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망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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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망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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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망했다고
2022.06.07.
카시우스가 그런 결론을 내렸다.
테샤의 반응을 보니 그의 생각이 좀 더 확고해졌다.
카시우스는 제 거대한 몸집이 아이에게 어떻게 비칠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카시우스가 주방에 널린 의자를 끌어다가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하니 아이와 눈높이가 얼추 비슷해졌다.
“테샤.”
“……카시우스 경.”
테샤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입술을 우물거렸다.
“내게 할 말이 있다면 편하게 하면 된다.”
테샤가 뒤로 물러섰다.
커다란 모자에 가려진 작은 얼굴이 겁에 질려 있었다.
카시우스는 테샤가 숨기고 있는 비밀이 가볍지 않다는 것을 짐작했다.
“천천히. 테샤, 천천히 이야기하면 돼. 네가 레니샤 황후에게 무언가를 보냈니?”
카시우스는 제가 낼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다.
테샤가 별안간 눈물을 터뜨리기 전까지는.
“흐, 흐어어어어어어엉!”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눈물을 펑펑 흘리는 테샤를 카시우스가 당혹스럽게 응시했다.
카시우스가 여유롭게 앉아 있던 의자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테, 테샤?”
카시우스가 멍한 말을 던질 때쯤, 출출함을 느낀 기사들이 주방으로 몰려 들어왔다.
기사들이 목도한 것은 위협적으로 서 있는 카시우스와 엉엉 울면서 쭈그리고 앉은 테샤의 모습이었다.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누고 있던 기사들이 빠르게 테샤의 앞을 막아섰다.
“말로 하십시오.”
“이 조그만 게 무슨 죄를 크게 지었다고……. 말로 하시면 될 걸 왜 울리십니까!”
“설마 때리시려는 건 아니지요?”
카시우스가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억울한데, 억울하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내, 내가 미안하다, 테샤.”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
투리엘은 카시우스를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돌아갔다.
카시우스가 그렇게 급하게 자리를 비웠다는 건 짐작하는 것이 있다는 뜻이다.
레니샤가 받은 선물이 카시우스의 저택에서 발송된 게 맞았다는 확인만 하면 됐다.
투리엘은 새로 지은 정장을 두고 떠났다.
카시우스가 돌아온 것은 투리엘이 가고도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뭘 하고 왔는지 녹초가 된 얼굴이었다.
“경.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테리언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후우. 아니야, 됐어.”
카시우스가 손을 내저었다.
테샤를 달래느라고 진땀을 뺐다.
아무것도 모르는 기사들은 카시우스에게 사과하라고 닦달했고 카시우스는 테샤가 눈물을 그칠 때까지 사과를 거듭해야 했다.
테사는 뭔가를 말하려는 듯 고개를 내저었지만 기사들은 아이의 방패막이라도 된 것처럼 막고 움직이지 않았다.
‘너는 아무 말 할 것도 없어. 다 경이 잘못하신 거야.’
‘그럼! 체급 차가 얼마나 나는데 너를 위협하다니. 카시우스 경이 잘못한 게 맞다.’
카시우스는 도끼눈을 뜨는 기사들을 허탈하게 보다가 테샤가 진정된 것을 확인하고는 응접실로 돌아온 것이다.
“……마담 투리엘은?”
“일정이 있다고 돌아갔습니다.”
“그래.”
카시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한숨 돌리겠거니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가뜩이나 피곤한 카시우스에게 테리언이 돌을 던져 넣었다.
“경,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테리언이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카시우스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테리언은 전쟁을 앞뒀을 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특히 마지막 전투를 하루 남겨두었을 때 저런 표정으로 카시우스를 찾아왔었다.
“뭔가.”
“……황제가 아무래도 끔찍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작자 자체가 끔찍한데 생각하는 거야 다 끔찍하겠지.”
카시우스가 신랄하게 말했다.
황제가 레니샤를 대하는 태도를 볼 때마다 신물이 치밀었다.
