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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카시우스가 만나야 할 사람 (31/135)


31화. 카시우스가 만나야 할 사람
2022.07.15.



 


“예, 예쁘다고…….”

카시우스가 말을 더듬었다.

정말로 카시우스는 이런 사람이 아닌데 왜 레니샤 앞에만 서면 이렇게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카시우스가 칼칼한 목을 달래기 위해 차를 마셨다.

이전과 달라진 것 중에 하나는 차 맛이 아주 좋아졌다는 것이다.

카시우스가 벌게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카시우스가 예뻐?”

레니샤가 여유롭게 말했다.


“응. 예뻐. 머리가 불꽃같아. 눈동자는 태양처럼 반짝이고…… 아무튼 예뻐.”

더 이상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한 듯 이사벨라가 배시시 웃었다.

레니샤가 이사벨라의 볼을 쓰다듬었다.

이렇게 보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다.

로테라 담장 안에서 다정한 가족으로, 고귀하게 자라는 영애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레니샤가 이사벨라의 짧아진 머리카락을 아쉬운 얼굴로 만지작거렸다.


“머리를 길러야겠다, 이사벨라.”

“머리카락을?”

“그래. 이사벨라는 인형처럼 머리를 길게 길러서 머리띠를 하는 걸 좋아했었잖아. 지금은 그게 싫어?”

“아니, 좋아. 그래도 돼?”

“그럼.”

이사벨라가 환하게 웃었다.


“나를 돌봐준 의사는 내가 남자애인 게 좋다고 했었어, 고모. 그래서 머리가 잘리고 난 이후에는 기를 수가 없었어.”

여자아이의 머리카락은 남자아이의 것보다 빨리 자란다.

의사의 말을 이해한 조숙한 이사벨라는 제 손으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머리카락을 잘라내야 했었다.

레니샤가 안타까움을 숨기고 미소 지었다.


“이젠 괜찮아. 나는 이사벨라가 여자애인 게 좋거든.”

그건 이사벨라가 여자애로 살 수 있도록 안전하게 지켜주겠다는 의미였다.

레니샤가 이사벨라의 등을 톡톡 쳤다.


“린데이가 차를 끓이는 걸 가르쳐줄 거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린데이가 이사벨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사벨라가 군말 없이 그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

다시 카시우스와 레니샤만 남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다 똑같은 눈을 가졌나 봐요, 카시우스. 이사벨라도 카시우스가 예쁘다잖아.”

“……세뇌하신 겁니까?”

“설마. 나를 그렇게 악당으로 봤나요?”

“어젯밤 같은 침대에서 잤으니 충분히 할 만한…….”

이게 무슨 헛소리람. 카시우스가 얼굴을 문질렀다.

레니샤와 있으면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이렇게 헛소리를 하게 되곤 했다.

카시우스가 혀를 짧게 찼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곤란함을 알아차리고는 웃음 지었다.


“우리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카시우스가 손을 내리고 레니샤를 보았다.


“내 아버지의 기사단에는 황제의 눈이 있었어요.”

“……압니다.”

그렇기에 전황을 알 수 있었고 로테라 공작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그들은 내 손에 죽었습니다.”

카시우스가 황금빛 눈동자를 번뜩이며 말했다.

그 순간은 레니샤 앞에서 바보 같아지는 남자가 아니라 전쟁터의 백전노장이 된 듯했다.

슈르륵.

카시우스의 뺨을 타고 붉은 비늘이 돋았다가 사그라들었다.


“나는 그들을 군법으로 다스렸습니다. 그리고 수하 기사들에게 주군을 배신하면 어떤 응징을 받는지 보게 했지요. 로테라 공작께서는 뛰어난 기사셨습니다. 그렇게 허망하게 가실 분이 아니셨습니다. 은혜도 모르는 짐승 같은 자들을 휘하에 둘 수는 없었습니다. 내가 데리고 있는 기사들은 아무도 나를 배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함께 전장에서 굴렀고 황제의 참혹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자신의 사냥개를 버리는지도 보았지요.”

레니샤가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다행히 카시우스는 레니샤가 생각했던 것보다 뛰어난 자인 듯싶었다.

