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환장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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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환장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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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환장하겠네
2022.07.26.
정말 레니샤는 할 말 없게 만드는 데 선수였다.
카시우스가 신음을 흘렸다.
덴버스 후작이 한 말이 화가 나지도 않는지 태연한 얼굴이었다.
카시우스가 제 볼을 쓸어내리는 레니샤의 손을 힐끗 보았다.
카시우스에 비해서 지나치게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었다.
카시우스의 목울대가 한 차례 움직였다.
“……화도 안 나십니까?”
“그 자리에 누가 앉든 나는 조금도 상관없어요. 덴버스 후작은 그리고 그리 친절하지 않은 작자예요.”
레니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덴버스 후작은 진심으로 내 생각을 물었을 거예요. 그 자리에 카나리아를 앉히는 건 어떻겠느냐고. 카시우스는 뭐라고 대답했나요?”
“……그건 제가 대답할 게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레니샤가 그자를 만나고 오라고 했을 때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득이 있었나요?”
카시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레니샤가 나긋나긋하게 대하니 카시우스의 분노도 가라앉는 것 같다.
“다음에 한 번 더 가서 덴버스 후작을 만나세요, 카시우스. 그리고 내 뜻을 전하는 겁니다. 카나리아가 황후가 되어야 한다고.”
“레니샤, 그 자리는……!”
“그러면 내가 황후 자리로 돌아가야 할까요? 그걸 바라는 거예요? 내가 렉서스에게로 돌아가길?”
레니샤가 질문을 연달아 토해내며 미소 지었다.
카시우스가 눈을 뜬 채로 굳어버렸다.
레니샤가 너무 가깝다.
황성 밖으로 나온 레니샤는 좀 더 저돌적이고 자신감이 넘쳤으며 예측할 수가 없었다.
레니샤에게서는 여전히 야생 장미의 향기가 났다.
“카나리아는 그 자리에 앉아야 해요. 아니면 비어 있거나.”
“어째서입니까? 레니샤는 왜 그 여자에게 관대한 겁니까?”
“멍청하기 때문이에요. 그 애는 렉서스에게 딱 걸맞은 짝이라고 할 수 있죠.”
레니샤가 부드럽게 속삭이듯 말하는 것을 이어갔다.
나긋한 목소리가 카시우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사람들은 카나리아가 멍청할수록 나를 그리워하게 될 거예요. 내가 떠난다고 해서 렉서스가 달라질까요?”
카시우스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아니죠. 황성이 렉서스에게 맞춰나갈 거예요. 내 역할을 대신해줄 누군가를 기대하겠죠. 하지만, 카나리아는 그럴 수 있는 재목이 아니에요. 그러면 그들은 자연스럽게 나를 떠올리게 될 거예요. 누가 적합한 주인인지 생각하겠죠.”
“……덴버스 후작도 같은 생각입니까?”
“아마도. 사실 그 애는 능력이 없는 걸 가장 혐오하거든요.”
“제가 실수한 겁니까?”
“아니요. 카시우스는 내 편을 들어준 거죠. 내 남편으로서.”
레니샤가 아무것도 문제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다시금 미소했다.
“덴버스 후작은 다시 당신을 만나줄 거예요. 그때는 내 뜻을 확실히 전해주면 돼요. 덴버스 후작은 나를 대신해서 이 제국에 있는 나의 세력을 규합해줄 거예요. 그들을 단속하고 나를 배신하지 않도록 지켜보겠죠.”
레니샤의 목소리가 꿀같이 달콤해졌다.
카시우스는 왠지 그를 쓰다듬는 손길이 끈적해졌다고 느꼈다.
카시우스가 눈을 들어 레니샤의 표정을 살폈다.
“덴버스 후작은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카드예요.”
“……다시 클럽에 가보겠습니다.”
레니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요?”
멍하니 얼굴을 맡긴 카시우스의 뺨에서 이마로, 그리고 콧잔등으로…….
마지막으로 입술로 레니샤의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카시우스의 얼굴이 또다시 빨갛게 달아올랐다.
레니샤가 입술을 벌렸다.
“우리 첫날밤에 대해서.”
레니샤가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다분히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그러나, 계속 생각해오던 것이기도 했다.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라면 카시우스가 저렇게 열렬한 눈으로 레니샤를 바라보는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했다.
사람의 마음은 변한다.
레니샤를 보는 카시우스의 마음이 언제 변하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레니샤는 실체가 없는 감정의 연속성을 믿지 않는다.
렉서스도 로테라의 은혜를 입을 당시에는 그들 동맹의 영원함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다.
‘은혜를 갚겠네. 그대들은 나를 위해서 많은 일들을 해주었지. 레니샤를 내게 주게. 레니샤를 행복한 황후로 살 수 있도록 하겠네.’
말뿐인 것들은 사라지길 마련이었다.
회고해보자면 렉서스가 레니샤를 바랐던 것은 일종의 정복욕에 지나지 않았었다.
레니샤를 손에 넣은 이후 그녀를 향하던 눈동자는 얼음보다도 차갑게 식어버렸으니 말이다.
카시우스 또한 다를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하지 않는 게 좋다.
모든 변수는 미리 겪고 난 이후에 힐로샤인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니 지금의 충동은 옳았다.
레니샤와 밤을 보내고 난 이후에도 카시우스가 저런 눈빛으로 레니샤를 바라볼지 궁금했다.
카시우스가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첫날밤.”
