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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흔들리는 마음 (37/135)


37화. 흔들리는 마음
2022.08.05.



 
저녁 내내 입을 멈추지 못하는 이사벨라 덕분에 저녁 식탁은 좀 더 풍성했다.

레니샤 또한 기사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가리지 않았기에 한데 모여 저녁 식사를 했다.

기사들은 시녀들과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거했다.

그 당시에 이사벨라가 기사들의 편을 들었던 까닭이었다.

그래서 의기양양한 기사들과 식사를 마무리했다.

그다음 린데이가 이사벨라의 손을 잡고 직접 재우러 올라갔다.

린데이 말로는 이사벨라가 밤에 혼자 잠드는 것을 무서워한다고 했다.

그리고 악몽을 자주 꾸는 것 같다고.

다쳤던 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요즘은 린데이가 이사벨라의 잠자리를 지켜주고 있었다.

이사벨라도 잠에 들러 갔으니 그다음 차례는 레니샤와 카시우스였다.

레니샤가 카시우스를 자신의 방으로 초대했다.

아직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저택이라 레니샤의 방은 조촐했다.

선룸까지 단장할 시간이 없어서 본침실만 사용하고 있었다.

레니샤가 차를 준비하는 동안 카시우스는 눈길이 자꾸만 침대로 가는 것을 참아야 했다.


“덴버스 후작이 뭐라고 하던가요?”

“아!”

카시우스가 탄성을 질렀다.

이사벨라가 정신을 쏙 빼놓은 덕에 덴버스 후작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덴버스 후작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도 말이다.


“카나리아가 임신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카나리아가 무난하게 황후의 자리에 오를 거라고요.”

레니샤가 멈칫했다.

레니샤가 들고 있던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렉서스가 후계를 가지게 되었다는 이야기군요.”

“안 좋은 겁니까?”

“카나리아로서는 좋은 패를 움켜쥐게 되었군요. 약간 곤란하게 되었어요. 몇몇 귀족들은 카나리아에게 붙을 거예요. 황제의 후계가 가지는 의미는 크답니다.”

여태 렉서스에게 아이가 없었던 탓에 그가 생식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서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타이밍 한번 더럽군.’

하필 지금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녀였던 카나리아의 몸에서 난 아이를 인정하는 귀족들은 별로 없을 겁니다. 다만, 제 딸을 후궁에 들일 생각을 할 거예요.”

“덴버스 후작 말로는 그 아이가 렉서스 황제의 아이가 아닐 경우를 상정해둘 필요도 있다고 하더군요.”

“렉서스의 아이가 아니다?”

레니샤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런 가정에도 신빙성이 있었다.

렉서스가 그간 아이를 가지지 못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덴버스 후작이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는 건 때가 됐을 때 그렇게 ‘만들겠다’는 의미와 다름없었다.

지금은 카나리아를 황후로 만들어 레니샤에게 유리한 상황을 형성해야 했으니, 카나리아의 아이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물론, 당장에는 세력이 분열될 위험은 있었다.

그러나 그런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분명 있었다.

추후에 카나리아라는 패를 버릴 때가 오면 아이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면 될 일이었다.


“아주 재밌는 이야기군요.”

레니샤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황제의 아이가 아니라면 누구의 아이인 겁니까?”

“카시우스는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 이해하기 힘들 텐데.”

레니샤가 눈을 가늘게 접었다.


“……제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않습니다!”

카시우스가 발끈했다.

레니샤의 저 말들이 카시우스를 들쑤신다.

카시우스가 이를 아득 갈았다.


“후후후. 장난이에요. 누군가의 아이를 가졌겠지요. 렉서스의 아이일 수도 있지만 다른 이의 아이인 것이 우리에게는 더 이득이 되겠죠.”

“……콩가루가 따로 없군.”

카시우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레니샤가 속 시원하게 웃었다.


“그 말에 동감해요. 진실로 그렇죠.”

카시우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얼른 이 제도를 떠나고 싶습니다. 적응도 안 되지만 적응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최소한의 도리는 하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히엔트리는 썩었어요. 이미 구린내를 풍기는 물이 가득 고여 있지요. 그러니 인간의 도리를 기억하겠어요? 전혀 모르지.”

레니샤가 옅게 웃음을 흘렸다.

혼란스러워하는 카시우스의 모습이 레니샤에게 웃음을 자아냈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에게 차를 한 잔 더 권했다.


“자. 마음이 가라앉을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고작 5일이면 이 소란스러운 제도를 떠나요. 언젠가는 이곳이 그리워질지도 모르죠.”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인물은 어떤 사람입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덤볐다가 덴버스 후작 같은 실수를 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자는 제도를 지키는 근위대의 수장입니다. 오랫동안 무가로 지내온 가문이지요. 덴버스 후작이 정보전에 능하다면 캘리엇 백작은 몸을 쓰는 일에 능합니다.”

“차라리 그쪽이 이야기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본디 기사들은 기사들끼리 통하길 마련이었다.

그들은 좋은 검 하나를 놓고 하루를 지새우며 이야기할 수 있는 족속들이었다.


“그렇게 쉽지는 않을 거예요. 캘리엇 백작은 완고한 사람이거든요. 신흥 귀족들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요.”

“어째서입니까?”

“그 신흥 귀족의 손에 가족을 잃었으니까요. 물론, 캘리엇 백작의 세력을 줄이기 위한 렉서스의 술수이기는 했지만 말이에요.”

“……그런 경우라면 제 이야기를 듣는 척도 안 할 수 있겠군요.”

“캘리엇 백작은 그래도 복수에 눈이 멀어 실제를 잊는 사람은 아니에요. 카시우스 뒤에 내가 있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 이야기는 나눠줄 거예요. 이걸 가져가요.”

