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테샤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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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테샤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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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테샤의 비밀
2022.06.03.
카시우스가 목을 축였다.
이건 도대체…….
그냥 독약에서 지옥에서 올라온 독약의 맛으로 진화한 찻잔을 카시우스가 원수를 보듯이 노려보았다.
사실 이 저택에는 제대로 갖추어진 게 하나도 없었다.
주방장을 고용할 형편이 되질 않는데 주방장이 있겠는가.
기사들이 전쟁터에서 배운 대로 썰고 구워서 익히고 소금을 치는 게 전부인 요리를 하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마음 편히 식사도 하지 못했던 시절에 비하면 이곳은 천국이 분명할진대…….
기사들이 용을 쓰며 내려온 홍차는 지옥의 맛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카시우스가 한숨을 내쉬곤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에 반해 투리엘은 일전과 동일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그게 목구멍으로 넘어갑니까?”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왔다.
투리엘이 카시우스를 힐끗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예. 제 목구멍으로는 잘만 넘어가는군요. 경께서는 참 솔직하신 분인 것 같습니다.”
카시우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 말 저변에 깔린 의도가 있는 듯한데 무엇도 읽히질 않는다.
사교계의 여자들은 다 이런 건지. 카시우스가 혀를 내둘렀다.
그래도 레니샤는…….
제 감정을 전부 드러내고 기대오던 레니샤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간 레니샤를 잊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왔다.
밤잠을 못 이루게 하는 생각들의 향연에 애꿎은 검만 휘두르며 수련장에서 새벽을 맞이한 날도 있었다.
그런데 또, 이렇게 레니샤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를 떠오르게 만든다.
“대체 왜 온 겁니까?”
카시우스가 저도 모르게 짜증스럽게 물었다.
그러다 제 상태를 자각한 카시우스가 미간을 문질렀다.
“……미안합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왔으니 놀라셨을 만도 하지요.”
투리엘이 선선하게 웃었다.
카시우스는 이 사교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유형의 사람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고 감정을 드러낸다.
공격당하기 쉽다는 거다.
물론, 카시우스가 공격을 당하지 않을 정도로 강해지면 된다.
카시우스가 그만한 힘을 가질 수 있을까.
레니샤가 카시우스에게 이렇게 공을 들일 만한 이유가 있을까.
투리엘은 아직까진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섣불리 결론을 내려선 안 될 문제이기도 하고…….
만약, 카시우스가 레니샤가 가려는 길에 방해가 된다면 저 남자를 배제하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겉으로 웃고 있다고 해도 정말로 웃고 있는 건 아니었다.
속으로는 부지런히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투리엘은 그녀의 인생을 레니샤에게 걸었으니.
“이번에도 그분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얼마 전에 경께서 보내신 선물은 잘 받았다고 전해달라셨습니다.”
“선물?”
카시우스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카시우스가 고개를 홱 돌려 테리언을 보았다.
테리언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닙니다.”
투리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 말을 전할 때 린데이는 정말로 기뻐 보였다.
카시우스가 대단한 선물을 보낸 게 틀림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린데이가 기뻐 보였다는 것은 레니샤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는 것이고.
‘저 반응은 뭐지?’
투리엘이 묻기도 전에 카시우스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테리언 경이 마담의 이야기 상대가 되어줄 겁니다.”
카시우스가 고개를 까딱하고는 자리를 비웠다.
갑작스럽게 떠밀린 테리언이 어색하게 의자에 슬쩍 앉았다.
“흠!”
테리언이 어색함에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 안에 든 것이 뭔지도 잊고 입을 댔다가 컥컥대고 있는 테리언에게 투리엘이 덤덤하게 말했다.
“이런. 갑자기 저를 떠맡게 되셨군요. 아차, 제 뒤에 붙이신 귀여운 아이들은 잘 돌려보내드렸습니다만.”
투리엘이 말을 끊고는 테리언과 눈을 마주쳤다.
테리언이 격렬하게 기침을 토해냈다.
“이 저택에서 그런 짓을 하실 분은 경밖에 없으니……. 차라리, 궁금한 것은 제게 물으시지요. 숙녀는 비밀을 들키는 것을 그리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컬록!”
투리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는 물론, 테리언도 알고 있었다.
투리엘에게 사람을 붙인 것은 테리언이 맞다.
투리엘이 계속해서 전령 노릇을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레니샤가 이유도 없이 이런 친절을 계속해서 베풀 이유가 있을까?
테리언은 사교계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카시우스는 그저 좋을 대로 어울려주다가 힐로샤인으로 떠나면 그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지만…….
그걸로 끝이 아닐 수도 있었다.
“……물으면 대답은 해주시는 겁니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면 답을 해드리겠습니다.”
투리엘이 생긋 웃었다.
“……사실 지금 저희는 고립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테리언이 어두운 표정을 했다.
이렇게 답답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전쟁을 치를 때도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는 것이 먼저다.
정보 없이는 전쟁도 승리로 이끌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테리언과 카시우스는 이 사교계에서 외딴 섬처럼 둥둥 뜬 채로 아무런 정보도 없이 지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작은 전쟁에서도 패전하고 만다.
카시우스가 무너진 전열을 수습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테리언이 가지고 있었던 정보도 한 몫 했었다.
테리언은 카시우스를 승리자로 만들고 싶었다.
“이곳은 폐쇄적인 곳이더군요. 그 누구도 곁을 내어주려 하지 않습니다.”
“다들 꼬리를 말고 몸을 사리는 거지요. 황제가 미친 것 같아도 제대로 하는 것은 하나 있거든요. 황제의 눈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제가 이곳을 드나드는 것도 황제는 알고 있겠지요.”
