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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침실로 갈까요? (47/135)


47화. 침실로 갈까요?
2022.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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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우스가 성 앞을 서성였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간이었다.

하루 종일 구슬땀을 흘리며 일하던 인부들도 잠자리로 돌아간 시간이었다.

힐로샤인 마을에서 힘을 쓸 수 있는 자들은 전부 성을 복구하는 일에 동원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힐로샤인에 로테라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이들이 귀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일꾼이 늘어가고 있었다.

이제 이족들만 찾아서 데리고 온다면 어느 정도 구색은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성을 보수하고 영지를 발전시키는 일도 하고.

오늘 내내 카시우스는 정말 바빴다.

수련하고 영지에 관련된 일을 익혀야 했고, 그를 찾아온 꼬마 손님들과도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차마 레니샤가 외출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래서 레니샤를 마중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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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카시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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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샤. 어딜 다녀오는 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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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로샤인을 이끄는 수장을 만나고 왔어요. 할 이야기가 있었거든요. 카시우스는 일은 마무리되었나요? 힐로샤인의 역사에 대해서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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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로샤인 사람들이 처음부터 검은 뱀의 힘을 쓸 수 있었던 건 아니라는 건 알았습니다. 그리고 꼬맹이들이 정말 말이 많고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카시우스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이들은 순수한 만큼 선이 없었다.

무엇을 말해야 하고 말해선 안 되는지에 대해서 판단하지 못한다.

이사벨라 또래의 아이들은 자신보다 어린아이들과 어울려주지 않는다.

그런데 이사벨라는 그들하고 거리낌 없이 어울려주니 아이들이 한껏 들떠 있었다.

게다가 이사벨라는 제도에서 온 귀족 소녀 아니던가.

고작 예닐곱 살 되어 보이던 아이들은 자기들보다 나이도 많고 예쁘장한 이사벨라를 선망의 눈길로 보고 있었다.

한동안 아이들은 이사벨라를 아기 오리처럼 졸졸 쫓아다닐 것 같았다.

이사벨라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가고 있으니 카시우스도 몇 번 더 시달리게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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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이사벨라도 어렸을 때 그랬었어요. 어린애치고 모르는 게 없다 싶었지.”

카시우스와 레니샤가 자연스럽게 나란히 걸었다.

두 사람이 함께 정원으로 발을 돌렸다.

누군가의 제안이 있었던 게 아닌데도 말이다.

레니샤의 속눈썹 위로 내려앉은 석양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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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이사벨라는 잘 어울리는 것 같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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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이들이 이사벨라를 잘 따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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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는 힘든 걸 말하지 않는 편이라. 그나마 다행이네요. 이사벨라에게도 같이 어울릴 아이들이 생겨서. 솔레인이 협조를 약속했어요. 아, 솔레인은 힐로샤인 수장의 이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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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로테라의 영지에 기거하는 사람들입니다. 레니샤가 바라는 건 무엇이든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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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방식으로는 원하는 결과를 도출해내기가 힘들어요. 그들에게도 이지가 있고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요.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이죠. 만약 나의 강압으로 우리에게 협조한다면 계속해서 그들을 견제해야겠죠. 언제 잡은 손을 놓을지 모르니. 하지만, 자의로 내 손을 잡게 만들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 마음을 유지하게 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런 걱정은 덜게 되겠죠.”

카시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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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와 비슷하군요. 그것과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초르파 평원에서 페리센의 사람을 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초르파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이었죠. 그리고 그렇게 잡힌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레니샤가 귀를 기울였다.

카시우스가 전쟁터에서 지냈던 이야기를 듣는 건 꽤 흥미로운 일이었다.

레니샤 앞에서 카시우스는 참한 요조숙녀인데 전쟁터에서의 그는 악마와 다름없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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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말해봐요. 거기에서 그들은 어떻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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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휘말려서 터전을 잃은 이들은 넘쳐났고, 히엔트리의 포로가 된 이들도 많았죠. 그리고 힐로샤인의 기사들의 의견은 두 가지로 나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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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요?”

카시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니샤의 보폭을 맞춰 걷는 카시우스의 몸이 우아하고 유연하게 움직였다.

레니샤는 카시우스를 보고 있으면 신기했다.

레니샤의 배는 될 것 같은 몸이 저렇게 소리 없이 조용히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말이다.

카시우스는 지금도 수련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레니샤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손바닥에 와닿던 단단한 촉감과 열기 같은 것들이 생각났다.

레니샤를 불태우는 것 같았던 카시우스도 말이다.

레니샤는 분명 카시우스와 다시는 밤을 보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나름 잘 밀어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보니 지금처럼 나란히 걷고 있었다.

카시우스가 입 맞추는 것을 거절하지 못했고 추운 새벽을 핑계 삼아 그녀를 끌어안고 잠드는 것을 막지 않았다.

레니샤가 한숨을 삼켰다.

카시우스와 알게 된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카시우스는 누구보다 빠르게 레니샤의 일상에 침투했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레니샤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카시우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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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부류는 그들을 훈련시켜서 히엔트리를 위해 쓰자고 했고 또 한 부류는 그들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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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버지는 어떤 결정을 내리셨나요?”

레니샤가 카시우스를 뚫어져라 보면서 물었다.

카시우스는 왠지 모르게 그 시선에 볼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레니샤의 분홍빛 눈동자가 생기로 반짝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달싹이는 입술과 그 위를 훑는 작고 귀여운 혀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카시우스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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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부부가 되세요.’