그런 놈과 같은 하늘을 이고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 수준이 아닙니다.”
“말을 해.”
카시우스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오늘 하루가 급격히 피곤하게 느껴졌다.
마침내, 테리언이 하고 싶던 말을 꺼냈다.
“……황제가 황후와 경을 결혼시키려는 것 같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테리언이 숨을 들이키며 제 입을 틀어막았다.
절대로 발설해서는 안 될 것을 발설한 것처럼.
“뭐? 이건 또 무슨 미친 소리야.”
카시우스는 돌아버릴 것 같다는 게 무엇인지 느꼈다.
“황제가 나와 황후를? 자네도 광기가 옮았나 보군. 아무래도 제도에서 최대한 빠르게 멀어지는 게 좋겠어.”
카시우스가 이를 갈 듯이 말했다.
황제의 파급력이 테리언에게도 닿은 모양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광견병 걸린 소 같은 소리를 할 순 없었다.
“……정말입니다! 카시우스 경! 제가 언제 허튼소리를 한 적 있습니까?”
테리언의 간절한 말에 카시우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자세히 말해보게.”
테리언이 입을 열었다.
투리엘과 나눈 대화와 황제가 카시우스의 혼사를 추진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외에 다른 의심스러운 정황을 전부 털어놓기 위해서.
***
레니샤가 가벼운 얼굴로 정원을 거닐었다.
카시우스가 보내온 선물이 그녀를 흡족하게 한 탓이다.
이사벨라의 편지를 받은 직후부터 지금까지, 가슴에 봄날이라도 든 것처럼 설레고 있었다.
이사벨라의 편지에는 소공작 부부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들과 떨어져서 지내다가 카시우스에게 발견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아이라도 찾아낸 것이 어디인가!
레니샤가 이 질긴 목숨을 끊지 못하고 버티고 있었던 것이 헛된 짓이 아니라는 게 증명되었는데.
이사벨라의 편지는 바로 태워야 했지만, 지금도 그 내용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레니샤의 미소를 지켜보는 린데이의 마음도 훈훈해졌다.
렉서스와 결혼하고 나서 여태껏 편하게 웃어본 적이 없었던 레니샤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로테라 공작 부부는 전쟁터로 떠밀렸고 미친 황제의 곁에서 살아남는 것으로 급급했으니 말이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그래?”
레니샤가 얼굴을 문질렀다.
티를 내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혹은 린데이의 눈을 속이지 못했거나.
“반신반의했었거든. 그런데 투리엘이 장담했지 않나. 카시우스가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건 분명한 것 같다고. 그 말이 나를 설레게 하는군.”
레니샤가 보드랍게 웃었다. 강인한 외면에 숨겨져 있는 가장 여린 미소였다.
린데이가 촉촉한 눈가를 톡톡 닦아냈다.
“기쁘시다니 다행입니다.”
“곧 모든 상황이 정리될 거야. 힐로샤인으로 가게 되면 그 아이를 내가 직접 돌볼 수 있게 되겠지. 황제의 눈에서 멀어지니 말이야. 그날만 생각하면 행복해서 잠도 이룰 수 없어.”
레니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반드시 그리되실 겁니다, 폐하.”
“나도 그리 믿네.”
레니샤와 린데이가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그 평온은 꽤 오래도록 지속될 것으로 보였다.
만약, 카시우스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갑작스러운 불청객에 레니샤의 정원이 소란스러워졌다.
곤란한 얼굴을 하는 린데이에게 레니샤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황후 폐하.”
그날, 그런 모습을 보이고 카시우스를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레니샤는 그날의 기억이 그녀에게 꽤 강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잊고 공작의 말만 마음에 담았다고 생각했는데 카시우스를 보는 순간 뜨거웠던 호흡과 눈물이 떠오른 것이다.
말없이 그녀의 머리에 얹어졌었던 서투른 손길도.
“카시우스 경. 무슨 일인가?”