레니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면 모든 건 변명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레니샤를 보는 카시우스의 뜨거운 눈빛이 그녀를 달아오르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카시우스의 불길에 저를 던져보고 싶은 욕망을 품고 있을 수도.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오늘 밤은 레니샤와 카시우스가 맺은 협정엔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우리는 부부가 되었어요. 언젠가는 거쳐야 할 일이죠.”
레니샤의 손가락이 카시우스의 입술을 문질렀다.
그 손길은 대담했고 동시에 뜨거워서 카시우스를 불태울 것만 같았다.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이야기에 카시우스의 눈동자가 떨렸다.
카시우스에게 레니샤는 함부로 닿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가 경외하는 로테라 공작 부부의 딸이며, 동시에 가장 존귀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레니샤의 말대로 동시에 카시우스의 여인이기도 했다.
카시우스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그의 입술을 만지작거리는 레니샤의 손을 제 손으로 덮었다.
그다음 레니샤의 손바닥에 깊숙이 입을 맞췄다.
“레니샤.”
카시우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레니샤는 아무렇지도 않게 카시우스에게 손을 내민다.
“레니샤, 정말 당신은…… 겁이 없어.”
카시우스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저택에 있다는 소식은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사람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대중들에게 레니샤는 제국의 영웅, 카시우스와 부정을 저질러 쫓겨나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제국민들 중 대다수는 레니샤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러실 이유가 있으셨겠지!”
“암만. 황후 폐하 아니신가. 그분이 설마 그런 짓을 하셨을 리 없어.”
“맞아. 그러니 황제께서도 그냥 내보내신 것 아닌가?”
“자네들 너무 낙관하는군. 부정을 저지른 건 저지른 거야!”
“이 사람! 황후 폐하도 사람이시네. 너무 각박하게 구는 것 아닌가? 3년 전 기근이 들었을 때 황후 폐하의 성덕으로 목숨을 건진 걸 잊었나 보지? 그분께서 베푸신 곡식이 아니었다면, 그분께서 새롭게 시작한 정책이 아니었다면 자네는 저 멘투샤 강물에 몸을 던지고도 남았어!”
“커흠. 그거야…….”
“우리가 누구 때문에 먹고 사는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네.”
그들은 레니샤가 베푼 온정을 기억하는 자들이었다.
레니샤의 폐위 공문 앞에서도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며 제자리를 내내 서성거렸다.
“그러면 누가 황후가 되는 거지? 그분을 대신할 사람이 있기는 한 건가?”
“그럴 리가 있어?”
“왜 그 여자 있잖아. 황제 폐하의 정부? 스캔들 기사에 자주 나오던 여자 말이야.”
“그 여자가 어떻게 황후가 돼?”
사람들이 불만을 토해냈다.
“그 여자가 황제와 황후 사이를 이간질한 것이 분명해.”
“세상에 다시없을 악녀로군!”
“그 여자만 없었다면 황후께서 이렇게 억울하게 쫓겨나시겠어?”
“그 말이 맞구만.”
누군가의 말에 다 같이 맞장구를 쳤다.
사람들은 레니샤를 마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누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고 한들 레니샤의 그림자에 가려질 것이 자명한 일이었다.
레니샤와 카시우스의 일로 제도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모두들 모이기만 하면 레니샤와 카시우스의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또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그 여자 때문에 낙담해 계신 황후 폐하를 카시우스 경이 위로하다가 두 분 사이에 뭔가가 생긴 것일 수도 있지.”
“그래! 그게 말이 되는구만!”
“참다못한 황후께서 황제에게 이혼을 요청했고 카시우스 경이 그 틈을 타서 황후 폐하를 책임지겠다고 나선 거지! 카시우스 경은 남자 아닌가! 영웅이기도 하고! 아주 늠름한 게 멀리서도 눈에 띄더군.”
“이제는 공작이기까지 해. 로테라 공작위를 그분께서 이어받지 않았나.”
“애석한 일이었지. 로테라 공작가가 문을 닫은 건 말이야.”
“뭐든 간에 두 분 사이에 말 못할 사랑이 시작된 건 확실해. 황제께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소설 같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레니샤는 그들에게 있어서 완벽한 황후이자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카시우스는 제국을 위협으로부터 구해준 영웅이었다.
그에 반해서 카나리아는 어떠한가.
그런 황후를 슬프게 하는 악역이었다.
또한, 렉서스는 어떠한가.
이 시대의 폭군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민중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울지는 뻔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레니샤와 카시우스 사이에 피어난 자극적이고 아름다운 로맨스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멋대로 편집하고 만들어낸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 진실로 자리 잡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건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결과였다.
***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등을 끌어안았다.
굳은살이 박인 거친 손바닥이 레니샤의 부드러운 피부 위를 쓸어내렸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카시우스 또한 이런 순간을 꿈꾸지 않았다면 거짓일 것이다.
레니샤가 빛나는 황금 의자에서 내려와 카시우스의 곁에 서게 되었을 때…….
밤잠 못 이루게 하는 그녀를 꿈꾸었다.
카시우스가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그동안 어떤 여자도 만나본 적이 없지만, 남녀 간에 오가는 일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노예 검투사로 일할 때도 숱한 유혹을 받아왔다.
그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카시우스가 매끄러운 레니샤의 뺨에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붉게 달아오른 레니샤는 평소와는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카시우스의 마음에 풍랑이 쳤다.
“레니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이름을 속삭였다.
레니샤가 굳게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도 환히 빛나는 분홍색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레니샤.”
그녀의 이름은 단 사탕과 같았다.
입 안에 다디단 향기가 고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지금이라서 그런 걸까?
카시우스가 부르는 제 이름을 들으며 레니샤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