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착한 내 강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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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착한 내 강아지
2022.07.22.
손 가득히 심부름으로 산 것들을 안고 있던 기사가 입에 물고 있던 빵을 바닥에 툭 하고 떨어뜨렸다.
광장의 게시판에 벽보로 붙은 황실의 공문을 본 것이다.
<폐위 교서>
굳이 아래에 붙은 내용은 확인하지 않아도 되었다.
‘부인에 대한 이야기야……!’
기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아직 사람들은 벽보로 붙은 공문에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다.
사실 황실의 공문을 훼손하면 벌금을 물어야 했다.
하지만, 기사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기사가 옆으로 슬금슬금 걸었다. 품에 안긴 식료품들을 추스르는 척하며.
“아이쿠. 이게 보기보다 무겁단 말이야.”
레니샤가 온 이후로 먹는 것이 아주 좋아졌다.
매일 식단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황후궁 주방장으로 일했다더니 그럴 만한 실력이었다.
기분 좋게 심부름을 하던 중에 한순간 기분 더러워지는 것을 본 것이다.
기사가 벽보를 쭉 찢어 구겨서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커흠!”
헛기침을 한 기사가 완전 범죄를 시도했으나, 근처를 순찰 돌던 황실 기사가 그것을 발견했다.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요! 그건 황제께서 친히 내리신……!”
“뭐. 뭘 봤나 봐?”
기사가 험악한 표정으로 잇새로 말을 짓씹었다.
황실 기사가 창을 붙들고 침을 꿀꺽 삼켰다.
왠지 모를 살기가 맴도는 남자였다.
대체 뭐 하던 작자인지 어깨도 넓고 건장한 것이 자세도 불량했다.
건들건들한 눈빛이 멀쩡한 사지를 찢어놓을 것 같았다.
황실 기사가 뒤로 물러섰다.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대답했다.
기사가 침을 바닥에 퉤 뱉고는 살기 어린 눈빛을 황실 기사에게 던졌다.
“이상한 것 좀 붙이지 마쇼, 응?”
기사가 몸을 홱 하고 돌렸다.
큰 보폭으로 걸음을 옮기는 기사의 주머니에 삐쭉 튀어나온 종이가 보였다.
황실 기사가 억울함에 눈물을 삼켰지만 저런 건달에게는 걸리지 않는 게 제일 좋았다.
카시우스의 저택으로 돌아온 기사가 숨을 몰아쉬며 수련장으로 달려갔다.
물론, 식료품은 주방으로 고이 전달한 이후였다.
“대체 왜 그렇게 뿔난 황소처럼 달려오나? 사람들 겁먹게.”
“지금 밖에 이런 게 나돌고 있단 말일세!”
기사가 오는 길에 본 것은 벽보뿐만이 아니었다.
일간지를 비롯한 온갖 가십지에 레니샤의 폐위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자극적으로 각색된 것은 물론, 그녀를 영웅과 간음한 여자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길거리의 아이에게서 동전 한 닢으로 살 수 있는 삼류 가십지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렸다.
보이는 걸 다 들고 오다 보니 품 안 가득이었다.
그것을 본 기사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런, 이런!”
기사들 중에는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렉서스로부터 훔쳤다는 투의 소설을 쓴 것도 있었다.
여기저기서 상스러운 욕설이 튀어나왔다.
“절대로 부인께 전해져서는 안 되네.”
“당연하지!”
기사들이 결연하게 주먹을 쥐며 외쳤다.
그리고 기사들은 부러 밖으로 나와 건달들처럼 몰려다니며 여기저기서 관련된 기사들을 회수했다.
그렇다고 발보다 빠른 말을 이길 수는 없었지만.
***
테리언도 해당 소식을 접했다.
기사들이 불쏘시개로 모아온 것이라며 던져놓은 종이들을 테리언이 난감하게 응시했다.
“이걸 정말로 뜯어왔다고? 안 걸렸나?”
“걸렸지만 모르는 체했지.”
그사이에 오갔을 공방을 알 법도 했다.
기사들이 당장 벽난로에 던져 넣으라고 종용하던 때에 레니샤가 1층 홀로 내려왔다.
나긋한 걸음걸이로.
“무슨 일 있나?”
기사들이 거대한 어깨를 흠칫하며 몸을 돌렸다.
거대한 몸으로 그것들을 가리고 섰다.
레니샤가 생긋 웃었다.
분명 숨기는 게 있는 솔직한 얼굴들이었다.
레니샤 뒤에서 린데이가 고고한 얼굴로 서 있었다.