마음의 교감이 중요하다고 했었잖아, 이 짐승 새끼야.

카시우스가 스스로를 비난하고는 팔짱을 꼈다.

저도 모르게 레니샤에게 뻗어 나가려는 손을 막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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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께서는……. 공작께서는 그들을 풀어주셨습니다. 그들은 페리센의 사람들이니 강압하여 히엔트리를 위해서 쓴다고 해도 언젠가는 배신할 거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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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버지 딸이 맞나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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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죄 없는 그들을 죽인다고 한들 전쟁이 끝나는 건 아니라고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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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아버지다운 말씀이고요. 아버지는 쓸모없는 희생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고 하셨거든요. 이 땅은 히엔트리만의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만물을 위한 것이니 나눌 줄 알아야 한다고.”

카시우스가 이 이야기를 왜 꺼냈는지 알 것 같았다.

레니샤를 보고 로테라 공작을 떠올린 것이다.

그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레니샤는 어릴 적부터 로테라 공작 부부를 보고 자랐으니 말이다.

그들을 닮아간다는 건 레니샤 안에 그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과 같았다.

레니샤가 생긋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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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카시우스. 그런 이야기를 들려줘서.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내 부모님의 이야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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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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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아프긴 해요. 분명 그분들은 살아계셨다면 더 훌륭한 일들을 해내셨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다고 불편하진 않아요. 나는 그분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고. 카시우스가 알려줬잖아요? 내 부모님은 끝까지 나를 사랑하셨노라고.”

레니샤의 눈매가 화사하게 휘었다. 미소가 조금 더 깊어졌다.

카시우스가 홀린 듯이 그 모습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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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면 됐어요. 내 안에 그분들은 영원히 살아 있을 거예요.”

레니샤가 카시우스에게 손을 뻗었다.

힐로샤인으로 오는 여정 중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유독 새벽이 싸늘하고 추운 날이었다.

레니샤는 몸을 웅크리고 잠들기 위해 노력했다.

익숙하지 않은 날이었고 무슨 일인지 잡념도 많았다.

부모님께서는 이렇게 추운 땅에서 돌아가셨구나.

레니샤가 따뜻한 곳에서 지내고 있을 때 그들은 이런 헐벗은 땅에서…….

그런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가슴이 답답하고 눈앞에 불길이 이는 듯했다.

잠들지 못하는 레니샤를 카시우스가 머뭇거리며 감싸 안았다.

그녀의 엉덩이를 단단한 배에 붙이게 하고 등을 꼭 감싸 안았다.

식어 내린 레니샤를 녹여주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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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오지 않으면 전쟁터에서는 별을 세곤 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었죠. 언젠가 저 별을 세지 못하는 날이 올 수도 있으니 오늘에 감사하자고. 나는 지금이 편안합니다. 당장 내일의 죽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하지만, 레니샤는 불편하겠지요.’

레니샤의 귓가를 스치는 카시우스의 숨결에 레니샤는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카시우스가 몸을 굴려 레니샤를 그의 위에 올렸다.

깜짝 놀라 일어서려는 레니샤의 등을 힘주어 끌어안은 채로 카시우스가 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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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불편함은 내가 짊어질 테니 레니샤는 오늘 밤만이라도 편히 주무십시오. 내일은 좀 더 먼 길을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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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우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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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테라 공작께서는 추운 날이면 공작 부인과 손을 꼭 붙들고 먼 곳을 바라보곤 하셨습니다. 망토를 벗어 공작 부인의 어깨에 얹어주셨지요. 그러곤 불행과 불편함, 그리고 두려움은 공작께서 막아주실 수 없으니 공작 부인은 지금의 추위라도 피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배운 대로 하는 겁니다, 레니샤.’

잠든 척 눈을 감아버리는 카시우스 덕분에 레니샤는 땅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피해서 눈을 감을 수 있었다.

그날의 기억이 물밀 듯이 쏟아졌다.

기억이 레니샤를 그날로 끌어들였다.

몸 아래로 느껴지던 카시우스의 뜨거운 체온과 흙냄새와 바람 냄새.

숲 한가운데에서 레니샤는 평온을 찾았다.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지켜줄 거라는 근거 없는 안도에 끌렸다.

그 품 안에서는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었다.

지금 왠지 그 품을 느끼고 싶었다.

레니샤가 혈색이 돌아 유독 붉어진 입술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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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아줘요, 카시우스.”

카시우스가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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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서 있지 말고 내게 와서, 나를 안아줘요.”

레니샤가 어린아이처럼 팔을 벌렸다. 인지하고 나니 추운 것 같았다.

카시우스의 팔이 아래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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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나를…….”

카시우스를 멀리하겠다는 그날의 다짐들이 전부 부질없이 흩어졌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손목을 붙들었다.

강렬한 힘에 이끌려 레니샤가 카시우스에게 안겼다.

들썩이는 숨과 뜨거운 체온, 그리고 레니샤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숨결까지.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레니샤가 느꼈던 그대로.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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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레인을 홀로 대면하면서 어쩌면 외로웠던 것일까?

레니샤의 추위를 막아줬던 카시우스가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레니샤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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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보 같았네요.”

한번 맛 들인 것을 끊어낼 수 없을 거라는 걸 짐작했어야 했는데.

한 번도 무언가에 중독되어 본 적이 없어서 안일했다.

레니샤가 바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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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실로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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