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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더 좋은 걸 주고 싶은 마음 (44/135)


44화. 더 좋은 걸 주고 싶은 마음
2022.08.30.



 
거대한 붉은 뱀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내 비밀을 먼저 보여주는 거다. 그게 너희의 의심을 거둘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 너희만 비밀을 들킨 게 아니라는 말이야. 사람들은 내가 뱀의 힘을 어떻게 쓰는지 알지 못해.]

카시우스 주변으로 기사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카시우스를 등 뒤에 두고 사람들을 견제하고 있었다.

레니샤 또한 이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어 놀란 얼굴로 카시우스를 응시했다.


[이것이 나와의 전투에서 적이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던 이유다.]

카시우스의 붉은 혀가 슈르륵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뱀의 몸체에 금색으로 일렬로 점이 찍혀 있었다.

징그럽다기보다는 성스러운 모습이었다.

정말로 피를 연상시킬 정도로 붉은빛의 비늘이었다.

석양이 그에 신비롭게 어우러졌다.

카시우스는 하늘에 녹아든 태양과 함께 빛이 났다.

붉은 비늘에 둘러싸인 금안은 금을 녹여 만든 것처럼 찬란했다.

아름다웠다.

레니샤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카시우스…….”

레니샤의 부름에 카시우스가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레니샤의 앞에서는 항상 그랬듯이 느릿하게 움직이며 그가 거대한 얼굴을 레니샤의 가까이에 가져다 댔다.

레니샤가 손을 들어 카시우스의 콧잔등을 쓰다듬었다.

붉은 뱀이 애교를 부리듯이 레니샤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레니샤.]

카시우스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하던 이들도 경계를 거두었다.


“괜찮아요? 정말로?”

제 비늘을 내보였던 아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앞으로 튀어나왔다.

카시우스가 아이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와. 그거 나도 할 수 있어요.”

아이도 금세 작고 귀여운 검은 뱀이 되었다.

신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붉은 뱀에 비하면 하찮을 정도로 작았다.

검은 뱀이 작은 삼각형 머리를 치켜들고는 꾸물거리며 붉은 뱀의 몸체에 올라탔다.


[꺄아!]

아이가 즐거운 비명을 터뜨렸다.

그것을 보곤 용기를 얻은 어린아이들이 튀어나왔다.


“랜돌!”

“아이, 나도! 엄마도 같이 놀고 싶어서 그러지?”

부모의 만류를 뿌리친 아이가 달려 나와 뱀으로 변했다.

귀엽고 작은 뱀들이 붉은 뱀의 몸체 위에 올라탔다.

아이들이 맑은 웃음을 터뜨리는 것을 들으며 레니샤도 웃음을 머금었다.

힐로샤인에 살고 있는 이들은 다른 이들과는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당하고 상처받은 이들이었다.

그들은 몇천 년 동안 힐로샤인에서 나고 자라고, 마지막을 맞이했다.

그들의 유해는 땅에 묻혀 지금의 힐로샤인을 이룩해냈다.

그들을 힐로샤인에 두고 여태까지 지켜온 것이 로테라였다.

로테라의 선조는 힐로샤인 사람들에게 거부감 대신에 연민을 느꼈다.

로테라의 선조는 모든 백성들이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고 힐로샤인 사람들을 철저히 감춰두었다.

그것이 로테라 가문에만 내려오는 힐로샤인의 비밀이었다.

아이들에게 한참을 시달리던 카시우스가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는 카시우스에게 아이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달려들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저들과 같은 모습을 한 카시우스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리고 아이들의 순수함은 어른들의 경계를 풀어주었다.


“……동족이시라면 믿을 만하지요.”

“힐로샤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던 카시우스와 레니샤의 눈이 마주쳤다.

레니샤가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아까 카시우스의 대처는 신속하고 효과적이었다.

만약, 카시우스가 그런 결정을 하지 않았다면 힐로샤인과 카시우스 사이를 중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족들하고의 문제만 해결하면 되겠군.’

