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地)의 종족 (8)
그게 무슨 말이지?
나는 순간 혼란이 와서 그를 쳐다보았다.
[아하하하하!]
순간, 가냘픈 여성의 목소리였던 그녀의 목소리가 굵은 남성의 목소리로 변했다.
[심도공법 같은 말은 천족과 지족이 우리를 이해하기 위해 어거지로 가져다 붙여 놓은 말… 우리에겐 공법 같은 체계적인 체제가 존재하는 게 불가능하단 말이지. 자네도 알지 않나? 구현 두 번째에 이르렀으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은 각기 다른 가능성을 지녔다는 걸 알 텐데?]
“….”
맞는 말이다.
나는 그인지 그녀인지 모를 이 녀석의 말에 미간을 좁히며 생각했다.
“그럼… 심도공법, 아니… 심족은 이 ‘경지’를 뭐라고 부르지? 심상은 전부 다르지만 ‘경지’에 이르르는 과정은 같은 게 아닌가? 그냥 말 그대로 ‘구현’이 끝인 건가?”
[흐음… 알려 주고픈 마음도 있긴 하지만….]
다시금 그의 목소리가 어린아이의 것으로 변했다.
[아무래도 질투가 나는걸? 천족의 몸으로 지족의 아래에서 수학하며 우리의 힘까지 얻는다니. 천지심(天地心) 삼재(三才)를 전부 대성한다면 어떤 괴물이 탄생하게 될지 꺼려진단 말이지.]
사라락….
주홍빛 강물이 내 주변으로 흘렀다.
나는 이 강물의 정체가 실재하는 물이 아닌 이 존재의 심상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실체가, 없다?’
하지만 나는 이 기묘한 강물을 보며 흠칫 놀랐다.
답천은 결국 자신이 구현한 심상과 일체되는 경지일 터.
하지만 이 강물은 분명 답천경과 같은 기세를 풍기는 강물이면서도, 본체로 추정되는 실체가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내가 속마음을 숨기며 그 존재를 들여다볼 때였다.
[허허, 하나 이토록 투명한 도산의 지옥이라니….]
다음 순간, 다시 강물의 목소리가 늙은 노인의 것으로 변하였다.
[천, 지족은 물론이고 우리 중에서도 이토록 극단적인 심상은 본 적이 없다만… 과연, 삼재의 괴물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지를 알 수만 있다면 자네에 대한 태도를 정하거나 할 텐데 말이지….]
강물은 나를 휘감고 목소리를 흘려 냈다.
그 모습은 마치, 심족이란 존재가 뒷짐을 지고 나를 바라보며 빙글빙글 도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바라보는 와중, 무형검을 일으켰다.
단악검법.
산명곡응.
티이잉!
맑은 검명이 울리며 정신을 강타했다.
기의 계위에서 울려 퍼진 파동이 혼의 계위로 전해지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난히 지족에 들어와서는 세뇌를 좋아하는 놈들을 많이 만나는 것 같군.”
[아니 이런. 벌써 들켰네. 그나저나 그거 도대체 뭔가? 기운이 의식으로 전환했어? 계위를 이동한 건가?]
“….”
나는 이 녀석의 헛소리에 답하지 않고, 정신을 집중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
어느새, 목화농장에 불을 지르던 노예들은 전부 사라져 있었다.
내가 이 녀석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저 멀리까지 이동한 듯싶었다.
‘환상에 빠져 있었다? 내가?’
나는 이를 악물며 강물을 노려보았다.
“내게 무슨 짓을 하려 한 거냐. 나를 세뇌해서 뭘 하려 한 거지?”
[아, 혹시 오해가 있을까 해서 말한다만. 내 구현의 힘은 세뇌가 아니야. 숙면(熟眠)이지. 꿈속으로의 침잠(沈潛)이 내가 깨달은 깨달음이지. 그냥 자네를 곤히 재운 다음에 잘 묶어서 보쌈하고 심족 최고회로 보내려 한 거였다네.]
