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카나리아가 잡은 허상
(46/135)
46화. 카나리아가 잡은 허상
(46/135)
46화. 카나리아가 잡은 허상
2022.09.06.
솔레인의 흐릿한 잿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살아온 세월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눈동자는 레니샤의 의도를 짚어보는 듯했다.
“……저희가 레니샤 님을, 공작 부인을 이용하라니.”
“솔레인께서는 저는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시지요. 제게서 무엇이 보이십니까?”
레니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과거, 제도에 방문하신 일이 있으셨지요.”
솔레인의 입매가 단단하게 굳었다.
“로테라의 제도 타운하우스에서 저를 마주치셨고 저에 대해서 아버님께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것을 기억하시나요?”
“레니샤 님.”
“그때 저는 고작 5살이었습니다. 세상이라곤 저택이 전부인 꼬마 아이였지요. 그런 저를 두고 뭐라고 하셨는지 기억하셔야 합니다.”
레니샤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레니샤가 알고 싶어서 알게 된 것이 아니었다.
부모님이 나누는 대화를 몰래 엿들었을 뿐이다.
“‘저 여자아이는 로테라를 파멸로 이끌 겁니다. 그릇된 선택으로 공작님을 죽이시겠지요. 그것을 발판 삼아 더 찬란한 빛을 품을 아이입니다. 버리십시오. 저 아이를 버리시고 로테라의 보전을 꾀하십시오.’ 그 말에 내 아버지는 물으셨다지요?”
“…….”
“‘그래서 내 아이는 어떤 빛을 품게 되나. 나의 죽음으로 나의 아이는 살아남는 건가?’”
“…….”
“솔레인께서는 제가 히엔트리의 빛을 거머쥐게 되실 거라고 그러셨습니다.”
레니샤가 저택에서 나가지 못하고 내내 갇혀 있었던 진정한 이유는 그것이었다.
솔레인이 한 말 덕분에.
로테라 공작은 레니샤에게 그 운명이라는 것이 최대한 늦게 찾아오기를 바랐다.
솔레인은 힐로샤인의 현자였다.
운명을 짚어 미래를 본다는 자가 한 말이니 반드시 일어날 일임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 시기였다.
어린 레니샤에게 그런 운명을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던 로테라 공작은 그녀를 저택 안에 가뒀다.
그 어떤 운명도 마주하지 못하도록.
운명이 직접 집 안으로 굴러들어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예언대로 레니샤는 로테라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녀가 베풀었던 오만한 연민의 대가로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레니샤가 빛을 가지게 될 차례 아니던가.
“지금도 그렇게 보이십니까? 제가 빛을 쥐게 될 것으로 여겨지시나요?”
레니샤가 나긋하게 물었다.
솔레인은 예언을 내리는 사람이다.
지금도 레니샤를 통해서 무언가를 보고 있을 것이다.
“솔레인님. 말씀해보세요.”
레니샤가 입을 다물고 있는 솔레인을 재촉했다.
“제 운명에서 무엇을 보고 계시는지.”
솔레인이 침음을 흘렸다.
“……알고 계시는지 몰랐습니다.”
“아. 과거의 일은 괜찮아요. 솔레인께서는 내 아버지를 존경하셨고 그분이 무너지는 걸 바라지 않으셨겠죠. 나아가 힐로샤인의 안전도 걱정이 되셨을 거고요. 저와 솔레인은 남이에요. 우리 둘 사이에 무엇도 없으니 그런 말을 했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이해해주신다니 다행입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드리지요. 붉게 빛나는 찬란한 빛을 손에 쥐실 겁니다. 욕심이 가득한 운명이라 바라시는 것은 전부 가지게 되시겠지요. 다만, 그 과정에서 불가피한 희생이 생길 겁니다. 힐로샤인을 그 운명에 몰아넣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살 건가요, 솔레인? 당신이 바라는 게 그거예요? 이렇게 힐로샤인에 갇혀서 사는 것 말이에요. 어린아이들에게도 이런 삶을 물려줄 생각인가요? 숨고, 도망치고. 삶의 터전마저 저버리는 삶을요. 또다시 언제 이런 기회가 올지 아무도 몰라요.”
일부 레니샤의 말이 맞다.
그들은 힐로샤인에 숨어서 양지로 나갈 날을 기다려왔다.
