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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이용당해 드리지요 (45/135)


45화. 이용당해 드리지요
2022.09.02.



 


“이족들을, 드디어.”

테리언이 감격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카시우스가 이끌고 있는 기사들 중에는 이족 출신들이 더러 있었다.

물론, 그들이 카시우스의 정체를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족들 중 노예 생활이 지겨운 자들은 도망 나와 검을 잡았다.

그들은 카시우스를 모르지만 카시우스는 그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가까스로 살아남아 도망친 자들은 깊은 숲속에 기거하고 있었다.

카시우스가 노예검투사 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카시우스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준 것은 뒤늦게 노예 검투사로 잡혀온 여자였다.


‘살아남았지요. 잡초처럼 질긴 것이 사람이라지 않습니까? 살아남은 자들은 산과 들을 달려 깊은 숲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그곳에서 숨을 죽이고 짐승처럼 살고 있지요. 그러다가 저 같은 이들이 생긴 겁니다. 이쯤이면 우리를 잊지 않았을까,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는 자들 말입니다.’

여자는 노예 검투사 노릇을 하다가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지는 카시우스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카시우스는 그 여자가 한 말을 잊지 않고 마음속에 새겼다.

그가 기를 쓰고 공을 세워 돌아온 것은 그들을 위함이기도 했으니.


“염원을 이루시게 되었군요, 공작 각하.”

카시우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공작 부인께서는 정말로 모르시는 것이 없나 봅니다. 이족들에 대한 이야기도 알고 계시고. 뒤를 캐보신 걸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네.”

“암요. 세상의 이치를 전부 꿰고 계시는 공작 부인께서 우리의 편인데 무서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저는 공작 부인이 하시는 건 뭐든 좋습니다.”

믿음이 충만한 얼굴로 테리언이 말했다.

그런 테리언을 비난하고 싶어도 카시우스도 별반 다르지 않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면 바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내가 직접 가는 건 안 되겠지?”

카시우스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도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과는 별개로 그에게는 이제 책임이라는 것이 생겼다고.

그만 보고 있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카시우스와 함께 긴 길을 걸어온 수백 명의 기사들이 있었고 레니샤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힐로샤인의 사람들도 있었다.

작은 검은 뱀들이 그의 몸을 놀이 삼아 타고 오를 때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아이들은 천진한 얼굴로 카시우스를 받아들였다.

카시우스는 그들 사이에서 평온을 느꼈다.

카시우스와 같은 힘을 가진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종종 스스로를 잃고 괴물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밤잠 설칠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보니 알겠다.

고작 그런 일로 스스로를 잃어버릴 일은 없다는 것을.

아이들의 웃는 얼굴에서 배운 교훈이었다.

그 애들은 어떤 고민도 없이 행복해 보였다.

같은 힘을 가진 이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 그들의 힘은 그저 일반적인 것이 되는 거였다.

더 이상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테리언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건 좋지 않습니다. 이제야 힐로샤인의 영주가 되시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도 안 좋고…… 그리고 레니샤 부인도 있지 않습니까. 부인을 홀로 두시려고요? 최소한 한 달은 걸릴 여정입니다. 혹여 문제가 생겼을 때 부인을 지킬 수 있는 건 각하뿐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자네 말이 맞아. 그들은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도 인지하지 못할 거야.”

“언젠가 그곳에서 나올 꿈을 꾸었지만, 이루어질 거라고 믿진 않았을 테니까요.”

테리언과 카시우스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족들에게 먹구름이 드리운 시간은 너무 길었다.

지금의 불행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이족들만 쓰는 연락책이 있을 겁니다. 한번 추적해보겠습니다.”

카시우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들 중에 이족 출신인 자들을 은밀하게 불러모으게.”

“네, 각하!”

카시우스가 테리언과 심각한 이야기를 마쳤을 때였다.

똑똑.

임시로 꾸민 집무실을 두드리는 소리에 카시우스가 얼굴을 굳혔다.

누군가 이야기를 엿들었을지도 모른다.

이족들을 데려올 생각이기는 하지만, 어떻게 그 사실을 알릴지는 카시우스가 결정할 일이었다.


“누구냐.”

낮게 깔린 목소리에 밖의 인기척이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이사벨라예요.”

작은 목소리에 카시우스가 경계를 풀었다.

테리언도 안도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테리언은 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머리통들을 마주해야 했다.

이사벨라뿐만이 아니었다.

어제 카시우스를 올라탔던 아이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이사벨라 아가씨?”

“아. 얘들이 어제 고모부하고 재밌게 놀았대서요! 같이 놀고 싶다고 해서 데리고 왔어요.”

이사벨라가 환하게 웃었다.

이사벨라는 일반적인 귀족 아이들과는 조금 달랐다.

죽을 고비를 넘어 와서 그런 건지, 혹은 기사들하고 어울린 시간이 길어서 그런 건지.

신분에 따른 차별 의식이나 격식이 없는 편이었다.

이사벨라의 목소리를 들은 카시우스가 고개를 내밀었다.


“나를 찾는 거니?”

“고모부!”

이사벨라가 카시우스에게 안겨들었다.

평소보다 더 친근하게 구는 모양새에 카시우스가 놀랐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표출하기 이전에 이사벨라의 등을 손으로 덮었다.


“애들이 어제 고모부랑 재밌게 놀았다고 해서 데리고 왔어요. 얘들이 또 고모부랑 놀고 싶대요! 고모부가 어디 있는지 찾길래 이사벨라가 안다고 했어요.”

