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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가까이서 보고 싶어 (23/135)


23화. 가까이서 보고 싶어
2022.06.17.



 
렉서스의 시선이 연회장을 배회했다.

여기에 렉서스가 준비한 연극을 위한 주연 배우들이 전부 모였다.

레니샤와 카시우스. 두 주연배우가 말이다.

렉서스가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손가락이 갈고리처럼 휘었다.

카시우스의 시선이 종종 그의 옆에 앉은 레니샤를 향하는 것이 보였다.

카시우스의 눈동자에 서린 감정이 그리 깨끗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렉서스도 알아차렸다.

남자가 여자를 보는 눈을 하고 있었다.


“레니샤.”

“네, 폐하.”

레니샤가 다소곳하게 대답했다.

레니샤는 항상 렉서스에게 순종하는 척 굴지만, 속내도 그럴까?

느리게 고개를 돌린 렉서스가 레니샤의 해사한 얼굴을 훑어보았다.

저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한 것은 렉서스도 마찬가지였다.

렉서스의 보랏빛 눈동자가 질척하게 가라앉았다.

화려한 샹들리에와 촛대의 오렌지 빛이 레니샤의 등 뒤로 찬란한 광경을 이루었다.

렉서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레니샤는 과거 그대로였다.

무심하고 차가운 표정.

렉서스를 위해서 가문의 문을 열었을 때와 같은, 표정.

무감하고 무심한 표정.

연민도, 사랑도, 증오도 그 무엇도 없는 표정.

렉서스가 아랫입술을 지르물었다.

렉서스에게 레니샤는 구원이었다.

그에게 내려온 유일한 동아줄.

아무도 구해주지 않았던 렉서스를 레니샤만이 구해주었다.

그날, 렉서스의 눈에 레니샤는 빛이었다.

그날 레니샤는 렉서스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렉서스에게 있어서 레니샤는 여전히 같았다.

레니샤는 그녀의 등 뒤로 흐드러지는 빛과 같았다.


‘머저리 같은 새끼.’

스스로를 향한 자조적인 욕설을 짓씹었다.

레니샤를 진창으로 무너뜨리고 싶었다.

렉서스와 같은 눈높이로, 그녀의 모든 것을 드러내도록.

그러나, 레니샤는 렉서스가 무슨 짓을 해도 무너지지 않는다.

지금도 그간 있었던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지 않나.


‘패배자.’

렉서스의 깊은 심연에 돌이 던져지는 것 같았다.

레니샤가 렉서스의 발에 매달려 빌었으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레니샤가 렉서스를 감정적인 무언가로 삼았다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레니샤는 렉서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았을 것이다.

그녀를 비참한 꼴로 만들 계략을 말이다.

그러라고 카나리아가 알게 했으며, 시종장이 알게 했으니.


‘빌어.’

렉서스가 눈빛으로 종용했다.


‘제발 보내지 말아달라고 빌어.’

지금이라도 모든 판을 뒤집을 수 있었다.

오늘이 마지막 밤이다.

레니샤는 내일 폐위되어 이 황성을 떠나게 될 것이다.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해.’

들끓는 감정을 보았을 텐데도 레니샤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렉서스가 허탈한 한숨을 흘렸다.


“이건 전부 너 때문이야, 레니샤.”

렉서스가 모든 책임을 레니샤에게 전가했다.

심장이 쿵, 쿵 소리를 내며 뛰고 있었다.

괜한 감정에 사로잡힌 렉서스가 손을 뻗었다.

레니샤의 뺨을 짓누르며 턱을 쥔 렉서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사랑하지 그랬어, 레니샤.”

요즘 들어 가장 명료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렉서스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로 레니샤의 입술에 키스했다.

레니샤의 아무것도 쥐지 못했으니 그녀를 비참하게 버려줄 것이다.

이것은 렉서스가 레니샤에게 고하는 마지막 이별 인사였다.


“네가 자초한 거야.”

렉서스가 속삭였다.

***

레니샤가 느슨한 모습으로 소파에 기대 웃었다.

