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地)의 종족 (9)
찌릿, 찌릿찌릿….
전신이 찌릿거린다.
하지만 이전 [그]와 만났을 때처럼의 압박감은 없었다.
눈앞의 존재도 피 한 방울에 깃든 잔념이고, [그] 역시 분체였으나 뭔가가 달랐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았으나, 나는 어쩐지 둘의 거리감이 다르게 느껴진다고 느꼈다.
어쩐지, 이 흑룡은 [그]보다 한참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아, 그런 건가.’
이 흑룡은 어쩌면 이 광한계에서 [그]보다도 멀리 떨어진 차원에 자리하는 존재인 것 같았다.
‘본체가 더 먼 차원에 있는 존재인지라 [그]만큼의 압박감이 없는 거야.’
물론 [그]만큼의 압박감이 없다는 것이지, 이 흑룡 또한 피 한 방울에 남은 잔념에 불과함에도 어지간한 합체기 태수 이상의 압박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내가 흑룡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촤라라라락!
“…!!!”
갑자기, 어둠 속에 잠겨 있던 내 전신이 흑룡의 앞에서 분해되고 있었다.
‘이게 무슨…!?’
비록 현실 세계가 아닌, 흑룡의 잔념과 만나는 정신세계기는 했으나, 나는 현실에 있는 내 몸이 분해되는 착각에 빠지는 듯했다.
“끄으으읍!!”
내가 비명을 참았으나, 흑룡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몸 가장 깊은 곳을 속속들이 분해하며 관찰했다.
뼈와 살이 분해된다.
피와 내장이 분해된다.
이윽고 세포 하나하나가 분해된다.
세포 하나하나의 속에 잠들어 있던 무수한 이중나선들이, 몸 안을 회전하던 무수한 영기의 음양들이 흑룡의 눈 앞에 까발려진다.
분명 정신세계임에도 불구하고 내 육신이 현실의 것처럼 구현되는 건 둘째치고, 나름 월도답천에 오르고 기묘성심전을 익혔음에도 불구하고 흑룡의 시선 앞에서는 아무런 저항도 불가능했다.
그리고, 나는 흑룡이 내 몸을 까뒤집어보는 것과 동시에 내 눈앞에도 흑룡이 보는 음양과 이중나선에 대한 정보가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건….’
원영(元靈)을 얻을 때 보았던 광경.
체내의 음양이 회전하면서 내 과거를 돌아보았던 광경이었다.
그랬다.
나는 흑룡에 의해 원영을 얻을 때의 광경을 한 번 더 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건… 내 역사…!!?’
태어나고, 자라고, 이 세계로 날아오고….
그리고 비승해서 서휼을 따라와 지금에 이르기까지, 약 30여년에 달하는 인생이 눈 앞을 지나간다.
‘어?’
그러나 나는 뭔가 이상한 걸 알 수 있었다.
평소에 보던 주마등이나, 혹은 원영기에 이를 때 보았던 삶의 순간들은 모두 회귀의 시간을 포함한 흐름이었다.
그러나 흑룡이 보여 주는 흐름은 회귀가 포함되지 않고, 원래 세계에서 이 세계로 넘어올 때에서 바로 회귀 직후로 기억이 끊겨 있었다.
그리고 기억이 스쳐 지나가며, 마침내 봉명주로 들어가 [그]와 마주쳤을 때의 기억이 뇌리로 떠올랐다.
그때였다.
피잇!
갑자기 주마등이 끊겼고, 내 몸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
나는 그제서야 공간 안에서 움직일 수 있었다.
“…! 허억, 허억….”
죽는 줄 알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몸이, 유전자 단위로 분해된다고?’
그리고 그 유전자를 영기의 음양이 타고 올라가며 이중나선을 그리고 과거를 보여 주었다.
말 그대로, 내 인생의 역사(歷史)를 한 눈에 들여다본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흑룡의 음성이 내 귓전을 때렸다.
[도대체 필멸자에게 이천 년이 쌓여 있는 건 또 무슨 일인가 했더니, ――――와 독대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그분께서 과거를 들여다보는 걸 허하지 않으시니, 이쯤 하겠다.]
“…? 아….”
아무래도 [그]와 만났던 기억을 보며 흑룡은 뭔가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제 기억을… 전부 읽으신 겁니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눈앞의 어둠의 용에게 질문하였다.
