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교차하는 밤, 낭만, 그리고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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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교차하는 밤, 낭만, 그리고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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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교차하는 밤, 낭만, 그리고 무언가
2022.06.24.
레니샤가 반짝이는 눈으로 카시우스를 보았다.
분홍빛 눈동자가 촛불의 열기로 기이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아니면, 그 속에 든 독기와 악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황후 폐하…….”
레니샤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거기에 협상을 제안하지, 카시우스 경.”
“협상……?”
레니샤의 눈동자에 불티가 번졌다.
“경이 힐로샤인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돕지. 힐로샤인의 가치를 아는 건 지금으로선 나뿐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그곳의 영지민들도 건사하기 힘들 거네.”
카시우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레니샤의 말대로다.
귀족이 되면 삶에 드리워진 불행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더 이상 배곯을 일은 없다고, 이족들을 전부 데리고 와 떵떵거리며 살게 해줄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건 동화 속에나 존재하는 꿈에 불과했다.
여전히 카시우스의 인생은 시궁창 속이었다.
카시우스가 하사받은 땅은 서북부 쪽에 위치한 덩치만 큰 황무지였다.
영지 크기로 치자면 나라의 으뜸이나 모든 것이 부족한 토지였다.
그러나, 그 땅은 로테라 가문의 영지 중 하나였다.
그나마 로테라 가문이 다스릴 때는 영위되던 곳이 황제가 빼앗고 나서는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서북부의 땅, 힐로샤인에 대한 해답을 아는 자가 있다면 지금으로서는 레니샤가 유일하리라.
“……그곳에서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레니샤가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로테라 공작가가 괜히 그 땅을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이 아니야, 카시우스. 거기에는 그만한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지. 황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그저 감춰두었을 뿐이지. 내가 약속하겠네. 힐로샤인을 히엔트리 제국의 최고로 만들어주겠다고.”
카시우스의 눈이 흔들렸다.
사실 더 이상 카시우스에게 답은 없었다.
황제의 말 한 마디에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는 파리 같은 신세 아닌가.
지금의 황제는 다른 이들의 보는 눈조차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짓을 벌인 것까지 생각하면.
사랑스러운 봄꽃의 눈동자와 황금빛 뱀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대신 경은 나를 여기서 데리고 나가주는 거야. 나를 아내로 삼아 보호해줘.”
레니샤가 아내라는 말에 강세를 주었다.
카시우스가 침을 삼키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귓불이 은은하게 붉었다.
“……제가 그래도 되는 거라면.”
레니샤가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카시우스가 뜨거운 불덩이를 삼키는 기분으로 다시 침을 삼켰다.
레니샤가 입을 벌렸다.
그건 마치 꽃잎이 벌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흘러나온 말은 독기로 가득 차 있었다.
레니샤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황제를 죽여줘, 카시우스.”
레니샤의 말에 카시우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데도 긴장이 될 지경이었다.
레니샤가 제 가는 팔목을 들어 보였다.
“이 팔목으로는 무 하나 썰기도 힘들지, 카시우스. 듣기로는 사람의 뼈가 질기고 단단해서 쉽게 베기 힘들다던데. 내가 황제가 개처럼 기게 만들어줄 테니 당신이 그 목을 베는 거야.”
지금만큼은 주변에 듣는 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가셔버렸다.
꽃분홍색 눈동자는 여태껏 어떻게 참았나 싶을 정도로 악의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건 증오심이었다.
레니샤가 드러낸 진심이었다.
그녀는 달콤한 꿈을 꾸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개처럼 기게 만든다……. 마음에 듭니다.”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하지만 레니샤가 말하면 가능할 것 같아 보였다.
카시우스가 생각에 잠긴 사이 레니샤가 피곤이 누적되어 무거운 눈가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붉은 입술이 절로 다물렸다. 그 사이로 작은 신음이 흘렀다.
다시 눈을 뜬 레니샤가 옅게 미소 지었다.
방금 전에 드러났던 피로는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불행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져, 카시우스.”
레니샤가 사늘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나의 불행을 분노로, 복수심으로 수용했지.”
“미련이나 서글픔은 없습니까?”
카시우스가 걱정스레 물었다.
레니샤가 또다시 상처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제가 열불이 날 지경이었다.
레니샤가 깔깔 소리 내 웃었다.
카시우스는 그 속에서 메말라버린 감정을 느꼈다.
감정이 약간의 부스러기조차 남기지 않은 채로 증발해버린 것이다.
“그럴 만한 미련도 없을 법한 사이일 수 있지 않겠어? 난 가장 잔인하고 비참한 방법으로 황제의 목이 꺾이길 바라. 그자의 시체를 내 부모의 영전에 바치는 것이 나의 목표이며 삶의 이유야.”
카시우스의 목울대가 울렸다.
지금만큼은 레니샤의 서글픔이 묻어나는 듯했다.
레니샤는 참 아파 보였다.
“그런 개만도 못한 자식을 남편으로 두고 살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자, 선택해. 카시우스 경. 나를 구해주겠나?”
레니샤가 마지막이라는 듯이 물었다.
카시우스에겐 선택지가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두 사람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동맹이었다.
카시우스에게도 레니샤가 필요했다.
“……좋습니다. 결혼, 하겠습니다.”
레니샤는 구해주겠느냐고 물었는데 카시우스는 결혼이란다.
역시 낭만적인 기사였다.
레니샤가 우아한 자태로 손을 내밀었다.
카시우스가 제게 내밀어진 작고 하얀 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걸 조심스럽게 잡고는 위, 아래로 우악스럽게 흔들었다.
말랑한 감촉에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카시우스가 잡았던 손은 대부분 거친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그러나, 레니샤의 손은 험한 일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던 것처럼 보드랍기만 했다.
