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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정당한 대가 (4/135)


4화. 정당한 대가
2022.04.12.


카나리아가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미소 짓고 있는 얼굴을 보아하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짐작할 수 없어도 그 정도는 짚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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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을 하세요, 폐하?”

카나리아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황제의 목을 끌어안고 단단한 뺨에 입을 맞췄다.

보드랍게 닿는 입술에 황제가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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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우스라고 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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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예 기사를 말씀하시는 거지요? 이번에 초르파 평야를 되찾아온 영웅이요. 그자가 폐하의 염원을 이루어주었다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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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지.”

황제가 술을 목으로 넘겼다.

기분이 좋으니 이 독한 술마저도 달게만 느껴진다.

카나리아가 황제의 뺨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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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가 무언가 황제 폐하를 기껍게 만들어드렸나요? 카나리아와 있는데도 그 남자를 떠올리실 만한 그런 일이었나요?”

나긋나긋하게 속삭이며 카나리아가 렉서스의 귓가에 바람을 훅하고 불었다.

황제의 관심을 제게로 돌리기 위한 짓이었다.

렉서스가 기분 좋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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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만한 일이 있었지.”

황제가 카나리아를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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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

기분 좋은 비명을 내지르며 렉서스의 무릎에 앉은 카나리아가 교태 어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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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인지 카나리아도 알고 싶어요.”

렉서스가 카나리아의 옷에 달린 리본을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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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를 비참하게 버려줄 방법을 찾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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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드디어 오랜 고민을 끝내셨나 봐요. 황후가 황제 폐하의 가장 큰 고민이셨잖아요. 그렇죠, 렉서스?”

달짝지근한 목소리로 카나리아가 렉서스의 이름을 속삭였다.

렉서스가 드러난 카나리아의 살결을 어루만졌다.

황후의 가문은 사생아였던 그를 황제로 만들었다.

로테라 가문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말이다.

그래서일까. 레니샤를 볼 때마다 기이한 열등감과 함께 두려움이 치솟았다.

20살의 나이에 17살이었던 레니샤와 결혼 후 황제가 되었다.

렉서스는 그때부터 누구보다 로테라를 견제해왔다.

렉서스를 황제로 만들었듯이 누구든 황제로 만들 수 있을 거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게 된 것이다.

렉서스의 생각을 알아차린 로테라 공작은 문을 닫고 칩거를 선택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렉서스의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렉서스는 로테라를 전쟁터로 내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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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라고 보낸 자리에서 엉뚱하게 살아 돌아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

렉서스가 설핏 웃으며 카나리아의 입술에 키스했다.

카나리아가 듣기 좋은 아양을 부리며 렉서스의 품에 안겨들었다.

8년간 렉서스와 레니샤 사이에는 아이조차 생기기 않았다.

레니샤는 내내 고상한 공녀님이었다.

렉서스 따위는 절대로 범접할 수 없다는 듯한 오라를 내뿜곤 했다.

렉서스가 무슨 수를 써도 레니샤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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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고고한 낯짝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기대되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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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카나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렉서스를 끌어안았다.

렉서스를 품에 안은 카나리아의 예쁜 미간이 좁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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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그놈의 황후한테 왜 이렇게 집착을 하는 건지. 평소에 하던 것처럼 죽여버리면 되는걸.’

카나리아가 얼른 표정을 바꿨다.

광기로 가득한 황제다.

언제 마음이 변해 카나리아에게도 검을 겨눌지 모른다.

카나리아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제의 아이를 낳아야 했다.

그러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어리광을 부리며 살아남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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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서스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카나리아는 아무것도 모르겠는걸요.”

카나리아가 한숨을 폭 내쉬고는 렉서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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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생각 마시고 카나리아를 즐겁게 해주세요.”

카나리아가 렉서스에게 감겨들었다.

***

시종장이 렉서스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황후궁으로 은밀하게 향했다.

레니샤와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황제가 알게 되면 그는 물론 그의 가족들까지 무사하지 못하리라.

하지만, 이 미쳐 돌아가는 황성이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황후 덕택이었다.

시종장이 숨을 고르고는 레니샤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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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폐하를 미천한 종이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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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장.”

레니샤가 평이한 목소리로 시종장을 불렀다.

연회장에서 그런 꼴을 당하고도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건 황후가 레니샤이기 때문이리라.

시종장이 침을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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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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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대를 부른 것은 묻고 싶은 게 있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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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문하시옵소서.”

레니샤가 가라앉은 눈으로 시종장을 응시했다.

그나마 렉서스에 대해서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것은 시종장뿐이었다.

렉서스는 시종장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곁에 가까이 두려 하지 않았다.

렉서스의 본능적인 감이 제 편을 가려낸 것일지도 모른다.

시종장은 레니샤의 편을 드는 척하며 그녀와 왕래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황제를 배반하지 못할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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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서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 자네를 불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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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시종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레니샤를 보았다.

레니샤가 생긋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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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서스가 카시우스에게 어느 영지를 내릴 생각인지 알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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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폐하.”

시종장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나, 대답과는 달리 뒷말이 바로 나오질 않았다.

길어지는 침묵의 의미를 알아차린 레니샤가 짧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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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참 다정한 편이야.”

실바람이 섞인 것 같은 레니샤의 음성에 시종장이 눈을 질끈 감았다.

황제가 이번에 카시우스에게 내리기로 결정한 영지는 힐로샤인이었다.

힐로샤인은 본디 땅 중에서도 가장 척박하고 인구수가 적은 곳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 힐로샤인이 원래는 로테라의 소유였다는 것.