그리고 지금 카시우스 덕분에 여지가 생겼다.
사람들이 힐로샤인 사람들을 괴물이 아니라 영웅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녀의 말대로 이와 같은 기회가 또 언제 올까.
“나를 이용해요, 솔레인. 나를 돕고 내게서 대가를 받아내요. 힐로샤인을 양지로 끌어내 줄게요.”
레니샤가 그 말을 하는 순간, 솔레인은 단 하나의 운명을 보았다.
레니샤가 말한 대로 힐로샤인의 아이들이 양지로 나가 다른 이들과 어울리는 장면을 말이다.
솔레인은 낡고 지쳤다.
그가 힐로샤인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은 오래 살다 보니 알게 된 것들을 전달해주는 것뿐이었다.
솔레인이 가고 나면 힐로샤인은 그렇게 이끌어줄 이도 잃게 된다.
힐로샤인의 오래된 자들은 이미 영면으로 떠난 지 오래였기에.
레니샤의 말대로 레니샤를 이용한다면.
“내가 꿈을 이룬다면 절대로 힐로샤인을 외면하지 않겠어요.”
레니샤는 달콤한 독을 품은 독사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내 손을 잡아요, 솔레인.”
***
“대관식은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덴버스 후작을 비롯한 귀족들이 렉서스를 몰아붙였다.
카나리아를 황후로 책봉하는 것은 결정되었다.
그렇다면 움직임이 있어야 할 텐데 황성이 조용하니 그들이 다시 나선 것이다.
누군가가 다시 다른 마음을 먹기 전에.
“카나리아 님께서도 황후궁에서 보호를 받는 게 더 안전하실 겁니다.”
“왜? 내 아이를 가진 여자를 건드릴 간 큰 인사가 있나 봐?”
렉서스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속이 잔뜩 뒤틀린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타이밍이 좋질 않다.
귀족들이 서로 눈치를 살필 때였다.
“렉서스.”
카나리아가 나타났다.
덴버스 후작이 카나리아를 보고는 눈을 빛냈다.
레니샤를 따라 하는 듯한 옷차림이었다.
목을 덮은 흰색의 드레스에는 무엄하게도 황금색 실로 수가 놓여 있었다.
레니샤가 종종 입던 드레스 디자인이었다.
레니샤처럼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 그녀처럼 장신구를 했다.
덴버스 후작이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품위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경박한 모양새였다.
누군가의 외양을 흉내 낸다고 해서 다른 것들도 빼앗아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어리석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카나리아의 차림새에서 레니샤를 연상한 것은 덴버스 후작뿐만이 아니리라.
귀족들이 전부 입을 벙하니 벌리고 카나리아를 보고 있었다.
카나리아에게 오늘 있을 논의에 대해서 알린 건 덴버스 후작이었다.
카나리아가 덴버스 후작이 있는 쪽을 보고선 눈웃음을 흘렸다.
순진한 여자는 덴버스 후작이 자신의 편이라도 되는 줄 알고 있었다.
레니샤처럼 모든 것을 내다보고 미리 대비할 수 있는 힘이 카나리아에겐 없었다.
그저 보이는 대로 믿을 뿐.
“카나리아? 이 자리엔 무슨 일로 온 거지?”
렉서스가 나른하게 물었다.
“이 작자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너도 구경을 온 게로구나. 좋다, 카나리아. 이리로 오렴.”
렉서스가 피식 웃으며 카나리아에게 손짓했다.
그 잔혹한 눈빛에 카나리아가 흠칫했다.
렉서스는 무엇 때문인지 요새 날이 곤두서 있었다.
잘못했다가는 별것도 아닌 일로 책이 잡힐 수도 있었다.
카나리아가 애써 생긋 웃으며 사뿐사뿐 걸었다.
렉서스 앞에 선 카나리아가 애교 어린 웃음을 지었다.
“저를 위한 결정을 하신다길래 달려왔지요. 렉서스와 함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요.”
카나리아가 렉서스의 옆에 살포시 앉았다.
“무슨 이야기를? 아, 카나리아 네가 황후가 될 거라는 걸 너도 알고 있는 게냐? 그렇지, 그렇지. 네가 모르면 안 되지.”
렉서스가 카나리아를 끌어당겼다.
