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승산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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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승산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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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승산이 있어
2022.04.08.
“어떠셨습니까?”
테리언이 빠른 걸음으로 카시우스에게 따라붙었다.
연회장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밖으로 나와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떠나는 것이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했다.
“카시우스 경!”
“황제는 미쳤어.”
카시우스가 이를 갈면서 말했다.
두꺼운 목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황실의 예법에 맞추기 위해서 갖춰 입은 제복이 카시우스에게는 영 답답해 보였다.
부풀어 오른 가슴팍이 상의 단추를 터뜨릴 것만 같았다.
카시우스가 돌연 멈춰 서서는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연회장의 흐느적거리는 불빛이 아직은 보이는 거리였다.
“황제가 미친 게 하루 이틀 일입니까. 카시우스 경, 그래도 약속된 것을 받아오셨느냐고요!”
테리언이 답답하다는 듯이 카시우스의 시야를 가리고 섰다.
“이대로라면 여태 고생한 게 정말로 개고생이 되는 겁니다. 황제가 약속한 것을 주덥니까?”
아무리 테리언이 떠들어 대도 카시우스의 머릿속에 남은 것은 단 한 명뿐이었다.
황후.
그런 상황에서도 죽은 표정으로 미소 짓던 여자.
그러다가도 분노와 증오로 눈을 빛내던 신기한 여자였다.
분명 여리하고 작은 몸집은 황제에게 휘둘릴 정도로 힘이 없어 보였는데, 카시우스를 짓누르는 위압감을 품고 있었다.
잘 갈무리되어 속 안에 담긴 것이 카시우스의 눈에는 보였었다.
미쳐 버린 황제에게는 한참이나 아까운 여자다.
“카시우스 경!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테리언이 답답한 마음에 목소리를 높였다.
“……황후의 이름이 뭐였지?”
“예?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으십니까? 황후라면…… 레니샤 로테라 아닙니까.”
“로테라?”
카시우스가 시선을 테리언에게로 내렸다.
로테라라면 카시우스도 알고 있었다.
이번 전쟁에서 카시우스가 출전하기 전에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두 기사가 있었다.
나가서는 안 됐던 전투였다. 매복이 확실했고 아군의 수는 적었다.
애초에 황제가 말도 안 되는 전쟁을 시작한 거였다.
황제는 과거 힐스테인의 땅이었던 초르파 평야를 다시 되찾아 오라며 로테라 공작가의 등을 떠밀었다.
황가의 지원은 없었다.
로테라 공작은 제 가문의 기사들과 함께 새롭게 기사단을 꾸려야 했다.
그나마 로테라 공작가를 지원하는 여러 귀족들이 있었기에 출전이나마 가능했을 것이다.
페리센 왕국의 초르파 평야를 중간에 두고 벌어진 전쟁은 8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그 시간은 소년을 청년으로 자라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카시우스 또한, 그렇게 전쟁터에서 수종 기사들이 지어 주는 밥을 먹으며 자라났다.
그러다가 공을 세워 로테라 공작을 직접 알현하게 되었다.
‘……네가 이번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지. 아니, 이제는 경이라고 칭해야겠군. 카시우스 경.’
부드럽게 휘어지던 눈가에는 고단함과 함께 세월이 묻어나 있었다.
그러나, 절대로 굴복하지 않는 아름다운 눈빛이었다.
로테라 공작은 기사들이 떠들어 대던 대로 고고한 흑표범과 다를 바 없었다.
카시우스는 로테라 공작을 동경했다.
로테라 공작이 죽던 날, 카시우스는 그를 말리기 위해 무례하게 그의 막사로 쳐들어갔었다.
말리던 기사들조차 황소처럼 들이받는 카시우스를 더 이상 저지하지 못했었다.
‘가면 죽습니다. 여기서 심부름이나 하는 어린아이들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애초에 황제가 죽으라고 떠민 자리라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차라리 그 검으로 황제의 목을 치십시오!’
카시우스의 금안이 흐려졌다.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전쟁터의 유황 냄새와 쇠붙이에서 나던 날비린내 같은 것들까지.
