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완벽한 위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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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완벽한 위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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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완벽한 위협
2022.04.29.
레니샤와 눈이 마주치면 대체 왜 그녀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굴게 되는지 카시우스조차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레니샤가 로테라 공작을 닮아서? 정말로 그것뿐인가?
덕분에 헛소리를 하는 렉서스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말았다.
‘로테라의 죄를 씻어줘?’
로테라가 어떤 죄도 없다는 것은 히엔트리 제국 사람이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로테라를 죄인으로 만들고 멸문시킨 것은 다름 아닌 렉서스였다.
“그렇지! 자네도 동의하는구만. 역시, 순리가 무엇인지 알아! 자, 다들 보게! 새로운 로테라 공작의 탄생이야! 뭣들 하고 있나? 다들 박수 치면서 축하해야지?”
사람들의 시선은 레니샤를 향해 있었다.
고요한 얼굴로 제 자리에 놓인 차를 마시고 있는.
그 시선 속에는 연민과 동정, 그리고 질시와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각기 레니샤를 보는 시선은 달랐지만 그들이 레니샤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렉서스 또한 레니샤를 보았다.
렉서스의 입귀가 비틀렸다.
“아, 그렇지. 이 자리에 황후가 있었지?”
렉서스가 카시우스를 밀치듯이 놓고는 레니샤의 어깨를 짚었다.
강한 힘으로 움켜쥔 어깨가 하얗게 질렸다. 레니샤가 이를 악물고 비명을 참았다.
‘멍청한 자식.’
렉서스가 왜 이러는지 모를 레니샤가 아니다.
로테라 가문에 대한 악의와 빌어먹을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 있는 그가 아닌가.
인간이라면 응당 가지고 있는 도의로 사람들은 레니샤의 눈치를 보았을 뿐이다.
렉서스는 그것도 못 참아줄 좁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렉서스가 레니샤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레니샤의 뺨에 입술을 붙인 렉서스가 귓가로 입술을 옮겼다.
온몸에 지네가 기어 다니는 느낌이었다.
레니샤가 창백한 미소를 지은 채로 그 모든 모욕을 참아냈다.
“자, 레니샤. 나의 황후. 말해봐. 황후는 어떻게 생각하지? 황후도 카시우스가 로테라의 죄를 씻어줄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응?”
카시우스는 렉서스를 떼어내 바닥에 내팽개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내야 했다.
레니샤가 참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만찬장에 모인 모두가 참고 있었다.
그 와중에 카나리아가 말을 보탰다.
“황후 폐하, 뭘 하고 계시나요?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시잖아요. 얼른 대답해드리세요.”
웃음기가 가득 묻어난 말투였다.
카나리아는 지금 이 상황이 매우 흡족한 것처럼 보였다.
이곳은 이해가지 않는 일투성이다.
그때였다.
레니샤가 가는 손을 들어 올렸다.
짝.
짝.
짝.
손바닥이 맞부딪히면서 낸 파열음이 고요한 만찬장을 울렸다.
레니샤가 그린 듯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말했다.
“폐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덕분에 로테라가 오욕을 벗게 되었군요. 카시우스 경, 고맙군. 다들 뭐 하고 있나. 이 일을 축하해야지.”
“하, 하하하하……. 그렇지요. 축하해야지요!”
“감사합니다, 카시우스 경! 우리에게 깨끗해진 로테라를 돌려주셔서요!”
귀족들이 발작적으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렉서스가 그것을 만족스럽게 응시했다.
레니샤에게서 몸을 떼어낸 렉서스가 카시우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자네는 로테라의 권리를 물려받게 될 걸세. 그리고 로테라가 소유했었던 힐로샤인과 일부 재산을 받게 될 거야.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알짜배기는 전부 제가 먹어치운 채로 배설물처럼 토해낸 것들만 내어주겠다는 거다.
카시우스가 무의식적으로 레니샤를 힐끗 보았다.
레니샤는 카시우스를 보고 있지 않았다.
