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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죽여 버리겠어 (1/135)


1화. 죽여 버리겠어
2022.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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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컹.

그건 대체 무엇을 알리는 소리였을까.

이명처럼 레니샤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던 그 소리는.

레니샤의 심장이 까마득한 무저갱 속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레니샤의 텅 빈 분홍빛 눈동자가 황제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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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건가, 황후?”

황제가 황좌에서 일어나 단 아래로 사뿐사뿐 걸어 내려왔다.

마치 소풍을 나온 것처럼 가벼운 걸음이었다.

렉서스의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레니샤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 내렸다.

그 뱀 같은 시선에 레니샤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드러내고 싶지 않아도 분노와 좌절, 서글픔은 어쩔 수 없이 겉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흘러넘친 감정의 잔재였다.

레니샤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렉서스가 손가락으로 거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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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샤, 나의 아름답고 고상한 황후. 왜 그렇게 우는 거지? 저기 저 죄인들과 황후가 무슨 관련이 있다고.”

렉서스가 속살거렸다.

렉서스가 손가락질한 곳에는 소금이 가득 든 상자에 가지런히 놓인 목 두 개가 있었다.

과거에는 인간이라 불렸을 것이나 지금은 사체에 지나지 않은.

고작 목 위만 남은 자들의 흔적이었다.

로테라 가문의 세리아와 베리턴.

레니샤를 낳고 길러준 부모의 이름이었다.

그들이 저렇게 처참한 몰골로 마지막을 맞이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로테라 가문은 초대 황제와 함께 히엔트리 제국의 기틀을 닦고 공신 가문으로서 황가의 뒤를 지켜온 가문이었다.

히엔트리가 황가로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로테라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라.

모두들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 모든 영광과 약속은 이렇게 비참하게 무너져 버렸다.

황제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레니샤의 입술에 키스했다.

짙은 박하향이 몰려들었다가 물러났다.

멍하니 눈물만 투둑 떨어뜨리고 있는 레니샤에게 렉서스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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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는 거냐고 묻지 않았는가,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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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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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하게. 저자들과 황후가 어떠한 연관이 있는가?”

렉서스는 악질적이게도 레니샤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레니샤의 손으로 제 가문을, 부모를 버리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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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그렇게 비굴하게 살아남아야 하지.’

레니샤가 멍하니 생각했다.

죽음이 레니샤의 발목을 스멀스멀 낚아챘다.

렉서스가 매끈한 손으로 레니샤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다정함이나, 온기 그런 건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이 아닌 자에게서 느껴질 법한 한기가 피부 위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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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폐하, 다행히 소공작께서는 목숨을 부지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부인과 아이도요. 아직 붙잡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레니샤의 반대쪽 발목을 낚아채고 있는 것은 살아남은 가족들의 생사였다.

그들의 생사를 확인하기 전에는 떠나지 못한다.

죽지, 못한다.

레니샤가 인형처럼 입술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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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아무도 아닙니다. 저와는 관계가 없는 자들입니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그 목소리에 렉서스가 환히 미소 지었다.

렉서스가 잘했다는 듯이 레니샤의 뺨에 입을 맞췄다.

레니샤에게서 멀어진 렉서스가 시종들에게 손짓했다.

비릿한 악취를 풍기고 있는 저것을 치우라는 의미다.

레니샤는 그들을 붙들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눈앞에 서 있는 자가 누구인지 기억해야 한다.

레니샤의 앞에 서서 그녀의 부모님의 죽음을 조롱하고 있는 저 남자가 누구인지, 기억해야 한다.

히엔트리 제국의 황제이자 희대의 폭군으로 손꼽히는 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황권을 구축하고 그 정점에 선 자.

언제든지 레니샤의 목숨 또한 거둘 수 있는 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동시에, 살을 맞대고 살아온 남편이기도 했다.