“….”
뭐지 이놈은?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리며, 그러면서도 정신을 극한으로 곤두세우며 말했다.
“이래 놓고 내가 너를 방해하지 말아 달라고 하는 건가?”
[너무 그러지 마시게. 우리 심족은 누구도 믿을 수 없거든. 천, 지족이 하도 음흉한 수로 우리를 납치하고, 단약으로 만들어 가려 혈안이 된 탓에 그들을 상대하려면 우리도 음험해져야 할 필요가 있거든.
그래도 자네에게는 이렇게 다 털어놓고 있으니 그걸로 용서해 주시게나. 자네 실력은 알았으니 납치 시도도 더는 하지 않겠네.]
“….”
속내가 안 읽힌다.
같은 경지인 탓인지, 이 녀석 역시 내게서 자신의 깊은 심상을 보호할 수 있는 탓이었다.
“…저 해룡족 전사들은 어떻게 한 거지?”
나는 흘끗 기절한 해룡족 전사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잠재웠네. 다만 본인들은 내 숙면의 과정을 죽음의 과정이라 착각하는 듯해서, 한두 시진 안에 깨우지 않으면 영혼이 정말로 죽음을 착각해서 죽어 버릴 테지만.]
무시무시하다.
또한 기오막측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보다 눈앞의 녀석을 노려보며 말했다.
“시간을 끌고 있군. 뭘 노리는 거지?”
심상은 읽히지 않는다지만, 녀석이 구태여 나를 감싸며 쓸데없는 말들로 시간을 때우고 있다는 건 알 수 있다.
필시 시간을 끌려는 것일 터.
[이런, 벌써 들켜 버렸군. 뭐 대단한 건 아니야. 나는 심족 최고회에서 파견된 심족 특명해방존사(特命解放尊使). 천, 지족에 스며들어, 그들에게 학대받는 연약한 노예종족 중에서 심족이 탄생하도록 돕고,
심족이 탄생하면 심족의 종족과 함께 심족 영역으로 그들을 인도하는 역할을 맡고 있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약 천, 지족의 사축기급의 고수를 만난다면 그들을 살해하는 임무 역시 맡고 있지.]
“…!?”
나는 이 녀석의 기운을 노려보며 말했다.
“영지의 주인인 규련을 기다린다는 거냐?”
[아무래도 그렇다면 좋겠지만 말이지… 영지의 주인이 오지 않으면 뭐 그냥 종족들을 인솔해서 탈출시키는 데에 집중해야겠지.]
사축기 수사를 살해한다니.
이게 이 녀석이 가진 ‘한 수’인 것 같았다.
‘녀석에게 덤볐을 때 대흉이 뜬 이유가 이것이었군.’
어줍잖게 들이댔다가는 죽은 목숨이었으리라.
아무래도 이 녀석이 나를 지금 가만히 내버려 두는 이유는 그저 내가 같은 ‘심족’의 항목에도 발을 걸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때였다.
우리 옆에 있던 염소가 문득 한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옵니다.]
염소의 눈에는 은은한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쿠구구구구!
그리고, 저 멀리에서 전신이 시뻘겋게 물든 멧돼지가 날아오고 있었다.
원영기의 기운을 지닌 멧돼지의 코에서는 새하얀 증기가 마구 뿜어지고 있었다.
[장령목화 농장의 총관리인… 영주인 규련을 대신하여 우리를 학대하고 괴롭혔던 놈….]
뿌드득….
염소에 손에 쥔 채찍이 살아 있는 것처럼 마구 펄떡였다.
[그래, 한판 붙고 오려무나. 밀리는 것 같으면 도와줄 터이니.]
[예, 어르신. 한데 그자는 그래서 누구인 겁니까.]
