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예뻐서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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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예뻐서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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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예뻐서 좋아
2022.07.12.
하녀는 이사벨라의 목욕이 끝나고 나서 꽤 시간이 흐른 후에야 돌아왔다.
마담 투리엘이 응접실에서 대기하고 있는 동안 이사벨라는 여의사의 진찰을 받았다.
레니샤가 차가운 얼굴로 그 모든 것을 응시했다.
“등에 상처가 깊습니다, 아가씨.”
“으응…….”
이사벨라가 무언가 죄를 지은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불안한 듯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아이의 모습에 레니샤의 마음이 찢어졌다.
항상 당당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솔직한 아이였다.
누구나 사랑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늙은 여의사의 눈동자에 안쓰러움이 서렸다.
고귀한 가문의 아가씨인 것이 분명할진데 아이는 움츠러들고 겁먹은 상태였다.
눈치를 살피며 우물거린다.
사랑받으며 자란 아가씨라기에는 무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노의사가 이사벨라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어떻게 다치신 건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낫게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진짜? 흉터를 없애줄 수 있어요?”
“완전히는 아니어도 옅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아직 아가씨는 자라는 중이시고 세상엔 좋은 약이 많으니까요.”
이사벨라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것을 지켜보던 레니샤가 멈칫했다.
‘상처였겠구나.’
그제야 알았다. 아이에게 그 상처가 어떤 의미일지.
한참 섬세할 나이였다.
본디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였으니 흉터가 다른 아이들보다 더 큰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처를 보면서 그날의 공포를 되새겼겠지.
레니샤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이사벨라가 놀라지 않게 레니샤는 다시 태연한 척 차를 마시고 책을 읽는 척했다.
여유로운 것처럼. 이사벨라가 항상 봐왔었던 레니샤의 모습대로.
“……검에 다쳤어요. 독이 발라져 있었다고 들었어요. 치료해준 의사 할아버지 말로는 열흘 동안 열이 올랐었대요. 등의 상처 때문에 붕대를 감고 살다보니까 사람들이 나를 남자앤 줄 알았어요. 등을 베일 때 머리도 엉망으로 잘렸었거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이렇게 잘랐어요.”
이사벨라가 제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그랬어요. 그냥 남자애로 사는 게 나을 것 같다고.”
“기억을 잃은 척했던 것은?”
레니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사벨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니샤를 보았다.
이사벨라가 또박또박 대답했다.
“엄마가 만약 위험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레니샤가 씁쓸한 웃음을 차와 함께 삼켰다.
“잘했다.”
이사벨라가 고개를 끄덕이곤 환하게 웃었다.
노의사도 이사벨라를 다독였다.
“잘하셨어요, 아가씨. 기특하십니다.”
“그러면 이제 상처를 옅게 만들 수 있어요?”
“예. 제가 약을 지어드리겠습니다. 그걸 매일 두 번씩 바르시면 됩니다. 잘하실 수 있으시지요?”
“네!”
“이사벨라. 가서 옷을 갈아입고 와. 옷을 새로 사왔어. 보라색을 좋아했었지?”
이사벨라가 볼을 붉혔다.
레니샤는 여전했다.
이사벨라가 13세, 레니샤는 24세.
겨우 11세 차이밖에 나지 않는 조카와 고모 사이였다.
그러다 보니 한 자매처럼 자랐다.
이사벨라는 제 부모에게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레니샤에게는 잘도 털어놓곤 했었다.
레니샤가 황후가 된 이후에는 그런 교류도 점점 줄어들어갔지만.
이사벨라가 레니샤를 힐끗 보았다.
오랜만에 보았는데도 레니샤는 여전한 것 같았다.
어느 그림책에서 나온 것처럼 예쁜 것도 그랬고…….
이사벨라에게는 유독 누그러지던 말투도 여전했다.
“드레스?”
“그래. 갈아입을래?”
그간 남자애 행세를 하면서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사벨라가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네.”
다시 드레스를 입을 수 있는 날이 오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이사벨라가 린데이의 손을 잡고 나가는 것을 확인한 레니샤가 여의사에게 물었다.
