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이사벨라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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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이사벨라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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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이사벨라 아가씨
2022.08.02.
이사벨라가 기사들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기사들은 하루 종일 바빴다.
초르파 평원에서 돌아온 이후로 항상 늘어져 있던 기사들이 무언가를 들고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들을 린데이가 말 한마디로 부리고 있었다.
“엇차. 후우, 이게 언제 끝나는 거지? 차라리 전쟁터가 편한 것 같은 건 내 착각인가?”
“우리 요조숙녀께서는 어딜 가신 건지. 가장 힘이 세면 손을 보태야 하는 것 아냐?”
“요조숙녀께서는 지금 외출을 하셨어.”
기사들이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들이 말해놓고도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웃겼던 것이다.
덩치가 가장 큰 카시우스를 요조숙녀라니.
카시우스가 전쟁터에서 싸우는 모습을 레니샤가 보지 못했기에 그런 말을 입에 담았을 것이다.
카시우스는 날카롭고 맹렬한 검이었으며 한시도 망설이지 않는 잔혹한 기사였다.
카시우스가 기사들을 이끌 수 있게 된 것은 붉은 뱀의 힘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카시우스가 가장 많은 적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레니샤가 그 사실을 모르니까, 그런 귀엽기 짝이 없는 별명을 붙여주었으리라.
테리언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다.
너무 웃어서.
다시 생각해도 웃음밖에 나질 않는다.
기사들을 훔쳐보던 이사벨라가 그 옆에 따라붙었다.
“어? 테샤. 뭘 하고 있었…… 으억!”
제 동료에게 옆구리를 얻어맞은 기사가 숨을 컥컥거렸다.
“이사벨라 아가씨. 아가씨라고 불러야지, 이 자식아!”
이사벨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내내 쫓아다니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사벨라는 가장 두렵고 힘들었던 순간에 만났던 이들이 내민 손을 기억하고 있었다.
거리낌 없이 테샤의 이름을 부르며 머리를 쓸어 넘기던 것도.
저승 문 앞에서 살아 돌아온 이사벨라의 앞에는 익숙한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이사벨라를 알고 사랑해줬던 이들은 전부 죽어 없어진 것이다.
이사벨라를 공격하던 이들로부터 그녀를 구해낸 것은 카시우스, 그리고 그녀를 살려낸 것은 군영에서 만났던 의사, 아픈 그녀를 어미 오리처럼 품고 제도로 데리고 온 것은 기사들이었다.
그들의 품에 안긴 채로 이사벨라는 무사히 이곳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아가씨는 왜 여기에 계실까?”
이사벨라가 몸을 배배 꼬았다.
“심심해서요…….”
린데이를 비롯한 시녀들은 이사벨라를 이제 막 부화한 새끼 오리처럼 다루고 있었다.
간신히 되찾은 아이기도 했고 눈 색이 변할 정도의 고통을 겪었다고 생각하니 그녀들 입장에선 안타깝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사벨라가 아무것도 못 하게 했다.
하고 싶은 걸 하면서 푹 쉬라고.
하지만, 이사벨라가 이 저택에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차를 내리는 곳에 얼쩡거리면 내쫓기고 걸레질하는 데를 기웃거리면 또 내쫓겼다.
이사벨라가 입술을 달싹였다.
“도와도 될까요?”
“흠.”
이사벨라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무엇이라도 하고 싶다는 얼굴이 커다란 눈동자로 애원하고 있었다.
본디 카시우스의 기사들은 이사벨라에게 약했다.
워낙 커다란 그들에 비하면 작은 아이기도 했고 그 작은 몸으로 사선을 넘어왔다는 생각만 하면 마음이 말랑말랑해졌기 때문이었다.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짐을 옮기는 중이야, 아가씨. 너무 무거운 건 들지 말고.”
“네!”
“그러면 다치지 않는 선에서 하는 거야. 약속할 수 있지?”
“네!”
“좋아. 지금 일손이 필요해서 그런데 도와주시겠어요, 아가씨?”
