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地)의 종족 (7)
‘심족!?’
나는 놀라서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으나, 어느새 해룡족 전사들은 하늘을 빠르게 날아오르며 규련의 빛무리를 따라가고 있었고, 규련과의 거리는 순식간에 빠르게 멀어져 버렸다.
“잠깐, 규 선배님께 심족에 대해 좀 물어보는 게 어떻습니까?”
나는 해룡족 전사들에게 황급히 말했지만, 그들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못 들었나, 심족인지 뭔지 잘은 모르겠지만 결단 급이라고 했지 않나.”
“빨리 가기나 하지.”
“아니….”
나는 해룡족 전사들에게 한소리를 하려고 했으나, 순간 시간상으로는 우리가 비승한 지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었다.
‘…아직 광한계에서 심족이 얼마나 두려움과 경외시의 대상이 되는지 모르는 건가.’
생각해 보면 아직 1년도 안 된 시점에서 광한계에 대한 무슨 얘기를 해 봤자였다.
‘어쩔 수 없군. 그렇다면, 이들은 내버려 두지.’
규련이 보내 준 빛덩이를 따라 날아가며, 나는 아직 어리숙한 해룡족 전사들을 보며 생각했다.
‘이들은 내버려 두고, 이들이 반란을 진압하는 사이… 심족을 만나 본다.’
여태껏 심족이라는 이들에 대해 들어는 봐 왔지만 도대체 뭘 하는 이들인지.
또 심도공법이라는 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야 할 터.
이제는 그들에 대해서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만나 보자, 그들이 뭘 하는 존재인지에 대해 알아야 해!’
파아앗!
얼마나 강산을 지나쳤을까.
번쩍!
규련이 보내 준 빛이 거대한 산맥 하나를 넘으며 폭발했다.
“이곳이….”
빛이 폭발했다는 의미는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뜻.
“용족 영역 최대의 장령목화(長靈木花) 농장…?”
산맥을 넘어서 도달한 그곳은 새하얬다.
햇살을 빨아들이며 환하게 빛나는, 눈앞의 대농장은 하얀색의 불꽃을 토해 내는 것만 같았다.
아니, 느낌이 아니라 정말로 규련의 농장에 있는 새하얀 식물들의 꽃 주변으로는 불꽃 같은 새하얀 영기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장령목화.
혹은 불절(不絶)목화라고도 불리는 저 새하얀 목화는, 광한계 선사들이 입는 절대다수의 의복에 들어가는 중요한 목화솜을 만들어 내는 목화였다.
수사들 중 대다수는 축기기만 넘어가도 전투를 하며 옷이 걸레짝이 되거나, 찢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경지가 높은 이들이야 법술로 옷을 만들어 낸다지만, 경지가 낮은 이들은 옷이 찢어지면 예비 옷을 꺼내 입거나 발가벗고 다녀야 하니 굉장히 불편했다.
그렇다고 늘 분쟁이 끊이지 않는 광한계에서 옷이 멀쩡하기를 바라는 것 역시 웃기는 심보였다.
그렇기에 수많은 수사들은 은근히 옷에 대한 것을 고민했고, 해결책은 크게 세 가지가 나왔다.
영기를 짜내 옷을 만들어 내는 법술을 익히는 방법.
혹은 찢어지거나 불에 타 버려도 원상복구가 되는 옷을 입는 방법.
마음의 부끄러움을 이겨 내고 벗고 다니는 방법 등이 그것이었다.
세 번째 방법은 웃기기는 하지만, 의외로 창호자 등을 포함해서 많은 이들이 저러고 다니기는 했다.
물론 절대적으로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는 이들만 저러고 다니기야 했지만.
어쨌든 첫 번째 방법은 고계 수사들이나 되어야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이었으나.
옷 자체에 복구 법술을 걸어 놓는 두 번째는 저, 고계 수사들을 포함해서 정말 수많은 이들이 택하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런 복구 법술이 걸려 있는 옷을 만드는 데에 쓰이는 주 재료가 바로 저 장령목화였다.
장령목화로 만든 옷은 다 찢어져도, 전부 불타 버려도 한 조각만이라도 남아 있다면 조각에 영기를 주입해 다시 옷을 재생시킬 수 있는 매우 유용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옷이었다.
그리고 그 재료인 장령목화는 영기가 매우 넘쳐나는 지역에서만 자랐고, 목화솜을 딸 때 영기를 많이 지닌 고계 수도자들이 법술을 부려 따면 목화솜이 계속 재생되기에 목화가 떨어지지 않는 특이한 성질을 지녔다.
