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부부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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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부부가 되세요
2022.08.12.
투리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각하. 아무것도 없이 제게 도움만 얻으시려는 건가요? 저는 대가 없이 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만.”
“바라는 대가가 있나?”
투리엘이 미지근하게 웃었다.
그녀는 레니샤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카시우스는 레니샤를 위해서 자문을 구하러 온 사람이고.
이런 별것도 아닌 질문에 답을 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투리엘이 바라는 대가는 단 하나.
“그 마음을 변치 마세요.”
“그게 무슨……?”
“레니샤 님을 위해서 한걸음에 여기까지 찾아오신 그 정성을 잊지 마세요. 그 마음에 담으신 레니샤 님을 향한 감정을 평생 간직하시는 겁니다.”
카시우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장사치라기에는 바라는 대가가 터무니없을 정도로 작군.”
“영원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생각보다 어렵고 힘든 일이지요. 제가 바라는 건 가장 큰 대가입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야.”
카시우스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팔짱을 낀 채 느슨하게 풀려 있던 그의 근육들이 느리게 움직였다.
워낙 체구가 큰 사람이라 조금 움직이는 것도 크게 느껴진다.
투리엘이 눈을 가늘게 뜨고 카시우스를 응시했다.
보통 기사들을 앞에 두고 있으면 위협을 느끼길 마련이었다.
그건 기사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체구 차이에서 오는 본능적인 감각이었다.
카시우스는 그것을 아는지 걸을 때를 제외하고는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부드러운 성정이 몸에 배여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보다는 타인을 먼저 볼 줄 아는 사람.
“내 말의 뜻은 나 또한, 그 영원을 바라고 있다는 거였어. 레니샤와의 영원을 바라네. 그건 내가 바라는 대가지 자네가 바랄 대가가 아니야. 그러니 자네의 대가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하찮은 게 맞네.”
그것이 카시우스의 진심이었다.
카시우스는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 내리지는 못했다.
그저 레니샤를 보면 애틋하고 지켜주고 싶다.
레니샤가 웃었으면 좋겠고 그녀의 인생에 더 이상 아픈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옆에 카시우스가 있기를.
그런 바람을 품고 있었다.
카시우스의 바람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그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카시우스는 첫눈에 알아보았던 것을 기억한다.
레니샤와의 인연이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임을.
카시우스의 말에 투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제 대가는 하찮은 것이 맞네요. 하지만, 제가 바랄 것들은 전부 레니샤 님을 위한 것이니 괜찮습니다.”
약한 질투심이 일었다.
레니샤를 향한 마음은 투리엘의 것이 가장 깊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투리엘을 제치려는 인물이 나타난 것이다.
투리엘이 제 속에 피어오른 불만을 꾹 눌러 삼켰다.
“그럼 이제 말을 해보게.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카시우스가 다시금 심각하게 물었다.
“내가 사실 이성을 만나본 일이 없어서 서툴러.”
“여자를 부른 일도 없으시다는……?”
카시우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종종 있는 일이라고 들었지만 나랑은 관계가 없는 일이네.”
딱 잘라 대답한 카시우스가 장난기 어린 투리엘을 차갑게 응시했다.
이상하게 투리엘하고 있으면 말려드는 느낌이다.
투리엘은 레니샤와 다른 의미로 위험한 여자였다.
“그렇군요.”
거의 수도승처럼 살았네. 투리엘이 혀를 내둘렀다.
“방법을 말하게.”
더 이상 투리엘과 긴 대화를 나누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린 카시우스가 딱딱하게 재촉했다.
“레니샤 님과 식사를 하십시오. 대화를 많이 나누시고 모든 걸 함께하세요. 손을 잡고 정원도 거닐어 보고 예쁜 것도 보고. 좋은 일을 함께하세요.”
“그건…….”
카시우스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마음을 먼저 만족시켜야 몸도 따라오는 법입니다. 레니샤 님을 폭풍처럼 흔드세요.”
“흔들라고?”