힐로샤인을 비롯한 본디 로테라의 영지였던 것들이 황실로 귀속된 것은 로테라 공작 부부가 떠밀려 출전했었던 8년 전의 일이었다.

황제는 로테라 공작이 가진 대부분을 전쟁 자금이라는 명목으로 앗아왔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로테라 공작은 황제가 원하는 대로 대부분을 내어주었다.

그렇게 억지로 앗아온 땅을 제 것인 것처럼 카시우스에게 하사한다는 말은 아무리 시종장이라도 쉽게 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로테라의 후손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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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로샤인이로군. 애초에 카시우스 같은 노예 출신의 영웅을 대우해줄 생각도 없었을 거야. 안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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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작위 계승 절차를 걸쳐 힐로샤인을 카시우스 경에게 내리고자 하십니다.”

시종장이 까끌한 목으로 간신히 침을 삼켰다.

사실 그보다 더 추잡한 명령이 떨어졌지만, 그것만큼은 차마 입에 담을 수가 없어 시종장이 입을 꾹 다물었다.

레니샤가 물은 것은 여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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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네, 시종장.”

시종장이 고개를 조아리고는 물러갔다. 레니샤가 입매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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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을 빗나가지 않았어.’

카시우스가 가지게 될 땅이 힐로샤인이고, 그곳으로 레니샤가 가게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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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서스. 내가 내 모든 것을 걸고 장담하지. 너는 절대로 편하게 죽지 못할 거야.’

레니샤의 입술이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검은 장막으로 가려진 것 같은 밤하늘을 밝히고 있는 달빛은 레니샤가 갈 길을 밝혀주는 등불과 같았다.

절대로 흔들리지도, 길을 잃지도 않으리라.

***

카시우스와 기사들이 머물고 있는 곳은 황성에서 임시로 제공해준 저택이었다.

귀족들이 사는 대저택은 아니지만, 그들은 따뜻하게 몸을 뉘이고 편한 곳에서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8년을 살다온 이들이라 들뜸을 감추지 못하고 매일같이 축제 같은 분위기였다.

왁자지껄 떠들면서 식사를 하고 있는 이들 사이에서 카시우스만이 침묵에 잠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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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 저러시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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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

테리언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도 뭐라고 이야기하기에는 그날 연회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카시우스가 레니샤 황후에 대해서 묻기는 했지만, 그건 로테라 공작으로 인해서 생긴 관심에 불과할 것이다.

설마, 미친 게 아니고서야 제국의 황후를 탐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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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영지를 안 내려주실 거래? 이미 보급받은 것들이 떨어지고 있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페리센 왕국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나을 뻔했어.”

기사들이 불만을 토로했다.

저들의 말대로 초르파 평야에서의 마지막 대전투가 끝나고 페리센의 왕은 그들에게 페리센 왕국으로의 귀화를 제안했었다.

초르파 평야를 고스란히 가지고 오는 조건으로 말이다.

페리센 왕은 카시우스에게 공작의 작위를, 그리고 드넓은 영지와 그에 걸맞은 자산을 내려줄 것을 약속했었다.

그것을 버리고 여기까지 돌아왔는데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니 불만이 늘고 있는 실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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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그런 소리 함부로 했다가 황제 귀에 들어가면 어떡하려고 그래? 로테라 공작이 어떻게 죽는지 못 봤어?”

기사들이 헛기침을 했다.

로테라 공작이 죽고 나서 군대는 무너졌었다.

수장을 잃었으니 별수 있겠는가.

그 자리를 바득바득 치고 올라와 결국 전쟁을 마무리 지은 것이 카시우스였다.

카시우스가 없었다면 이 자리도 없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난 후 떠날 이들은 떠나고 남은 자들은 카시우스의 뒤를 따라왔다.

주인을 잃은 로테라의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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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우스 경께서도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데 왜 자네들이 이 난리야?”

테리언이 타박을 놓는데 카시우스가 여태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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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불만이 생길 만도 하지.”

카시우스의 형형한 금빛 눈동자가 태양처럼 불타고 있었다.

느른하게 기대 있던 몸을 바로 세운 카시우스가 차갑게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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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황제가 계속 이렇게 미적거린다면 우리는 또 한 번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겠지. 테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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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카시우스 경. 지금 황성에 주둔 중인 기사들은 300명에서 500명 정도 되는 것 같았습니다. 거리를 재어 봐도 성 밖에 주둔 중인 이들을 불러들이려면 반나절은 걸릴 테고요.”

카시우스가 식탁을 짚었다.

시끄럽게 떠들어 대던 이들이 입을 다물고 카시우스에게 집중했다.

카시우스가 입술을 끌어 올렸다.

카시우스가 저렇게 웃을 때는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나곤 했다.

기사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기사들이 먹던 것들도 전부 내려놓았다.

테리언은 카시우스가 이끌고 있는 기사들 사이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이였다.

정보를 수집하는 능력도 뛰어나고 가장 최선의 전략을 내어놓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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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의 수는 얼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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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명 정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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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해봄 직하지. 황제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를 개고생시킨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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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누군가가 주먹을 위로 내질렀다.

두려움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밝은 낯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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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들 초르파 평야보다 낫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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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목표는 황제의 목이라니. 황제라도 되려고 하십니까?”

기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순간 카시우스가 떠올리고 있는 이는…….

황후의 자리가 아닌 황제의 자리에 앉아 찬란한 금빛 왕관을 쓰고 있는 레니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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