“다른 데 상한 곳은?”
“기사들이 먹는 음식들이 아가씨에게는 부족했을 수 있습니다. 영양이 부족한 상태이신 걸로 보입니다.”
지끈.
분노와 함께 찾아온 옅은 두통에 레니샤가 이마를 문질렀다.
“그리고?”
“등의 검상 외에는 크게 다치신 곳은 보이지 않습니다.”
“……고맙네.”
“아닙니다.”
“우리는 곧 이 제도를 떠날 걸세. 힐로샤인으로 갈 생각이지. 혹여, 그대가 생각이 있다면 우리와 함께 가지 않겠나?”
“……아가씨에 대해서 발설할 일은 없을 겁니다. 얼마 남지 않은 생을 걸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저에게는 숨이 끊어질 때까지 돌봐야 하는 이곳 거리의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 애들을 위해서 선처를 베풀어주십시오.”
노의사가 허리를 깊게 숙였다.
레니샤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런 것이 아니네. 은인을 해할 정도로 막돼먹진 않았어. 그저 아이를 돌봐줄 좋은 의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뿐이야. 상처가 많은 아이라서 신경이 쓰이는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마담 투리엘의 의상실을 찾아가게. 약은 거기에 두면 되고 그이가 보수를 챙겨줄 걸세.”
“네, 부인.”
노의사가 물러가고 레니샤가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레니샤의 곁을 지키던 시녀들이 걱정스러운 낯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레니샤가 느리게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길 반복했다.
처음부터 멀쩡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족하다고.
하지만, 직접 마주하고 나니 심장이 뜯겨나가는 기분이었다.
‘문을 여는 것이 아니었어.’
은혜를 모르는 짐승을 안으로 들이는 실수를 범한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럽다.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던 어린 치기가 아니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레니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래, 은혜는 함부로 베푸는 것이 아니지.”
어쩌면 노의사의 삶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니샤가 차게 웃었다.
***
“여자애였다고?”
“여자애? 누가?”
“테샤가! 테샤가 여자애였대.”
“말도 안 돼!”
기사들이 고개를 저었다.
테샤의 정체를 알고 나서 가장 먼저 기겁을 한 것은 단연 기사들이었다.
그간 테샤가 어떠했던가.
기사들과 섞여서 노숙을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다람쥐처럼 뽈뽈거리며 수련장을 돌아다니기도 했었다.
과하게 수줍음을 타기는 했지만, 아직 어려서 그러겠거니 했었다.
“내가 등 밀어주겠다고 했을 때 어쩐지 싫다고 하더라!”
“뭐? 너 아가씨에게 그런 말도 했었단 말이야?”
“나는 화장실 같이 가자고 했었는데…….”
“뭣!”
“나, 나는 여자 친구를 사귀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하얗게 질린 기사들이 숙연해졌다.
“테샤가 아니라 이사벨라라고 하더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카시우스가 말했다.
“흐억!”
갑자기 나타난 카시우스 덕에 기겁한 기사들이 벌떡 일어나거나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수련장에 때 아닌 작은 소란이 일었다.
삐딱하게 서 있던 카시우스가 손에 들고 있던 사과를 베어 물었다.
카시우스가 여상한 얼굴로 덧붙였다.
“정확히 말하면 이사벨라 아가씨지. 로테라 가문의 딸이니 말이야.”
“예?”
“로테라요?”
“그 로테라요?”
여기 기사들은 대부분 로테라 가문에 제 목숨도 내어줄 이들뿐이었다.
보통 기사들은 뛰어난 검술을 쓰거나 힘이 강한 이들에게 복종하길 마련이다.
게다가 뛰어난 리더십도 갖추었던 로테라라니.
전쟁에 한 번이라도 로테라 공작과 함께 출전했었던 기사들은 하나같이 그를 신화화하거나 영웅처럼 여기곤 했었다.
기사들이 놀란 얼굴로 넋을 빼는 것을 보곤 카시우스가 씨익 웃었다.
“어쩌면 좋아, 그래. 귀한 아가씨께 그런 무례들을 범했으니.”