[흠, 나도 모른단다. 그래서 지금 담소를 나누면서 붙잡아 놓고 있는 게 아니니. 그래도 최소한 우리를 일부러 적대하려는 생각은 없는 거 같으니 시원하게 원을 풀고 오면 될 것 같구나.]
[예!]
염소는 굳게 대답하며 채찍을 쥐고 허공을 밟으며 멧돼지에게로 날아갔다.
‘허공답보로군.’
나는 강물을 보며 물었다.
“심족이란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해 줄 수 있는가?”
강물은 다시금 젊은 여성의 목소리로 대답하며 말했다.
[무슨 당연한 말을. 심상을 통합시킨 존재들을 칭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심상을 통합?”
[그래, 자신의 외부 심상과 내부 심상을 하나로 통합시켜 하나의 완전한 심상을 만들어 낸 이들. 그렇게 심상을 만들어 내, ‘구현’시킬 수 있는 자들. 그런 이들이 심족이라 통칭되는 게지.]
“그렇다면 의식공법을 통해 그 구현이라는 것에 도달할 수 있는 이들 역시 심족이 아닌가? 의식공법만 잘 익혀도 심족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아하하, 의식공법을 익혀 심족에 도달해?]
강물은 웃기다는 듯이 낄낄거렸다.
[이보게 친구. 외부 심상과 내부 심상을 통합하는 것은, 상상 이상의 고통과 압력 속에서만 이뤄지는 거라네. 단순히 의식의 크기를 키우고 정련하는 의식공법은 의미 없어.
심족이 되려면, 심상을 구현시키려면 상상을 초월하는 [갈구(渴求)]가 필요하다네. 심족의 존자께서는 본인의 종족을 구원할 압도적인 힘을 갈구했고, 저기 저 신입은 자기 종족을 구한다는 책임감의 ‘무게’를 갈구했으며, 나는 ‘잠’을 갈구했지. 그리고 형태가 자유스러운 자네의 구현을 얼핏 보니 자네는 ‘뭔가에서 벗어나는’ 것. 그런 걸 갈구한 것 같은데? 그렇지 않나?]
“….”
[뭔가를 강하게 갈구하지 않는다면, 의식공법을 아무리 익혀 봤자 구현은 절대 얻지 못하네. 만약 의식공법을 익힌 이가 외부와 내부의 심상을 통합시켜 구현에 이르렀다면, 그건 그자가 뭔가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갈구하고 있다는 뜻이지.
그래, 상상을 초월하는 갈구(渴求). 끝없는 갈증. 뭔가를 향한 끊임없는 광신(狂信). 그를 향해 모든 것을 내던질 각오를 하고서 스스로를 고통의 압력 속에 밀어 넣는 것만이, ‘우리’가 되는 법이지.]
우우웅!
녀석이 일부러 자신의 의념을 흘려 내게 보여 주었다.
그것은 호감이었다.
[자네는 분명 천족이며, 동시에 지족이지만 내가 자네를 싫어하지 않는 이유는 자네가 구현, 두 번째에 도달할 정도로 끊임없이 스스로의 신념을 갈구해 왔다는 것 때문이지.
그토록 투명한 도산의 지옥이라니, 그건 분명 광인(狂人)의 심상이야. 하지만, 미치광이의 그것일지언정, 한 번도 손에서 놓지 않고 달려온 덕에 그 경지에 이르른 게 아니던가?]
“…맞지.”
콰광, 콰과과광!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채찍을 휘두르는 염소와 주변을 불바다로 만드는 멧돼지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멧돼지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원영기였으며, 염소는 결국 입천에 불과했다.
하지만, 염소는 멧돼지와 팽팽하게 맞붙고 있었다.
‘멧돼지가 원영기 극초반인 것도 있겠지만… 염소 녀석, 멧돼지가 쓰는 법술을 전부 꿰고 있는 것 같군.’