이족들 또한 힐로샤인처럼 골목길에 내몰린 사람들이었다.

같은 처지의 사람을 공격할 리가 없지.

레니샤는 조금은 낙관적인 희망을 품었다.

카시우스를 만난 이후로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풀리는 것 같았다.


‘모든 게 잘될 것 같아.’

레니샤가 카시우스에게 다가갔다.

사람들에게서 풀려난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응시했다.


“아까부터 숨기고 있는 거, 이제 줄 때가 된 것 같은데요?”

“이건…….”

언제 알아차린 거지? 절대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카시우스가 그 말을 하지 못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레니샤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몽환적인 모습이 카시우스의 눈을 파고들었다.

카시우스가 홀린 것처럼 숨겨두고 있었던 꽃을 내밀었다.

레니샤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한 꽃다발이었다.

숨이 죽어 고개를 숙인 꽃다발을 레니샤가 받아들었다.


“결혼 선물이에요?”

“…….”

“마음에 들어요.”

“다음에 더 좋은 걸…….”

카시우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고작 이 꽃을 받고 저렇게 웃고 있는 것을 보니 더 좋은 것을 해주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것이다.

레니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이게 마음에 든다고 말했잖아요. 여기에 담긴 당신의 마음, 잘 받았어요.”

왠지 카시우스가 귀엽게 느껴져 레니샤가 손을 뻗었다.

그녀가 한참 위에 있는 카시우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바람에 까치발을 한 레니샤의 몸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카시우스가 몸을 굽힘과 동시에 레니샤의 허리를 붙들었다.


“착하다, 우리 강아지.”

레니샤의 손길을 음미하던 카시우스가 눈을 홉떴다.

그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흥미로운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파괴적인 레니샤가 또 한 건 올렸다. 카시우스가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미치겠군.”

이 작은 여자가 사람을 휘두르려고 하는 통에 미쳐버리겠다.

***

렉서스가 말을 몰아 제도를 둘러보았다.

익숙한 곳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낯설게 느껴진다.

지난 며칠 동안 한숨도 이루지 못했다.

약을 씹어 삼키고 나서야 간신히 잠들 수 있었고 그것마저도 짧은 잠으로 끝났다.

눈을 뜨면 차가운 새벽 공기가 곳곳에 내려앉아 있었다.

그 덕분인지 이불을 아무리 끌어모아 덮어도 추웠다.


“빌어먹을.”

렉서스가 욕설을 연신 중얼거렸다.

어느 곳도 편안하지 않았다.

그를 수행하는 이들도 전부 그대로인데 왜 이렇게 생경하기만 한지.

변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레니샤가 제도에 없다는 것.

레니샤는 기어이 그 먼 길을 떠났다.

레니샤가 렉서스를 찾아와 내쫓지만 말아달라고 빌었다면 못 이기는 척 들어주었을 것이다.

항상 제도에서 고생 한번 모르고 살았던 여자가 어딜 간다고.

렉서스가 떨리는 손으로 눈을 가렸다.

레니샤가 그 새끼하고 뒤엉키는 상상을 자꾸만 하게 된다.

건방진 노예 기사 말이다.

비가 내리던 가운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입을 맞추던 그들을 잊을 수가 없었다.


‘레니샤, 네가 나한테 어떻게…….’

렉서스가 얼굴을 훑어 내렸다.

그날 이후로 같은 상상을 반복했다.

렉서스의 상상 속에서 카시우스와 레니샤는 입을 맞추고 서로를 안았다.

그러고는 렉서스를 보고는 비죽이 웃는 것이다.

몸속의 피가 전부 빨려나가는 기분이었다. 질투가 들끓었다.


 


“카시우스, 카시우스.”

렉서스가 입을 벌려 중얼거렸다.

그 말에는 악의가 가득했다.

레니샤는 결국 더러운 노예 기사를 선택했고 지금쯤이면 힐로샤인에 도달했을 것이다.