그렇기에 장령목화를 기르는 수도자들은, 가진바 영기가 약한 약소 종족을 노예 종족으로 삼아 장령목화를 따는 목화 노예로 만들어 목화를 관리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화륵, 화르르륵!
내가 목화밭을 바라보며, 장령목화에 대한 것을 생각할 때였다.
저 멀리서부터, 시뻘건 불길이 목화밭을 물들이고 있었다.
“저게 반란군인가.”
“다들 하나같이 연기기도 못 되어 보이는 것들이군.”
불길 뒤편에서는 어마어마한 기척이 느껴졌는데, 정말로 식겁할 만큼의 숫자였다.
‘몇만인 거지?’
“자, 그럼 내려라. 다들 각자 알아서 노예들을 진압하고, 반란의 수뇌부를 전부 몰아 죽인 후 규 선배께 보고하면 될 터.”
“그러지.”
나를 태운 해룡족 전사가, 머리를 털어 내며 나를 떨어내고는 말했다.
해룡족들은 나를 신경 쓰지 않고, 빠르게 수많은 종족들을 제압하기 위해 그들에게로 날아갔다.
나는 잠시 그들을 보다가 목화밭에 불을 지르는 노예 종족들을 바라보았다.
‘심족이 있다고 했다. 결단기 수준이라는 말은 분명 월도입천의 실력일 터.’
심족이 뭔지는 아직도 헷갈렸지만, 그래도 일전 장익의 말을 들은 후, 그의 일격을 본 후 추측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분명, 심족이라는 이들은 서로를 보자마자 알아챌 수 있다.’
파앙, 파앙!
나는 허공을 박차며 불길 너머로 향했다.
그곳에서 방화를 하는 종족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수많은 종족들이 섞여서 불을 놓고 있다.
광한계 종족들은 밀도가 높은 광한계 영기를 쐬며 살았기에 대다수가 태어날 때부터 연기기 급의 강함을 지닌다.
하지만, 그럼에도 광한계에서조차 약한 이들이 있었다.
타고난 육신이 너무나 허약해서 광한계의 밀도 높은 영기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요수 공법을 익히지 못하는 이들.
그리고 제사법도 찾지 못해 천족 공법도 익히지 못하는 이들.
그런 이들이 광한계의 밑바닥을 깔아 주는 약소 종족들로 구분되며, 천족, 지족들에게 잡혀 노예로 부려지거나 단약이 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그리고 지금 불을 놓고 있는 수많은 종족들 역시, 규련의 농장에서 일하던 그런 약소 노예종족들이었으리라.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피잉―
갑자기 긴장의 끈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지금 당장이라도 갑자기 내 목이 쪼개질 것 같은 느낌!
차라리 미래 예지라고 할 수 있는 살의(殺意)를 예지하는 감각!
‘이건….’
단순한 살기가 아니다.
심어!
입천의 경지에 오른 무인들이 주고받는 심어였다.
누군가가 심어를 통해 말하고 있다.
아니, 묻고 있다.
너는 누구냐.
찌릿, 찌릿….
‘이건….’
나는 씨익 웃으며 심어가 주는 감각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감각을 타고 올라가, 이 심어를 보낸 존재가 있는 곳을 향해 눈을 빛냈다.
규련의 정보가 잘못된 것 같다.
‘입천이 아니라, 답천경인데?’
쿠구구구구!
저 멀리서, 세 명의 해룡족 전사가 입을 벌리고 숨을 내쉬고 있다.
나는 그들을 보며 외쳤다.
“피하시오, 그쪽에 심족이 있소!”
그러나 그들은 명백히 내 외침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시한 채 입에서 빛살을 뿜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번쩍!
촤아아아!
주홍빛의 물살.
노을빛의 강이 파도치며, 해룡족 전사들의 입김을 막아 낸다.
‘아아….’
느껴진다.
지금 원영기 해룡족 셋의 공격을 막아낸 저자는 분명 답천경이다!
나는 등골을 타고 오르는 흥분을 삭이며 그쪽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그쪽으로 달려가려고 할 때였다.
쉬릭!
오싹!
나는 순간 뇌리를 파고드는 불길함에 빠르게 뒤로 보법을 밟으며 물러섰다.
쿠과과광!
