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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요조숙녀 (27/135)


27화. 요조숙녀
2022.07.01.



 
테리언이 벙한 표정으로 제 앞에 선 사람을 응시했다.

레니샤 로테라.

황후의 관을 벗어 던진 이 제국의 황후.

테리언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게 로테라를 신봉하더니 결국 카시우스가 일을 저지른 건가?

어제 밤새 돌아오지 않았던 것은 이런 미친 짓을 저지르려고 그랬던 것일지도.

테리언이 고개를 돌려 카시우스를 응시했다.

테리언이 카시우스를 끌어당겼다.

무례인 것은 알고 있지만, 레니샤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을 해야 했다.

레니샤와의 거리를 확보한 테리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치신 겁니까!”

“뭐?”

“결국 황후 폐하를 데리고 도망치시려는 겁니까? 우리 다 같이 죽자는 거냐구요!”

“그럴 리가.”

카시우스가 짧게 고개를 저었다.


“드디어 나는 공작이 되었고 힐로샤인도 내 차지가 되었지.”

카시우스가 잠을 자지 못해 피곤한 얼굴로 손에 들고 있던 양피지를 테리언에게 내밀었다.

테리언이 미심쩍은 눈으로 카시우스를 보고는 그것을 펼쳤다.

카시우스가 말한 대로 그는 공작이 되었다.


“그리고 자네 말대로 황제는 나를 결혼시키려는 속셈이고. 이 모든 게 황제가 주도하는 연극판이란 소리야.”

“……아.”

테리언이 짧게 신음했다.

정말로 짐작한 대로 일이 벌어진 것이다.

황제는 제 아내를 카시우스에게 떠넘겼다.

레니샤는 고고한 표정으로 그녀의 사람들과 황량한 정원에 서 있었다.


“이제 이야기는 끝났나?”

레니샤가 나긋하게 물었다.


“카시우스 경.”

그녀의 부름에 카시우스가 재빨리 레니샤의 곁으로 갔다.

테리언이 그 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충직한 강아지처럼 쫓아간 카시우스가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가십시오. 누추하지만 편히 머무르시길 바랍니다.”

레니샤가 눈웃음을 지었다.

카시우스의 가슴에 봄바람이라도 불러일으키려는 것처럼 환하게.


“그래. 누추한 곳에 실례를 하지.”

장난스럽게 말한 레니샤가 제 사람들과 엉망진창인 저택으로 들어갔다.

테리언이 가만히 생각했다.


‘이건 꿈이야.’

 

***

테샤가 발을 동동 굴렀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대체 왜 여기에 레니샤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상황에 머릿속이 하얗게 바라는 것 같았다.

테샤가 발끝을 응시했다.

레니샤가 왔다. 테샤가 있는 곳으로.

***

별것 아니었던 저택은 빠르게 정돈되어 갔다.

레니샤와 함께 온 사람들은 능숙하게 제가 해야 할 일을 찾아갔다.

저택에 기거하던 기사들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수련장으로 뛰쳐나왔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기사들이 머리를 맞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테리언과는 달리 짐작도 못했던 이들이라 혼란은 더 가중되었다.


“황후라던데.”

“황후?”

“로테라의 공녀?”

“그 여자가 여길 왜?”

“설마 카시우스 경이…… 아니. 카시우스 공이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자네는 공작 전하라고 불러야지!”

“세상에.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기사들이 머리를 움켜쥐었다.


“저택에 여자들이 늘어났어.”

“이제 여기서 함께 지낼 거라던데?”

“아니야. 곧 떠날 거라고 하더군.”

“뭐?”

“영지를 하사받았다지 않나. 거기로 가겠지!”

“아무튼 저택에 여자들이 늘어났어.”

기사들이 동시에 숙연해졌다.

가끔 방문하던 마담 투리엘과 그녀의 직원들과는 또 달랐다.

저들은 여기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갈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떠나게 될 영지에서도 그렇게 되겠지.

여러 가지로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수련장에 기사들을 혼란으로 밀어 넣은 이들 중 하나인 시녀장이 등장했다.


“여기가 수련장이군요.”

“으갸아아악!”

“으아악!”

짐작하지 못한 등장에 기사들이 벌떡 뛰었다.

괴성을 지르며 수련장 끝으로 몰려가는 기사들을 보며 린데이가 무심하게 생각했다.


‘초원에서 목동에게 쫓겨 다니는 양들 같군.’

양이라기에는 과하게 건장하고 커다랬지만.

린데이는 왠지 이 저택이 마음에 들었다.

레니샤는 저택의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길 원했다.

린데이는 카시우스와 레니샤의 허락을 받고 온 저택을 둘러보고 있는 중이었다.

전체적으로 낡았지만, 오래된 역사를 가진 저택이었다.

잘만 가꾸면 수도의 타운하우스로서 역할을 다해줄 것이다.

바로 떠나진 않는다고 들었다.

그동안 이 저택을 손보고 뜯어고칠 수 있으리라.

게다가 저기 이 저택을 위해서 소매를 걷어줄 건장한 양들이 있지 않은가.

린데이가 양들을 쫓는 늑대의 미소를 지었다.

