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쓸모없는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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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쓸모없는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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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쓸모없는 고민
2022.05.27.
단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던 레니샤의 기대는 무너졌다.
레니샤가 하얗게 바랜 눈으로 침실 문 앞에 선 렉서스를 응시했다.
비릿하게 웃고 있는 저 낯짝을 침실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헛웃음을 흘린 레니샤가 애써 미소를 덧그리고는 렉서스에게 말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폐하.”
“내가 오지 못할 곳을 왔나? 표정이 좋질 않군, 레니샤.”
“……그럴 리가요. 연락도 없이 오셔서 아무 준비도 못해서 당황했나 봅니다.”
레니샤가 감정을 추슬렀다.
렉서스에게는 그 무엇도 드러내서는 안 된다.
렉서스가 어떻게 돌변할 수 있는 사람인지 잊어서는, 안 된다.
레니샤가 입 안의 살을 씹었다.
그러고 나니 미소가 좀 더 자연스러워졌다.
“황후를 찾아온 건 오랜만이다 싶어서 나도 새삼스러운 참이야. 아, 생각해보면 황후가 나를 찾아온 적도 없었군. 정말 데면데면한 부부 사이 아니었나?”
“폐하의 공사가 다망하시어 그랬을 겁니다.”
레니샤가 부드럽게 응대하며 린데이에게 말했다.
“잠자리에 마실 것이니 가벼운 차를 가져오게.”
“예, 폐하.”
“아니. 그런 건 필요 없어. 다들 이만 나가.”
렉서스가 린데이를 비롯한 사용인들을 몰아냈다.
사용인들이 레니샤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돌아보다가 침실에서 나갔다.
완벽하게 레니샤와 렉서스만이 남게 된 것이다.
렉서스가 방 안을 둘러보고는 침대에 방만하게 앉았다.
“이리 와.”
렉서스가 레니샤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니샤가 그 손을 느리게 잡았다.
‘죽일 수 있을까?’
렉서스는 지금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다.
어렵게 돌아갈 것 없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른다.
레니샤는 지금 목욕을 마치고 가운을 입고 있었고 무기로 쓸 만한 것은…….
촛대.
벽난로를 들쑤시는 부지깽이.
화병.
모두 손에 바로 닿지 않을 정도로 먼 곳에 있었다.
레니샤가 그런 생각들을 하며 렉서스의 손을 잡았다.
렉서스가 레니샤의 생각을 흩어버리듯 그녀를 잡아당겼다.
“폐하?”
렉서스가 서늘하게 웃었다.
“앉아.”
렉서스가 고압적인 태도로 바닥을 턱짓했다.
레니샤가 고요한 눈으로 렉서스를 응시했다.
레니샤가 몸싸움으로 렉서스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아무리 렉서스가 제 몸을 멋대로 다뤘다고 해도 남자다.
레니샤는 검을 쥐어본 적조차 없는 귀족 여성이었던 것이다.
레니샤가 느리게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렉서스의 벌어진 다리 사이에 앉게 된 레니샤가 드러나지 않은 손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렉서스가 레니샤의 손을 놓고 그녀의 턱을 치켜들게 했다.
레니샤의 분홍빛 눈동자가 불빛에 일렁이고 있었다.
쉬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눈동자다.
이런 상황에서도 레니샤는 렉서스를 무감하게 보고 있었다.
“참, 한결같지.”
그런데 왜 놈에게는 달랐을까. 무엇 때문에.
렉서스가 레니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늘 오후에 느꼈던 분노가 단전에 가득 고여 있었다.
렉서스가 레니샤에게 입을 맞췄다.
앙 다문 입술을 턱을 당겨 벌리고 그 안을 파고들었다.
레니샤의 입 안은 차가웠다. 왠지 비릿한 혈향이 맴도는 것 같기도 했다.
렉서스가 거칠게 움직이다 입술을 떼어냈다.
분명 레니샤는 순종적으로 굴고 있는데 그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았다.
렉서스가 짜증스럽게 레니샤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레니샤가 이를 악물고 신음을 삼켰다.