그리고 다음 순간, 내가 지나치려던 자리 아래로, 커다란 계곡이 생겨났다.
“…이거, 규 선배님께 항의를 해야겠군.”
심족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잖은가.
‘아니, 어쩌면 규 선배님도 지금 이 녀석밖에 파악을 하지 못한 걸지도.’
우우우웅!
저 멀리서 흘러나오는 주홍빛 노을의 강이, 파도처럼 몰아치며 세 마리 해룡족을 휩쓸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노을빛 바닷속에 갇힌 세 마리 뱀 같아 보였다.
저쪽은 분명한 답천경이었으나, 내가 느끼는 답천경만의 감각이 아닌, 요수 공법이나 천족 공법의 감각으로는 전혀 감지가 안 된다.
‘감지가 안 되니 뭐, 저쪽은 몰랐던 것 같고….’
저벅, 저벅….
나는 목화밭을 헤치고 나온, 한 명의 인영을 쳐다보았다.
이족 보행을 하는 새하얀 털을 가진 염소.
“네가, 규 선배께서 말하신 결단 급 심족인가.”
녀석은 확실한 입천 급의 실력자였다.
그리고, 나는 이 염소 인간이 들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채찍?’
그것은 얇은 가죽 채찍이었다.
노예를 매질할 때에 쓰는 얇은 채찍.
그러나 기이하게도 노예를 때리는 데에 쓰는 채찍을 쥔 이 염소 인간의 이마에는 분명한 노예의 표식이 있었다.
이마에 노예의 인장이 찍힌 염소 인간은, 전체적으로 순하고 동글동글하게 생긴 인상이었다.
털 자체가 굉장히 보송보송하고 부드러울 것 같았고, 눈빛 자체가 맑고 말랑말랑한 기질을 띄고 있었다.
거기다 체구도 작은 탓인지, 한눈에 보아서는 썩 귀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침을 삼키며 녀석을 바라보았다.
‘털 아래로….’
흉터가 몇 개나 있는지 모르겠다.
보송보송하고 귀여운 털 아래에는, 채찍 자국 같은 것이 마치 빗줄기처럼 빼곡하게 차 있었다.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나는 긴장을 끌어올리며 녀석에게 질문했다.
“네가 심족이냐?”
“….”
“네가 익히고 있는 게, 심도공법이 맞나?”
“….”
“너희 심족은….”
그리고.
메에에에―
녀석이 울부짖으며 채찍을 휘둘렀다.
쿠과과광!
“…!”
그리고, 다시금 채찍이 맞은 곳에 계곡이 생겨났다.
‘아, 그렇군. 나는 멍청이인가.’
나는 심족이 메에 거리는 것을 보며 깨달았다.
내가 쓰는 요족어는 요족들 사이에서는 만계 공용어였으나, 생각해 보면 이 심족이란 녀석들은 지족의 시야를 못 얻었고, 그에 따라 자연히 요족 언어도 익히지 못했을 터였다.
[이봐, 너는 심족이냐고 물었다.]
나는 다시금 의식을 쓰는 영언으로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심도공법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나, 너희 심족은 뭘로 경지를 구분하지? 네가 얻은 깨달음은 어떤 거냐?]
그리고, 나는 그제야 녀석에게서 제대로 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아까부터 혼자 주절주절, 당신은 입으로 대결하나?]
“…하.”
왜일까.
분명 나보다 낮은 경지의 상대에게 이런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다.
나는 오히려, 환하게 웃으며 허공을 움켜잡았다.
[실례했다.]
이제 말은 필요 없을 터.
부웅!
공기를 찢어발기며, 무형검을 전신에 흐르게 하며 놈에게 돌진한다.
요수 공법은 끌어올리지 않는다.
원영 역시 잠재워서, 계위를 보는 눈 역시 강제로 봉인한다.
천, 지족 공법을 모조리 봉인한 후.
순수한 답천의 상태를 유지한 채로 녀석에게 쇄도하였다.
‘과연, 심도공법이라는 것은 무(武)인가?’
오늘 그 답을 알게 되리라.
나와 염소의 공격이 부딪쳤다.
* * *
쿠구구구!
주홍빛 강물이 해룡족 전사들을 집어삼켰다.
세 명의 전사들은 숨을 몰아쉬며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누군지는 파악이 되지 않는다.
쓰는 법술도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거기에 본체조차 어디 있는지 감지되지 않는다.
그런데 느껴지는 의식의 크기는 한없이 작다!