카시우스가 기사들의 신병을 장담하니 레니샤도 믿을 생각이었다.


“그들을 믿으시니 나도 믿겠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정말 많습니다.”

카시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내가 움직이면 황제는 다시 내게 주목할 겁니다. 하지만, 카시우스가 움직이면 황제는 무시하겠죠. 미안하지만 황제는 카시우스를 별 볼일 없는 노예 기사라고 여기고 있을 테니까.”

카시우스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사실로 받아들인 것이다.

레니샤는 그 점이 조금 놀라웠다.

카시우스는 열등감이나, 혹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부끄러움이 조금도 없는 듯했다.

그만큼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다는 거다.

저런 단단함을 갖추기는 힘들었다.

카시우스는 보이는 것만큼이나 내면도 단단한 사람인 것 같았다.


“밖으로 나가 내가 말한 사람들을 만나세요. 그들에게서 힐로샤인으로의 지원을 얻어내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를 도와주려 할까요?”

“할 거예요.”

레니샤가 손을 뻗어 단정하게 테이블 위에 올려진 카시우스의 손등을 덮었다.

카시우스가 눈을 크게 떴다.

레니샤는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카시우스에게 닿는다.

카시우스가 입술을 잘근 물었다.

고작 그것만으로도 카시우스는 레니샤에게 포박된 인질이 된 것 같았다.

카시우스가 뻣뻣하게 굳어서 레니샤를 응시했다.


“그들은 이 황실의 미래를 보았어요. 카나리아는 멍청하고 황후의 자리는 비어 있죠. 카나리아만이 남은 황실이 제 기능을 할까요?”

레니샤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똑똑한 귀족들은 그것을 알아차렸죠.”

“……그렇다고 해도 당신은…….”

“그들은 내가 쫓겨났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카시우스. 내가 한 수 물러줬다고 생각하지. 다음을 위해서. 나의 몰락은 그들의 몰락이기도 해요. 그리고 더 나아가 히엔트리의 몰락일 수도 있지요. 그게 내가 지난 시간 동안 황성에서 쌓아온 것들이에요.”

레니샤는 반짝 빛이 났다.

그녀는 자신이 해온 일들에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카시우스는 홀린 것처럼 레니샤를 보았다.

봄을 닮은 눈동자도, 불빛을 담아 일렁거리는 백금발도.

레니샤를 이룬 색들은 여리기 짝이 없는데 그녀는 여전히 히엔트리를 이끄는 지배자였다.

모든 게 레니샤의 말대로 될 것 같았다.


“……레니샤가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착하군요.”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카시우스가 손을 내려 다른 손으로 제 손을 감쌌다.

불길이 붙은 기분이었다. 레니샤는 아무렇지도 않게 카시우스를 불태웠다.

레니샤가 미리 준비해두었던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세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개중에 카시우스의 눈길을 끄는 이름이 있었다.


“샴디르의 왕자……?”

이 남자를 왜?

***


 
그는 샴디르에서도 가장 왕을 닮은 남자였다.

하지만, 왕의 자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제 형을 왕으로 만드는 데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왕은 책임져야 할 것이 너무 많았고 참고 인내해야 하는 것들도 많았다.

그는 그런 제약이 싫었다.

메테오는 왕의 방패 뒤에 숨어서 적당한 책임을 지면서 제 할 일을 하면서 사는 게 좋았다.

그런 메테오에게도 지키는 선은 있었다.

바로 가족.

메테오는 그의 왕실을 사랑했고 가족을 사랑했다.

왕 부부는 화목했으며 서로를 아꼈다.

그 아래에서 태어난 자식들도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다.

메테오는 그런 샴디르가 좋았다.

그런 평화로운 왕실에 막내 왕녀가 화를 당할 뻔한 사건은 큰 경각심을 심어주었다.

처음부터 가지지 못했던 것은 탐하지 않았을 것이다.

잃었다고 슬퍼할 까닭도 없었다.

하지만, 메테오와 그의 형제들은 처음부터 유복하고 화목하게 태어났다.

