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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참을 수 없는 (40/135)


40화. 참을 수 없는
2022.08.16.



 
카시우스는 레니샤가 정말로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샴디르의 복장이라는 게 이렇게까지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하얗게 드러난 배와 그 위를 드리운 보석들, 움직일 때마다 짤랑짤랑 소리를 내는 발찌까지.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위에도 보석을 드리웠고 하얀색 베일로 눈 아래를 덮었다.


“모자 대신에 이런 것도 괜찮다고 해서. 어떤가요, 카시우스?”

레니샤가 천천히 돌았다.

속이 훤히 비치는 소매의 천이 함께 나풀거리며 움직였다.

레니샤의 모든 것들이 카시우스를 현혹시키기 위한 것인 듯했다.


“……잘 어울립니다.”

카시우스가 목 메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얼굴을 문지르는 손길이 다소 거칠었다.

이족으로 살 때도, 노예 검투사였을 때도, 마지막으로 제국의 영웅이 되어 돌아왔을 때도.

대부분 평정심을 잃은 적이 없었다.

무언가를 향한 강렬한 열망을 품은 적은 있으나, 내면이 흔들린 적은 없었다.

그것이 카시우스의 성취가 빠를 수 있었던 이유였다.


‘이상해.’

그런데 레니샤를 보기만 하면 평정심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만 같다.

지금도 그랬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가슴이 요동쳤다.


“얼른 가요, 카시우스. 너무 늦으면 구경거리가 남지 않을지도 몰라.”

린데이는 대체 어디서 저런 옷을 구해온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카시우스가 린데이를 힐끗 노려보고는 레니샤를 쫓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 뒤에서 린데이가 매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저런 옷을…… 레니샤 님한테. 이게 맞는 걸까요?”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제인이 물었다.

제인은 저 옷을 구하기 위해서 직접 시장 안에서 발품을 팔고 다녔었던 시녀였다.


“그럼. 공작 각하하고 같이 나가는 길 아니시냐. 게다가 부인께서도 별말씀 없으셨고.”

오히려 레니샤는 재밌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레니샤는 다른 나라의 문화를 흥미롭게 여겼고 직접 체험해보는 것도 즐기는 편이었다.

샴디르의 의상도 그런 가벼운 의미로 받아들인 듯했다.

물론, 순발력 좋은 린데이가 이런 옷밖에 구하지 못했다고 둘러댄 것도 있었다.

레니샤의 의상뿐만 아니라 카시우스가 입은 것도 적당한 노출을 동반하고 있었다.

팔뚝이 훤히 드러나고 팔을 들어 올릴 때면 배가 슬쩍 드러나는 디자인이었다.

다행히 날이 날이다 보니 그다지 춥지 않았다.

린데이를 비롯한 시녀들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두 분의 사이가 돈독해지셔야 해. 카시우스 공작은 황제하고는 다르지. 부인을 존중하고 경애하는 게 눈에 보이지 않니? 나는 부인께서 이제 그만 행복해지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든.”

제인이 불안한 얼굴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괜찮을 테니 걱정하지 마렴. 제인, 가서 테시와 루나가 짐을 싸는 것을 도와주렴.”

“네!”

제인이 새로운 임무를 받고는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레니샤는 귀족 출신의 시녀들은 린데이를 제외하고는 전부 저택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들에게 투리엘을 도와 중앙 사교계를 감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린데이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귀족들입니다, 부인. 그들이 배신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하십니까? 그들은 얼마든지 저들이 바라는 이익을 쫓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배신할 자라면 나를 따라 힐로샤인으로 간다고 해도 배신하겠지. 그렇지 않은 자들은 여기서도 그러지 않을 것이네. 나는 그들의 도움이 필요해. 물론, 필요하지. 그러나, 그들도 내가 필요한지를 실험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나.’

지난 이 주 동안 레니샤는 부지런히 자신의 사람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귀족 출신의 대부분은 레니샤의 뜻을 받아들였다.