그에 반해 멧돼지는 염소의 채찍질의 움직임을 하나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 녀석의 이름은 백녕(白寗). 이 목화농장에서 자기 종족을 위해 노예감독관 자리까지 올라간 노예지.]
강물이 말하였다.
[동족들을 자기 손으로 채찍질하겠다고 솔선수범하며 나섰지만, 자신이 채찍을 잡은 그 날부터 무수히 채찍을 연습하며 어떻게 하면 ‘안 아프게’ 동족을 때리는 척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녀석이다. 채찍에 무게를 싣고, 또 빼는 법을 익히며, 자기 자신에게 채찍질을 해 가면서 채찍에 무게를 조종하는 법을 극한까지 익혔지. 그렇게 무게를 조종하는 법을 극한의 극한까지 밀어붙이며 도달한 것이 녀석의 구현이다.]
쿠과과광!
염소, 백녕이 내지른 채찍에 멧돼지는 비명을 지르며 저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후웅!
쿠구구구!
다시금 채찍이 휘둘러졌고, 그의 채찍이 스친 자리에 채찍 형태의 계곡이 생겨났다.
[저 총 관리관 요족은 백녕에게 자기 가족을 채찍질하도록 시켰던 지족이지. 백녕이 저놈만은 기다렸다가 죽여 버리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영주를 기다릴 겸 놀고 있었던 게지.]
쿠과광, 콰광, 꽈아앙!
백녕은 두 눈이 뒤집힌 채로 채찍을 휘두르고 있었다.
[무게]의 극점을 살린 입천의 공격에, 불길을 뿜던 멧돼지는 점차 의식을 잃고 죽어 가는 듯했다.
‘공격력에 특화된 경지군.’
나는 그의 입천을 보며 탄성을 터트렸다.
아무리 멧돼지가 원영 극초기에 백녕이 그의 법술을 전부 알고 있다고는 해도, 원영기와 입천의 차이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상대를 죽기 직전까지 몰아가는 것은, 백녕이 방어를 도외시하고, 자살이라도 하려는 듯이 공격에만 주안점을 두고 멧돼지를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냘픈 채찍이 도대체 어디까지 무거워질 수 있는가.
꽈아아앙!
[사, 살려….]
멧돼지가 백녕의 채찍을 피해 날아올랐다.
백녕은 눈이 뒤집힌 채로 멧돼지를 쫓아가려 했고, 강물의 주인은 신이 난 듯이 백녕을 응원했다.
나 역시 백녕과 저 멧돼지는 은원 관계가 확실한 걸 알았기에 함부로 끼어들지 않았다.
그때였다.
푸콱, 푸확!
“…!?”
저 멀리, 강물의 주인의 공격에 잠들었던 세 명의 해룡족 전사들의 몸이 마구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강물의 주인이 흠칫 몸을 떨었다.
동시에.
푸콱!
푸화아아악!
해룡족 전사들의 심장 부위에서 피가 솟구치며, 어마어마한 천지영기가 그곳으로 몰리기 시작하였다.
고오오오….
천지영기는 허공에 푸른 빛을 응결하더니, 한 마리 거대한 청룡의 형상을 응집시켰다.
그것은, 서휼의 형상이었다.
강물의 주인이 흠칫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뭣… 자기 종족을 제물로… 백녕! 돌아와라, 퇴각한다!]
그리고, 장내에 강림한 서휼의 형상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느껴진다.
눈앞의 형상은, 해룡족 전사 셋의 목숨을 제물로 바쳐 강림한 형상.
원영기 셋의 목숨을 제물로 바쳤기에, 짧은 찰나일지언정.
저 형상은 서휼 본체와 똑같다.
쿠구구구구!
어마어마한 압력이 전신을 짓누른다.
그리고, 서휼의 고개가 강물에게 휩싸여 있는 나에게 향했다.
[흐음, 규 선배의 영지에 있던 반란군이 이토록 위험할 줄이야. 반란군에 죽으라고 보낸 아이들이 아니거늘….]