린데이가 기사들을 헤치고 들어가 종이를 하나 빼내왔다.
린데이가 한숨을 내쉬곤 그것을 레니샤에게 건넸다.
레니샤가 기사를 천천히 살폈다.
“제, 저희가 밖에 나가 이런 삿된 것들을 싹 다 긁어오겠습니다, 부인!”
“거짓부렁투성이예요!”
“이런 걸 누가 믿겠습니까?”
혹시 레니샤가 상심하기라도 했을까 발을 동동 구르는 눈치였다.
레니샤가 옅게 웃음을 터뜨렸다.
“풉.”
신문은 예상했던 것인데 기사들의 반응이 레니샤를 웃게 한 것이다.
사교계의 생리와 황실의 음험함에 대해서는 어린 이사벨라도 알고 있었다.
이사벨라에게는 레니샤와 카시우스의 상황에 대해서 잘 설명해두었다.
그런데 카시우스를 닮아 귀여운 기사들은 레니샤가 상처를 받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레니샤가 입술을 신문으로 가리고 웃었다.
“……괜찮으신 겁니까?”
테리언이 대신해서 물었다.
“그럼요? 사실인 것도 있는걸. 그리고 황실이 이렇게 치사하게 나올 걸 예상 못한 것도 아니었네. 게다가 이 정도면 많이 순화되었는걸.”
기사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래도 레니샤는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저런 걸 보고 웃다니.
“정말로 괜찮으신 거지요……?”
레니샤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제 그녀는 저택의 안주인이었다.
테리언에게 듣기로는 레니샤가 똑똑하고 아는 것이 많아 그들을 잘 이끌어줄 것이라고 했다.
게다가 먹는 것도 개선되었고 그들이 머무는 숙소도 개선되었다.
테리언을 통해서 힐로샤인의 성이 정리만 되고 나면 병장기에 예산도 책정해줄 것이라고 했다.
임금도 나올 것이라고.
그런 약속을 해주는 안주인을 어떻게 미워하겠는가.
알게 모르게 마음이 무른 기사들은 레니샤에게 이미 마음을 내어주었다.
“물론이지.”
레니샤갸 신문을 내렸다. 그녀는 활짝 핀 꽃봉오리처럼 웃고 있었다.
기사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는 안도했다.
다행이다. 아무래도 그들의 안주인은 생각보다 훨씬 더 대범한 것 같았다.
아무튼 레니샤의 폐위와 카시우스와의 결혼은 여러 입을 타고 퍼져나갔다.
레니샤를 추종하고 경애했던 자들은 레니샤를 감쌌다.
‘미친 황제가 일을 저지른 게지. 뻔한 일 아닌가. 황후께서 그러실 분이냐고.’
‘그러니까 말이야. 이 제국을 지탱하던 분이신데! 이제 우리는 어찌하나.’
하지만, 반대인 자들도 있었다.
레니샤를 시기하고 질투했었던 자들은 레니샤를 깎아내렸다.
‘내 그럴 줄 알았지. 그렇게 악독하다며? 그러니 황제가 밖으로 돌지. 다 안사람 하기 나름 아니겠느냐고.’
‘후우. 그러면 이제 황후 자리는 누가 차지하게 되는 거지?’
그리고 그들은 빈 황후의 자리에 눈독을 들였다.
권력에 관심이 많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다음 황후에 대해 관심을 모았다.
‘설마…… 카니라아가 황후가 되는 건가?’
‘신빙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 지금 황실에서 가장 오래 버틴 여자 아닌가. 황제가 그 여자를 정말로 사랑할 수도 있지!’
‘에헤이. 그래도 그 여자는 너무 비천하지. 레니샤 황후의 하녀 출신 아닌가. 황족의 피를 더럽히는 일이야.’
그리고 황후 후보로 카나리아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
“아, 다녀왔어요?”
레니샤가 고고하게 웃었다.
황제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외출을 자제하는 것이 답답할 법도 한데 레니샤는 오히려 저택 안에서 편안해 보였다.
카시우스가 겉옷을 벗어서 제 어깨에 걸치려다가 자연스럽게 다가와 웃으며 손을 내미는 노신사를 힐끗 보았다.
“제게 주십시오.”
이틀 전 밤, 저택을 다급하게 찾아왔던 헨리는 결국 저택의 집사장이 되었다.
총괄관리는 린데이가 맡게 되었다.
린데이가 헨리의 감시를 하게 된 것이다.
헨리와 레니샤 사이에는 몇 가지 협상이 오갔다.
황성에 연락을 할 때는 검열을 받을 것.
협의된 내용 외에는 발설하지 않을 것.
