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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믿음이 향하는 곳 (11/135)


11화. 믿음이 향하는 곳
2022.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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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샤가 힐로샤인에 대하여 희망을 품었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카시우스는 로테라의 딸을 믿었다. 로테라 공작이 그녀를 믿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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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샤는 나를 가장 닮은 자식이지. 그 애라면 로테라를 지켜낼 거야.’

로테라 공작은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레니샤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지만, 로테라 공작을 믿는다.

카시우스가 지난 8년 동안 모셔온 주군은 그럴 만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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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대들을 믿는다. 그대들은 나를 믿어라. 나는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던 로테라다! 나를 믿지 못하겠으면 내가 로테라의 후손임을 믿어라! 이 길의 끝에는 광명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나, 베리턴 로테라가 그대들을 이끌겠노라!’

카시우스는 로테라 공작을 영원히 마음에 품고 살아갈 것이다.

누구보다 강인했고 아름다웠던 기사였다.

퇴각할 때는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살아남은 기사의 목덜미를 쥐고 전쟁터에서 끌어냈던 주군이기도 했다.

테리언이 바로 그 기사였다.

다리가 부러진 채 숨만 간신히 붙어 있었던 것을 베리턴이 전쟁터에서 꺼내와 살려냈다.

테리언도 로테라에 대한 선망이 대단한 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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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후께서 말씀하시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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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요?”

마지막에 황후가 카시우스를 스쳐 지나갈 때였다.

레니샤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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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로샤인은 희망의 땅이네, 카시우스 경.’이라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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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께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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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테리언이 말 속도를 멈췄다. 카시우스도 덩달아 말을 멈추고 테리언을 돌아보았다.

테리언이 근심을 덜어낸 표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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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믿을 만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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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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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카시우스 경에게 힐로샤인이라. 이건 뭐 죽으라는 건가 싶었습니다. 죽음의 땅이라고도 불리는 황무지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독하게 전쟁터에서 살아나왔는데 굶어죽나 했습니다.”

테리언이 솔직하게 말했다.

그럼에도 카시우스는 변명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테리언의 말이 맞다.

카시우스는 하샴으로 나기는 했지만, 하샴으로 자라지 못했다.

핏줄에 타고난 리더십이 있어 사람들을 이끄는 것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런 황무지에서 먹고살 수 있느냐고 물으면…….

막막한 게 사실이었다.

입을 꾹 다물고 노려보는 카시우스의 시선을 테리언이 슬쩍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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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황후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니 믿음이 갑니다. 로테라의 레니샤 아닙니까! 과거에 공작께서 무릎에 앉혀두고 직접 가르치셨다는 수재요! 아주 희망적이네요. 분명 수가 있으니 그런 말씀을 해주신 걸 겁니다. 황후 폐하께 방법을 배워 오십시오. 그러면 최소한 배는 곯지 않을 겁니다.”

이것 봐라.

아닌 척해도 테리언이 로테라라는 단어에 얼마나 맹신적인지.

***

레니샤가 피곤한 몸을 뜨거운 물 속에 뉘였다.

렉서스를 상대하고 돌아오는 날은 항상 정신적으로 탈진되는 느낌이다.

카시우스와 정식으로 대화를 나눠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카시우스는 생각보다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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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했지.’

레니샤가 피식 웃었다.

검을 다루는 기사의 딸로 태어나 자라왔다.

어릴 적에는 로테라 공작의 품이 가장 단단하고 따뜻하다고 생각했었다.

그 생각은 오늘까지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카시우스는 대단히 뜨겁고 단단했다.

손바닥 아래에서 느껴지던 열기와 심장 박동, 근육의 움직임까지.

레니샤가 손을 들어 올렸다. 천장을 가린 손바닥에 지금도 느낌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만큼의 강렬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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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이 살아 있었어.’