‘세상에는 할 수 있음에도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다네, 카시우스 경.’
‘대체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전히 황제를…….’
‘내 딸이.’
로테라 공작이 카시우스의 말을 잘라 냈다.
‘내 딸이 황제에게 붙잡혀 있네. 내가 내 딸의 목숨을 두고 내 목숨을 구걸해야겠는가? 자네도 지키고 싶은 게 있을 것 아닌가.’
카시우스는 입을 벌렸지만 숨을 내쉬는 것 외에는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어깨를 두드리는 로테라 공작의 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젖어 있었다.
‘……만약 내 딸을 보게 된다면 전해 주게. 나는 절대로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이 또한 너로 인해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고…… 사랑한다고 말이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평소에 다정하게라도 굴어볼 걸 그랬군. 내 딸이 웃는 얼굴이 얼마나 예쁜지 자네는 모르겠지. 그리고 그 얼굴을 나도 다시는 못 볼 것 같군. 하하…….’
그리고 그 모습이 정말로 로테라 공작의 마지막이었다.
쓸쓸하게 저버린 영웅의 마지막을 카시우스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로테라 공작과 공작 부인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으니 말이다.
카시우스는 로테라 공작의 뒤를 좇으며 자라났다.
18살, 노예 검투사의 삶에서 벗어나 그의 군대에 지원한 날부터.
로테라 공작의 보호를 받았고 그가 베푸는 것의 은혜를 입었다.
“로테라.”
“예, 그 로테라입니다.”
테리언도 그 이름의 무게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숙연해졌다.
테리언이 한숨을 내쉬었다.
“레니샤 황후를 보셨습니까? 어때 보이시던가요?”
로테라를 따르던 기사들은 전부 레니샤를 알고 있었다.
불현듯 가슴속에 묻고 있던 기억을 떠올린 카시우스는 왜 그렇게 그 여자에게 시선이 갔는지 알 것 같았다.
레니샤는 로테라 공작과 똑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살아 있더군.”
카시우스가 황성에 시선을 둔 채로 읊조렸다.
“살아 있었어.”
“카시우스 경?”
로테라 공작이 마지막으로 남긴 그 말을 전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카시우스가 밤에 물들어 어두워진 머리를 헤집었다.
“경? 레니샤 황후는 멀쩡하셨다는 거지요? 그런데 뭐가 문제입니까. 설마 황제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안 해주겠다고 합니까? 초르파 평야를 되찾아온다면 영지와 작위를 내려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카시우스가 테리언을 눈앞에서 밀어내고는 황성을 묵직하게 응시했다.
레니샤 로테라.
절대로 황제에게 어울릴 여자가 아니었다.
황후 옆에 선 황제는 비루먹은 당나귀보다 못해 보였으니 말이다.
“기다리고 있으라더군. 말 잘 듣는 개처럼.”
“예?”
“우릴 잊은 것은 아니니 되었지, 뭐. 그래도 올 겨울은 지붕 아래에서 날 수 있겠군.”
“또 기다리랍니까? 세상에. 같이 가요, 카시우스 경!”
카시우스가 보폭을 크게 해서 황성으로부터 멀어졌다.
오늘 본 레니샤는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로테라 공작 부부는 딸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를 내버렸는데 말이다.
왠지 입맛이 썼다.
황제의 비열한 낯짝을 뭉개버리고 싶었다.
카시우스의 우상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목숨을 잃어야 했는데 황제는 태연하게, 연회장에서 유유자적 제 할 짓을 하고 있지 않았나.
레니샤의 불행도 황제로부터 비롯되었으리라.
공작은 레니샤를 황후라고 말하지 않았다.
‘붙잡혀 있다.’라고 표현을 했지.
어쩌면 로테라 공작도 레니샤가 어떤 취급을 당하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말을 할 때 로테라 공작의 얼굴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으니 말이다.
“이대로 황제가 아무것도 안 주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테리언이 참지 못하고 카시우스를 닦달했다.
카시우스가 맹렬하게 타오르는 눈으로 뇌까렸다.