그것을 잃을 뻔한 두려움을 뼛속 깊이 새기게 된 것이다.

막내 왕녀에게 일어난 사건을 알게 된 샴디르의 왕실은 침묵에 잠겼다.

왕과 왕비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고 처음으로 큰 소리를 냈다.

가족 간에 불화가 생겼고 벽이 생겼다.

메테오는 그 불화가 끝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준 레니샤를 향한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다.

레니샤는 막내 왕녀뿐만 아니라 샴디르를 지켜준 것이다.

그리고 메테오의 평화와 안정을 지켜주었다.


“레니샤 황후에게 접근할 방법은 찾아보았느냐?”

히엔트리의 화려한 시가지를 내려다보던 메테오가 찬 목소리로 제 수하에게 물었다.

남자가 고개를 조아리고는 말했다.


“오늘 카시우스 공작이 저택 밖으로 나왔다고 하더군요.”

사실 카시우스의 저택이 허술해 보여도 지금 그곳에 기거하고 있는 자들 대부분은 오랫동안 전쟁터에서 굴렀던 기사들이었다.

그들을 뚫고 카시우스 저택을 염탐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사실 카시우스의 저택을 기웃거린 자는 몇 명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되지 않아서 날벌레처럼 쫓겨났다.


‘아니. 이건 또 뭔데 저택을 기웃거려. 엉? 너! 불쏘시개로 만들어서 벽난로나 쑤시는 신세로 만들어줄까?’

‘요즘은 왜 이렇게 세상이 각박한지. 이 가난한 저택에서 또 뭘 훔쳐가려고! 이리 와, 아주 홀딱 벗겨서 쫓아내줄 테니까!’

어찌나 그렇게 감들이 좋은지.

거기에 건달처럼 손속에는 조금도 자비가 없었다.

염탐꾼들은 전부 강도 취급을 당하며 쫓겨나야 했다.

그런 상황이 되다 보니 저택을 기웃거리는 눈은 사라져버렸다.


“후우.”

그 덕에 메테오도 곤란해졌다.

그나마 카시우스가 문을 열고 나왔다고 하니 그쪽을 통해서 접촉하는 게 좋을 듯싶었다.

카시우스와 레니샤의 관계에 대해서는 모른다.

다만, 카시우스가 히엔트리의 영웅이며 렉서스가 밀어붙인 혼사에 레니샤가 떠밀린 것은 알고 있었다.

렉서스가 미쳐서 제 황후에게 파렴치한 짓을 했다는 것은 거리에도 파다한 이야기였다.

심지어 제국의 백성들조차 제 황제를 비호하려 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로군. 공작에게 접근할 길을 찾아보게. 내가 만나고 싶다고 전하면 돼.”

“네, 왕자님.”

수하가 고개를 조아렸다.


“카시우스 공은 어때 보인다던가? 그 작자를 조사하는 일은 어떻게 되었지?”

“기사들 사이에서 평판은 좋은 편인 것 같았습니다. 그를 따라온 기사들만 백이 넘으니까요.”

그 덕에 카시우스의 저택은 지금 기사 소굴이었다.


“그리고 여자 문제는?”

“없었습니다.”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메테오가 방 안을 서성거렸다.


“공이 좋은 사람이라면 다행이지만…….”

아니라면.

만약 레니샤가 저택에서 나올 수 있기만을 바라고 있다면.

메테오는 레니샤의 소원을 들어줄 수밖에 없으리라.

메테오는 은혜를 갚기 위해서 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것이니 말이다.

메테오는 레니샤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전율했던 것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레니샤는 고고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강건하고 아름다웠다.

메테오는 내면적인 강함이 진정한 강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온갖 치욕 속에서도 절대로 꺾이지 않는 결기도 중요한 덕목이었다.

레니샤는 그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레니샤는 렉서스의 옆을 지키며 이용당할 허수아비 인형이 아니었다.

레니샤는…….


“바란다면 황후께서 바라시는 삶을 살 수 있게 도와드려야겠지.”

그것이 메테오가 은혜를 갚는 방식이었다.

레니샤에게 어울리는 고귀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돕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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