어둠의 용은 잠시 침묵하는 듯하더니, 그대로 어둠으로 흩어져 버렸다.
사방팔방의 어둠으로 흩어져버린 흑룡의 목소리가 천지간에서 울렸다.
[전부 읽으려 했다만, ――께서 막으셔서 감히 다 읽지는 못했노라. 너는 무얼 하는 필멸자이기에 ――께서 너를 귀히 여기시는가.]
‘음?’
나는 흑룡이 말하는 ――이 뭔지 들어보려 했으나, 그가 말하는 단어 자체가 인지되지 않았다.
‘…진선이 뭔가를 해 놓은 거겠지.’
“…송구스러우나, 저 역시 그분께서 제게 어찌 관심을 쏟는지 잘은 모르나이다.”
[그런가… 알겠다. 하나, 내가 너를 신경 쓰는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니노라. 너는 지금 선수 진혈을 연화하려 하는 것이 맞느냐?]
“…? 예, 맞습니다.”
[선수의 혈통을 이은 이들에게 정식으로 인정을 받고 진혈을 연화하는 방법은, 우선 극한의 환경에 내몰려 선수 진혈을 받을 만한 생명력이 있음을 확인받는 것. 너도 분명 이 과정을 치렀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예.”
나는 분명 선수혈합을 치렀다.
[네게 묻자면, 그 선수혈합에 참여한 이들의 최대 수행이 어느 정도였느냐?]
“분명 원영기가 최대였습니다.”
내 기억으로는 천인기 이상은 참여가 불가능했었다.
[왜 천인기 이상은 참여를 막아 놓았다고 생각하지? 천인기 수사가 원영기 수사보다 몇 배는 더 생명력이 질길 텐데?]
“그건….”
어둠 속에서 흑룡의 목소리가 울렸다.
[천 년. 선수 진혈을 받아 연화시킬 수 있는 조건은, ‘천 년 이하의 세월을 살았을 것’이다. 원영기 중에서도 천 년 이상을 먹은 녀석들은 당연히 선수 진혈을 받을 수 없고, 천인기는 절대다수가 그보다 오래 살았으니 선수 진혈을 받을 자격이 없지.]
“…!”
[그런데 너는 육신은 반갑자인데, 어찌 필멸자 주제에 이천 년의 세월을 쌓은 것이냐. 천인기에 필적하는 세월을 쌓은 주제에 선수 진혈을 받으려 한다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노라. 본디 선수 진혈에 남겨진 본좌의 잔념은 겁도 없이 선수의 진혈을 연화시키려는 천인기 수사들에게 충고를 주기 위해 남겨진 것이니….]
“그, 그럼 저는 자격이 없단 말입니까?”
나는 어이가 없어서 흑룡에게 되물었다.
이천 년을 넘게 살아온 것 때문에, 그것 때문에 자격이 막혀서 선수 진혈을 연화할 수 없다고?
내가 기막혀 할 때, 어둠 전체가 웃는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니지. 되려 자격이 너무 넘치기에, 천인기 이상의 짐승들은 선수의 힘을 담을 수 없는 것이다. 이미 다 채워진 그릇에 뭔가를 더 채우려면 넘쳐 버릴 뿐이니.]
“….?”
[영기(靈氣)는 곧 폭발. 폭발은 곧 생명(生命). 그리고 모든 생명은 음양을 본따 이중나선의 구조를 가지고 있지.]
어둠 속에서 흑룡이 말을 잇는다.
[이중나선은 모든 정보의 총람이자, 생명이란 존재의 역사(歷史). 아이야, 어째서 영기를 폭발시켜 생명을 키워가는 종족에게 땅(地)의 종족이란 이름이 붙는지 아느냐?]
우욱!
갑자기 헛구역질이 난다.
[그]를 만날 때와 같다.
‘이, 이건….’
지금껏 먼 차원에 있다고 생각했던 흑룡이, 점차 이곳으로 ‘가까워’ 지고 있다.
온 세상이 핑글핑글 돌아간다.
흑룡이, 나를 향해 ‘관심’을 보이고 있다.
비록 머나먼 차원에 있을지언정, 그가 나를 향해 관심을 보이는 것만으로 피 한 방울에 담긴 잔념을 넘어 그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전해져 왔다.
본체는 멀리 있으나, 그의 관심이 차원을 넘어오며 그 관심만으로 나의 존재가 짜부라지고 있는 것이었다.