투리엘이 조금은 부드러운 목소리를 흘렸다.
테리언의 태도를 보건대 카시우스와 테리언이 아무 생각도 없는 것 같지는 않았다.
“분명 황제가 이곳에 카시우스 경을 붙들어두고 있는 데에는 속셈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짐작할 방도가 없으니 경과 저는 답답한 겁니다. 그래서 실례를 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과는, 받아들이겠어요. 테리언 경의 답답함도 이해합니다.”
투리엘이 찻잔을 소서 위에 내려놓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황제에게 꼬투리라도 잡힐까 두려운 귀족들은 문을 닫아걸고 있었다.
은밀하게 이어지고 있는 회동을 제외하고는 웬만한 사교 모임도 절제하고 있었다.
어디든 황제의 눈이 존재한다.
황제는 의심이 많은 자였다.
로테라의 손을 잡고 황제가 되었으되, 그 자리를 지킨 것은 황제인 것이다.
어떤 삿된 소리가 황제의 귀로 흘러 들어갈지 알 수가 없었다.
일전에 투리엘이 참석했었던 회동 또한 비밀리에 극소수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곳에 참석한 귀족들은 대부분 레니샤의 치맛자락에 매달려서 안위를 도모했었던 이들이었다.
“그리고 황후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마담을 보내서 친절을 베풀어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테리언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로군요.”
알고 있는 사실도 함부로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되는 법이다.
테리언이 머리를 헤집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경께서 할 수 있는 최선은 황후 폐하를 믿는 거라고요.”
투리엘이 신뢰를 담아 말했다.
“황후 폐하를…….”
“그분을 실망시키지 마십시오. 그거면 됩니다.”
“저희는 곧 힐로샤인으로 떠날 사람들입니다. 저희가 황후께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투리엘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사늘한 시선이 테리언을 훑었다.
테리언은 마치 투리엘 앞에서 도축시장의 고기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 또한 같은 질문이기에 드릴 수 있는 답이 없군요.”
같은 질문.
테리언이 그 말을 곱씹었다.
투리엘이 대답하지 못한 것은 황후와 황제가 무슨 속셈을 가지고 있느냐다.
그것과 그들이 힐로샤인으로 가는 것, 그들이 황후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은 질문이라고?’
테리언이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미쳐버린 황제.
황후를 향한 황제의 열등감은 테리언도 익히 알고 있었다.
로테라 공작이 전쟁터에 떠밀려온 이유를 모를 리가 있나.
그 대단한 공작이 죽음으로 내몰리는 것도 테리언이 두 눈으로 보지 않았던가.
그리고 황후를 미워하는 황제.
황제는 로테라 공작을 죽였다. 그리고 그다음 순서가 황후라면?
황후를……. 제 곁에서 치워버리려는 거라면?
테리언이 하얗게 질린 얼굴을 치켜들었다.
황후는 내내 카시우스에게 온건한 태도를 취해왔다.
그리고 황제가 황후를 내쫓으려는 와중이라면.
황제는 카시우스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여태까지 박대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황제가 황후에게 모욕을 주려고 한다면……!
게다가 카시우스에게 로테라 공작위를 내렸다고 들었다.
모든 혼란들이 하나의 답을 가리키고 있었다.
“혹 황후께서 카시우스 경과……!”
“쉿.”
투리엘이 생긋 미소 지었다.
“듣는 귀가 많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경.”
테리언이 말 잘 듣는 개처럼 입을 꾹 닫았다.
투리엘의 말대로 어디서도 발설할 수 없는 말이었다.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미쳐버린 세상에 도저히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
카시우스가 응접실이라고 마련된 곳에서 벌떡 일어나 나온 것은 뇌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사들은 자유롭게 저택을 오가고는 있지만 카시우스의 이름을 빌어 무언가를 할 만한 이들은 못된다.
평생 검만을 알고 살아온 자들이기도 하고, 굳이 그의 이름으로 레니샤에게 선물을 보낼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 며칠간 저택에 있었던 특이점을 찾아내면 될 일이다.
카시우스가 빠르게 걸었다.
지금쯤이면…….
“테샤.”
원하던 곳에서 아이를 찾아낸 카시우스가 나지막이 테샤를 불렀다.
찬장을 정리하고 있던 테샤가 카시우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테샤가 벗어두었던 모자를 허겁지겁 썼다.
역시나.
투리엘에게 대접한 차는 테샤의 솜씨였던 것이다.
테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님을 만나고 계시던 중 아니었어요?”
“물을 게 있어서.”
카시우스가 침을 삼켰다.
테샤는 기억을 잃은 아이다.
그래서 그런지 세상을 두려워했다.
제도에 와서도 외출 한번 한 적 없을 정도였다.
그랬었던 테샤가 얼마 전에 말도 없이 외출을 한 적이 있었다.
어딜 다녀왔느냐고는 굳이 묻지 않았다.
그것은 테샤의 자유였고 카시우스는 테샤를 고용한 것이 아니었으니 아이의 자유를 억압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기억을 잃은 아이가 어디를 다녀온 것일까?
왜 아이가 나갔다 오고 나서 투리엘이 찾아와 ‘선물’을 운운하는 것일까.
세상에는 우연으로 일어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카시우스와 레니샤 사이에 로테라 공작이 있어 그들 사이에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것처럼.
“이야기 좀 할까?”
테샤가 겁먹은 얼굴을 했다.
카시우스는 직감했다. 보통 그의 짐승 같은 감은 틀리는 적이 없었다.
테샤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테샤는 아마도 기억을 잃지 않았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