레니샤를 쳐다보는 카시우스의 번뜩이는 눈동자에 몸서리가 쳐질 지경이었다.

마치 파충류의 것 같았다.

레니샤가 나긋한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카시우스?”

“……황후 폐하.”

황제의 침실에 떠밀린 카시우스의 얼굴은 당혹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운 차림으로 소파에 기대 늘어져 있었던 레니샤와는 다르게.

레니샤가 나른하게 미소 지었다.

렉서스는 가장 저열하고 더러운 방법을 선택했다.

레니샤를 황제의 침실로 부른 것은 렉서스였다.

그가 그녀를 평범한 부부의 일로 부른 것이라 생각지는 않았다.

분명 무슨 속셈이 있으리라 여겼다.

목욕을 하고 나와 기다림이 한 시간쯤 이어졌을 때는 마음마저 편해졌다.

그리고 침실 문을 열고 들어온 카시우스를 보니 이제는 안도마저 될 지경이다.

복잡했었던 생각들이 전부 날아가 버렸다.

이것이 렉서스의 수였다.

황제의 침실에 제 정부를 끌어들인 정신 나간 황후.

레니샤를 더러운 추문의 주인공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여기서 보니 기분이 또 새롭군.”

사랑하지 그랬느냐고.

이 또한, 레니샤가 자초한 일이라고.

맞는 말이다.

레니샤가 렉서스를 골랐기에 지금 이 모든 일을 자초한 것이다.


“당황한 얼굴이군.”

“대체 이게 무슨…… 들어오려던 게 아니었습니다.”

카시우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황제의 부름이라고 해서 왔을 뿐인데 침실 안에 레니샤가 저런 모습으로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카시우스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레니샤의 무방비한 모습을 감히 눈에 담지 않기 위함이었다.

다시 밖으로 나가려는 듯 손잡이를 돌리던 카시우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찰칵.

문이 잠겨 있었던 것이다.


“……쓸데없는 곳에 힘쓰지 않는 게 좋아, 카시우스 경. 황제의 침실은 밖에서 잠글 수 있지. 안에서는 조작하지 못해.”

레니샤가 턱을 괜 채로 말했다.

지금 카시우스의 노력을 무용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카시우스가 고개를 홱 하고 돌려 레니샤를 응시했다.

지금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카시우스도 안다.

아무리 사교계에 문외한이라고 해도 이 일이 레니샤를 어느 벼랑으로 몰아넣을지, 안다.

카시우스가 이를 빠득 갈았다.

평소의 미소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표정이었다.

카시우스의 눈동자는 뱀의 그것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특히나 카시우스의 눈이 금빛을 띄고 있어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금안이 어둠 속에서 번뜩이고 있었다.

슈르르륵.

카시우스의 뺨을 타고 붉은 비늘이 오소소 돋아났다가 가라앉았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동요를 보며 미소를 사그라뜨렸다.


“미친 새끼.”

카시우스가 작게 읊조렸다. 황제의 허락 없이 이런 일을 벌였을 리 없다.


“왜 태연한 척하십니까? 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레니샤가 엄중하게 말했다.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으니 이리 태연할 수 있는 거네, 경.”

차분한 목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황후 폐하……!”

“이곳은 히엔트리 황제의 침실이지.”

레니샤가 눈을 접어 웃었다.


“황제가 제 침실을 내어주면서 이런 연극을 벌이는데 우리도 동조해줘야 하지 않아?”

레니샤의 말투가 좀 더 가벼워졌다.

카시우스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세상 천하에 자신의 아내를 이런 취급하는 남자는 없었다.

최소한 카시우스가 아는 세상에는 없었다.

지금 당장 황제의 멱살을 틀어쥐고 흔들고 싶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 이 미친 새끼야!!’

오늘 공개적인 자리에서 황제는 황후에게 키스했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이 카시우스를 휘어 감았었다.

렉서스를 레니샤에게서 떼어놓고 싶었다.

주먹을 저도 모르게 움켜쥐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에겐 그럴 자격이 없었다.