전쟁터에서 8년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곳에서 소년기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더러움과 부정적인 감정, 상처 따위는 조금도 흔적을 남기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저 횃불을 닮은 선명함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로테라 공작이 카시우스로부터 받은 감명을 이제야 알겠다.

레니샤가 손을 천천히 움켜쥐었다.

그 힘을, 카시우스를 손에 쥐려 한다.

카시우스를 레니샤의 운명에 끌어들이려는 것이다.

죽지 못하게 되었으니 죽이겠다는 맹세는 여전했다.

이사벨라를 포함한 소공작 내외를 찾아달라는 것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카시우스가 이 이야기를 다른 곳에 떠들고 다닌다면 레니샤가 위험해질 것이다.

찾지 못한다면 카시우스의 능력이 거기까지라는 거겠지.

하지만, 레니샤는 아버지의 안목을 믿는다.

잘 알지 못하는 카시우스는 믿지 못하지만, 평생 그녀를 키워준 부모를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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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우스……. 다음 만남이 기대돼.”

그는 어떤 답을 가지고 올까?

레니샤가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레니샤는 카시우스에게만 패를 던진 것이 아니다.

투리엘에게도 새로운 일을 지시해두었다.

작은 조각부터 하나씩 맞춰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거대한 그림을 맞추기 마련이다.

레니샤가 그릴 그림은 이제 시작이었다.

***

어젯밤, 사람들은 황제의 의중을 확인했다.

카시우스와 황후를 붙여놓는 것도 모자라 카시우스에게 로테라의 성을 내리다니.

밤새 잠들지 못하고 탁상공론을 펼친 결과, 그들은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미친 황제가 황후를 카시우스에게 보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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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께서 미치신 게 틀림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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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럽게. 그나저나, 이건 정말로 충격적이군. 황후께서 황성을 떠나고 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아니. 이 제국이 어떻게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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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를 막을 수 없으니 황후가 성을 떠나는 것 또한 막을 수 없소. 하지만, 제국을 떠나지는 못하게 해야 하오.”

한 나라는 사람과 사람이 모여 이루어진다.

히엔트리 제국을 지탱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민이었다.

그들이 존경하고 따르던 로테라 공작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손쉽게 죽었다.

뒤숭숭한 분위기에서 황제는 황후에게 죄를 물어 그녀를 폐하고자 한다.

거기에 더해서 황후가 제국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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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에요. 황제가 미쳤다는 사실은 그들도 알고 있지요. 그들이 믿는 건 황후지 황제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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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앙탈을 부리는 고양이 같은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한 사실을 속 시원하게 말한 이는 마담 투리엘이었다.

투리엘 자작.

투리엘이 생긋 웃고는 입에 물고 있었던 시가를 내려놓았다.

뿌연 연기에 가려져 있었던 투리엘의 교태스러운 외모가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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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리엘입니다. 오랜만에 뵙네요.”

투리엘이 허리를 곧게 폈다.

밤새 같이 있었으면서도 투리엘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이들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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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리엘 자작이 이 자리에 온 것은 황후 폐하의 뜻인가요?”

누군가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투리엘이 생긋 웃었다.

대답은 없었지만 그것은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좌중이 침묵에 휩싸였다.

역시가 역시였다. 황후는 이대로 몰락할 인물이 아니었다.

황제에게 그런 핍박을 당하면서도 제국에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다진 인물이었다.

레니샤는 여전히 레니샤였고 그들은 그녀를 함부로 업신여기거나 버린 패로 여길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사람들이 레니샤에 대해 불안감을 가지기 시작할 틈에 투리엘을 보내 그것을 정리한 걸 보라.

분명 레니샤에게는 생각이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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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폐하께서는 항상 황제 폐하의 뜻에 순응하시며, 동시에 히엔트리 제국을 위해서 노력하고 계시지요. 저는 황후 폐하의 종에 불과한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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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카시우스 공의 옷을 투리엘 자작께서 작업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또한 그분의 뜻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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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의뢰대로 옷을 만든 것뿐입니다.”