레니샤가 카시우스에게 내민 것은 둥근 패였다.


“캘리엇 백작가의 문장이에요. 과거 그들을 돕고 받은 것이니 그날의 약속을 기억한다면 캘리엇 백작은 우리에게 우호적일 겁니다.”

“어떤 약속을 기억해야 하는 겁니까?”

“캘리엇 백작이 그의 가솔을 렉서스의 칼날에 잃었을 때, 그의 손주를 구했거든요. 내가.”

레니샤가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로테라는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가진 자’였다.

레니샤는 그동안 로테라 공작으로부터 가진 것을 나누는 법에 대해서 배워왔다.

사회적인 약자를 보호하고 그들을 돌보는 법도 배웠다.

덕분에 렉서스를 들이는 우를 범하였으나, 그게 항상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다.

이렇게 인연을 만들기도 하니까.

레니샤는 황후가 된 뒤에도 로테라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녀가 로테라의 핏줄임을 잊지 않고 위에서 아래를 굽어본 것이다.


“이번에도 잘 부탁해요, 카시우스.”

“아닙니다. 내가 미숙해서 미안합니다, 레니샤.”

“당신이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힘이 돼요.”

레니샤가 미소가 번졌다.

그건 진심이었다.

카시우스는 존재만으로도 다른 귀족들을 위협할 수 있는 무기임과 동시에 곧 렉서스를 겨눌 검이 되어줄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다른 뜻도 함의되어 있었다.

곁에 있어주는 것.

카시우스가 곁에서 레니샤를 지지해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레니샤는 진심으로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카시우스는 로테라 공작 부부의 마지막을 지켜준 사람이었다.

카시우스가 곁에 있으면 부모님이 레니샤를 든든하게 지켜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카시우스가 볼을 붉혔다.

레니샤가 아무렇지도 않게 달콤한 말을 흘릴 때면 혈관이 확장되고 피가 빠르게 순환한다.

저도 모르게 붉어지는 볼의 이유도 그것일 테다.

레니샤는 자신이 어떤 순간에 가장 아름다운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카시우스가 저도 모르게 레니샤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레니샤의 말이 카시우스의 귀에는 고백처럼 들렸다.

그건 카시우스가 어리석기 때문일까?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손등에 오래도록 입술을 대고 있었다.

레니샤가 눈을 깜빡였다.


‘레니샤.’

그것이 지난밤의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레니샤가 입술을 꾹 물었다.

카시우스가 몸을 세워 고개를 그녀에게로 기울였다.

레니샤의 입술 앞에서 머뭇거리는 카시우스를 위해 눈을 감았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댔다.

카시우스는 듣기 좋은 이야기를 꾸며내는 재주는 없었다.

하지만, 진심을 다해 부딪치는 법은 알았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입술을 머금었다.

레니샤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그녀를 붙든 카시우스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

레니샤는 사실 쉽게 생각했다.

카시우스와 밤을 보내는 것 말이다.

카시우스가 그녀의 전반을 흔들 거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당연했다.

레니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아무래도 복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루 종일 카시우스를 떠올리고 있었다.

카시우스와 함께 보낸 밤을 말이다.


“후우.”

카시우스는 레니샤가 깨지기 쉬운 유리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

레니샤는 지금 이런 상황이 조금도 익숙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안달하고 레니샤가 전부인 것 같은 눈을 하는 카시우스가 너무나도 낯설었다.

처음보다 어제 더.

카시우스는 좀 더 다정했고 정중했으며 그녀를 애틋해했다.

레니샤가 방 안을 서성거리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감정으로 만들어진 굴레에는 탈출구가 없다는 사실을 레니샤도 알고 있었다.

레니샤를 옥죄다가 결국에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을 거라는 사실도.

지금 레니샤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렉서스의 목을 부모님의 영전 앞에 바치는 것!

그것만이 아직도 편히 잠들지 못한 부모님을 위한 예의일 것이다.

끝까지 레니샤를 원망하지 않았다는 부모님에게…….


“어머니, 아버지.”

레니샤는 이런 일로 흔들릴 처지가 아닌 것이다.

카시우스가 불러일으킨 변화는 분명 좋은 것이지만, 이토록 흔들려서는 안 됐다.


‘알고 있는 데도…….’

그녀를 더듬어 내려가던 손길, 머리카락을 쓸던 다정함.

눈을 맞춘 채로 괜찮으냐고 물어오던 사랑스러움.

스스로의 당혹감을 감추기 위해서 과할 정도로 여유롭게 굴어야 했던 자신.

들떠 있던 목소리와 카시우스를 유혹하던 몸짓들은 레니샤 스스로의 혼란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레니샤는 폭풍에 휘어지는 여린 들풀처럼 흔들렸고 그 순간을 쉬이 잊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레니샤가 긴 숨을 내쉬었다.


“이러지 마, 레니샤.”

카시우스는 달콤한 독이다.

입이 달아서 계속해서 마시고 싶지만 종내에는 이성을 마비시키는 독.

더 이상 삼켜선 안 된다.

레니샤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멈추어 섰다.

변수가 된다면 삼키지 않으면 된다.

카시우스는 지금으로서는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패였다.

카시우스와 그를 따르는 기사들만이 레니샤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그 무기를 무디게 만드는 감정이 있다면 거세해버리면 된다.

레니샤가 결정을 내렸다.

카시우스와는 더 이상 밤을 보내지 않는다.

어쩌면 이 결정을 하기 위해서 지난밤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안일해진 그녀에게 경고하기 위해서.

레니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젯밤이 마지막이다. 절대로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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