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하지 못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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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하지 못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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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하지 못한 이야기
2022.05.20.
카나리아가 부들부들 떨었다.
“경! 내가 분명 드레스코드는 푸른색이라고 말하지 않았었나요?”
쏘아붙이는 목소리는 가시가 잔뜩 돋쳐 있었다.
카시우스가 무감한 얼굴로 카나리아를 보았다.
그 눈동자 속에는 짜증이 담겨 있었다.
“카나리아. 카시우스 경에게, 아니, 이제는 공인가? 황제께서 카시우스 경에게 공작위를 수여하겠다고 공언하셨으니 말이야. 카시우스 공에게 너무 무례한 건 아닌가 싶군.”
레니샤가 부드러운 목소리를 뽐냈다.
카나리아가 빨개진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아직 정식 교지는 내려지지 않았으니, 경이라는 호칭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경은 출신상 저보다 아래지요. 그러니, 제가 하대를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럼에도 카나리아는 경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존댓말을 사용하고 있지요.”
“그대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지. 아, 그리고 그 드레스코드에 대해서는 너무 그러지 말게. 내가 내린 것이니 말이야.”
사근사근한 미소가 레니샤의 입가를 맴돌고 있었다.
귀족들의 시선이 레니샤를 향했다.
“아무래도 내가 실수로 잘못 의뢰했나 보군.”
실수일 리가!
카나리아의 눈빛이 뾰족해졌다.
“……카나리아 님은 황제 폐하의 사람이시지요.”
카시우스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 폐하의 사람께서 제게 그런 초대장을 보내셨으니, 저는 폐하의 뜻이라 생각하여 응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선물 주신 분이 황후 폐하이시니 그에 응한 것뿐이고요.”
“그렇다는군, 카나리아. 너무 의미 두지 말게.”
카시우스가 카나리아의 손을 떼어내고 빈자리에 앉았다.
보이지 않는 알력다툼에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이래서 귀족들 싸움에 끼고 싶지 않았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이렇게 끼어버렸다.
카시우스가 이를 악물고 찬물을 마셨다.
‘나를 가지고 놀고 있어.’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힐끗 보았다. 그를 향해 미소 짓는 얼굴이…….
‘제기랄.’
카시우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여전히 카시우스는 제 정부를 버젓이 궁 안에 들여놓고 부인을 모욕하는 렉서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렉서스는 레니샤에게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해 그녀의 삶을 짓밟았다.
레니샤는 혼자가 되었고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울타리는 무너졌다.
누가 레니샤를 지키겠는가.
그래서 카시우스를 이용해서라도 카나리아를 모욕하고자 하는 레니샤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저 여자를 안쓰럽게 만드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알 수 없는 건 카나리아다.
카시우스와 무슨 연대감이 있다고 그를 이용하려 든 것인지.
레니샤가 카시우스를 향해서 입을 벙긋거렸다.
‘잘 어울려, 카시우스 경.’
카시우스가 헛웃음을 삼켰다.
왠지 저 칭찬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일었던 것이다.
유치하게 기뻤다.
그사이 공백을 채우는 선율이 흘렀다.
씨근덕거리는 카나리아의 숨소리가 등 뒤에서 울리고 있었다.
“……경께서는 사교계의 예의를 잘 모르시나 봅니다. 이런 자리에서는 반드시 파트너를-.”
“지난 8년간 전쟁터에 있었던 탓이니 이해하십시오.”
카나리아의 말을 잘라낸 카시우스가 덤덤히 말하고는 제 옆자리에 놓인 의자를 쓱 당겼다.
“앉으십시오, 카나리아 님. 설마, 앉혀드려야 합니까?”
카나리아가 눈을 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더 이상 이 자리에서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사양이다.
카나리아가 거친 몸짓으로 자리에 앉았다.
카시우스는 레니샤만큼이나 재수 없다.
황제의 침실에 들게 된 이후로 카나리아를 이렇게 모욕 준 이는 카시우스가 처음이었다.