[하늘이 운명(運命)이라면 땅은 곧 역사(歷史). 역사는 정보, 정보는 곧 생명. 그러므로 생명의 극의를 향해 달려가는 이들은 모두가 지(地)의 종족인 것이란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의 본질은 이미 어둠으로 흩어져 사라진 채였고, 나는 내 몸을 이루는 유전자 하나하나가 어둠 속에 잡아먹히는 느낌을 느끼며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녹아 내려갔다.
나는 그 부드러운 목소리 한 음절 한 음절에 녹으며 죽어 가고 있었다.
[우리 선수(仙獸)란 생명과 역사의 영역에서 노니는 신(神)들일진저, 진정한 땅(地)의 대변자이노라. 그렇기에 우리의 힘을 받들기 위해서는 도리어 너무 많은 세월을 쌓아 오면 아니 된다. 왜냐하면, 많은 세월을 쌓아 왔다는 것은 하나의 그릇에 충분히 많은 내용물이 들어있다는 뜻이니, 그 그릇에 새로운 걸 불어넣으면 그릇이 깨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노라.]
쿠구구구구!
“아악… 아아악! 아어…아악….”
[역사는 절대적인 ‘하나’. 그렇기에 한 존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선수의 힘도 하나이다. 그렇기에 아이야, 너는 본래라면 내 힘을 받아들일 수 없노라. 너는 이미 자기 자신의 한계를 한참이나 뛰어넘을 정도로 세월을 쌓아 왔으니….]
점차 비명조차 어둠 속으로 침잠해 간다.
[하지만 도리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그 정도의 세월을 쌓았기에, 어쩌면 또 모르지. 그렇기에 한번 지켜보도록 하마. 너는 내 힘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부스스….
어둠에 의해 전신이 갈려 나간다.
나는 내 자신이 먼지가 되어 버리는 것을 인지하며, 그대로 어둠 속에서 정신을 잃어버렸다.
* * *
“그학…! 그하학! 크학!”
허억!
나는 번뜩 눈을 뜨며, 내 목에서 나는 기이한 소리에 몸을 흠칫 떨었다.
‘여긴… 어디지?’
맞다.
나는 규련에게 나를 도와 선수 진혈을 연화하는 것을 부탁하며, 그녀의 동부 안에서….
“…헛!”
나는 황급히 일어나서 주변을 둘러보려 했다.
하지만, 나는 목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이물감에 자리에 주저앉아야 했다.
아니, 목뿐이 아닌 전신 곳곳에서 끔찍한 이물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
그것은 핏빛의 창이었다!
피로 이뤄진 혈창이 내 목, 사지, 그리고 심장과 단전 바로 윗부분에 꽂혀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쿨럭!
말을 할 때마다 피가 토해진다.
그때, 저 멀리서 익숙한 인영이 걸어왔다.
규련이었다.
“정신 차렸느냐?”
“규… 선배님?”
“원래 선수 진혈을 연화할 때는, 피에 녹아 있는 선수 흑룡의 힘의 편린을 마주하기에 이지가 날아가서 날뛰게 되지. 하도 날뛰어서 주술진 안에 제압해 놓았다.”
“아… 감사합니다. 혹시 이제 빼 주실 수 있으실지….”
그녀는 말없이 내게 다가와, 내 목에 박힌 창과 심장에 박힌 창, 그리고 단전 위에 박힌 창을 뽑아 주었다.
촤라락!
창을 뽑자마자 웅혼한 기운이 몰려들며 창이 꽂혀 있던 부위가 재생되는 것이 느껴졌다.
‘재생력이… 차원이 다르다…?’
나는 이전과는 달라진 몸 상태에 눈을 빛냈다.
이정도 재생력은 결단기는 되어야 볼 수 있는 재생력이었다.
“저… 그런데 팔다리에 박힌 창들도 뽑아 주시면 안 됩니까?”
“아직 안 끝났다.”
“예…?”
“이제 겨우 흑룡의 힘이 남긴 잔류를 경험하고 깨어난 게 아니느냐.”
“무슨… 흐읍!!!”
나는 그와 함께 닥쳐 오는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춥다!
이전에 봉명주 밑바닥에 처박혔을 때처럼 춥다!
이것은….
“흑룡은 태음의 힘을 관장하는 선수이시다. 그분의 힘을 네 몸에 녹여 내는 과정이다. 아득한 옛적부터 전해진 태음의 권능을 받아들여라.”