레니샤는 황후이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다. 게다가 평생을 귀족으로 살아왔다.
그런데도 왜 저렇게 약해 보이는 걸까.
카시우스가 고개를 숙이고는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다 됐고 레니샤를 이곳에서 구해내고 싶었다.
카시우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어쩔 수 없이 참아야만 하는 분노가 가슴을 헤집고 혈관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참아야함을 안다. 카시우스는 지켜야 할 이들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레니샤는.
로테라의 딸인 레니샤는 저런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로테라가 지켜낸 그들의 딸은……!
슈르륵.
검붉은 비늘이 주먹 위로 돋아났다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다행히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렉서스가 제 자리로 돌아갔다.
숨이 막히는 만찬이 시작되었다.
“할 일도 했으니 다들 식사를 시작하지. 아, 그런데. 이렇게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은 것을 보니 잘 어울리지 않나?”
카시우스는 확신했다.
여기서 먹는 음식이 전쟁터에서 씹어 먹던 모래 섞인 빵보다 못할 것이라는 것을.
***
카시우스가 목을 죄고 있던 보타이를 끌어 내렸다.
예상대로 먹은 게 전부 얹혀버렸다.
토할 것 같은 역함을 간신히 참는 것이 전부였다.
“저딴 것도 황제라고!”
카시우스가 거칠게 걸음을 옮겼다.
다른 귀족들은 카시우스와는 다른 길로 가버렸다.
그들과 섞여 있는 것이 숨 막혀서 카시우스가 길을 이탈한 것이다.
되는 대로 걷는 카시우스와 눈이 마주친 이들이 알아서 그를 피해갔다.
어딘지도 모르고 가던 카시우스가 허리에 두 손을 얹고 멈춰 섰다.
이미 입고 있었던 옷은 전부 흐트러진 지 오래였다.
“후우!”
이제야 숨이 쉬어지는 것 같다.
욕이 머릿속을 마구잡이로 떠돌았다.
전쟁터가 훨씬 더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황제의 눈치를 보며 그의 비위를 맞추는 꼭두각시로 전락한 기분이었다.
‘참으셔야 합니다. 그놈은 미쳤어요. 하지만, 미친놈이 황제이니 어쩌겠습니까! 신관이 싫으면 신전을 떠나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경은 이 제국의 귀족이 되셔야 합니다. 경을 따르는 저이들과…… 지켜야 할 자들을 잊지 마십시오. 제발, 하샴.’
가증스러운 테리언.
하샴이라니. 테리언은 이미 잊혀버린 그 호칭을 적절하게 사용했다.
카시우스는 이국의 후계자로 태어났다.
하샴은 이국의 왕을 부르던 호칭이었다.
분명, 카시우스도 하샴으로 불리게 될 운명이었다.
이국이 히스테인에 멸망해 흡수당하기 전까지는.
왕족이었던 카시우스는 노예가 되어 이곳으로 끌려왔고 이국의 국민들은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카시우스에게는 하샴으로서 그들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래서, 참았다.
이제는 잊혀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출신의 비밀이었다.
카시우스가 이국 출신이라는 것은 비밀이 아니지만, 하샴이 될 후계자였다는 것은 철저히 비밀에 붙여져 있었다.
카시우스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왕족이었기 때문이었다.
카시우스가 참느라 터져버린 입 안을 혀로 훑었다.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찔러댔다.
한숨을 크게 내쉰 카시우스가 다시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갑자기 나타난 손이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가늘고 작은 손이었다.
악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는데 카시우스는 뿌리치지 못하고 끌려 들어갔다.
익숙한 향기가 났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야생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레니샤 황후.
레니샤였다.
레니샤는 미로 같은 이곳을 잘 알고 있는지 카시우스를 붙들고 정원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따르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인기척이 사라진 곳에 도착했을 때, 레니샤가 카시우스를 벽으로 밀쳤다.
거대한 카시우스에 비해서 작은 체구였는데 어디서 그런 박력이 나오는 건지.
