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긴 밤이 지나고
(26/135)
26화. 긴 밤이 지나고
(26/135)
26화. 긴 밤이 지나고
2022.06.28.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전쟁터에서는 수도 없이 밤잠을 이루지 못했었지만, 이런 식은 처음이었다.
레니샤는 말없이 내내 책을 읽었고 카시우스는 그 앞에서 책을 뒤적이는 척하며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황제의 침실을 뒤져서 찾아낸 책들이었다.
미친놈이 침대가에 두고 읽는 책치고는 꽤 멀쩡했던 것도 충격이었다.
<히엔트리를 일으킨 위인들>
<올바른 황제란 무엇인가>
<누군가는 황제가 되고 싶었다>
레니샤는 침대 밑에서 그 책들을 발견하고는 피식 웃었었다.
책들을 꺼내는 것은 카시우스의 몫이었다.
사실상 제목부터가 불호였는데 레니샤는 재밌게 읽고 있었다.
“……정말 태연하시군요.”
카시우스가 동이 터 오는 하늘을 보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레니샤는 카시우스에게 지루하면 자도 된다고 말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수로 잠이 든단 말인가.
인생을 도둑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갑자기 당한 이상한 청혼에, 결혼 확정까지.
게다가 그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아내로 낙점된 신비롭고 이상한 밤이었다.
그리고 그 밤이 지나 이제는 새로운 아침이 밝으려 하고 있었다.
어제 있었던 일을 꿈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정신이 또렷했다.
지금 당황스러운 건 카시우스뿐인 것 같아서 어느 정도는 억울하기도 했다.
툭 하고 던진 말에 레니샤가 책에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 책들은 여기에서밖에 볼 수 없거든.”
“그게 무슨 말입니까?”
“황제가 금서로 지정하고 불태워버린 책들이지. 대부분 렉서스하고는 궤도를 달리하거든. 현 황제는 공포 정치로 이 제국을 다스리고 있어. 급진주의자들이나 읽을 만한 이런 책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지. 집권 초기에 전부 불태워버렸을걸?”
“그런데 왜 이걸…….”
“모르지. 황제가 그 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황제는 바닥을 기는 능구렁이처럼 교묘해.”
레니샤는 웃는 낯으로 황제를 비하했다.
“미친 척하며 사람들을 몰아붙여서 결국에 모든 걸 제 뜻대로 되도록 만들지. 황제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이 제국이 잘만 굴러가는 이유야.”
긴장이 풀린 것인지 레니샤가 별말을 떠들어 댔다.
카시우스가 책을 뒤적였다.
카시우스는 이것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레니샤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이해할 순 없었다.
다만, 정치적 성향의 문제라는 건 이해했다.
약간 심술이 돋기도 했다.
지금처럼 렉서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누그러져 보이는 레니샤는 처음이었다.
“동이 트는군. 곧 저 문이 열릴 거야. 카시우스 경. 저 문이 열리고 나면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없게 되지.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지.”
“어떤 기회 말씀이십니까?”
“내게서 도망칠 기회.”
레니샤가 잔잔히 웃었다.
여명에 비친 해사한 얼굴 위로 새벽의 그림자가 졌다.
레니샤는 웃고 있는데도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한번 시작한 일은 멈추지 않을 생각이야. 기어이 끝을 보고 렉서스와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겠지.”
가녀린 몸체를 감싼 가느다란 백금발도, 여린 봄빛을 담은 눈동자도.
레니샤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연약한데 지금 레니샤는 군신처럼 보였다.
전쟁터를 수호하는 여신 같기도 했다.
반드시 승리를 취하고야 마는 전쟁의 신 말이다.
“……멈추지 마십시오.”
카시우스가 저도 모르게 홀린 것처럼 말했다.
“그 길을 계속 가십시오. 제가 뒤에 있겠습니다.”
“…….”
카시우스는 지금 레니샤를 통해서 로테라 공작을 보고 있었다.
한번 시작한 일을 멈추지 못하는 것은 로테라 공작도 마찬가지였었다.
레니샤는 역시 로테라 공작의 딸이 맞았다.