‘뭐란 말인가, 이 자는….’
해룡족 전사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고참.
전격이 호풍환우를 불러내, 주변의 하늘을 메우며 이를 악물었다.
쿠릉, 쿠르르릉!
먹장구름이 해룡족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준다.
일반적인 상대라면 그들은 체력이 다하지 않는 불멸의 전사가 되어 적을 몰아쳤겠으나,
눈앞의 존재를 상대하고 있자니.
그들은 이 법술로 겨우겨우 목숨을 연명하는 기분이었다.
“크윽, 네놈이 반란의 수괴로구나! 원영기 급 반란 세력이 있다는 정보는 못 들었다만….”
전격은 상대를 떠보기 위해 우선 아무 말이나 던졌다.
하지만 상대는 반응이 없었다.
여러 제안이나 질문 등으로 상대를 떠보려고 했으나 계속 묵묵부답.
전격은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요력이 모두 동난다. 규 선배님께서 오지도 않으셨는데, 이렇게….’
그때였다.
[흐음, 영지의 주인, 사축기 지족은 안 나온 건가?]
전격은 눈앞의 상대가 읊조리는 말을 들으며 눈을 빛냈다.
‘그래, 동급 경지를 상대로는 선전한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고계 수사를 상대로는 자신이 없나 보군.’
그는 짐짓 준엄한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우리는 선발대일 뿐, 반 시진 안에 진룡맹 장로 규련 님께서 도착하실 것이다. 우리는 네놈을 이기지 못할지언정, 그때까지 잡아 둘 수는 있지.”
전격은 다른 해룡족 전사들에게 신호를 보내 당장이라도 결계진으로 눈앞의 존재를 묶어 놓을 듯이 요력을 끌어올렸다.
‘이렇게까지 했으니, 분명 당황해서 일단 물러나려 할 터. 그때를 노려 잠시 후퇴해서 규 선배님께 지금이라도 도움을… 청해야 한다.’
“모두 저 녀석을 포위….”
그리고.
주홍빛 강의 주인이 피식 웃었다.
[허세가 대단하구나. 사축기 괴수(傀修)는 안 오는 모양이지?]
“하하, 그렇게 믿고 싶은….”
[아까부터 눈알 굴리면서 서로 의견 주고받는 거 모를 줄 알았나? 큭큭… 아까부터 초조해하더니만, 역시… 사축기는 오지 않았어.]
“…사축기는 오지 않았지만.”
전격은 머리를 빠르게 회전시키며 살길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해룡족의 전사들이다. 전부 죽을 각오를 하고 너희… 심족을 진압하러 왔기 때문에, 우리의 패색이 짙어진다면 자폭할 수 있는 요술을 미리….”
[거짓말이네?]
“…어리석긴, 설령 우리가 자폭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와 함께 온 인족은, 우리와 막역한 사이로 그가 전력을 다하면 천인기 수준의 힘을 낼 수 있다. 우리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면 그가 우리를….”
[그것도 거짓말인 거 같은데.]
“의심이 많군. 하지만 아무리 의심해 봐야 소용없다. 진실은 바뀌지 않으니까. 하지만 잘 생각해라. 사축기 선배께서 이곳으로 오고 계시고, 우리는 자폭용 법술을 두르고 왔으며, 사실 저 인족 친우가 있기에 실제 전력은 우리가 네놈보다 유리하다. 또한 반란을 일으킨 이들을 생포하라는 명령을 받았기에 적당히 싸우고 있던 것뿐. 우리는 흑룡족의 머나먼 방계이므로 선수 흑룡의 힘 역시 선수진혈로 상당수 끌어내는 것이….”
[세상에나, ‘생포’라는 단어와 ‘흑룡족의 방계’라는 거 외에는 전부 거짓말이구나. 너희, 해룡족이 아니라 허풍족인데, 혹시 소개를 잘못한 건가?]
“….”
전격은 눈앞의 상대를 노려보았다.
‘도대체 뭐지?’
마음이 속속들이 읽히는 느낌이다.
자신은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데, 상대는 실시간으로 자신에 대해 읽어 내려가는 듯한 기묘한 불쾌감.
[불쾌한가 보군. 그리고 점차 무서워지고 있지?]
“….”
전격은 물론이고,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다른 해룡족의 전사들 역시 안색이 파리해졌다.
분명하다.
눈앞의 존재는, 상대의 속내를 가볍게 읽어 낸다.