‘아니, 자기가 죽인 거 아닌가?’
나는 순간 어이가 없었지만, 서휼은 흥미롭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백녕과 주홍빛 강물에게 닿았다.
[과연, 그대들이 광한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심족인가?]
주홍빛 강물이 짜증 난다는 듯이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윙윙거렸다.
[이런 젠장. 최악의 형태로 사축기 수사가 관여하는군. 내 목숨을 버려서 당신을 죽여 봤자, 본체에게는 피해가 안 가는 형식이겠지?]
[그렇다네. 본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 강림하려고 한 수단이었다만, 자네들 따위 덕에 강림하게 되어 조금 섭하군.]
[그래, 그럼 잘나신 사축기 수사께서는 지금 우리를 어찌할 것이지? 말해 두지만 나는 심족 최고회로부터 만만치 않은 절기를 부여받았기에, 목숨을 건다면 당신의 형상이나마 없애 버릴 수 있다.]
[궁색한 위협이군.]
스스스!
용형의 서휼이, 인간형의 형상으로 다시 응결된다.
인간형의 서휼은 선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본인은 별로 자네들을 어찌할 마음이 없다네. 규 선배의 농장에 반란이 일어난 건 슬프지만… 심족이라는 이들에게 우리 소중한 해룡족 전사들이 전부 몰살당할 정도라니,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아니, 너희 전사들을 몰살시킨 건 너 아닌가?]
주홍빛 강물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이 서휼을 바라보았다.
현재 서휼은 본신이 아닌, 해룡족 전사들의 생명력을 기반으로 본체를 투영시킨 것이기에 그의 심상을 읽을 수도 없어 상대를 파악하기가 힘든 듯했다.
[우리 해룡족 전사들은 심족에게 혼을 바쳐 맞서 싸웠으나 전원이 장렬하게 싸우다가 죽었고, 본인이 먼 거리에서 분신을 투영하여 도우려 했으나 이미 전부 죽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네.]
[…미친놈.]
[하여, 본인은 그들을 기리는 마음으로, 심족의 비밀을 알아내고자….]
쿠구구구구!
서휼의 손에서, 강한 인력(引力)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 인력은 백녕에게 향해 있었다.
백녕은 갑작스럽게 그를 빨아들이는 서휼의 인력에 잡혀 빨려가기 시작했다.
[잠깐, 뭐 하는 거냐!]
[이렇게 적의 수괴를 잡기라도 해야, 억울하게 죽은 본 족의 전사들이 저승에서라도 한을 풀지 않겠는가.]
파아아앗!
서휼의 손 위로, 공간이 일그러지며 공간 균열이 나타났다.
필시 저 공간 균열의 너머는 해룡궁일 터!
[본디 이런 일에 쓸 것은 아니고, 본족의 일원인 서은현이 위험해지면 데려오는 용도로 쓰려 했다만… 일이 이리되었으니 어쩔 수 없군. 그래도 광한계에서 소문이 무성했던 심족을 생포할 수 있으니….]
[당장 그 손을 치워라!]
쿠구구구구!
주홍빛 강물이 진노한 목소리를 드러내며 서휼에게 날아갔다.
주홍빛 강물의 전신이 일순간 녹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녹빛 속에서 한 자루의 환한 박도(朴刀)의 형상을 찾을 수 있었다.
‘저것은….’
저것이 저 녀석이 숨겨 두고 있던 일격!
존자(尊者)의 일격이었다!
그러나, 서휼은 자신의 발치 아래에서 심장이 뚫려 죽은 해룡족의 사체들을 향해 반대쪽 손을 들어 올렸다.
쿠드득!
해룡족의 사체들이 영기에 의해 들어 올려지며, 주홍빛 강물을 막아섰다.
주홍빛 강물은 사체들보다는, 동족을 아무런 감정 없이 방패로 쓰는 서휼의 태도에 놀라서 잠시 움찔거렸으나, 그대로 몸을 밀고 들어갔다.