이사벨라가 작은 고개가 떨어질 것처럼 끄덕였다.
그 모습에 기사들도 녹아내릴 수밖에 없었다.
기사들이 번갈아가며 이사벨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녀들이 요령껏 단장해놓은 머리가 흐트러졌다.
하지만, 이사벨라는 그것도 좋은지 내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런데 힐로샤인으로 다 같이 가는 거예요?”
“그렇다던데.”
“안 돌아와요?”
“그건 모를 일이지. 왜, 여기가 좋아?”
이사벨라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힐로샤인에는 처음 가보거든요. 끙차!”
이사벨라가 작은 짐 가방을 들어 올렸다.
비틀거리며 걷는 이사벨라를 기사들이 세심한 눈길로 살폈다.
하루 종일 다람쥐처럼 돌아다니던 이사벨라가 얼마나 심심했겠는가.
차라리 이렇게라도 뭔가를 하는 게 아이에게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기사들과 시녀들의 의견은 확연하게 갈렸다.
이사벨라가 짐을 들고 있는 것을 본 시녀들이 기함을 하며 달려온 것이다.
“지금! 아가씨한테 뭘 들게 하신 건가요?”
“그러면 사람이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늘어져 있어야 맞다는 겁니까?”
한 기사가 대거리를 했다.
이제는 저택에 여자가 있는 것이 익숙해져서 그런지 이전과는 다르게 입도 열 수 있었다.
시녀들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이러다 다치기라도 하시면 어떡하려고?”
“아이를 싸고 키우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니지!”
“싸우면 안 되는데…….”
이사벨라가 발을 동동 굴렀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다. 그냥 심심해서 뭔가라도 하고 싶었는데.
왁왁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시녀들과 기사들이 아이 양육 문제를 놓고 다투는 부부 같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다.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헨리가 고개를 내저었다.
뭐, 저런 문제는 쉽게 해결되길 마련이다.
“으, 으아아아아앙!”
저렇게 아이가 눈물을 터뜨리면 말이다.
***
카시우스가 얼굴의 피로를 거둬냈다.
저택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레니샤가 저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저택에 기거하고 있는 사람들은 힐로샤인으로 떠날 준비를 빠르게 하고 있었다.
린데이와 헨리가 끼어드니 훨씬 수월했다.
저택 살림을 돌보는 일에는 재능이 조금도 없는 기사들뿐이라 놓칠 수밖에 없던 부분들을 그들이 채워주고 있었다.
그리고 레니샤는, 카시우스의 삶을 풍부하고 충만하게 채워주고 있었다.
그녀는 매번 카시우스를 예상하지 못했던 세계로 안내한다.
레니샤의 떨리던 어깨와 숨을 죽이고 신음을 흘리던 모습, 혼란스러워 보이던 눈동자.
레니샤는 어젯밤 내내 드러내지 않으려 했지만 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두려운 것 같기도 했다.
레니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가장 가까이에서 살을 맞대고 있었던 카시우스조차도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어젯밤이 카시우스에게만 의미를 가지진 않는다는 것.
레니샤에게도 어젯밤은 분명히 의미가 있었던 시간이었다.
두 사람만이 공유하고 있는 시간.
카시우스가 제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왠지 모르게 감정이 묵직해진 기분이었다.
카시우스가 가까워지는 저택에 숨을 몰아쉬었다.
레니샤를 어떤 표정으로 볼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도착했습니다, 공작 각하.”
여전히 익숙지 않은 호칭으로 마부가 도착을 알렸다.
카시우스가 역시나 익숙하지 않은 마차에서 내렸다.
“오셨습니까.”
마차가 오는 소리에 나와 있던 린데이와 헨리가 카시우스를 맞이했다.
그리고 화려하게 불을 밝힌 샹들리에 아래 레니샤가 서 있었다.
“다녀왔어요?”
레니샤가 나긋하게 미소 지으며 카시우스에게 말을 건넸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어색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사벨라가 있었다.
“카시우스 공. 다녀오셨어요?”
역시나 우물거리며 인사를 건네 온다.