그 불쾌함과 공포스러움.
전격은 저런 존재를 딱 한 번 본 적 있었다.
‘괴군, 조연….’
하계에서부터 사축기 괴뢰를 두 기나 부렸던 미치광이.
그자의 앞에 섰을 때에나 느꼈던, 영혼까지 꿰뚫리는 듯한 감각이었다.
물론 전격은 미치광이 노인네가 속내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은 믿지 않았으나, 괴군의 투명한 눈동자가 주는 그 불쾌한 느낌과, 지금 드는 이 불쾌한 느낌에는 무언가 공통점이 있었다.
[너희 천족과 지족은 그게 문제야. 늘 죽음의 위기를 앞에 두고는 어떻게든 살려고만 발버둥 치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만, 한두 명 정도는 자기 신념을 지킨다거나 그런 놈들도 있을 법하지 않나? 내가 너무 잔챙이들만 상대해 왔던 건가?]
“너는….”
[됐다, 닥쳐라. 너희 멍청이들과는 이제 별로 더 놀고 싶지 않고, 저기 저놈이 그나마 재밌어 보이는군.]
주홍빛 강물이 낄낄 웃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전격은 뭔가 말하려 했으나, 다음 순간.
그는 문답무용으로 그에게 달려드는 주홍빛 파도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제길, 정녕 끝까지 해 보자는 거냐!”
[하하하, 네들 따위가 나랑 끝까지? 심족에 대해 잘 모르는 걸 보니 대강 비승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잘 기억해 둬라. 심족은… 잡고 싶으면 늘 함정을 잘 파두고 과잉 전력으로 상대하지 않으면, 너희 천, 지족의 힘으로는 결코 쉽지 않아.]
삐이이이이―
그와 동시에 전격은 어떠한 이명을 들었다.
그것은 노랫소리였다.
‘이, 이건…!’
그리고, 노랫소리를 인식하자마자 전격은 전신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느낌이 아닌, 실제로 생명력과 영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 안돼….’
뭐지?
이렇게 죽는다고?
이렇게 어이없게?
전격은 몸 안에서 빠져나가는 생명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생명이 통제를 받지 않는다.
기(氣)가 그의 통제를 받지 않고,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흩어져 내린다.
‘이렇게, 쉽게, 죽을 순….’
[너희의 패착은 우선, 심족을 몰랐다는 것. 그리고… 내가 너희 천, 지족을 징글징글하게 많이 봐 온 놈이라는 것. 그 정도가 되겠군. 잘 가라.]
투웅!
전격은 뭔가, 줄이 튕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의식을 잃었다.
전격은 그것으로 죽었다.
마치 사람이 벌레를 때려잡듯이, 너무나도 간단하고 허무하게.
해룡족의 전사 셋은 그렇게 죽었다.
그리고, 해룡족의 전사들을 죽인 주홍 강물의 주인은 다른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서는 한창 폭음이 터지고 있었다.
* * *
쿠과광, 콰과과광!
대지가 떨리며, 먼지구름이 비산하고 기다란 채찍이 사방으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채찍에 맞춰 길이가 늘어나며.
투명한 무형의 검이 채찍처럼 휘둘러진다.
서은현은 염소에게 쇄도하여 양팔을 들어 올리며 하복부와 등짝, 그리고 어깨에 힘을 주었다.
일순간 그의 근육이 부풀어 오르는 듯하더니, 무형검이 염소를 향해 내리찍혔다.
염소도 만만치 않았다.
염소가 채찍을 잡고 우하에서 좌상으로 올려 휘둘렀다.
그리고 그사이에 손목에 힘을 주고, 채찍에 기(氣)를 불어넣었다.
그와 동시에 채찍의 중량(重量)이 변하며 서은현의 무형검을 떨쳐 냈다.
촤락!
염소가 다시 손목을 굽히자 채찍의 무게가 깃털처럼 가벼워지며, 가공할 속도로 채찍이 빠르게 회수되었다.
스팟!
서은현이 검을 휘두르고, 염소가 채찍을 휘둘렀다.
중량이 변화하는 채찍, 형상이 변화하는 무검.
둘의 공방은 얼핏 대등해 보였다.
피싯, 피싯, 피싯!
하지만, 염소의 하얀 털 아래로는 참격들이 점차 그를 스치고 있었다.
염소의 팔목, 엄지, 검지, 소지….
늑장뼈, 명치, 배꼽….
