하지 못하는 영지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법이다.


“레니샤가 그곳으로 갔다니…….”

운명은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들이 안일하게 있는 사이에.


“좋습니다, 왕자님. 이 모든 것은 반드시, 반드시 갚아드리겠습니다. 로테라도 절대로 은혜를 잊지 않으니까요.”

메테오가 호탕하게 웃었다.


“이것이야말로 선순환이로군요. 준비를 해두십시오. 황제를 배알하는 대로 떠날 준비를 하겠습니다.”

“네, 왕자님.”

드디어 이 답답한 곳을 나가는 것이다.

브릭스턴과 헤일린은 목숨을 구한 이후로 이 작은 저택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다.

메테오가 먹을 것을 조달해주었고 그가 데리고 온 샴디르의 사람이 그들을 돌봐 주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던 궁핍한 생활이었지만 렉서스의 칼날 같은 눈길을 피해서 숨죽이고 살아야 했었던 과거에 비해서는 훨씬 편안한 삶이었다.

그들의 가슴속에 돌처럼 얹혀 있는 것은 사지에서 죽음을 맞이한 로테라 공작 부부와 잃어버린 이사벨라뿐이었다.

메테오가 돌아가고 헤일린이 브릭스턴의 팔을 붙들었다.


“그 애를……. 그 애를 그렇게 보내는 것이 아니었어요.”

“헤일린…….”

“그 애가 정말로 잘못되기라도 했을까 봐 잠을 잘 수가 없어요.”

헤일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브릭스턴이 헤일린을 감싸 안았다.


“모든 것을 갚아줄 수 있을 겁니다, 헤일린. 내 부모님께서는 로테라를, 그리고 나와 레니샤를 절대로 약하게 키우지 않으셨어요. 레니샤가 우리와 로테라를 위해서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헤일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목적은 단 하나였다.

렉서스가 이 모든 것을 돌려받는 것을 보기 위해서.

***

메테오는 그 길로 바로 황성으로 들어갔다.

얼마 전에 황성에서 난리가 있었다고 들었다.

귀족들이 황제의 결혼식을 종용했고 그 자리에서 모욕을 당한 카나리아가 울고불고한 덕에 아이가 유산될 뻔했다나.

카나리아는 그것을 빌미로 드러누웠단다.

정부의 귀여운 앙탈에도 렉서스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카나리아는 히엔트리의 하급 귀족보다도 못한 결혼식을 치르게 될 것이다.


‘남의 것을 삼키면 꼭 탈이 나는 법이지.’

메테오가 실소를 흘리고는 시종장에게 말했다.


“황제 페하를 뵈러 왔네.”

“……기다리십시오.”

시종장이 렉서스의 허락을 구했고 무거운 문이 열렸다.

메테오가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오, 메테오 왕자. 오랜만이로군. 듣기로는 지금까지 히엔트리를 즐기고 있다지?”

“예, 폐하. 폐하의 은덕으로 풍요로운 히엔트리의 광경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많을 것을 보고 배우고 있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로군. 듣기로는 신부를 구하고 있다던데?”

렉서스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좋은 생각이야. 샴디르와 히엔트리 간의 우호 관계를 생각해서도 말이지.”

메테오가 렉서스의 옆에 놓인 향로를 힐끗 보았다.

속을 메스껍게 하는 냄새가 저기서부터 나고 있었다.


‘대낮부터 약에 취해 있군.’

메테오가 숨을 조절했다.

렉서스의 느물거리는 말투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메테오가 한심함을 간신히 감췄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와 마음이 통하는 아가씨를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부모님께서 저를 보고 싶다고 하시니 이만 돌아가 볼까 합니다.”

“그렇다니 아쉽군. 기회가 있다면 언제든지, 언제든지 말하게. 어떤 영애든 간에 내가 내어줄 테니.”

렉서스가 광기 어린 얼굴로 웃었다.


“돌아가는 여정이 편안해야 할 텐데 말이지.”

 

 
그 순간 왜 오싹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염려 감사합니다. 돌아가는 길에 레니샤 부인을 뵙고 갈까 합니다.”

“먼 길을 돌아가게 될 터인데?”

“그래도 인사를 드리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이대로 돌아가면 부왕께 큰 꾸지람을 받을 겁니다.”

“하하. 레니샤가 막내 왕녀를 구한 것으로 샴디르에 좋은 올가미를 씌운 모양이군.”

모욕적인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렉서스는 두려움을 모른다.

아무도 그를 해하지 못할 것을 아는 얼굴이었다.

절대 권력.

히엔트리는 이번에 페리센 왕국을 상대로 불가능한 승리를 이룩하면서 저력을 과시했다.

그 덕분에 모든 나라가 렉서스의 눈치를 보고 있으니 모든 것이 제 것처럼 여겨질 터였다.

메테오가 생긋 웃었다.


“그럼 허락하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아. 레니샤를 보러 간다고 하니……. 그래, 내 선물도 전해줄 수 있겠나?”

“선물……이라고 하셨습니까?”

렉서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랏빛 눈동자가 묘하게 번뜩였다.

그 속에 들어 있는 감정들의 정체를 메테오는 도저히 읽어낼 수가 없었다.

미쳐 있는 데다가 속도 알 수 없는 황제라니.

렉서스는 확실히 위험한 인물이었다.


‘뒤에 따라붙는 꼬리가 없는지 조심해야겠군.’

렉서스가 손짓하니 시종이 상자를 가지고 왔다.

시종이 메테오 앞에서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피투성이가 된 옷가지가 들어 있었다.


“이, 이건…….”

“레니샤가 애타게 찾고 있을 이들이 있거든. 내가 찾아낸 흔적이지. 이 정도로 피를 흘렸으면 그 조그만 아이는 분명 죽었을 거야. 그렇지 않나? 찾고 있으니 찾아 줘야지. 그래야 진정한 남편의 도리 아니겠나!”

렉서스가 광소를 터뜨렸다. 메테오가 마른침을 삼켰다.

이사벨라의 옷인 게 분명했다.

메테오가 상자의 뚜껑을 닫고는 고개를 깊게 숙였다.


“잘……. 전달해드리겠습니다.”

“아, 그것 말고도 가져갈 것들이 있으니 기다리게. 레니샤가 쓰던 것들을 내가 찾았거든. 레니샤가 나를 박정하게 본 모양이야. 내가 선물한 것들도 전부 두고 간 것을 보니.”

시종 둘이 커다란 상자를 가지고 나타났다.

그 안에는 레니샤가 과거에 착용했었던 보석들이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제 몸을 화려하게 반짝이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