레니샤는 카시우스에게 닿는 유일한 보드라움이며, 뜨거움이었다.
이제는 손바닥에 화인이 찍힌 듯했다.
레니샤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아닌가?’
카시우스가 남은 손으로 목덜미를 문질렀다.
“손등에 키스를 하라는 뜻이네. 보통 영애들이나 귀부인들이 손을 내미는 것은 그런 의미지.”
놀란 카시우스가 미묘한 표정으로 손등을 응시했다.
목을 가다듬은 카시우스가 손등에 입술을 꾹 눌렀다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떼어냈다.
고개를 치켜든 카시우스의 금빛 눈동자가 세로로 응축되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손을 놓친 채로 등받이에 몸을 딱 붙였다.
마치 제가 입맞춤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왜 그러지?”
카시우스가 억눌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런 걸 언제나 한다는 겁니까? 영애들을 만나면?”
레니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카시우스의 얼굴이 붉었다.
뜨거운 불구덩이에 들어갔다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레니샤가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생각을 했지?”
사근사근한 목소리에 카시우스가 흠칫했다.
카시우스가 냉큼 손등으로 입술을 가렸다.
이어 고개를 치켜든 카시우스가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정말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나?”
레니샤가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자 카시우스는 눈가까지 붉어졌다.
카시우스가 입술을 거세게 문질렀다.
생크림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향기를 풍기던 살결이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져 나갔다.
맹세코 이런 건 해본 일이 없었다.
레니샤가 명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이 세상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로군.”
카시우스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자 응축되었던 눈이 제대로 돌아왔다.
‘저게 바로 힘의 대가인가.’
카시우스와 붉은 뱀에 대해서는 제국민이라면 들어본 바가 있을 것이다.
카시우스는 ‘붉은 뱀의 기사’였다. 힘을 대가로 제 몸을 내어놓은 영웅.
그런 카시우스가 지금만큼은 미력해 보인다.
카시우스의 입술에서 손등이 툭 하고 떨어졌다.
“……아내가 될 사람이 아니라면 손끝도 스쳐선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카시우스는 아주 고릿적 시대에 살다오기라도 한 모양이다.
레니샤가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낭만적인 교육을 받았군.”
레니샤는 항상 고고했다.
가장 높은 곳에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서 있었다.
“나도 그런 낭만을 좋아하는 편이야.”
그런데 지금의 레니샤는 손으로 툭 치면 무너질 것처럼 연약해 보였다.
온실에서처럼.
레니샤를 저렇게 만든 것은 황제, 그 개자식일 것이다.
애틋함에 카시우스가 망설이다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흰 발을 끌어당겼다.
레니샤의 여유가 처음으로 무너졌다.
“지금 뭐 하는……!”
“……차갑습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작은 발을 손 안에 가두었다.
손을 잡았을 때 알아차렸다. 그녀의 손발이 차갑게 식어 있다는 것을.
카시우스가 베풀어주는 온기가 레니샤를 물들였다.
얼어붙었던 발가락이 점점 따뜻해지고 있었다.
뜨거운 카시우스의 체온만큼이나.
레니샤가 손을 뻗어 카시우스의 머리카락을 쓸어보았다.
카시우스가 엉망으로 흩어버린 머리카락이 레니샤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 내렸다.
레니샤의 것보다 두껍고 거친 듯하면서도, 매끄럽다.
카시우스의 볼이 붉어졌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
밤이 무르익었다.
잠든 카나리아를 보는 렉서스의 눈빛이 고요했다.
내일이 되면 레니샤는 황성을 떠난다.
레니샤와 카시우스는 지금쯤 그의 침실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사랑을 속삭일까? 그게 아니면 렉서스를 죽일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무엇이든 그리 유쾌하진 않았다.
렉서스가 침실에 자물쇠를 단 것은 잠들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로테라 공작이 렉서스를 끌어낼 것 같은 두려움이 일었기에.
밖에서 잠그는 것이 별다른 효용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안정감이 들었다.
침실 안에서만큼은 렉서스가 이곳의 주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문이 잠기고 아무도 들어올 수 없게 되면 렉서스는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로테라의 전신이나 마찬가지인 레니샤가 내일이면 떠난다.
렉서스는 황제가 되는 것이다.
로테라는 더 이상 렉서스에게 어떤 위협도 되지 못한다.
“하하하…….”
결국 렉서스가 이긴 것이다. 지독한 로테라와의 싸움에서.
로테라 공작의 망령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는 침묵으로 렉서스를 질타하고 있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로테라 공작. 죽은 자는 죽은 자의 영토로 돌아가야 할 때야. 패배를 인정해!”
렉서스가 중얼거렸다.
“내일이면 자네 딸이 폐위되어 나갈 거야. 다시, 결혼하게 되겠지. 내가 골라준 남자와 함께. 어때, 마음에 들던가?”
망령이 촛불에 일렁였다.
“자네는 더 이상 내가 하는 짓을 방해하지 못해. 내가 이긴 거라고.”
렉서스가 잇새로 웃음을 흘렸다.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렉서스의 눈을 어지럽히는 것이 그렇게 묻는 듯했다.
후회?
알싸한 어떤 감정이 렉서스를 뒤흔들었다.
“안 해.”
렉서스가 단정 지었다. 스스로의 흔들림을 무시한 채로.
“나는 무엇도 후회하지 않을 거야, 로테라 공. 자네가 후회하겠지. 나를 황제로 만든 것을 말이야.”
그런데 단언하는 순간 왜, 레니샤가 떠오른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레니샤를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분명 상관없다 생각했는데 알 수 없는 감정에 입이 틀어 막혔다.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