레니샤와 완전히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임무를 받은 것이라는 데에 만족하는 듯했다.

린데이가 불안한 것은 오히려 그쪽이었다.

레니샤는 차가운 얼음 같지만 그 속에는 여리디여린 속을 품고 있었다.

카시우스는 그런 레니샤를 품어줄 수 있을 정도로 뜨거운 사람이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보는 눈빛은 누구라도 알아차릴 수밖에 없으리라.

린데이가 한숨을 내쉬고는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떠나기 전에 투리엘을 만나 한 번 더 그들에 대한 감시를 당부할 생각이었다.


‘레니샤 님이 상처받는 건 안 돼.’

지금까지도 충분했다.

레니샤는 그간 자신의 사람들을 온 힘을 다해 지켜왔다.

그렇다면 이번엔 그들이 레니샤를 지켜줄 차례였다.

***

레니샤가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레니샤. 큼. 조금 날이 춥지 않습니까?”

“딱 좋다고 생각하는데, 카시우스는 춥나요?”

레니샤가 생긋 웃었다.


“그렇다면 내 숄을 빌려줄게요.”

레니샤가 내민 숄은 얇아서 안이 다 비치는 재질이었다.

여름 냄새가 나는 연푸른 비단이었다.

카시우스가 이를 악물고는 그 숄로 레니샤의 어깨를 감쌌다.

그나마 이거라도 레니샤를 가리고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지금 카시우스는 전쟁터에 있을 때처럼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남자가 레니샤를 보는 것 같으면 모자와 베일 사이로 드러난 금안을 번뜩이며 그를 쫓아내는 것이다.


“후우.”

“카시우스, 저쪽에 신기한 구경거리가 있는 것 같군요. 얼른 가봐요.”

레니샤는 그런 카시우스의 마음을 진정으로 모르는 것인지 한층 활기차 보였다.

카시우스가 주인을 지키는 도사견처럼 눈을 번뜩이며 걸음을 옮겼다.


“후후. 이거 정말 맛있겠는데요? 사람들이 이렇게 줄을 서 있는 덴 이유가 있었을 거야.”

레니샤가 드물게 반짝이는 눈으로 카시우스를 응시했다.

항상 차분하던 레니샤가 지금은 진실로 자유로워 보였다.

황후라는 작위와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는 짐을 벗어던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무도 레니샤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녀를 샴디르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

분명 귀족들도 바깥에 나와 구경을 하고 있을 텐데도 말이다.

레니샤가 웃는 모습에 경계심을 곤두세우고 있던 카시우스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줄을 서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싶은 겁니까? 부인께서 직접?”

“이런 거,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레니샤가 길게 선 줄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 줄에는 귀족 영애들이 한데 모여 깔깔거리며 서 있었다.

그렇게 친구들하고 놀러 나온 귀족들도 몇 보였다.


“한 번도, 말입니까?”

레니샤의 시선이 짙어지는 것을 알아차린 카시우스가 물었다.


“어릴 때는 저택에서 나온 적이 없었어요. 로테라의 딸로 태어나 나는 짊어져야 할 것들이 많았거든요. 로테라의 아이를 노리는 이들도 한둘이 아니었고. 그들의 노고를 덜어주기 위해서라도 나는 밖을 돌아다니면 안 됐어요.”

“그리고?”

“커서는 결혼을 했죠.”

레니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는 곳은 세 곳뿐이군요. 로테라의 타운하우스와 영지, 황성.”

레니샤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한 마디 더 덧붙였다.


“그리고 당신 저택까지.”

카시우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레니샤는 본의 아니게 새장 속 새처럼 살아왔던 것이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어째서 레니샤가 지금 들떠 있는지 명확하게 깨달은 것이다.

이제 보니 레니샤는 알을 깨고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나온 병아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항상 강인해 보였던 레니샤답지 않은 일이다 싶었는데, 그런 속사정이 있었던 거다.