파아아아앗!
규련의 말이 울려 퍼진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팔다리에 꽂혀 있는 혈창에서 황금빛 생명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너무 추워서 얼어붙어 버릴 것만 같거늘.
혈창은 내 추위를 몰아내주며 내 정신을 이끌었다.
‘이것이, 태음….’
나는 이를 악물며 전신에서 날뛰는 음기를 가라앉혔다.
“흐오오오오오오!!”
가라앉아라!
규련이 황금빛 뿔을 드러내며 내 전신에서 날뛰는 음기를 제압해 주고 있었고, 나는 제압된 음기를 내 의지 하에 두며 날뛰지 못하게 억눌렀다.
“그 상태에서 네가 익힌 요수공법을 운용해라. 음양의 흐름이 태음을 포용하도록 유도해!”
‘음양의 흐름이 태음을 유도하도록….’
나는 창령성광오채대법을 운용하며, 음의 기운을 유도했다.
음과 양의 영기가 폭발하며, 그 폭발 사이로 이중나선이 그려진다.
나는 그 이중나선 사이로 음의 기운을 유도했다.
음의 힘은 이중나선 사이로 스며들며, 내 육신 자체를 개조해 나갔다.
우득, 우드드득!
전신에 흑룡의 힘이 스며든다!
뿌득, 뿌드드득!
이마에 흑색의 사슴뿔이 돋아나고, 이빨이 삐죽삐죽해지는 게 느껴졌다.
손끝으로 매의 발톱 같은 날카로운 발톱이 생겨났고, 피부 위로 드문드문 흑색의 비늘들이 돋아난다.
“그…아아아아아!”
고함을 지르자, 내 성대에서는 인간의 고함이 아닌 용의 그것이 터져 나왔다.
흑룡의 힘이 주는 강력한 흉성이 뇌리를 지배하는 듯했다.
‘저, 정신이….’
귓가에서 흑룡의 고함이 미친 듯이 터져 나온다.
이대로라면 흑룡의 야성에 정신이 잡아먹힐 것만 같았다.
아니, 아니다.
‘이건….’
나는 내 내면에 숨겨진 야성을 마주하고 있었다.
흑룡의 힘은 내 안쪽으로 스며들며, 이천 년에 달하는 나 자신의 세월을 끄집어냈다.
이천 년을 살며 내 내면에 차곡차곡 쌓여 온 부정적인 기운들, 그동안 강력하게 억눌려 왔던 욕망이 미친 듯이 꿈틀거렸다.
‘그런가, 오랜 세월을 살아온 자일수록 자기 자신에게 쌓여 온 야성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는 거구나.’
나는 흑룡의 힘에 고개를 드러낸 나 자신의 야성을 마주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라면 정신이 나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크아아아아아!”
포효를 내지른다.
이제 내 포효는 용의 포효와 다를 바 없었다.
규련의 동부 전체가 흔들거렸으나, 그녀는 무덤덤하게 황금빛 기운을 끌어올렸다.
“조금 아플 거다. 그래도 선수혈합을 통과한 정도라면 충분히 견딜 수 있을 테니 걱정은 말도록.”
다음 순간, 그녀가 자신의 발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발에 황금빛 기운이 몰린다.
그리고, 그녀의 발이 내 머리통을 거세게 짓밟았다.
“크왁!”
뭔가를 느낄 새도 없이.
야성과 욕망에 사로잡혔던 내 머리통은 그대로 규련의 발에 밟혀 박살이 나 버렸다.
퍼엉!
나는 내 머리통이 수박 터지듯이 폭발하는 느낌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다.
* * *
[네게 나의 힘은 독이나 다름없다. 네가 그 힘으로 인하여 얻을 것은 재액에 불과함이다.]
흑룡의 음성이 어렴풋이 어둠 속에서 들려온다.
[그래도 정녕 내 힘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냐. 마음대로 해 보아라. 죽을 때나 되어서야 후회할 녀석이구나.]
점차 다시 의식이 흐릿해져 간다.
나는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이번 기회가 이번 생에서 흑룡과 나눌 수 있는 마지막 대화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겐, 안 된다.’
이 기회를 놓쳐 버린다면, 나는 엄청난 기회를 놓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위대한 흑룡이시여. 필멸자의 의문을 들어주소서.’
어둠은 침묵하였다.