발등, 발뒤꿈치, 오금….
슈칵, 슈칵!
서은현이 두 번을 움직이자 염소의 몸에 난 상처들이었다.
염소는 이해했다.
지금 그의 상대는 그를 봐주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지도해 주고 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처음에는 마치 염소의 실력을 탐색하듯, 뭔가를 시험하듯 조심스럽게 몰아붙였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시종일관 몇 번이고 염소의 머리통을 쪼개 버릴 기회가 있었음에도 봐주는 중이었다.
그리고 벌써 몸 곳곳이 붉어진 염소와는 다르게, 서은현의 몸은 옷자락 하나 찢어지지 않고 멀쩡했다.
‘기술의 숙련도가, 하나하나 무시무시하다.’
염소는 서은현을 보며 생각했다.
‘하나하나가, 간단한 기술조차도 형상이 변화하는 검에 담기니 천변만화로 이어지고, 천변만화의 일 초식 일 초식이 모두 극한으로 숙련된 기본기에 기반하니 일격필살 급이야.’
거기에 저자가 휘두르는 검은 투명하다.
의식으로야 확인이 된다지만,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불합리함이었다.
‘투명해서 지금 변화하고 있는 도중인지도 제대로 감을 못 잡겠다.’
이대로는 안 된다.
‘큰 기술로 승부를 봐야 한다.’
염소의 기세가 달라졌다.
‘내 모든 걸 쏟아부어… 나의 종족을 해방시키리라…!’
다음 순간.
염소의 채찍이 하늘 위로 높이 치솟았다.
이제는 태산보다도 무거운 무게와 함께 떨어질 시간.
그의 기세를 알아챘는지, 서은현 역시 태세를 정비했다.
짐작할 수 있다.
서로가 쓰려는 것은, 서로가 그 나름의 오의라고 부르는 기술.
‘결과가 어찌 되든, 존경의 의미를 담아 전력을 다해 펼친다!’
그리고, 서로의 기술이 서로를 향해 쇄도하려 할 때였다.
투웅!
청아한 소리가 울리며, 염소는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허억…!]
힘이 빠진다.
전신에 탈력감이 깃들며,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들의 사이로, 주홍빛 강물이 흘러 들어왔다.
* * *
[안녕, 재밌게 놀고 있었는데 방해해서 미안하네. 그런데 말이지, 우린 시간이 없어. 사축기 수사가 직접 올 거란 예측도 떨어지고 이런 떨거지들만 걸렸으니… 어쨌든 약속대로 사축기는 안 나왔으니, 약속대로 너희 종족 전부 심족 영역으로 진입을 허용하겠네.]
[…! 네! 감사합니다!]
나는 눈앞에서 떠드는 주홍빛 강물을 보며, 전신이 나른해지고 생명력이 빠져나가는 느낌을 느꼈다.
‘위험하군.’
졸리다.
너무나도 졸리고 힘들다. 아마 이게 그녀가 구현한 답천의 능력인 듯했다.
[이봐, 친구도 그만 싸우지 않겠어? 친구를 보아하니 인족에다가, 요족 밑에서 요수공법을 배우고 있고… 거기다 보자니 우리처럼 구현 2단계에 올랐어. …솔직히 내가 이길 자신이 별로 없군. 하지만 그래도 친구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릴 정도는 된다만, 나와 이 친구의 종족만이라도 나가는 걸 묵인해 준다면 참 고마울 텐데.]
나를 이길 자신이 없으니 그냥 물러가게 봐달라는 건가.
이전이라면 당연하게 일소해서 헛소리 취급했을 말이다.
하지만,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덤빌 경우, 대흉.
덤비지 않을 경우, 무난.
‘숨겨 두고 있단 최후의 한 수가, 상당히 무서운 것일 수 있어.’
나는 일단 가만히 속마음을 잠재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해라.”
[아하하, 정말 고맙군. 그럼 혹시 뭐, 물어보고 싶은 거 있나? 묵인의 대가로 궁금한 걸 알려 주지.]
나는 즉시 그에게 질문했다.
“심도공법이란, 뭐지?”
오늘로써 심도공법에 대해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강물의 주인이 답하였다.
[푸, 푸큭큭큭… 크하하하하!]
맹렬한 웃음으로 말이었다.
너무나도 웃기다는 듯한 반응.
그리고 그의 말이 이어졌다.
[이보게, 친구. 심도공법이라는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