기사들이 현실을 부정하는 사이 테리언이 달려왔다.
“카시우스 공!!”
“왜.”
카시우스가 고개를 삐딱하게 돌리곤 반문했다.
손에 들고 있던 사과의 잔여물을 대충 수련장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 카시우스에게 테리언이 말했다.
“부인께서 찾……!”
굳이 뒷부분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다.
카시우스는 이미 기사들을 놀리던 것을 그만두고 자리를 떠났으니까.
테리언이 떨떠름한 얼굴로 바람처럼 사라진 카시우스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옹기종기 모여 있던 기사들이 테리언에게 매달렸다.
“정말로 테샤가 아가씨야?”
“아니라고 말해!”
“예쁘던데.”
테리언이 한 마디로 못을 박았다.
“드레스도 잘 어울리고.”
그리고 확인 사살까지 마쳤다.
기사들이 현실을 부정하며 바닥에 널브러지는 것을 보곤 테리언이 낄낄거렸다.
***
레니샤의 곁에는 인형처럼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테샤가 앉아 있었다.
‘아, 이제는 이사벨라지.’
카시우스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레니샤가 가리킨 의자에 착석했다.
바른 자세로 앉은 카시우스를 가리키며 레니샤가 아이에게 말했다.
“카시우스 공과 나는 결혼했어, 이사벨라.”
레니샤가 이사벨라가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말했다.
이사벨라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 그럼 고모님은 더 이상 황후 폐하가 아니에요?”
“맞아. 더 이상은 그런 무서운 사람이 아니지.”
레니샤가 생긋 웃었다. 이사벨라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그러면, 그러면…… 고모님 말고 고모해도 돼……?”
어릴 적처럼 말을 늘리며 눈치를 보는 이사벨라에게 레니샤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다가가기 힘든 누군가보다는 친구 같은 이가 되어주고 싶었다.
이사벨라가 언제든지 기댈 수 있도록.
“그래.”
“나는 고모님보다 고모가 더 좋아. 고모랑 같이 살 때가 더 좋았어.”
이사벨라의 말에 레니샤가 웃음을 머금었다.
“나도 그랬어, 이사벨라. 네가 없으니까 심심하기도 했고…… 우리 못생긴 토마토가 얼마나 자랐는지도 궁금했고.”
“이제는 토마토 아니야! 엄마가 이제는 아가씨 다 됐다고 했는데.”
이사벨라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새초롬하게 레니샤를 노려보는 눈빛은 어릴 적 그대로였다.
레니샤가 하녀들이 정성껏 리본을 둘러놓은 아이의 머리통을 손으로 쓱쓱 쓰다듬었다.
레니샤가 가만히 앉아 있던 카시우스를 가리키고는 이사벨라에게 물었다.
“카시우스는 어때?”
“응?”
“네 고모부로 말이야.”
갑자기 쏠린 시선에 카시우스가 어정쩡하게 웃었다.
그간 이사벨라에게 잘못한 것이 있나, 없나 떠올리게 된다.
‘없는 것 같긴 한데…….’
한 번 울리기는 했었다.
물론, 그것도 카시우스에게는 어떤 의도도 없었지만 말이다.
왠지 모르게 긴장감이 밀려왔다.
그간 이사벨라와 알고 지내온 시간이 있는데도 그냥 처음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사벨라가 살짝 웃었다.
“나는 카시우스 경 좋아!”
“이제는 카시우스 공이야, 이사벨라.”
“정말?”
“그래. 로테라 공작이 되었지.”
“……로테라는 우린데.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지금은 몰라도 돼. 그냥 카시우스가 고모부로 어떤지만 물은 거야. 카시우스가 왜 좋은데?”
이사벨라의 시선이 다시 카시우스에게 향했다.
카시우스가 미소를 지은 채로 얼어붙었다.
이런 심사를 받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다.
“……예뻐서 좋아.”
이사벨라가 수줍은 얼굴로 속삭였다.
레니샤는 웃음을 터뜨렸고 카시우스는 멍하니 얼어버렸다.
레니샤와 이사벨라는 한 핏줄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