레니샤를 제외하고!
“그러면 모두 착석했으니, 티파티를 시작하지. 이렇게 본 후의 초대에 응해준 여러분께 고맙네. 얼마 전 폐하께서 만찬으로 그대들을 대접했으니 황성의 안주인으로서 응당, 다과를 대접해야 맞지 않겠나.”
레니샤의 음성은 하늘거리는 꽃 같으면서 동시에 심지가 단단하게 굳은 나무 같기도 했다.
카시우스의 시선은 단 한 번도 레니샤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전해야 할 이야기가 있는데.’
로테라 공작에게 약속한 것을 아직도 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죽기 전에 레니샤에게 남긴 말을 말이다.
그게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 여기서 유일하게 익숙한 이이기에 시선이 가는 것도 있었다.
추가로, 눈길을 끄는 사람이기도 하고.
레니샤가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간간히 카시우스에게 시선을 주었다.
보드라운 입가가 기분 좋은 듯 한껏 들려 있었다.
“커흠!”
카나리아가 불편한 기색으로 헛기침을 하기 전까지는 티파티는 평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카나리아가 찻잔을 달싹거리며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사람들의 시선이 어쩔 수 없이 카나리아를 향했다.
“황후 폐하. 요새 돌고 있는 이야기를 들으셨나요?”
“돌고 있는 이야기?”
레니샤가 우아한 어투로 반문했다. 귀부인들의 부채질이 빨라졌다.
“예. 세상에, 황성의 사용인들이 떠들어대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황제 폐하께서 카시우스 경의 혼사를 추진하고 계시다더군요.”
처음 듣는 소리에 카시우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마시던 찻물이 덜컥 걸렸다.
“콜록!”
목을 가까스로 가다듬은 카시우스가 말했다.
“대체 무슨 소립니까?”
당사자는 모르는 일을 황제가 기획하고 있다니.
“어머, 모르셨구나. 카시우스 경, 황제 폐하께서는 제국의 영웅께 그렇게 세심한 신경을 기울이고 계신답니다. 황후 폐하께서는 그 이야기를 알고 계시나요? 그 상대가 누구인지.”
모여 앉은 이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미 황제의 속을 넘겨짚던 이들의 시선이 카시우스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카나리아가 지금 이 자리에서 굳이 저 말을 하는 건 여기 있는 모두에게 말하고자 함이다.
황후는 떠날 것이고 카나리아는 남을 것이라고.
레니샤가 미소를 흘렸다.
“그런 이야기가 돌고 있었군. 카나리아는 나보다 아는 것이 많아. 아무래도 사용인들이 나보다 카나리아를 편히 여기기 때문이겠지? 그런 소문이 있거든 언제든 전해주게.”
카나리아가 입을 꾹 하고 다물었다.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레니샤가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다.
‘뭐야. 왜 저렇게 태연한 척이야?’
카나리아가 입을 삐죽였다.
그러든 말든 레니샤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카시우스를 달랬다.
“카시우스 경, 너무 심려치 말게. 황제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바가 있으실 거야. 확실해지는 것이 있다면 자네에게도 이야기가 들어가겠지.”
레니샤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마무리 지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는 게 좋겠군. 오늘 티타임이 모두에게 즐거운 시간이었기를.”
귀족들이 입을 모아 오늘 티파티를 칭송했다.
카나리아는 그 사이에 어울리지 않고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고 카시우스는 입을 꾹 다문 채로 레니샤만 보고 있었다.
“카시우스 경, 잠시 남게. 카나리아가 한 말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있다면 내가 아는 한도에서는 이야기해주겠네.”
“예, 황후 폐하.”
카시우스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모두 몰려 나갔다.
카나리아는 레니샤와 카시우스가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궁금한 듯 뒤를 힐끔거렸으나 어쩔 수 없이 온실을 떠나야 했다.