콰드득!
주홍빛 강물의 돌진에 해룡족 전사들의 사체는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하나 서휼은 아랑곳하지 않고서, 더더욱 손에서 강한 인력을 뿜어낼 뿐이었다.
촤라라락!
그리고, 강물이 움찔거렸던 찰나.
사체들을 박살 내며 걸렸던 찰나.
그 찰나들이 모여 틈을 만들어 냈고, 서휼은 그 틈에 자신의 손 위에 생긴 공간 균열로 백녕을 빨아들였다.
[안 돼에에에!]
촤라락!
강물이 서휼의 형상을 향해 돌진했으나, 서휼의 형상은 그저 허공으로 흩어질 뿐이었다.
서휼의 밝은 목소리가 허공으로 울려 퍼지며 사그라졌다.
[좋은 선물을 줘서 고맙군. 덕분에 억울하게 전사한 본 족의 영웅들 역시 편히 잠들 수 있을 걸세.]
스르르….
서휼이 만들어 낸 공간 균열 역시 사라져 버렸고, 주홍빛 강물은 함천존자의 일격을 쏟아 내지도 못한 채 망연자실하게 주변을 휘돌았다.
[….]
나는 서휼이 공간 균열을 통해 백녕을 데려갔던 것을 보며 나는 서휼이 한 말을 떠올렸다.
내가 위험해지면 나를 데려가는 용도였다는 그 말.
‘서휼은, 원래 수틀리면 자기 전사들을 희생해서라도 나를 해룡궁으로 강제로 끌어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였나.’
물론 아닐 수도 있었다.
말만 저렇게 해 놓고, 해룡족 전사들을 통해 규련에게 뭔가를 하려던 것일 수도, 규련의 동부에서 뭔가를 훔쳐 내려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원래 끌고 가려던 대상이 정말로 나였다면.
‘녀석이, 오혜서를 통해 우리의 가치를 깨달았단 것일 터…!’
범인 주제에 사축기 급의 의식을 지닌 김연.
양수진과 같은 체질이라는 전명훈, 100년 안에 천인기 급 전투력을 갖추는 오현석, 500년 내로 쇄성기에 오르는 강민희 등….
서휼과 세 명의 천인기 수사들이 발견했던 우리의 가치는, 그 잠재력은 그 정도로 어마어마했던 것이리라.
‘그러니 자족 원영기 셋을 희생시켜서라도, 수틀리면 나를 끌고 가려고 했던 것이겠지….’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나를 납치할 수단이 사라진 게 아닌가? 백녕이 서휼이 생각하기에 나보다 가치가 높은 것이었나?’
그때였다.
오싹!
나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며 문득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서휼은… 대놓고 내 앞에서 원래는 원영기 셋을 희생시켜서라도 나를 끌고 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 말은 내 가치를 원영기 셋보다 높게 잡았다는 뜻.
그리고 그 말은 곧, 나와 비슷한 가치를 지녔을 오혜서의 가치를 깨달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지난 10개월간 내 행동을 관찰하고 내 언행을 살펴봄으로써 내가 동료인 오혜서의 행방을 알아내려 노력한다는 것을 알아냈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이미 오혜서와 나의 가치를 깨달았으니, 오혜서를 만나려면 어쨌든 다시 자신에게 찾아오리라는 것을 예측한 건가…!?’
내가 동료를 아낀다는 것을 10개월간 파악하며.
자신이 나와 동료의 가치를 알아냈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리하면 나는 내 성정 때문에라도 다시 돌아가게 되어 있다.
‘…공간 균열로 나를 직접 잡아가는 것보다도, 더더욱 확실한 방법이군.’