이사벨라는 마냥 어리다기엔 어리지 않았고, 그렇다고 어른이라기에는 너무 어린 애매한 경계선에 서 있었다.
모든 것을 인지하고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다녀왔어요, 레니샤. 그리고 이사벨라.”
이름을 불린 이사벨라의 표정이 환해졌다.
테샤일 적에도 잘 웃고 잘 우는 아이였지만, 지금은 더 했다.
드레스를 입혀놓고 나니 확실히 귀티가 흐르는 여자 아이 같았다.
레니샤가 이사벨라의 손을 잡았다.
“카시우스 공에게 오늘 뭘 했는지 말씀드려.”
“하지만, 고모.”
이사벨라가 우물쭈물거렸다.
“오늘 하루 종일 날 붙들고 귀찮게 굴었잖아, 이사벨라. 옛날에도 말이 많기는 했지만 지금은 더 많아진 것 같던데.”
“그, 그건…… 아직 부끄럽단 말이야.”
“네 이야기를 들어줄 어른이 한 명 더 늘어난 것뿐이야. 고모부는 널 잡아먹는 괴물이 아니야.”
레니샤가 다정하게 이사벨라를 타일렀다.
아이가 쭈뼛거리며 카시우스에게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다.
가늘고 상처가 많은 손이었다.
카시우스는 어색해하는 아이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가 안심할 수 있도록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이사벨라가 손을 꼼지락거렸다.
카시우스가 괜히 헛기침을 했다.
부끄러움에 두피까지 빨개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어린아이랑 가깝게 닿아본 건 거의 처음이었다.
서부에서 위험에 처한 아이들을 구하거나 검투사로 일할 때 다른 아이를 대신해서 맞거나.
그런 식의 접촉을 해본 이후로 처음이었다.
아이는 작아도 너무 작았다.
이렇게 작은 아이를 죽이겠다고 살수까지 보낸 이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작고 너무나 소중해서 움켜쥐기도 걱정스러운 손이었다.
이채가 도는 카시우스의 얼굴을 레니샤가 미소 띤 얼굴로 응시했다.
카시우스를 보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오늘 무슨 일을 했는지 말해줘, 이사벨라. 네 고모부도 듣고 싶을 거야.”
고모부.
귀도 간질거리고 마음도 간지러운 호칭이었다.
이사벨라가 망설이다가 입술을 뗐다.
“오늘은 기사님들하고 짐을 옮겼어요. 아무도 못 하게 했는데 이사벨라가 하고 싶어서요!”
“그……랬구나.”
카시우스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기사님들이 고맙다고 그랬어요! 사실 시녀들은 하지 말라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아무것도 못 하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좋아요. 그래서 린데이가 차를 내리는 걸 가르쳐주기로 했어요. 앞으로 이사벨라가 차를 내릴 수 있게요.”
“차를 네가?”
카시우스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굳이 차를?”
저도 모르게 한 번 더 덧붙였다.
이사벨라가 기가 죽어 축 늘어진 토끼처럼 고개를 기울였다.
“차를 배우는 건 안 되나요?”
카시우스가 있던 입맛도 달아나게 만들고 잠을 쫓아내던 차를 떠올렸다.
마담 투리엘이 올 때마다 이사벨라가 타주었던 차였다.
“아니. 하고 싶으면 해야지.”
하지만, 시무룩한 아이 앞에서 카시우스가 할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배우게 되면 차를 타드릴게요.”
이사벨라가 환하게 웃었다.
그에 카시우스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무던하게 무엇이든 잘 먹는 카시우스의 입맛에도 그건 영 아니었던 것이다.
레니샤가 웃음을 흘렸다.
이사벨라가 재잘거리는 것을 들으며 나란히 복도를 걷는 장면은 오래도록 기억해둘 만했다.
레니샤도 이사벨라가 이곳에 있게 된 정확한 정황을 알고 있었다.
카시우스가 구해서 여기까지 데려왔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만나기 전부터 두 사람의 인연은 이어져 있었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