이사벨라의 커다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아이들 뒤에서 이사벨라를 돌보는 유모가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질투요, 질투.’

유모가 입을 벙긋거렸다.


“아.”

카시우스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사벨라는 카시우스가 어제 자신만 빼고 아이들과 놀아준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이사벨라는 부당한 일로 부모와 헤어져 카시우스, 레니샤와 지내고 있었다.

기댈 곳이 그들뿐인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카시우스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이사벨라가 조숙하다고는 하나 아직은 어리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랬구나, 이사벨라.”

“네! 이사벨라가 고모부는 바쁘다고 했는데도 얘들이 졸랐어요.”

“어제처럼 놀아요!”

뒤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아이 하나가 외쳤다.


“공작님처럼 큰 뱀은 처음 봤어요!”

나 사람이야.

카시우스가 튀어나오려던 말을 삼켰다.

아이들의 순수함을 앞에 두고 도저히 사실 관계를 따질 수가 없었다.


“정말 컸는데. 우리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큰지 알았는데 아니었어.”

“그러니까. 나도 우리 아빠가 제일 큰 줄 알았다?”

“나도, 나도.”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카시우스의 거대한 덩치가 아이들에게 충격적이었던 모양이었다.

카시우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다들, 나를 크게…… 봐줘서 고맙구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 아빠의 본체 크기라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퍽 중요한 문제였나 보다.

아이들이 심각한 얼굴로 논쟁을 시작했다.


“아냐! 우리 아빠가 제일 커.”

“거짓말.”

“우리 아빠는 뱀이 둘이야!”

뱀이 둘?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카시우스와 테리언, 그레이가 시선을 주고받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우리 아빠는 몸에 뱀이 붙어 있어!”

“어? 우리 아빠도!!”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를 주의 깊게 듣고 있던 카시우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건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테리언과 그레이도 마찬가지였다.

카시우스가 조용히 이사벨라를 끌어당겨 귀를 막았다.


 


“왜요?”

카시우스가 고개를 작게 저었다.

아이들 앞에서는 찬물도 마셔서는 안 된다는 말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

카시우스가 이사벨라와 아이들에게 모든 정신을 털리고 있을 무렵.

레니샤는 힐로샤인 사람들을 이끄는 ‘솔레인’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바깥 공사가 마무리될 때까지는 몇 달이 걸릴 거예요.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우리가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어요.”

“…….”

“성을 보수하고 힐로샤인의 위상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힐로샤인의 가치는 거기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솔레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 앞에서 레니샤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미소 지었다.


“기사들이 입을 무기와 갑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질 좋은 금속이 필요하죠. 그리고 이 힐로샤인에는 그보다 더 좋은 것들이 널려 있어요. 검은 뱀의 비늘이죠.”

힐로샤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검은 뱀의 힘을 이은 자들이었다.

그들의 힘이 지금까지 보존되어오고 있는 것은 땅에 묻혀 있는 ‘검은 뱀의 사체’ 덕분이었다.

세상이 열릴 때 세 마리의 뱀 신이 등장했다.

대지를 다스리던 붉은 뱀 신과 바다를 다스리던 하얀 뱀 신, 마지막으로 어둠을 다스리던 검은 뱀이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세 신은 자취를 감추었고 붉은 뱀의 힘은 거대한 불꽃으로 남았다.

그 힘을 취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이겨내야 했다.

많은 도전자들이 목숨을 잃었고 카시우스가 그 힘의 주인이 되었다.

두 번째로 하얀 뱀의 힘은 바다에 녹아들었다.

끝없이 순환하는 바닷물을 따라 하얀 뱀의 힘은 전 대륙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마지막으로 검은 뱀의 사체는 힐로샤인 땅에 묻혔다.

검은 뱀의 힘은 힐로샤인 사람들을 통해 이어져 오고 있었다.

그들은 힐로샤인에서 태어나 힐로샤인의 땅으로 돌아간다.

땅에 묻힌 사체는 다이아몬드보다 단단한 금속으로 변모했다.

게다가 검은 뱀의 힘을 가진 힐로샤인의 사람들은 평범한 이들에 비해서 월등한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 명의 힐로샤인 기사가 수십의 일반 기사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그것이 힐로샤인이 가진 저력이었다.

레니샤는 힐로샤인을 손에 넣었다.

그것으로 레니샤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기사들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간 힐로샤인은 숨을 죽이고 자신을 감추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붉은 뱀의 기사가 나타났죠. 카시우스가 로테라 공작이 되었고 세상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힐로샤인도 숨어 있을 이유가 없게 된 겁니다.”

“……레니샤 님께서는 힐로샤인을 이용하려고 하시는군요.”

솔레인이 낡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요한 얼굴은 마치 잔잔한 호수와 같았다.


“그게 나쁜가요?”

레니샤가 차갑고 명료한 눈동자로 솔레인을 응시했다.

100년을 넘게 산 노인이었다.

솔레인은 레니샤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는 이였다.

힐로샤인은 로테라를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솔레인의 말을 우선시한다.

솔레인의 역할이 중요했다.


“……힐로샤인은 검은 뱀의 힘으로 인해서 풀 한 포기 쉽게 나지 않지요. 여기에 나는 거라고는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질긴 것들뿐이에요. 로테라를 잃었을 때 어땠나요? 힐로샤인은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죠.”

“…….”

“나는 힐로샤인을 이용할 거예요. 힐로샤인의 힘으로 렉서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겁니다. 그 대신.”

레니샤가 마침표를 찍었다.


“나도 이용당해 드리지요.”

절대로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단호함이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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