이사벨라와 레니샤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절대로 발설하지 않을 것.
그 외에도 몇 가지 규칙이 있었지만 크게는 그게 전부였다.
사실 이사벨라를 지키기 위한 조항들이 대부분이었다.
카시우스가 못마땅하게 헨리를 보다가 제 옷을 내밀었다.
“……잘 지냈습니까?”
카시우스가 티 나게 고개를 돌리고 레니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은 없었고요?”
“반나절 외출해놓고 그게 맞는 안부라고 생각하나요?”
레니샤가 실소를 지었다.
헨리를 견제하고 있다는 게 눈에 보이는 행동이었다.
사실 카시우스는 헨리를 받아들이는 일을 반대했었다.
하지만, 다른 이를 보내올 거라는 레니샤의 말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헨리는 말이 통하는 작자이니 협상할 여지가 있을 거라는 말에 동의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뒤로하고서도 카시우스는 헨리가 싫었다.
그건 그가 렉서스의 흔적이기 때문이리라.
“아무 일도 없었고 잘 지내고 있었어요, 카시우스. 안으로 들어가요.”
카시우스가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을 지키는 사냥개 같군.’
아차하면 저택을 전부 태워버릴 강렬한 불꽃이기도 했다.
헨리가 카시우스 몰래 혀를 내둘렀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뒤를 졸졸 쫓아가다가 헨리를 향해 고개를 슬쩍 돌렸다.
카시우스가 헨리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제 나름대로 경고라고 하는 짓일 것이다.
내가 널 지켜보고 있다. 뭐, 대충 그런 의미이려나.
하지만, 렉서스로 인해서 매일같이 심장을 졸이며 살아왔던 헨리다.
렉서스와 눈이 마주칠 때면 어떤 방향으로 광기가 튈까 두려워 숨을 죽여야 했다.
저런 카시우스의 위협은 그저 귀여운 재롱 정도로 느껴졌다.
물론, 카시우스가 진심으로 살기를 담지 않아 그런 것일 테지만.
전쟁터에서 사람을 베었던 기사의 살기를 우습게 볼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마음이 편하군.”
최소한 카시우스는 사람이 짐작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으니 말이다.
***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따라 침실로 들어갔다.
끝까지 경계의 눈빛을 밖으로 던지는 카시우스를 보며 레니샤가 웃음을 삼켰다.
안 그래도 된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은데 속내가 전부 드러나는 모습이 귀여워서 두고 보게 된다.
레니샤가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카시우스. 오늘은 누굴 만났나요?”
밖을 향해 눈을 부라리던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건너편에 앉았다.
“카시우스?”
“아, 오늘은 덴버스 후작을 만났습니다. 레니샤가 일러준 대로 선라이즈 클럽에 다녀왔습니다.”
카시우스는 로테라 공작이 되었다.
과거 카시우스의 신분이 무엇이었든 간에 지금 카시우스는 어떤 사교클럽이든 프리패스로 들어갈 수 있는 신분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카시우스에게 호기심을 느꼈다.
레니샤에게 호의적인 자들은 카시우스를 쉽게 제 무리에 끼어주었고 그러지 못한 자들은 카시우스를 손가락질하고 배척했다.
카시우스는 신경줄이 아주 두꺼운 편이었기에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카시우스는 정직하게 클럽에 가서 레니샤가 시킨 자들만 만나고 돌아왔다.
아직은 그런 생활에 대해서 잘 모르는 그가 스스로가 실수할 것을 피하려 하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만났군요. 지금 세 번째였던가.”
레니샤가 눈을 빛냈다.
덴버스 후작은 본디 사교 클럽을 즐기지 않는 자였다.
그런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덴버스 후작이 카시우스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는 거였다.
카시우스와 레니샤가 엮인 것을 알고 있으니 그녀의 뜻을 듣기 위함이었겠지.
“뭐라고 하던가요?”
카시우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이상한 여자를 황후로 만드는 게 어떻겠느냐고 묻더군요! 그 자리는…….”
카시우스가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카시우스.”
레니샤가 몸을 일으켜 분노를 표출하는 카시우스의 앞에 섰다.
레니샤가 고개를 숙여 카시우스의 뺨을 쓸었다.
놀란 얼굴을 하는 카시우스에게 레니샤가 속삭였다.
“내 착한 강아지.”
여태 생각했던 것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카시우스가 눈을 깜빡였다.
그는 6피트를 훨씬 넘는 장신이었다. 그런데…….
요조숙녀에 이어서 강아지라니.
카시우스의 머리에 열이 올랐다.
미쳐버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