“남편으로서, 그리고 지지자로서 그 뒤에 서겠습니다.”
“경은 정말로 친절해.”
레니샤가 녹아내린 목소리로 내뱉었다.
“제가요?”
“다른 이들에게는 몰라도 내게는 참 친절한 편이지.”
레니샤가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지루한 밤을 견디기 위해서 손에 쥐었던 책이었다.
하지만, 이 책보다 레니샤의 신경을 끈 것은 카시우스였다.
빳빳하게 굳어 앉아서는 레니샤를 힐긋거리는 카시우스 말이다.
여전히 그들 사이에는 꽤 큰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두 사람 중 아무도 그것을 넘을 생각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사이의 거리가 친절하지 못한 것 같아. 우리는 어차피 부부가 될 사이 아닌가? 이렇게 모르는 이들처럼 마주 보고 떨어져 앉는 것은 부부로서는 어울리지 않아.”
“황후 폐하.”
카시우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황제께서 그렇게 마음을 먹으셨고 기어이 그렇게 될 일이라고 해도 아직 황후 폐하께서는 제 아내가 아니십니다. 저는 어떤 치욕도 황후 폐하께 안겨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카시우스가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는 레니샤의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 사교계에, 그리고 레니샤에게 너무나 안 어울리는 남자였다.
레니샤와 잘 어울린다고 말하기엔 그는 너무 때묻지 않았다.
이미 바닥도 찍어본 레니샤에게 카시우스가 가당키나 하겠는가.
“……경은 반드시 바라는 건 뭐든 얻게 될 거야. 심지어 이혼까지도.”
“이혼이라고 하셨습니까?”
카시우스의 금빛 눈동자에 경악이 서렸다.
세상에 태어나 그런 불경한 단어는 처음 들어봤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카시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 바람에 카시우스의 붉은 머리카락이 그의 감정만큼이나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런 건 없을 겁니다, 폐하. 제가 폐하께 그런 요구를 할 일은 없을 테니…….”
카시우스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그런 말은 안 하시기로 약속해주십시오.”
이번엔 레니샤가 놀란 표정을 할 때였다.
레니샤는 영원을 믿지 않는다.
그런데도 확신으로 가득 찬 카시우스를 보고 있자니 믿고 싶어졌다.
카시우스만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력해보지.”
그제야 카시우스가 누그러진 미소를 머금었다.
아침이 왔다.
끝없이 풀어지는 실타래처럼 긴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다.
렉서스가 준비한 연극이 절정에 이르렀다.
“이런.”
렉서스가 야살스럽게 웃었다.
“내 침실에서 이게 무슨 짓이지? 말해보게, 황후.”
***
레니샤가 무심한 눈길로 시종장을 응시했다.
시종장이 송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황후 폐하…….”
“나는 괜찮으니 괘념치 말게.”
“황후 폐하, 이럴 수는 없는 일이온데…….”
시종장의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눈물을 터뜨린 것은 황후궁의 시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시종장이 허리를 깊게 숙여 고개를 조아렸다.
그다음 손에 들고 있었던 양피지를 펼쳤다.
폐위 교서였다.
<황후 레니샤가 부정을 저질렀다.
나는 이 사실에 통탄을 금치 못했으나, 황후와 제국의 영웅 카시우스를 한 번 용서하고자 한다.
황후를 폐위한다.
레니샤는 앞으로 카시우스의 아내가 되어 살아가라.
레니샤는 로테라 공작위를 수여받은 카시우스의 아내가 되어 레니샤 로테라가 될 것이며 황후로서 어떤 권한도 주장할 수 없으리라.>
레니샤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모든 것을 레니샤에게 떠밀다니. 렉서스는 예상만큼이나 파렴치하고 비열하다.
렉서스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사람들은 알 것이다.
고고한 레니샤를 황제가 어떻게 끌어내렸는지 말이다.
<하나, 나는 지난 10년간 황후로 살아온 레니샤의 헌신을 기억한다.
나는 황후와 카시우스 경의 새로운 출발을 축복하는 의미로 죄인들의 죄를 사한다.