그녀의 허리를 안아 무릎 위에 앉힌 렉서스가 카나리아의 목덜미에 숨을 불었다.
이상하게 차갑기만 한 숨결이었다.
렉서스가 카나리아의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 사근사근히 속삭였다.
“너는 무엇을 하고 싶으냐? 말을 해보렴.”
“저, 저는…….”
카나리아가 귀족들의 눈치를 살폈다.
예전에는 정부였을지는 몰라도 이제 그녀는 황후가 될 사람이었다.
이렇게 귀족들 앞에서 무릎에 앉는 건 옳지 않다.
카나리아가 무릎에서 일어나려는 것을 렉서스가 막았다.
“왜 일어나려는 거지? 무엇이 불편한 거냐?”
“사, 사람들이 보고 있어요.”
“그게 무슨 상관이지? 내가 너를 어떻게 다루든 그건 내 마음이다, 카나리아.”
“하지만, 레니샤 황후는 이렇게 무릎에 앉히신 적이 없잖아요.”
카나리아가 울먹이며 속삭였다.
귀족들이 그녀를 경멸 어린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치를 살피느라고 정작 렉서스의 눈치를 살피지 못한 것이 카나리아의 실책이었다.
렉서스가 카나리아의 볼을 움켜쥐고 입을 맞췄다.
질척한 소리가 날 정도로 진득하게 입 안을 훑어대는 짓거리에 카나리아가 파드득 떨었다.
마치 이 자리에서 옷이라도 벗길 것처럼 렉서스가 천박하게 굴었다.
카나리아의 몸을 더듬는 손길도 거침없었다.
카나리아가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저었다.
렉서스가 카나리아의 입술을 콰득 깨물고는 놓아주었다.
“레니샤와 네가 같으냐, 카나리아? 네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었지? 나를 황제로 만들어주었느냐?”
카나리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 저는 아이를…….”
“그래, 아이. 그것 말고 또 무엇을 해줄 수 있느냐. 레니샤를 대신해서 황성의 일을 돌보겠느냐? 아니면 사신들을 대접하겠느냐. 그도 아니면 귀부인들을 초대해 그들과 정사를 논하겠느냐. 네가 무엇을 할 것인지 말을 해봐.”
렉서스가 카나리아의 턱을 아프도록 움켜쥐었다.
“노래나 하라고 앉혀두었더니 헛소리를 하는구나, 카나리아. 네 이름은 카나리아다. 카나리아! 내가 그렇게 이름 붙였지. 그럼 본분에 맞게 노래나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카나리아가 저도 모르게 눈물을 떨어뜨렸다.
창피함과 모욕감, 그리고 분노와 두려움이 한데 섞여 있는 눈물이었다.
카나리아가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렉서스가 어떤 사람인지 잠시 잊었다. 카나리아가 속삭이듯 말했다.
“카나리아가 잘못했어요, 렉서스. 네?”
렉서스가 그제야 웃으며 손을 놓았다.
카나리아의 뺨을 툭툭 치며 렉서스가 말했다.
“그래, 그래야지. 착하게 굴어야 내 카나리아지.”
렉서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결혼식은 치러야지. 간소하게 치른다. 전쟁으로 쓴 돈도 많은데 지금이라도 아껴야 하지 않겠느냐? 의식은 전부 생략하고 결혼식만 거행할 것이다. 아무도 초대하지 않을 것이니 경들도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카나리아가 터진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이 자리엔 무엇을 얻기 위해서 와 있는 거지? 오히려 모든 걸 잃을 판이었다.
카나리아가 렉서스의 팔을 붙들었다.
레니샤처럼 성대한 결혼식을 하고 싶었다.
발을 닦던 하녀도 꿈꾸게 만들었던 그 반짝이는 결혼식이 부러웠다.
그런데 카나리아는 허울만 얻었을 뿐 그 무엇도 가진 게 없었다.
더 비참한 건 렉서스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다는 거다.
그녀는 렉서스에게 무엇도 줄 수 없었다.
아이.
아이뿐이었다.
그것도 렉서스의 아이인지 죽은 그 남자의 아이인지 모를 아이 말이다.
카나리아가 모멸감에 숨죽인 울음을 터뜨렸다.
레니샤처럼 되고 싶었는데 붙잡은 건 허상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