내뱉은 말이 불러일으킨 죄악감이 레니샤의 목구멍을 뜨겁게 달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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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 물러가도 되오, 황후. 피곤해 보이는군.”

렉서스가 레니샤의 팔목을 놓아주었다.

레니샤가 눈물자국이 마른 얼굴로 고개를 조아려 예를 취하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탁.

문이 닫혔다.

다리의 힘이 풀려 휘청거리는 레니샤를 시녀들이 달려와 부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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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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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하…….”

레니샤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얼굴을 매만졌다.

눈물이 흐르지 않는다.

이 죄인은 더 이상 부모님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릴 자격도 없다는 듯이 멎어버렸다.

레니샤가 손을 들었다.

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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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폐하!!!”

시녀들이 레니샤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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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하소서! 제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스스로의 뺨을 내리친 레니샤가 시녀들을 떼어내곤 다시 한번 제 뺨을 내리쳤다.

이 목숨 이어보겠다고 평생을 사랑으로 길러준 부모를 부정했다.

빌어먹을, 렉서스. 개만도 못한 렉서스!

레니샤의 마음속에 검붉은 불씨가 타닥 소리를 내며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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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폐하! 차라리 저를 때리세요. 제발……!”

레니샤를 온몸으로 끌어안은 시녀들이 함께 눈물을 터뜨렸다.

레니샤의 터진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울지 못하는 레니샤 대신에 시녀들이 울고 있었다.

머릿속이 멍했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이 전부 꿈처럼 느껴졌다.

시녀들을 뿌리치고 비틀거리며 걷던 레니샤의 몸이 한순간에 꼬꾸라졌다.

살아 있는 것이 죄였다.

***

렉서스가 술병을 만지작거렸다.

주둥이가 긴 술병 안에 가득 찬 호박색 액체는 레니샤를 연상시킨다.

레니샤의 머리타래를 말이다.

명도 높은 금을 녹여서 실로 엮어 놓는다면 레니샤의 머리칼 같을 것이다.

렉서스가 즐겨 마시는 술의 색도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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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폐하, 렉서스…….”

옆에서 잠들어 있던 여자가 하얗고 매끈한 손으로 렉서스의 허리를 더듬거렸다.

잠자리 후의 나른함을 가득 담고 움직이던 손가락이 렉서스의 허리를 끌어안고는 멈춰 섰다.

이불을 말고 일어난 여자가 렉서스의 등에 고양이처럼 얼굴을 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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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셔요? 이렇게 카나리아가 곁에 있는걸요.”

여자의 생김새를 닮은 나긋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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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렉서스가 무심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카나리아를 떼어낸 렉서스가 침대에서 벗어나 술병을 쥔 채로 소파에 앉았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를 보던 레니샤다.

태어나기를 황후로 난 것처럼 렉서스보다도 더 황족다웠던 황후다.

그녀는 렉서스의 머리 위에 선 것처럼 오만했다.

그 고결함을 꺾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분명 그 얼굴을 보고 나면 즐거울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렉서스가 눈살을 찌푸린 채로 잇새를 악물었다.

조금도 통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럽고 추저분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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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또 그런 표정.”

카나리아가 애교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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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표정을 하세요? 카나리아가 곁에 있어서 기쁘지 않으신가요? 카나리아를 사랑한다고 하셨잖아요.”

카나리아가 렉서스의 귀에 달콤한 바람을 훅 불어넣었다.

렉서스가 카나리아의 허리를 잡아채 몸을 굴렸다.

소파에 누운 카나리아가 눈을 귀엽게 깜빡였다.

카나리아는 누구의 눈길도 끌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답다.

렉서스의 비위를 맞추고 그를 위해서만 노래하는 어여쁜 새였다.

그런데 왜 카나리아를 곁에 두고도 그 뻣뻣한 황후를 떠올리고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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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칫. 거짓말쟁이. 지금 다른 여자를 생각하고 있는 거죠?”