하지만 나는 침묵 속에서 질문을 허한다는 기색을 느꼈다.
‘당신의 혈통을 타고난 흑룡왕 현음은 혈음계와 어떤 연관이 있나이까….’
흑룡에게, 직접 흑룡왕 현음과 용족에 대하여 물어보자.
[그렇군. 최근 그분께서 내 핏줄을 빌어 발버둥을 치고 계시다지.]
어쩐지, 내 질문에 흑룡은 굉장히 재미있어하는 듯했다.
[명계의 명망 높은 판관이었던 분이 어찌 그 꼴로 영락해서 발버둥을 친다는 말인가. 선악을 관장하는 판관이라면 누구든 벌벌 떨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진선(眞仙) ◈#■(攸好德)께서 찌꺼기만 남아서 벌레처럼 내 핏줄에 기생하신다니… 아하하하….]
찌잉!
콰아앙!
다음 순간.
진선의 이름을 듣자마자 내 머리는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흑룡에게 뭔가 더 묻고 싶은 것도, 더 알고 싶은 것도 많이 남아 있었으나.
그 순간 모든 것이 머리에서 지워졌다.
감히 진선의 진명을 망령되게 함부로 들은 자.
그 정신이 온전하지 못할진저.
“끄아아아아악!”
이름에는 운명의 일부가 담겨 있다.
나는 진선의 이름을 엿들음으로써, 진선의 명을 엿본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게서 지워 영향이 없었으나, 흑룡이 아무런 배려 없이 내뱉은 진선의 이름은 내 뇌리를 어지럽히며 정신을 혼돈으로 몰아간다.
지운다!
방금 나눴던 대화를 지운다.
방금 들었던 이름을 지운다.
머릿속에서 그것을 지우지 않는다면 ▒▒▒攸好德이 나를 들여다보리라.
나는 정신이 어둠 속으로 침잠하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 * *
“…헛.”
나는 숨을 들이켜며 정신을 차렸다.
‘방금, 머리가 터졌던 것 같은데….’
맞다, 규련이 내 머리를 밟아 터트렸다.
그런데….
‘머리가 재생되어 있다?’
나는 아직 축기기였다.
그런데 벌써부터 내 머리가 재생되어 있는 것이었다.
‘머리를 재생하려면 결단기는 되어야 할 텐데….’
꿈틀….
“…어?”
나는 몸을 움직여보며, 흠칫했다.
이상하다.
이 정도 기력이 축기기라고?
그 때였다.
“뭣…!”
나는 다음 순간.
내 단전 안에 있는 뭔가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금단(金丹)? 아니, 아니다.’
내 내단이 진화하여, 금단만큼 커져 있었다.
뚝, 뚜두둑….
내가 손을 움직이자, 내 팔다리에 박혀 있던 혈창이 으스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뭣…!”
“깨어났느냐?”
그리고, 내 옆에 앉아 있던 규련이 말을 걸었다.
“선수 진혈이 잘 안착됐나 보군.”
“헛…!”
우드득!
내가 황급히 놀라며 일어서자, 내 몸에 박혀 있던 혈창들은 마치 과자 조각처럼 으스러졌다.
“축하한다. 이제 너도 완전히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우리 용족의 일원이라 할 수 있게 되었구나.”
규련은 장하다는 듯이 팔짱을 끼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 아니, 규 선배님… 그나저나 제 뱃속의 내단, 아니, 요단이….”
“넌 지금 결단기다.”
“예…!?”
“가끔 너 같은 녀석들이 있지. 선수 진혈의 힘이 유난히 잘 들어서 수행이 폭증하는 녀석들. 네 요단은 금단화가 완료되었기에, 너는 이제 결단기이다.”
나는 상상 외의 경지 상승에 입을 벌렸다.
육신 전체에 힘이 가득가득하다.
이대로라면 아무런 초식도 법술도 쓰지 않고 맨몸만으로 결단기의 힘을 재현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몸 안쪽에서 넘실거리는 태음의 힘은 잘만 조정하면 그대로 법술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질 것이라는 게 느껴졌다.
‘아니, 법술이 아니지.’
내가 흑룡의 진혈을 얻어 부리는 태음의 힘은 법술이 아닐 터.
이는 요술(妖術)이라 불려야 옳을 터다.
꾸드득….
주먹을 쥐자 웅혼한 힘과 함께, 음기가 주변으로 몰리며 우릉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요족의 요술과 인족의 법술을 합치고, 이 육신의 힘에, 힘을 극대화시키는 초식을 더불어 사용하면….’