“레니샤. 나는 그대가 대체 왜 이렇게 애를 먹이는 건지 모르겠어.”
렉서스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폐하…….”
레니샤가 나긋한 목소리를 흘렸다.
지금 이 순간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기에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렉서스가 건조한 손길로 레니샤의 가운을 밀어냈다.
눈부시도록 흰 피부가 불빛 아래에서 드러났다.
그 지경이 되어서도 레니샤는 무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뻣뻣한 나무토막 같군.”
렉서스가 잇새로 짓씹고는 레니샤를 침대 위로 집어 던졌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엉망이 된 머리카락이 레니샤의 주변으로 흩어졌다.
레니샤가 인형처럼 눈을 깜빡였다.
렉서스가 레니샤의 얼굴을 붙들어 제게로 돌리고는 낮게 을렀다.
“너를 안을 때면 차가운 시체를 안는 것 같았지. 여전히 그건 변하질 않는군. 역겨워.”
그건 참 다행이었다.
레니샤도 렉서스가 역겨운 것을 간신히 견뎌내고 있었으니.
렉서스가 레니샤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흥이 식었다는 얼굴로 렉서스가 제 가운을 여몄다.
레니샤를 그 꼴로 던져둔 렉서스가 침실을 벗어났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있던 레니샤가 날카로운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할 소리를.”
레니샤가 사나운 손길로 줄을 당겼다.
안 그래도 걱정스럽게 대기하고 있었던 사용인들이 몰려 들어왔다.
“목욕물을 받아줘.”
“예, 폐하.”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찾아온 건진 모르겠지만, 절대로 반기지 않을 불청객 덕분에 단잠은 그른 것 같다.
렉서스가 남긴 흔적을 전부 씻어내기 전까지는 잠들 수 없었다.
***
렉서스가 짜증스럽게 카나리아의 침실 문을 열었다.
“꺄아, 폐하! 옷을 갈아입고 있었는……!”
렉서스가 옷을 반쯤 헐벗고 있는 카나리아의 뺨을 붙들고 거칠게 키스했다.
카나리아가 눈을 깜빡이다가 그를 끌어안았다.
눈치 빠른 하녀가 침실 문을 닫고 나갔다. 렉서스가 제 가운을 벗어 던졌다.
카나리아를 뒤로 밀어 바닥에 넘어뜨린 렉서스가 그 위에 올라앉았다.
“폐, 하?”
급하게 구는 렉서스를 카나리아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오늘 오후, 그렇게 나가고 나서 렉서스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아마도 카시우스와 레니샤가 함께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황제는 알게 모르게 황후에게 집착하는 게 있었으니 화가 났을 수도 있다.
카나리아가 입술을 삐죽였다.
“왜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
“추워서 그래. 차가워서 견딜 수가 없더군.”
렉서스가 카나리아의 품을 파고들었다.
별다른 행위 없이 그렇게 안겨만 있는 렉서스를 카나리아가 끌어안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몰라도 이렇게 카나리아의 품 안에 있으니 되었다.
카나리아가 렉서스의 이마에 키스했다.
“아이참. 어린아이 같으셔라. 카나리아가 따뜻하게 해드릴게요.”
지금처럼 렉서스는 종종 엄마 품을 조르는 아이처럼 굴곤 했었다.
그저 눈을 감고 숨을 내쉬고 있는 렉서스의 등을 카나리아가 쓸어주었다.
“노래해, 카나리아.”
렉서스의 말에 카나리아가 달콤한 목소리로 노래했다.
카나리아가 자신 있게 손꼽을 수 있는 장기였다.
카나리아는 제 이름값을 똑똑히 하는 사람이었다.
새처럼 아름다운 노래로 황제를 홀린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렉서스가 카나리아의 품 안에서 눈을 감았다.
카나리아의 노래를 듣고 있으니 세상 모든 일이 잊히는 것 같았다.
렉서스가 카나리아를 곁에 두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카나리아가 부르는 노래가 가진 힘! 렉서스가 고르게 숨을 내쉬었다.
지독한 열등감도.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두려움도 가셨다.
두려움.
렉서스가 로테라를 보는 또 다른 감정이었다.