레니샤의 미소에는 분명한 호의가 담겨 있었다.
그날 이후로 한결 편해진 모습이었다. 카시우스가 호흡을 멈췄다.
레니샤의 환한 미소가 그를 멈추게 만들었다.
저렇게 진심을 다해 웃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어깨를 억누르고 있었던 것들을 전부 벗어 던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거기엔 시골의 촌부라도 된 것처럼 해맑은 면모도 있었다.
휘어진 분홍색 눈동자는 팔랑거리는 꽃잎과도 같았다.
그녀의 백금발이 흐드러지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건 봄날의 햇살 중에서도 가장 예쁜 것들만 골라서 엮어 늘어뜨려 놓은 것 같았다.
야생 장미의 향기가 났다.
“경?”
멍하니 서 있는 카시우스를 레니샤가 거듭 불렀다.
“카시우스 경.”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손목을 쥐었다.
그날 쥐었던 것과 같은 감촉이었다.
단단했고 그녀를 지켜줄 수 있을 정도로 강해 보였다.
레니샤가 새삼스럽게 카시우스의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어떤 의도도 없는 단순한 행위였다.
“……경은 딱딱하군요.”
뭐가?
멍하니 있던 카시우스가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쳤다.
딱딱하다고? 갑작스럽게 들은 말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레니샤의 손끝이 닿았던 피부가 홧홧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머리를 기댔던 레니샤, 가슴을 짚었던 레니샤.
그를 지배하는 것 같았던 레니샤.
마치 달의 요정이라도 된 것처럼 카시우스에게 가까워졌었던 레니샤가 순서 없이 떠올랐다.
카시우스가 등을 대고 기대고 있었던 것이 벽이 아니라 침대였다면?
엄한 상상도 뒤따랐다.
그런 생각들이 고작 몇 초도 되지 않아 카시우스를 지배했다.
게다가 머릿속에는 계속 같은 말이 맴돌고 있었다.
‘……황제가 황후와 경을 결혼시키려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광견병이 옮은 게 분명하다.
“뭐, 뭐가 딱딱하다는 겁니까? 저, 저는 절대로……. 절대로 딱딱하지 않습니다!”
카시우스가 제가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고 외쳤다.
결백을 주장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웃음기를 머금은 레니샤의 표정을 본 순간 깨달았다.
‘정신 나간 머저리 새끼.’
레니샤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아니, 애초에 그런 의도로 말을 꺼낼 상황도 아니었다는 것을 말이다.
레니샤가 붙들고 있었던 것은 그저 카시우스의 손목이었다.
카시우스의 얼굴이 제 머리카락처럼 달아올랐다.
레니샤가 명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흰 장미가 만개하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카시우스가 뭐라고 변명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확실하다. 이건 광견병이 옮은 거다. 그러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황제 새끼.’
그놈의 얼굴을 속 시원히 후려쳐줘야 지금의 이 창피함이 가실 것 같았다.
이 모든 일을 렉서스의 탓으로 돌린 카시우스가 이를 악물었다.
그럼에도 레니샤의 웃는 얼굴에서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군. 경은 딱딱하지 않군.”
“잊어주세요. 제 속에 악마가 든 것이 분명합니다.”
카시우스가 한숨과 함께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던졌다.
레니샤는 그것마저도 즐거운지 웃음을 터뜨렸다.
저렇게 웃음이 많은 사람인지는 몰랐는데.
카시우스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오늘 이 자리에 오겠다고 챙겨 입은 기사 정복이 그를 옥죄는 것 같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용건이 있어서 왔습니다, 황후 폐하.”
어떻게든 말을 돌려보려는 카시우스의 발악이었다.
레니샤가 웃는 건 보기 좋았지만 창피해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만약, 그에게 토끼처럼 굴을 팔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땅을 파고 드러누웠으리라.
“말하게, 딱딱하지 않은 카시우스 경.”
카시우스는 생각했다. 망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