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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알아도 삼킬 수밖에 없는 독 (18/135)


18화. 알아도 삼킬 수밖에 없는 독
2022.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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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서스가 황위에 오른 기념일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고작 일주일 정도 남았나.

손을 꼽아 세어보던 레니샤가 웃음을 흘렸다.

헨리가 귀띔해준 바에 의하면 레니샤가 떠나는 것도 그날이 될 것이란다.

렉서스는 제멋대로 레니샤를 내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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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소파에 기대 앉아 밖을 보고 있던 레니샤가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어차피 레니샤가 나가게 되면 황후궁에서 일하는 이들은 전부 함께 내쫓길 것이다.

그들의 거취를 생각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귀물들을 대부분 현금화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힐로샤인에 필요한 것은 돈이지 귀금속으로 휘어감은 귀부인이 아닐 것이다.

방치된 힐로샤인이 어떤 꼴일지는 직접 보지 않아도 알 법했다.

레니샤가 볼을 톡톡 쳤다.

그리고 레니샤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들도 전부 현금화해두는 게 낫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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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남부 땅은 팔지 않는 게 좋아.’

힐로샤인은 곡식을 재배할 수 없는 땅이 대부분이었다.

힐로샤인의 땅에서는 곡식이 아니라 다른 것이 난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맞게.

그러니 먹을 것을 최대한 스스로 충당하기 위해서 남부 땅은 남겨두고…….

게다가 레니샤가 소유하고 있는 남부의 웨일스턴 령의 경우에는 지난 3년간 풍년이라 곡식 창고에 비축하고 있는 곡식의 양도 많았다.

다른 땅들은 지난 일주일 동안 팔아서 현금화해두었다.

모든 것이 차근차근히 준비되어 가고 있었다.

레니샤가 눈을 감았다.

그날 티파티 이후로 레니샤에게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편지를 보내는 귀족들의 수가 늘었다.

눈으로 보고 느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실상 렉서스는 항상 엉망이었으니 굳이 그들에게 보여줄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카나리아까지 더해지게 생겼으니……. 생각이 많았겠지.

그들은 중앙에 남아 레니샤의 눈과 귀가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언제든 필요할 때면 레니샤에게 손을 내밀어주겠지.

레니샤가 내놓은 토지를 구입한 것도 그들이었다.

레니샤는 천천히 그들과의 관계를 쌓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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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리엘도 여기에 남겨야 해.’

힐로샤인에는 의상실이 들어설 곳도 없을 것이다.

투리엘이 효용가치를 다할 수 있는 곳은 힐로샤인이 아니라 이곳, 중앙이었다.

현금화한 돈의 일부를 투리엘에게 맡겨두는 게 좋을 것이다.

귀금속뿐만 아니라 그간 입었던 드레스들도 함께 내놓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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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를 쓰고 사들일 이가 보이는군.’

레니샤가 옅게 웃었다.

카나리아도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레니샤가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를 즐기며 생각에 잠겨 있던 와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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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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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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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우스 경께서 심부름꾼을 보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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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우스 경?”

레니샤가 몸을 일으켰다.

카시우스가 보낸 사람이라. 레니샤가 눈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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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오빠를 찾은 걸까?’

그 요령 없어 보이던 남자가 레니샤에게 연락할 일은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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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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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이것만 전해달라고 하고 가버렸습니다.”

레니샤가 의아한 얼굴로 린데이가 내미는 것을 받아 들었다.

<……고모님.>

레니샤가 눈을 홉떴다.

레니샤를 고모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는 세상에서 단 한 명뿐이었다.

레니샤가 마른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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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라……!”

레니샤가 편지를 다급하게 펼쳤다.

<고모님, 이사벨라예요.

그간 잘 지내셨어요? 황제로 인해서 곤욕을 겪고 계실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우리는 곧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고모님.

제 걱정이라도 덜어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다급하게 펜을 잡아요.

서면으로는 나눌 수 없는 이야기가 너무 많네요.

고모님, 보고 싶어요.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잘 지내셔야 해요.

-이사벨라로부터.>

여전히 이사벨라는 사려 깊은 소녀였다.

허상처럼만 느껴졌던 끄나풀을 잡은 기분이었다.

레니샤의 손끝이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심장이 다급하게 뛰면서 온몸에 혈류를 내보내고 있었다.

레니샤가 입술을 달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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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고 있다는군. 이사벨라가 말이야.”

레니샤가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연락을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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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우스의 심부름꾼으로 왔다고 했지?’

레니샤가 다급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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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부름꾼은 어디로 갔나? 어떤 이가 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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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키가 크고 구부정하게 몸을 굽히고 있는 남자였습니다. 그냥 이것만 전해달라고 하고 갔습니다.”

이건 신호일지도 모른다.

카시우스가 이사벨라를 찾아서 보호하고 있다는 신호 말이다.

카시우스도 만나지 못한 지 일주일이 넘었다.

그사이에 카시우스가 이사벨라를 찾아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레니샤가 심장 위에 손을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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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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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드립니다, 폐하.”

기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레니샤의 궁에 오랜만에 반가운 소식이 찾아들었다.

레니샤가 예쁜 미소를 머금었다.

린데이가 왠지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톡톡 닦아냈다.

모든 게 잘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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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가 떠날 준비를 하나 봐.”

카나리아가 깔깔 웃으며 테이블 위에 올려진 것들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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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황제 폐하께서 마음을 먹으셨으니 황후라 하더라도 어떻게 반항을 하겠어요? 나가라면 나가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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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카나리아가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귀금속들을 뒤적였다.