아니, 내가 서휼의 계획대로 10개월간 그를 만나며 세뇌를 제대로 당하기만 했다면,
내가 위험해 처했을 때 나를 구하기 위해 원영기 셋을 희생시켰다는 상황에 벌써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서휼을 위해 내 마음을 바치리라 맹세했을 것이다.
나는 서휼의 간교함에 치를 떨었고, 주홍빛 강물은 허망한 듯이 백녕이 끌려간 곳을 빙빙 돌다가 그대로 다른 노예 종족들이 도망친 곳을 향해 날아갔다.
[…상황이 조금 더 좋았다면 더 얘기를 나눴겠지만, 일이 이리되었으니 언젠가 나중에 다시 만나도록 하지.]
파아앗!
주홍빛 강물은 그렇게 말하며 저 멀리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멍청하게 목화농장에 남아, 백녕에게 당한 상처를 치유하고 있는 멧돼지를 바라보았다.
멧돼지는 뭐가 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서휼이 사라진 자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보게.”
나는 멧돼지에게 다가가 말했다.
“영지의 주인, 규 선배님께 연락을 할 수 있는가?”
“음? 아, 그렇다만….”
“연락을 넣어 주게나. 선배님께는 송구스러우나, 반란 진압은 실패했다고.”
“알겠…네.”
멧돼지는 서휼이 사라진 곳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 술법. 어디서, 본 것 같은데….”
“…?”
“아니, 아니네. 영주님께 연락 드리지. 제기랄….”
그렇게.
짧고도 굵었던 심족들과의 만남은 일단락이 되었다.
* * *
“…뭐, 그렇게 되었다면 어쩔 수 없지.”
규련은 나와 이 멧돼지, 홍국(紅鞠)이라는 녀석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서휼이 직접 자신의 종족을 죽이고 강림한 것에 대해서는 일단 다물고 있기로 했다.
해룡족이 전부 죽은 상황에 대해, 홍국은 서휼이 동족을 죽인 걸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고, 나 역시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는 서휼과의 관계 때문이었으나, 홍국은 진짜로 제대로 못 본 것인지 아니면 뭔가 다른 것 때문인지 몰랐다.
여하튼, 규련의 한숨과 함께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었고.
나는 어찌 되었든 규련과의 약속에 따라 흑룡 진혈의 연화를 시작하기로 하였다.
규련의 동부 깊숙한 곳.
그곳에는 규련의 용혈(龍血)로 그려진 주술진이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나는 주술진의 중심으로 들어가 가부좌를 틀었다.
내 앞에는 흑룡 진혈이 한 방울 담긴 옥병이 세워져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선수 진혈을 연화해 보도록 할까.”
농장 반란과 더불어, 서휼의 부하들을 죽게 했다는 자책감 때문인지.
규련은 조금 힘없이 결인을 맺었다.
그리고, 주변에서 시뻘건 핏빛이 피어올랐다.
그그그그극!
내 앞에 있던 옥병 역시 빛에 호응하여 마구 흔들리더니, 안쪽에 있던 흑룡의 피 한 방울이 내게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다음 순간.
‘…어?’
나는 새카만 어둠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한 마리의 거대한 용(龍)이 나를 바라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군, 이게 흑룡 진혈에 담긴 선수 흑룡의 잔념….’
이 잔념을 극복해야 선수진혈을 연화할 수 있으리라.
‘지금부터, 잔념을 제압한….’
다음 순간.
[왜 살아온 세월은 반 갑자도 안 되는 녀석이, 어째서 2000년이 넘는 역사(歷史)를 지니고 있는 것이지?]
어둠 속의 거대한 용이, 내게 말을 걸었다.
[선수(仙獸)의 앞에서 어찌 역사(歷史)를 속이려 하느냐. 태음(太陰)을 관장하는 흑룡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너 필멸자는 제대로 된 역사를 고하도록 하여라.]
선수진혈의 연화는 시작되었다.
하지만, 나는 규련에게서 선수진혈을 통해 선수가 직접 말을 건다는 소리 따위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