죽은 죄인들의 사체는 예의를 갖춰 황후의 품으로 돌려보내 줄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가납하길 바란다.>
시종장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금만큼은 레니샤의 입술도 떨리고 있었다.
레니샤의 분홍색 눈동자 속에 다시 한번 분노의 불씨가 튀었다.
‘빌어먹을 새끼.’
시종장이 황망한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이 비이상적인 상황에서 오로지 황제만이 태연했다.
<또한, 황후궁의 식솔들을 데리고 떠나라.
유능한 황후궁 식솔들을 내리는 것이니 황후의 앞길에 도움이 될 것이 당연하다.
이 또한 황후의 앞길을 축복하는 나의 마음이다.
황후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나는 황후의 모든 것을 용서하고 가납하기로 하였다.
그러니, 황후 또한 이곳에서의 일들은 전부 잊고 행복한 새 출발을 하길 바란다.>
시종장이 눈물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죄송합니다…….”
“그대가 내게 미안할 것이 뭐가 있지? 그건 그대의 뜻이 아닌데.”
레니샤가 고개를 작게 저었다.
그다음 고개를 돌려 황후의 침실에 북적거리며 몰려든 이들을 바라보았다.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황후 폐하, 이럴 수는 없습니다. 그 누구도 폐하께 이럴 수는 없습니다. 그간 폐하가 안 계셨더라면 이 제국은 진작에 망했을 겁니다……!”
“그런 말은 말아, 린데이. 나 때문에 그대들까지 휘말리는군. 떠날 자는 떠나도 좋네. 그리고 나를 따르고 싶은 자가 있다면 함께 가도 좋고.”
“저는 황후 폐하께서 가시는 길이라면 가시밭길이라도 흔쾌히 갈 것입니다!”
린데이 시녀장을 필두로 대부분의 사용인들이 레니샤를 따를 것을 선언했다.
레니샤가 쓰게 웃었다.
황성에 들어와 레니샤는 남은 것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잃었다고.
그러나, 레니샤에게는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남았던 것이다.
레니샤를 사랑하고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레니샤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래……. 그대들이 있었군.”
레니샤가 읊조렸다.
황제라는 부당함과 마주 싸우고 있을 때 그녀의 뒤를 지키고 서던 자들.
황제는 미쳤다.
입궁한 첫날, 황제는 레니샤에게 경고를 던졌다.
‘황후, 잘 오셨소. 황후는 로테라 가문을 대표해서 온 사람이오. 가문을 지킬 의무가 있는 사람이지. 어떻게 해야 가문을 지킬 수 있을지 잘 생각하면서 지내도록 하시오.’
과거를 떠올린 레니샤가 짧게 웃었다.
레니샤는 가문을 위해 이 황성에 매달렸다.
황제가 방만하게 풀어놓은 것들을 수습해 일을 처리했다.
힘들고 아플수록 더 일에 매달렸었다.
그게 언젠가는 보상받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국은 이것이다.
그러니 언젠가는 레니샤의 마음속에서 시작된 불티가 이 성 전체를 태울 것이라고 믿는다.
‘반드시!’
***
레니샤는 황후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훌훌 벗어 던지고 떠났다.
렉서스가 술잔을 움켜쥔 채로 소파에 기대앉았다.
그의 시선은 테이블 위에 정갈하게 놓인 책에 꽂혀 있었다.
침대 밑에 던져두고는 잊고 있었던 책들이었다.
레니샤의 흔적이었다.
“책을 치울까요?”
헨리가 눈치를 살피며 렉서스에게 물었다.
“아니. 그대로 두게.”
레니샤가 렉서스의 침실에 남긴 유일한 흔적이었다.
렉서스가 차갑게 웃었다.
바라던 대로 로테라의 흔적을 전부 지워냈다.
렉서스를 뒤흔들어대는 레니샤를 먼 곳으로 내쫓아버렸다.
부정한 황후는 다신 황성으로 돌아오지 못하리라.
그런데 왜 이렇게.
울지도 않고 떠났다는 레니샤가 거슬리는지.
렉서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