“한 번에 무너질 정도로 흔드시는 겁니다. 레니샤 님이 아차 하실 사이에 모든 게 끝나 있도록. 레니샤 님의 마음을 잡으세요.”
“……그건 레니샤가 바라지 않을 텐데?”
“바라지 않는다고 해서 안 하실 건가요?”
투리엘이 매끄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다 레니샤 님께서 공작 각하를 필요치 않게 되실 수도 있습니다.”
카시우스가 눈썹을 찌푸렸다. 필요로 하지 않는다?
“레니샤 님이 각하께 기댈 수 있게 해주세요. 그분의 버팀목이 되어달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흔드셨으면 그분을 지탱해주시면 되는 겁니다. 그분의 뒤를 받쳐주시고 앞에서 이끌어주시면 됩니다.”
투리엘은 외롭게 사는 레니샤가 걱정이었다.
황성에서도 그랬다.
레니샤는 렉서스의 핍박 속에서도 힘들다는 말 한 마디 해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도움을 요청하는 법을 모르는 것인지 모든 걸 자신이 해결하려고 들었다.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카시우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족이 되라는 거군.”
“맞습니다. 그게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거예요. 각하.”
카시우스가 깨달음을 얻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부가 되세요. 그게 먼저입니다.”
카시우스는 그게 무슨 말인지 완벽하게 이해했다.
청소년기 때부터 지금까지, 전쟁터에서 로테라 공작 부부의 뒤를 쫓으며 자라났다.
카시우스는 그들이 어떠했는지 전부 낱낱이 기억하고 있었다.
카시우스뿐만이 아닐 것이다.
로테라 공작 부부가 키운 어린 기사들은 한둘이 아니었으니.
카시우스는 그들이 어떻게 사랑을 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었는지 알고 있었다.
“좋은 이야기였어. 고맙네.”
***
레니샤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카시우스가 이상했다.
출발을 앞두고 설레기라도 하는 건가?
아니면, 힐로샤인으로 갈 생각을 하니 두려워서?
카시우스에게는 책임져야 할 이족이 있었다.
카시우스의 출신에 대해서는 레니샤도 알고 있었다.
로테라 공작이 카시우스를 감춘 방법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러니 역으로 벗겨내는 것도 가능했다.
‘문제가 생긴 건가?’
카시우스는 한 시간째 레니샤를 말없이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노려보는 건지 아니면 할 말을 못 하고 있는 건지.
레니샤가 결국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샴디르의 왕자는 만났나요?”
“내일 만나기로 했습니다.”
레니샤가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카시우스가 대답했다.
“메테오 왕자와의 약속은 잡았고 내일 저녁 만찬을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다행히 떠나기 전에 그를 만날 수 있게 되었네요. 샴디르의 왕자가 여태 떠나지 않고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예요. 나는 그 이유가 나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하.”
카시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한 것치고 무척 담백한 반응이었다.
“……할 말이 있어요?”
시선을 거두지 않는 카시우스에게 레니샤가 물었다.
카시우스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오늘 저녁 식사를 하고 함께 외출을 할 수 있습니까?”
카시우스가 진지하게 물었다.
“외출이라면. 뭘 해야 할 게 있나요?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지.”
카시우스가 이런 요청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간 카시우스는 레니샤가 시키는 대로 움직여왔다.
맹목적으로, 말 잘 듣는 군견처럼.
“오늘 시장이 열린다고 합니다. 이번엔 특히 수입되어 들어오는 것들이 많아 구경할 것들이 많다더군요.”
“그래서요?”
레니샤가 고개를 갸웃했다.
“같이 구경을…… 가자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카시우스는 시종일관 진지했다.
이런 말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떤 말을, 어떻게, 어떤 타이밍에 꺼내야 하는 건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레니샤가 책을 읽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도 않아서 내내 입을 다물고 할 말을 고르고 있었는데.
튀어나온 말이라고는 조금도 멋없는 ‘외출’이라니.