카나리아가 매끄러운 팔을 렉서스의 목에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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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야말로 레니샤 황후를 죽이실 거라고 하셨잖아요. 이 카나리아를 가장 높은 곳에 앉혀주신다고 해놓고는. 왜 안 그러셨어요?”

카나리아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렉서스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건 스스로도 답을 알 수 없는 문제였다.

레니샤가 그런 표정을 하고 있으니 오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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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군.”

렉서스가 자조하고는 카나리아가 입고 있던 가운을 벌렸다.

아무래도 조만간 레니샤의 거취를 결정해야 할 것 같았다.

죽일 순 없다.

짜증나게도 레니샤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려 할 때면 입에 못질이라도 한 것처럼 움직이질 않는다.

오늘도 그랬다.

그렇다면 눈앞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방법으로 치워버리면 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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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폐하! 아직 답을 않으셨…… 컥!”

렉서스가 카나리아의 목을 압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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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내가 생각 중이잖아, 카나리아. 내가 원할 때만 예쁘게 울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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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 폐하……!”

카나리아가 황제의 손등을 긁었다.

작은 새처럼 파닥거리는 카나리아를 보는 황제의 눈동자에 잠시나마 즐거움이 스쳤다.

혀로 입술을 훑은 황제가 제 손을 카나리아에게서 떼어냈다.

울음을 터뜨리는 카라니아의 뺨을 쓸어내리며 황제가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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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렴, 카나리아. 너는 귀엽게 굴기만 하면 원하는 걸 가질 수 있을 거다.”

카나리아가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렉서스의 음험한 눈동자가 카나리아를 훑었다.

그래, 지금 레니샤 따위를 생각할 때가 아니다.

이렇게 잘 차려진 만찬이 렉서스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렉서스가 카나리아의 쇄골에 얼굴을 파묻었다.

짙은 꽃향기가 몰려들었다.

***

깊은 수심 속에서 수면 위로 끌어 올려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레니샤가 눈을 번쩍 떴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시녀들이 짧은 비명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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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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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정신이 드십니까? 괜찮으세요? 제가 보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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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좀 가만히 좀 있어봐! 폐하, 제 목소리 들리세요?”

시녀들이 앞다투어 달려와 레니샤에게 매달렸다. 레니샤가 큰 눈을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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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어.’

기어이 살아 있었다. 레니샤가 비릿하게 웃었다.

아무 말도 없이 인형처럼 앉아 있는 레니샤를 보는 시녀들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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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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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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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만 하세요!”

시녀들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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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부모님의 사체가 어디에 버려졌는지 알아봐줄 수 있나?”

시녀들이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레니샤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던 지난 하루 동안 그들도 수소문을 하며 알아보았다.

이리저리 돈을 찔러주고 나서야 간신히 알아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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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감옥에 계신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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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앞을 경비들이 둘러싸고 지키고 있대요.”

결국 죽고 나서도 그렇게…… 황제의 손아귀에 붙잡히신 거다.

로테라가 히엔트리에 어떻게 했는데.

다 죽어가던 사생아 황자를 황제로 만들어준 것도 로테라 아니었나!

렉서스는 로테라가 아니었으면 황제가 되지 못했을 운명이었다.

사생아로 태어나 위 형제들을 처단하고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건 로테라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움켜쥔 레니샤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레니샤가 침대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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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로테라에 기생해 살더니! 금수보다도 못한 개자식!”

레니샤가 평소와 같지 않은 모습으로 무너지는 것을 시녀들이 처참한 심경으로 지켜보았다.

레니샤는 죽지 못한다.

아직 살아남은 식솔들의 안위를 확보하기 전까지는.

죽지 못할 바엔 죽이는 것은 어떨까.

이 하늘 아래 렉서스와 함께 살지 못하겠다면, 그 개자식을 죽이는 건 어떨까!

레니샤가 이를 악물고 뇌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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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 버리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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