레니샤가 내놓은 것들을 사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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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게 대단할 것도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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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리아 님이 가지신 것들이 더 좋고 아름다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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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이. 칫. 그렇게 콧대를 세우더니. 황제 폐하께서 베풀어주시는 게 없는데 어떻게 좋은 걸 사겠어. 게다가 황후 앞으로 들어온 비단도 나한테 보내주셨었잖아.”

샴디르에서 온 귀한 비단으로 지은 옷을 등극 기념일에 입고 갈 생각이었다.

그날, 그 옷을 입고 레니샤를 약 올릴 생각을 하면 입맛이 돌곤 했다.

요새 카나리아의 근심은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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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하지, 않으셨습니다.’

월경을 앞두면 꼬박꼬박 확인하고 있는데 이번에도 좋은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이다.

초조함이 맴돌았다.

렉서스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황후위에 앉으려면 아이가 필요했다.

시기적절한 임신을 위해 요새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데.

카나리아의 몸을 가꾸는 것은 물론, 렉서스와 자주 밤을 보내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가 들어서질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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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도 아이를 갖지 못하면?’

레니샤의 말이 마음에 박힌 가시처럼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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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처럼 렉서스에게 문제가 있는 거라면?’

카나리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주치의를 닦달해도 황제의 상태에 대해서는 들을 수가 없었다.

카나리아가 렉서스의 임신 가능성에 대해 물으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안달을 하는 카나리아에게 주치의가 들려준 건 단 한 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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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바라시다 보면 아기님도 찾아오실 겁니다.’

희박한 가능성이기는 하지만 아이를 가질 가능성은 있다는 것 아닌가?

문제는 ‘희박한’에 있었다.

카나리아가 언제까지 기다릴 수 있을까.

카나리아가 임신을 하지 못하고 미적거리는 사이에 다른 여자가 황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카나리아가 그간 레니샤를 몰아내기 위해서 불철주야 들인 공이 허사가 되는 것이다.

레니샤의 허점을 황제에게 고하고 황제가 품은 열등감에 부채질을 했다.

그리고 혹여나 황제가 레니샤의 침실에 들기라도 할까 봐 별짓을 다 하지 않았던가.

쓰러져보기도 하고 황제를 찾아가 유혹도 해보고.

비천한 짓까지 일삼으면서 해낸 것인데 빼앗길 수는 없었다.

카나리아가 입술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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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바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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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카나리아 님.”

카나리아가 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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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가 필요해. 바바라도 알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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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에요.”

바바라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카나리아의 영광은 바바라의 영광이었다.

바바라는 카나리아처럼 대단한 외모나 노래실력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해도 황제가 바바라를 돌아볼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바바라가 영광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하나.

카나리아가 높아지는 것이다.

바바라는 카나리아를 높이는 일에 제 사활을 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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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를…… 만들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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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바바라가 놀란 얼굴을 했다.

아이는 원한다고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카나리아는 그 아이를 만들겠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카나리아는 이미 고민을 끝낸 얼굴이었다.

사실 카나리아는 아이에 대해서 자각한 이후부터 계속 생각해오고 있었다.

황제를 받들게 된 카나리아가 예전처럼 다른 사내를 품는다는 건 사실 꺼림칙한 일이기는 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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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별로 없어, 바바라. 일주일 후면 황후는 황성을 떠날 거야. 그렇게 되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황후 자리를 채울 이를 찾겠지. 길어야 한 달에서 두 달 정도 걸릴까. 그런데 난 이제 월경을 시작해.”

바바라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것이다.

바바라의 영광이 멀어질 수도 있다는 거다.

바바라의 꿈은 황성의 시녀장이 되는 것이었다.

하녀에서 시작해서 시녀장이라니, 그거야말로 바바라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였다.

본디 시녀장은 귀족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시녀장이 된다는 것은 귀족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녀에서 시작해서 시녀장의 자리에 오른 이들이 그간 몇몇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카나리아가 반드시 황후가 되어야 한다.

바바라가 카나리아를 향해서 몸을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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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말씀만 하세요, 카나리아 님.”

카나리아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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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와 비슷한 외양을 가진 이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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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발에 보라색 눈은…….”

황제의 보라색 눈은 황실에만 흐르는 피에서 발현되는 거였다.

그렇다고 이런 일에 대단한 힘과 신분을 가진 누군가를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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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힘들겠지. 그러니, 은발에 녹안을 가진 이로 찾아봐.”

카나리아가 자신의 눈을 톡톡 쳤다.

아이가 녹안을 가지고 태어나기만 한다면 이 일은 들키지 않을 것이다.

눈동자 색은 카나리아를 닮았다고 우기면 되는 일이니.

카나리아가 렉서스를 떠올렸다.

이건 렉서스에게도 도움이 될 일이었다.

아이가 있어야 렉서스의 기반도 튼튼해진다.

이 아이는 렉서스와 카나리아 모두에게 이득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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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카나리아의 뜻을 알아차린 바바라가 탄성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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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들키지 않고 몰래 해야 해. 알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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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카나리아 님.”

바바라와 카나리아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들키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이렇게 세월만 흘려보내는 것은 카나리아가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카나리아는 목숨을 건 도박을 하기로 했다.

아이.

그 아이를 가질 수만 있다면.

그리고 아무 문제 없이 그 아이가 황제가 된다면 말이다.

황제의 친모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카나리아의 심장이 부풀었다.

그 누구보다 고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달콤한 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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