렉서스를 황제로 만들었듯이 다시 진창으로 처박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로테라의 거대한 그림자는 사라져버렸는데 밤잠 한번 제대로 잘 수 없었던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끔찍함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로테라 공작을 볼 때마다, 그를 구원한 소녀를, 레니샤를 볼 때마다 그런 감상이 드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죽음과 같은 졸음이 밀려왔다.
지금만큼은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
카시우스가 잠에서 깨어났다.
지난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레니샤는 오랜만에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랬는데, 카시우스는 반대가 되었다.
침대 위에 앉은 카시우스가 머리를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으아아악!”
정말이지. 돌아버리겠군!
카시우스가 머리를 쥐어뜯을 것처럼 움켜쥐었다.
자꾸만 레니샤가 떠올라서 미칠 것 같았다.
가슴께에 기댔던 온기와 훌쩍이던 울음소리 같은 것들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
가슴에 화인이 남겨진 것처럼 며칠간 뻐근하더니. 지금은…….
카시우스가 크게 숨을 내쉬곤 벌떡 일어섰다.
이런 잡념을 지우는 데는 검을 휘두르는 게 최고다.
“아.”
카시우스가 몸을 움직이다 멈췄다.
“미친놈.”
레니샤 생각을 하느라 렉서스가 카시우스의 혼사를 기획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카시우스가 허탈하게 혀를 내두르며 허리를 짚었다.
광견병 걸린 미친놈이 제 결혼을 제멋대로 휘두르려고 하고 있는데 지금 그걸 내던지고…….
“카시우스, 정신 차려.”
스스로를 타이르고는 카시우스가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떤 여자를 데려다 놓으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인생도 불쌍했다.
렉서스의 희생양이 될 테니 말이다.
이 일을 어떡하면 좋을지 테리언과 의논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미친 황제가 여태 카시우스를 힐로샤인으로 보내지 않고 붙들고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었던 거다.
카시우스가 뜨거운 물에 몸을 맡겼다.
***
“예? 결혼이요?”
“그래. 결혼.”
테리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자리를 서성거리는 테리언을 카시우스가 노려보았다.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런 얼굴을 하는 거지?
카시우스가 입술을 앙다물었을 때였다.
“결혼도……. 하실 수 있는 분이었군요.”
“뭐?”
“아니, 뭐.”
테리언이 멋쩍게 웃었다.
“결혼을 하실 거라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요. 카시우스 경은 평생, 혼자이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죠.”
“어째서?”
“어째서는……. 어째서는, 뭐. 그냥 그렇잖아요. 카시우스 경, 그동안 여자 손끝 하나 스쳐보신 적 있으십니까?”
레니샤가 떠올랐다.
“그게 아니면 여자랑 단둘이 이야기를 나눈 적은요?”
레니샤가 또 떠올랐다.
“그것도 아니면 여자랑 눈빛이라도 주고받으신 적이 있으신지?”
레니샤가 또, 또 떠올라버렸다.
테리언은 쓸모없는 충복이 틀림없다.
간신히 머릿속에서 몰아낸 레니샤를 다시 불러왔으니 말이다.
카시우스가 날카롭게 테리언을 노려보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맞는 말만 골라서 했는데! 기사들이 내기한 건 아세요? 카시우스 경이 고자다, 동성애자다, 혹은 무성애자다.”
테리언이 낄낄거리며 이성애자에 건 이는 아무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카시우스가 이를 아득 물었다.
“어떤 새끼들이……!”
“참고로 저는 고자에 걸었습니다.”
테리언이 환하게 웃었다.
카시우스가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집어 던졌다.
멀쩡한 놈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의논할 놈이 따로 있지.
카시우스가 후회하던 때에 테리언이 웃으며 말했다.
“뭘 고민하십니까. 어차피 황제 뜻대로 될 거. 지금은 무사히 힐로샤인에 정착해서 이족들을 데리고 올 생각만 하십시오.”
카시우스가 손을 스륵 내렸다.
“……그렇군.”
멍청한 고민을 할 때가 아니었다.
하샴의 무게가 여전히 카시우스를 짓누르고 있었던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