“가서 줄을 서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읍시다. 그리고 이 시장을 다 둘러볼 때까지는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는 겁니다.”

“좋아요.”

레니샤가 자유로운 얼굴로 웃었다.

두 사람이 줄을 섰다.

눈에 띄는 카시우스의 머리가 모자 속에 가려진 덕에 그들은 눈길을 끌지 않을 수 있었다.

게다가 어두운 저녁 하늘이 두 사람을 가려주었다.

레니샤와 카시우스가 가장 마지막에 줄을 섰을 때였다.


“꺄아!”

“이런, 비가 오잖아!”

“그래도 이 정도면 맞을 만하지. 아이스크림을 포기할 거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보슬보슬한 비였다.

이대로 계속 서 있으면 꿉꿉하게 몸이 젖을 테지만, 그럼에도 맞을 만한 비였다.


“아.”

레니샤가 손바닥에 비를 받았다.

톡, 톡 손을 치고 흩어지는 물방울들은 그렇게 차갑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비를 맞는 것도 처음이었다.

레니샤는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너무 많았다.

로테라의 아이로 태어나서, 황후가 되어서.

이유는 거창했고 그 무게는 고스란히 그녀의 어깨에 얹혀 있었다.

레니샤는 그 짐을 벗지 못한 채로 정도를 걸어왔다.

레니샤는 위엄 있는 황후였고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이건 레니샤 인생에서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레니샤가 멍하니 하늘을 응시했다.


‘이런 건 기대하지 않았는데.’

자유로웠다. 레니샤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세상이 그녀의 주변으로 천천히 흘러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비가 멎었다.

레니샤가 볼을 때리던 물줄기가 사라진 것을 알아채고는 눈을 떴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둥글고 아기자기한 우산이 씌어져 있었다.

카시우스가 어느새 우산을 사온 것이다.

그 작은 우산 아래에 덩치가 산만 한 카시우스와 작은 레니샤가 마주 보고 섰다.


“우산이 참 카시우스를 닮았네요.”

“이 우산이, 나를 닮았다는 겁니까?”

카시우스가 경악했다.

갑작스럽게 내린 비에 우산을 사는 이들이 급작스럽게 늘어 간신히 구해온 우산이었다.

오늘 돌아가면 이사벨라의 몫으로 남겨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레니샤는 이 우산이 카시우스를 닮았단다.


“네. 귀엽잖아요.”

레니샤가 우산 끝을 만지작거렸다.

분홍빛 눈동자가 물기에 젖은 것처럼 보였다.

작은 우산 속에 알 수 없는 열기가 피어올랐다.

카시우스는 망설였다.


‘부부가 되세요, 그게 먼저입니다.’

투리엘이 했던 말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정말 예쁜 비예요, 카시우스. 이런 비라면 내내 맞아줄 수도 있을 듯한데.”

오늘따라 예쁘게, 자주 웃는 레니샤를 앞에 두고 카시우스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비에 젖어 옅은 물비린내와 함께 레니샤 특유의 야생 장미의 향이 올라왔다.

카시우스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카시우스가 우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카시우스, 고마워요.”

“…….”

“당신 덕에 나는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해보네요.”

왜 그렇게 스스로를 억압하고 가둬두려고만 했는지.

그녀를 그렇게 몰아붙였던 렉서스를 향한 분노와 원망이 일시에 치솟았다가 사라졌다.

지금 이 순간을 그런 인간으로 인해서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때 카시우스가 고개를 숙였다.

레니샤를 향해 가까워지는 그림자에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우산이 그들을 다른 이들로부터 가려주었다.

작디작은 우산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낸 것이다.

카시우스가 거기에 숨어서 레니샤에게 입을 맞췄다.


 
가볍게 맞닿은 입술은 뜨거웠고 동시에 축축했다.

레니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표정을 일그러뜨리고는 입술을 벌렸다.

누군가의 시선이 닿아 떨어질 줄 모른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그렇게 한참을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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