‘언제까지 뻗대는지 두고 보지.’

힐로샤인의 척박함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곧 돌아오게 해달라고 빌게 될 거다, 레니샤.’

렉서스는 확신했다.

수행인들은 렉서스가 무슨 짓을 할지 두려워 몸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는 오늘따라 더 미친 것처럼 보였다.


“이제 그만 돌아간다.”

정신을 차린 렉서스가 뇌까렸다.

***

힐로샤인에서의 첫날밤이 저물었다.

분명 제대로 된 성이 아니었다.

온 곳이 무너져 있었기에 비를 피하고 바람을 피한 것을 감사해야 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레니샤는 이곳처럼 편한 곳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어젯밤 한 번도 깨지 않고 푹 잔 것이다.


“잘 잤어요, 카시우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얼굴에 레니샤가 인사를 건넸다.

카시우스도 어제는 피곤했는지 금세 잠들었었다.

카시우스가 눈을 깜빡이다가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일찍 일어났군요.”

카시우스가 빠르게 목을 가다듬었다.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요. 그리고 카시우스도 해야 할 일이 있지요.”

카시우스가 의아한 눈으로 레니샤를 응시했다.


“살아남은 이족들을 모아와야죠. 그것이 카시우스의 염원 아니었나요?”

“……그래도 됩니까?”

“무슨 뜻이에요?”

“지금 힐로샤인 사람들은 우리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벅차 보였습니다. 그런 상황에 이족들도 더해지게 되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니 빠르게 받아들이는 게 나아요.”

레니샤가 조금은 싸늘하게 말했다.

따뜻한 아침 햇살에는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우리는 나아가야 할 길이 멀어요. 뒤처지는 누군가를 기다려줄 시간도 없지요. 카시우스, 나는 힐로샤인에 머물기 위해서 여기에 온 게 아니에요. 나는 힐로샤인을 발판 삼아 렉서스를 끌어내리기 위해서 여기에 온 거예요.”

“그렇습니까.”

카시우스가 잔잔한 목소리로 물었다.


“카시우스. 모든 건 순리대로 될 거예요. 힐로샤인과 이족은 절대로 반목할 수 없어요.”

“어째서입니까?”

“공통된 적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당신과 내가 이렇게 손을 잡은 것처럼, 그들도 그럴 거예요.”

레니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까의 싸늘함은 가신 얼굴이었다.


“레니샤가 바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다만.”

카시우스가 잠시 망설였다.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며칠간 카시우스를 피하기는 했지만 떠나온 이후로는 그에게 곁을 내어주지 않았던가.

새벽바람을 막기 위해서 카시우스가 인간 방패를 자처했을 때도 레니샤는 그의 품에 기대 쉬었었다.

그날의 숨결이 아직도 가슴팍에 묻어 있는 듯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손등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아요, 레니샤.”

“……약속할게요.”

이런 말을 들은 건 오랜만이었다. 레니샤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카시우스는 인간적이었다.

그리고 그는 레니샤의 틈을 자꾸만 파고들었다.

레니샤가 뜨거운 낙인이 남은 손등을 다른 손으로 덮었다.

그렇게 하면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고 이 교감과 감정을 묻어둘 수 있을 것 같았다.

카시우스는 항상 그렇듯 레니샤를 올곧고 뜨거운 눈으로 응시했다.


“당신이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카시우스가 덧붙인 말에 레니샤가 입술을 깨물었다.

레니샤에게 저런 말을 해주는 것은 가족뿐이라 여겼었는데.

카시우스가 어느새 레니샤의 가족이 되어 있었다.

레니샤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니샤도 똑같은 마음을 카시우스에게 되돌려주었다.


“카시우스도, 다치지 말아요.”

어떤 상황에서든.

언젠지 모르게 당신이, 내게 중요해져 버렸거든.

차마 나오지 못한 그 말은 꾹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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