“황제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겠지.”
검붉은 비늘이 목선을 따라 돋아났다가 사그라들었다.
***
시녀들이 레니샤의 머리 장식을 하나씩 풀어냈다.
“황후 폐하, 괜찮으세요?”
“괜찮다. 그러니 염려하지 않아도 좋아.”
레니샤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응시했다.
화려한 화장을 한 얼굴엔 어떤 표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잘 꾸며진 인형이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있는 것처럼 무감정했다.
레니샤가 제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거울에 비친 저 화려한 여자가 저 같지 않고 남처럼만 느껴진다.
오히려 시녀들이 분노와 서글픔을 꾹꾹 눌러 참는 표정이었다.
레니샤가 버석한 웃음을 흘렸다.
그다음 렉서스에게서 읽어냈던 생각을 다시금 곱씹어보았다.
레니샤를 카시우스에게 보내려는 것이다.
제 아내를 제 손으로 죽이는 짓만큼은 할 수 없으니, 가장 비참하고 처참한 방법으로 버리려는 것일 테지.
죽은 제 표정을 보고 있으니 카시우스가 돌연 떠올랐다.
화려한 불꽃처럼 타오르던 그 남자가 말이다.
‘카시우스…….’
레니샤가 입속으로 그 이름을 굴려보았다.
카시우스에 대해서는 모르는 이가 없으리라.
그건 레니샤도 마찬가지였다.
카시우스는 노예 검투사 출신의 기사였다.
자세한 내력은 알 길이 없으나, 카시우스는 거기서부터 바득바득 올라와 영웅의 자리를 꿰찬 남자였다.
생명력으로 타오르던 선명한 금안이 뇌리에 박혀 있었다.
레니샤가 오른손을 들었다.
“그만.”
“황후 폐하?”
“목욕물을 받아주게. 시중은 들 필요 없어.”
“하지만, 폐하……!”
시녀들과 하녀들이 우물거렸다.
혹시나 레니샤가 잘못된 선택을 할까 두려워하는 얼굴들이었다.
레니샤가 피식 웃었다.
맨 처음 로테라 공작 부부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레니샤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었다.
지금도 붉게 남은 상흔을 가리기 위해서 화려한 팔찌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그날 시녀들이 빠르게 수습한 덕분에 황제에게 알려지지 않고 정리될 수 있었다.
그날을 떠올리고 있는 것일 테다.
“이제 더 이상 멍청한 짓을 하지 않아. 살아 있는 자들을 찾아서 지켜야지.”
레니샤가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그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홀로 남아 이 상황을 정리하고 싶을 뿐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새롭게 레니샤의 인생에 끼어든 카시우스라는 패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카시우스로 새로운 판을 짤 수 있을지 생각해보아야 했다.
하녀들이 빠르게 레니샤의 옷을 벗겼다.
시야가 흐릿할 정도로 훈기로 가득한 욕탕에서 사용인들이 나갔다.
레니샤가 탕에 몸을 담갔다.
‘아직은 지켜볼 필요가 있어.’
모든 걸 버리고 도망가는 방법도 있긴 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정말 바닥부터 시작해서 기어 올라와 렉서스와 맞서야 했다.
다 포기하고 떠나버리는 선택지는 레니샤에게 없었다.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공작 부부의 원혼을 달래줘야 했으니까.
‘카시우스에게 내려지는 영지가 어디일까. 만약…….’
레니샤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렉서스라면 카시우스에게 가장 험준하고 삭막한 영지를 내릴 것이 분명했다.
혹은 버림받은 땅이나.
‘정말로 힐로샤인이라면…….’
승산이 있다.
레니샤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죽어 있던 분홍빛 눈동자에 강렬한 무언가가 깃들었다.
한참을 물속에서 머물러 있던 레니샤가 몸을 일으켰다.
시녀들이 두고 나간 종을 흔드니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몰려들었다.
멀쩡한 레니샤를 확인한 시녀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지금 조속히 시종장을 보고자 한다고 전해.”
“예, 황후 폐하.”
왠지 예감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