투리엘이 시가의 불씨를 끄고는 홍차를 홀짝 마셨다.

그 여유로움에서 레니샤가 묻어나고 있었다.

황후는 건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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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께서 황성을 나가시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황제의 뜻을 뒤집을 수 있는 이는 이 제국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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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엔트리가 꼭 제도라는 작은 땅덩어리 안에 갇혀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참 이상해요. 히엔트리의 광활함 앞에서 제도는 그저 작은 얼룩에 지나지 않는데 말이에요.”

투리엘이 생긋 웃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각자 생각하기 나름일 것이다.

이것으로 투리엘의 임무는 끝났다.

흔들리는 귀족들을 잡아두는 것.

투리엘은 레니샤의 말로서 임무를 훌륭히 수행해냈다.

레니샤의 그림 속에 속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

황제가 만찬을 벌였으니 관습에 따라 황후가 티타임을 열어 귀부인들을 초대해 대접해야 했다.

레니샤는 이번 티타임에 참석할 이들을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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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카나리아는 빼는 거죠?”

린데이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레니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오랫동안 모신 린데이도 짐작할 수 없었다.

레니샤가 고개를 돌려 생긋 미소 지었다.

초대장 디자인을 고르고 있던 레니샤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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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카나리아를 초대할 생각이야, 린데이.”

이럴 줄 알았다. 어쩐지 불안하더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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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리아는 그런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잖습니까. 귀부인들이 불편해하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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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초대하는 거야, 린데이. 내가 떠날 황성에 누가 남게 될지 알아야 할 거 아니야.”

레니샤의 얼굴이 얄궂은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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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대체할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야 그들도 마음을 정하지. 변화는 이미 시작됐어, 린데이. 내가 황성을 떠났을 때 나를 따라올 이들과 그러지 않을 이들을 추려야지.”

레니샤의 뜻을 알아차린 린데이가 작은 감탄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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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역시 레니샤는 절대로 아무 의미도 없는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레니샤와 카나리아는 나란히 서 있으면 흑백 대비처럼 명확한 차이를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레니샤가 고상하고 우아한 흰 장미 같다면 카나리아는 새빨간 장미와 같았다.

타고난 황후, 타고난 지배자로 지칭되는 이가 레니샤라면 카나리아는 교태스러운 미인의 상징이었다.

카나리아는 누가 보아도 아름다울지언정 황후에 어울리는 이는 아니다.

카니리아와 레니샤가 나란히 같이 있는 자리에서 그것이 더 두드러질 것이 분명했다.

미친 황제와 머리 빈 카나리아라니.

사람들이 어느 쪽에 더 흥미를 느낄지는 굳이 보지 않아도 분명했다.

물론, 그것만이 끝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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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티파티 자리엔 파트너를 동행하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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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파트너를요……? 그렇게 되면 황제 폐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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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호스트가 그런 규칙을 지킬 이유는 없지. 호스트가 규칙을 만드는 이유는 스스로가 빛나기 위해서 아니겠나? 나는 그날 붉은색 원단에 금색 실로 수놓은 드레스를 입어야겠어, 린데이. 그리고 드레스 코드는 푸른색으로 정하겠네. 실내 장식도 흰색을 위주로 하도록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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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너는 왜 동행하도록 하시려는 겁니까?”

레니샤가 입술을 휘어 올렸다.

렉서스는 레니샤를 카시우스에게 찍어 붙이지 못해서 안달이니 어떻게 해서든 이 자리에 보내줄 것이다.

굳이 카시우스를 몰래 만나기 위해서 애쓸 필요가 있을까.

이렇게 레니샤를 위해서 노력해주는 남편이 있는데.

레니샤가 나른하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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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이가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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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즐거워 보이세요, 폐하.”

린데이가 다행이라는 듯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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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밖에. 나를 설레게 하는 일이 생겼거든.”

카시우스가 불러일으킨 희망이 레니샤를 설레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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