레니샤가 손을 뻗어 카시우스의 가슴을 짚었다.
그다음 느리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카시우스는 레니샤와 눈이 마주칠 때까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카시우스 경.”
레니샤가 나긋한 목소리로 카시우스를 불렀다.
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 황성에서 가장 강렬하게 기억하는 유일한 사람인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 만났던 그날부터 카시우스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생각을 지배하는 것치고는 말이다.
레니샤가 입술을 끌어 올렸다.
이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 오늘을 참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망종 같은 짓을 하는 렉서스를 참아내고 카나리아의 무례를 참았다.
귀족들이 보내오는 연민도 씹어 삼켰다.
레니샤는 맹수였다.
먹이가 방심할 때를 숨죽여 기다릴 줄 아는 맹수.
레니샤가 제 목덜미와 뺨을 쓸고는 카시우스에게 물었다.
“혹 손수건 남는 것 있나?”
레니샤가 아무 대답도 않는 카시우스의 주머니를 더듬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 속에 든 손수건을 꺼내든 레니샤가 제 목덜미와 뺨, 귓불을 문질렀다.
그 서슬에 흰 피부가 붉게 물들었지만 레니샤는 거리낌이 없었다.
“더러운 게 묻어서. 후우.”
레니샤가 손수건을 다시 접어 카시우스의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를 들어왔다가 나가는 작은 손이 주는 느낌에 카시우스는 이를 악물어야 했다.
왠지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다. 열기가 아래로 쏠리는 것 같았다.
“할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데…….”
레니샤가 말끝을 흐리며 카시우스의 턱을 톡톡 쳤다.
가슴을 짚고 있는 손은 여전했고 카시우스도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저 작은 손이, 이 몸짓들이 위협적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카시우스의 반이나 될까 싶은 여자인데!
……완벽하게 위협적이었다.
이러다가 심장이 멎어버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카시우스가 붉어진 얼굴을 돌렸다.
“궁금한 게 없나?”
“……있습니다.”
카시우스가 짓씹듯이 내뱉었다.
간신히 숨통도 트였다.
오르락내리락 하는 가슴을 레니샤가 신기한 눈으로 응시했다.
렉서스도 체구가 꽤 큰 편이었는데 카시우스보다는 못한 것 같다.
온순한 동물처럼 레니샤의 손에 몸을 맡기고 있는 게 마음에 들었다.
흉포하게 휘두르려고만 하는 렉서스와는 달랐다.
‘정말로 착하게 구는군.’
레니샤가 웃음을 흘렸다.
“무엇이지? 얼른 말해봐. 그 이야기를 듣자고 여기까지 쫓아왔으니 말이야.”
“……왜 이 옷을 보내주신 겁니까? 저를 아십니까? 왜 아시는 것처럼 행동하십니까?”
“옷을 선물한 이유라. 나 또한 받을 것이 있어서 이 옷을 보냈지.”
“부탁하실 일이 있습니까?”
레니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에 대해서 알고 있느냐고? 남들보다는 좀 더 알고 있는 편이지. 경이 어떤 검법을 쓰는지, 그리고 얼마나 뛰어난 능력을 가졌는지. 단것을 좋아하는 편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경이 맞는 것 같은데. 내 아버지께서 극찬을 하시던 소년 기사 말이야.”
레니샤가 로테라 공작과 주고받았던 편지를 떠올린 것은 우연이었다.
카시우스라는 이름을 곱씹다가 그가 로테라 공작의 휘하 기사였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러다가, 특출 나게 검을 잘 다루던 소년 기사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 기사에 대해서 로테라 공작은 종종 언급했었다.
“아버지는 경을 두고 전쟁터에서도 열렬하게 불타오르는 생명과 같다고 말씀하셨었지. 눈길을 끄는 힘이 있다고 말이야. 오랜만에 즐거워 보이셔서 기억하고 있었지.”
카시우스가 놀란 얼굴을 했다.
‘나를……. 공작께서 나를 언급하셨다고?’
다른 의미로 가슴이 벅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