레니샤는 숨을 죽인 채로 사람들이 전부 떠나기를 기다렸다.
레니샤가 느린 속도로 찻잔을 비웠다.
카나리아는 예상한 바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보았을 것이다.
남게 되는 자와 떠나는 자가 보인 품격의 차이를 말이다.
레니샤가 보스스 한숨을 내쉬었다.
카나리아 같은 것을 그녀의 적수로 내세운 렉서스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레니샤가 고개를 들어 카시우스를 마주했다.
“카시우스 경.”
“……황후 폐하.”
“오늘 자리는 어떠했나?”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투성이였습니다. 카나리아가 한 말은 무슨 뜻입니까? 제 혼사라니.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카시우스가 답답함을 토로했다.
습관적으로 타이를 끌어 내린 카시우스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마치 단둘이 남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머리를 헤집는 손길도 거칠었다.
레니샤가 자리에서 느리게 일어났다.
사뿐, 사뿐.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옆자리 의자를 빼 앉았다.
그러고 보니 온실에 시중을 드는 사용인조차 남지 않았다.
카시우스가 그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경의 혼사 말인가?”
가까워진 레니샤가 읊조리듯이 물었다.
“예.”
카시우스가 가까워진 향기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 온실에서 레니샤만큼 생생한 꽃은 없었다.
적어도 카시우스에게만큼은 말이다.
레니샤의 곁에 있으니 입이 굳어버리는 기분이었다. 천하의 얼간이가 된 것처럼.
레니샤가 대답 없이 천천히 자리를 둘러보았다.
‘이 자리로군.’
레니샤가 쓰게 웃었다.
한 번 앉아보고 싶었는데, 혼자서는 용기가 나지 않았었다.
앞으로 레니샤가 앉게 될 자리였다.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이 빠져나갔다.
‘별것 아니야, 레니샤.’
막상 앉아보니 괜찮았다.
레니샤가 고개를 돌려 카시우스를 마주했다.
카시우스가 억울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이해하려고 하지 말게. 황제가 무슨 일을 하던 그냥 무시하면 돼.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이니 말이야.”
“그에 관해서 아시는 바가 없으시다는 겁니까?”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지. 황제의 뜻을 함부로 입에 담는 자는 명이 길지 못하거든.”
레니샤가 조곤조곤히 말했다.
아무리 레니샤라도 네 신부가 될 사람이 저라고 말할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그러기에는 너무 기우는 결혼이었다.
레니샤는 렉서스와 결혼했었던 전적이 있는 이고, 카시우스는 초혼이다.
레니샤는 말을 돌리는 것을 택했다.
“……전에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었지. 그 이야기를 해보게.”
나른하게 눈을 아래로 내리깐 레니샤가 옆 테이블에 팔을 올리고 고개를 기댔다.
손바닥 위에 얹어진 작은 얼굴 위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아직 바라시던 소식은 찾지 못했습니다.”
“서두르지 말게. 비밀스럽게 해야 할 일이니 쉽지 않을 것은 알고 있어. 그것 말고. 내게 하려던 이야기가 뭐였지?”
카시우스가 입을 달싹였다.
로테라 공작을 입에 담으려니 왠지 추가 매달린 것처럼 무거워졌다.
카시우스가 입을 크게 웅얼거리고는 말했다.
“……로테라 공작께서 생전에 황후 폐하께 전해달라던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레니샤가 눈을 깜빡였다.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아버지가?”
“예, 페하.”
레니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레니샤를 둘러싸고 있던 막이 무너지는 것을 카시우스는 똑똑히 목격했다.
레니샤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미소를 덧그리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말해보게. 아버지께서 내게 무엇을 전하라 하셨지?”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팔을 덥석 잡았다.
순식간에 닿은 레니샤의 체온이 카시우스를 들끓게 하는 듯했다.
그녀의 손이 닿은 피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경!”
레니샤가 카시우스를 재촉했다. 카시우스의 입술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