***

테리언이 기묘한 표정으로 카시우스와 레니샤를 응시했다.

카시우스는 레니샤의 곁에 붙어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레니샤를 지키는 케르베로스 같았다.

지옥을 지킨다던 괴물 개 말이다.

간략한 인사도 주고받았고 사이에 찻잔을 두고 앉아 있는데도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는다.

곱게 꼬까옷 입혀서 연회에 보내놨더니 다음 날이 되어 엄청난 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테리언이 침을 꿀꺽 삼켰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들어 올린 테리언이 정신을 차린 것은 차를 마시고 난 직후였다.


“어……? 맛있습니다.”

“그래? 다행이로군.”

레니샤가 생긋 미소 지었다.


“……이게 이런 맛을 내는 거였군요.”

묘한 얼굴로 잔을 내려놓은 테리언이 목을 가다듬었다.


“갑작스러운 일에 놀랐을 걸 아네. 누구나 이 상황에 처하게 되면 그리되는 법이지. 자네에게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나?”

“말씀하십시오.”

아직 뭐라고 불러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무튼 테리언의 안주인이 될 사람이었다.

무려 레니샤 로테라가.

돌아가신 로테라 공작께서 가호하시길.


“수도가 돌아가는 꼴을 확인해야겠네. 우리는 여기에서 이 주 정도 머물 작정이야.”

카시우스와 테리언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혼란을 정리하고 떠날 준비를 해야겠지. 발이 빠르고 입이 무거운 기사를 마담 투리엘에게 보내주게. 투리엘이 귀족들의 반응을 파악해서 알려줄 거야.”

“네.”

“그리고 자네가 나서서 기사들을 다독여주면 좋을 것 같군. 그들에게 지금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테니.”

“그리하겠습니다. 그런데…… 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요. 제가……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테리언은 이처럼 멍청한 질문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꼭 확인해야 할 사항이기도 했다. 레니샤가 미소를 머금었다.


“카시우스가 공작이 되었으니 나는 공작 부인이 되겠지. 공작 부인이라고 부르게.”

“예, 공작 부인.”

테리언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무거운 엉덩이를 의자에서 떼어내 이 어색함에서 도망쳤다.

레니샤가 시킨 일을 한다는 핑계로 말이다.

그렇게 응접실이라고 마련된 곳에는 레니샤와 카시우스만이 남게 되었다.

다른 이들은 레니샤가 지낼 침실을 치우고 있었다.

황후궁에서 기거하던 사람들 대부분이 이곳으로 왔다.

주방장은 주방으로 갔고 황후궁의 정원사는 정원으로 갔으며 마구간 지기는 마구간으로 갔다.

다들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으니 레니샤도 제 자리를 찾아가야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정리를 해야지.”

레니샤가 피로가 누적된 얼굴을 카시우스에게로 돌렸다.


“……일단은 쉬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전에. 경은…… 아니. 나부터 고쳐야겠군.”

레니샤가 멋쩍음에 제 볼을 긁적였다.


“……공작. 흠.”

기억을 더듬어 어머니가 아버지를 뭐라고 불렀는지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벌써 9년이 지난 일이다. 모든 것이 아득했다.

레니샤는 보통 아내가 남편을 부르는 호칭들을 떠올려 보았다.


“여보.”

카시우스가 숨이 턱 막힌 표정을 지었다.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부군.”

카시우스가 입을 떡하니 벌렸다.

얼굴이 저도 모르게 새빨갛게 변했다.

저 말을 들으니 정말로 레니샤가 그의 아내가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는 것이다.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법적인 문제도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아직 카시우스가 적응하지 못했다.

고민을 하며 고개를 갸웃하는 레니샤가 현실처럼 느껴지지도 않는 상황이었다.


“이것도 별론가. 카시우스? 카시우스 공. 모르겠군.”

“카시우스!”

카시우스가 목 졸린 목소리로 외쳤다.


“그냥 카시우스면 됩니다.”

“그래?”

레니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으로 고민하고 있었던 듯 골똘히 생각하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카시우스. 카시우스…… 보통 애칭을 사용하기도 한다더군. 이름자를 따서 만든 애칭을…… 카시. 카스. 카우. 시스. 키스. 키스?”

단어들을 나열하던 레니샤가 재밌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키스는 어떤가?”

카시우스가 빨갛게 익어버렸다.


“그, 그런 남사스러운 호칭이라니. 차라리 없는 사람 치십시오!”

“카시우스는 말이야…….”

레니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카시우스는 레니샤가 입을 벌리는 것이 무서웠다.

또 어떤 파멸을 불러일으킬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카시우스가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요조숙녀 같아. 수줍음을 잘 타는군.”

이것 봐.

카시우스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번에도 파괴적인 말이었다.

지금 이걸 테리언이 들었다면 10년간 놀림감이 되었을 것이다.

정말로 이 수도에, 그리고 레니샤에게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카시우스가 심호흡을 하고는 손을 내렸다.

그 순간,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이가 보였다.

열려 있는 문 앞에 테리언이 석상처럼 서 있었던 것이다.

테리언이 입술을 달싹였다.


 


“요조숙녀……?”

욕설이 절로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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