결단기 수준의 실력만 가지고도 원영기 수사가 전혀 두렵지 않았다.
내가 육신의 힘을 살펴볼 때였다.
앉아 있던 규련이 동부 바깥을 가리켰다.
“힘을 살펴보는 건 나가서 해 보거라, 널 찾으러 온 손님이 찾아왔으니.”
“예?”
“내가 지금 손님을 막고 있느라 썩 힘이 드니, 네가 가서 제대로 맞아 드리거라.”
“아….”
나는 그녀가 말하는 ‘손님’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쿠릉, 쿠르릉, 쿠릉!
먹장구름이 하늘에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먹장구름 사이로 익숙한 청뢰가 우르릉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청뢰는 떨어지지 않았다.
황금빛의 용이 그려진 주술진이 규련의 동부 위쪽, 하늘 전체를 뒤덮고 있어, 청뢰는 규련이 펼친 주술진에 갇혀 꿈틀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내가 결단에 오르는 동안 천뢰가 떨어지지 않게 막아 주고 있었던 건가.’
쿠릉, 쿠르릉!
물론 하늘에서 몰아치는 힘은, 타인이 막아 주고 있는 만큼 훨씬 더 강해져 있었다.
감히 타인의 힘을 빌어 천겁을 이겨 내냐는 듯, 하늘에서 우릉거리는 천뢰의 위력은 결코 우습게 볼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왠지,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동부 안에 있는 규련에게 우선 절을 올렸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됐다, 이제 천겁을 해방할 테니… 한번 새로 얻은 선수의 힘을 시험해 보거라.”
“예.”
그녀의 말과 동시에, 하늘의 진이 사그라들며 청뢰가 나를 향해 떨어져 내린다.
꾹, 꾸구구국!
나는 내 체내에서 용솟음치는 힘들을 정련했다.
음혼귀주와 백란축성, 천린수해와 규토장성 등의 천족 공법.
광한결로 인해서 완전히 요수공법화시킨 창령성광오채대법과 흑룡의 힘 등의 지족 공법.
그리고 무(武)을 쌓아 올리며 다다른 심족의 힘.
무형검은 드러낼 필요 없다.
무(武)의 극점으로 얻은 무형검은 이미 내가 상용하는 초식 전반에 녹아 있었다.
무형검을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내 몸에서 펼쳐지는 궤적은 모두 내 지배하에 있으니.
전신에서 끌어 넘치는 이 힘들을 최선의 궤적으로 휘두르기만 하면 될 뿐.
파아아앗!
천, 지, 심 삼재의 힘을 담아.
‘단악검법.’
청뢰(淸雷)를 향해 내지른다.
‘유릉!’
법력과 요력이 뒤섞이며, 극한으로 증폭된 육신의 힘과 함께 최적의 궤적으로 하늘을 향해 뻗쳐 나간다.
하늘을 향해 쏘아올려지는 힘에는 자연스레 태음의 기운이 깃들며, 하늘을 향해 질러지는 찌르기는 커다란 흑룡(黑龍)의 형상이 되어 청뢰를 박살 내 버렸다!
콰과과광!
청뢰는 산산조각 났고, 그 위에 있던 먹장구름은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 푸른 하늘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후우….
무형검을 직접적으로 쓰지 않고도 이 무지막지한 청뢰를 받아 냈다.
우우웅….
시야에도 변화가 있다.
지금까지는 그냥 영기의 흐름을 보는 정도였던 지족의 시야는, 이전보다도 훨씬 더 뚜렷하고 광대한 광경을 보여 주었다.
‘이것이, 음양….’
하늘과 땅은 그 자체로 거대한 태극(太極)을 그리고 있다.
그 태극은 공간(空間)이었다.
월도입천에 도달해 심상을 보게 되고, 천족 공법을 익히며 운명을 보는 눈이 더더욱 강화된 것처럼. 요족으로서 경지에 달하자, 천지에 흐르는 음과 양이 더더욱 거시적으로, 더더욱 확실하게 보인다.
나는 새로이 진화한 요족의 시야를 보며,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는 확고하게, 지(地)의 종족이 되었다.’
드디어, 천, 심에 이어 지(地)에 영역에도 발을 딛는 데에 성공하였다.
나는 비로소 그렇게 느낄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