스스로의 언어능력에 통탄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레니샤의 반응이 나쁘지 않다는 거다.
“구경이라. 그것도 좋겠네요. 수입품이 많다는 건 그만큼 관광객도 많을 거라는 이야기거든요. 그들을 실어온 배가 있을 테니. 나와 카시우스는 눈에 띄는 편이니 옷으로 가리는 것도 좋겠어요.”
이야기를 꺼낸 건 카시우스였지만 주도적인 건 레니샤였다.
“제가 린데이에게 말해서 옷을 구해보라고 할게요. 샴디르의 옷이 좋겠군요.”
“샴디르의 옷?”
“카나리아가 입은 옷을 봤나요? 귀한 샴디르의 비단을 낭비했었죠.”
레니샤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샴디르의 비단은 특히 샴디르의 복식으로 지었을 때 더 아름다워요. 샴디르의 비단들은 잘 엮으면 문양이 전부 이어지거든요. 게다가 샴디르의 왕비에게 진상되는 것이니 더 세심하게 신경을 썼겠죠.”
“……레니샤는 그런 걸 어떻게 다 알고 있습니까?”
“황후였으니까요. 주요 나라의 문화와 관습을 익히는 건 당연한 일이었어요. 어느 나라에서는 악수를 하는 건 무례한 일이고, 또 어떤 나라에서는 뺨에 키스를 하며 인사를 나누어요. 그런 것들을 알지 못하고서야 사신들을 대할 수 있겠어요?”
레니샤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이게 맞나?’
투리엘은 카시우스에게 레니샤와 대화를 나누라고 했었다.
지금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게 맞는 건지 갈피가 잡히질 않았다.
“카나리아는 제 이름에 들어가는 철자도 몰랐습니다.”
“카나리아는…… 허수아비에 불과한걸요. 렉서스도 카나리아에게 그런 걸 바라지 않을 거예요. 정말로 아이를 낳는 것만으로 가치를 다하겠죠.”
레니샤가 싸늘하게 말했다.
‘이건 아니구나.’
카시우스가 침을 삼켰다.
“샴디르의 옷을 입고 나가면 사람들이 우리를 알아보지 못할까요?”
“샴디르의 정통 복식 중에 모자를 쓰고 얼굴을 가리는 게 있어요. 그러면 우리를 알아보지 못할 거예요.”
“레니샤는 어떤 색의 옷을 입을 겁니까?”
“나한테 맞추려고요?”
“린데이에게 그렇게 부탁을 하려고 합니다.”
레니샤가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요. 오늘은…….”
레니샤가 제 뺨을 톡톡 두드렸다.
“분홍색 어떨까요?”
“좋습니다.”
카시우스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의 목적은 레니샤와 ‘부부’가 되는 거였다. 투리엘이 말했던 것처럼.
다른 이들도 카시우스와 레니샤를 부부로 봐줬으면 하는 작은 열망이 있었다.
레니샤가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분홍색도 괜찮다고요? 세상에.”
레니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투리엘이 무슨 이야기를 한 건지. 뭘 배우고 온 건가요, 카시우스?”
카시우스가 눈을 크게 떴다.
“그, 그걸 어떻게?”
“카시우스에게서 나는 냄새요. 투리엘이 좋아하는 향수거든요. 투리엘의 가게에 가면 그 냄새가 진동을 하지요. 몸에 배는 것도 당연하구요.”
“큼.”
레니샤는 예리한 사람이었다.
카시우스가 멋쩍은 얼굴로 목덜미를 문질렀다.
“투리엘이 그러던가요?”
레니샤가 눈을 접으며 미소 지었다.
“나와 데이트를 하라고?”
“컥!”
카시우스가 저도 모르게 기침을 터뜨렸다.
“데이트 신청을 하고 싶어서 여태 나를 노려보고 있었던 거군요.”
“…….”
“좋아요. 귀여우니까 받아줄게요.”
다 보이는 술수에 어쩔 수 없이 웃게 된다.
레니샤가 허물어지는 마음에 저도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