스스로가 자격을 논하는 이유조차도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렉서스도 레니샤에게 키스할 자격도 없는 새끼였다.

카시우스가 짙은 숨을 내쉬었다.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지만, 마음에도 들지 않는다.

렉서스는 천하의 몰상식한 개새끼였다.

그러나, 지금 같은 상황에 렉서스의 정신 상태에 대해서 따져서 뭘 하겠나 싶었다.

카시우스가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딱딱하게 말했다.


“여기에 날 보낸 건 황제이십니다. 절대로 제 자의로 이곳에 온 게 아닙니다. 황후 폐하를 농락하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알고 있어.”

레니샤가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카시우스를 볼 때마다 생각하지만, 예상 외로 성실하고 다정한 남자였다.

지금도 필사적으로 이 상황을 해명하고 레니샤를 안정시키려는 몸짓을 보이고 있었다.

레니샤도, 카시우스도 렉서스의 광기로 막을 내렸던 오늘 연회의 끝을 회고했다.


‘우리 제국의 영웅, 카시우스! 그대를 위해서 가장 귀하고 좋은 선물을 내려야겠지. 보자, 이 제국에서 가장 귀중한 보물이 무엇인지!’

웃음기 어린 목소리와 그의 곁에서 속살거리던 카나리아.

악의로 번들거리던 카나리아의 휘어진 눈동자와 가느다란 손가락이 가리키던 사람.


‘그렇지! 황후가 있었지! 내게는 수많은 여자들이 있지만 가장 귀한 것은 황후가 아니겠나? 카시우스, 자네에게 내 황후를 내려주지.’

아연실색한 사람들의 조롱기 가득한 눈빛이 레니샤에게로 쏟아졌었다.

카시우스는 황제의 말이 끝나자마자 욕설을 짓씹으며 탈주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카시우스의 앞을 막아선 기사들이 고개를 저었던 것이다.

그 신호가 없었더라면 카시우스는 도망을 치거나 황제를 베거나 둘 중 하나는 했을 것이다.

지금 황제는 미쳤다.

밤새 끼고 있던 정부의 웃음소리가 거슬린다는 이유로 목을 벨 수 있는 사내였다.

히엔트리의 황권은 광기에 젖은 황제의 만행을 토대로 단단하기만 했다.

황권은 광기에 휘말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부터 기인했다.

카시우스는 종종 이 나라 귀족들이 ‘평화에 안주해서 돌대가리가 되어버렸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이 황제를 쳐낼 생각을 하지 않는 거라고.

그리고 황제의 광기 아래 카시우스는 정말 침실로 들이밀어진 것이다.

같은 생각을 한 레니샤와 카시우스의 눈이 마주쳤다.

레니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레니샤의 신비로운 백금발이 얼굴 양옆으로 흩어졌다.

그에 대비되는 꽃분홍색의 눈동자는 봄날 같은 색과는 달리 겨울의 추위를 머금고 있었다.

레니샤가 입술을 달싹였다.


“알다시피 경의 잘못이 아니야. 그리고 내 잘못도 아니지. 그러니 긴장하지 않아도 돼.”

레니샤는 오늘따라 흐트러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피곤한 것 같기도 했다.

항상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머물다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어차피 경이나 나나 여기서 지금 나가게 된다면 죽게 될 거야.”

레니샤가 나긋하게 맞은편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니 이만 이리 가까이 와 앉아 봐, 카시우스 경. 내내 그렇게 서 있을 수는 없잖아.”

레니샤의 입술이 보드라운 미소를 머금었다.

카시우스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지금의 레니샤는 또다시 완벽한 달의 요정처럼 보였다.

이렇게 흐트러진 레니샤의 모습도 정말로 처음이다.

카시우스의 눈동자에 비친 지금의 레니샤는 전부 신비로웠다.

여기가 황제의 침실이라는 사실도 잊힐 정도였다.

레니사가 달콤하게 말했다.


“가까이서 보고 싶어, 카시우스 경. 새로운 옷이 경에게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말이야.”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카시우스의 목을 조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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