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地)의 종족 (6)
내가 선택한 것은, 흑룡(黑龍)의 진혈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용족 안으로 파고들려면, 같은 용족의 피를 받아 연화시키는 게 가장 유리하겠지.’
더군다나 흑룡은 태음(太陰)을 상징하며, 물(水)의 힘을 다스리는 선수였기에, 흑룡족의 방계인 해룡족의 안에서는 고개를 당당히 들고 다닐 수 있었다.
더군다나 흑룡의 진혈을 받으면 흑룡왕 현음의 비밀 역시 파고들 여지가 생기며.
동시에 현재 인족 총연맹에서 마계 침공의 선봉장이 될 흑린어령문과도 관계를 맺을 기회가 생길 터.
흑룡의 진혈 하나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물론, 흑룡의 진혈을 받아들임으로써 역으로 흑룡왕이 내게 영향을 끼친다거나 하는 일도 있을 수 있겠으나, 솔직히 그는 그렇게 두렵지 않았다.
‘정말로 두려운 건, 그런 자가 아니지.’
[그]를 만났을 때의 공포감과, 흑룡왕을 만났을 때의 압박감을 생각해 보면 흑룡왕이 피를 이용해 내게 어떻게 영향을 끼친다거나 하는 일은 어떻게든 극복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그래, 흑룡 진혈이라니 좋은 선택을 했다.”
규련은 같은 용족의 진혈을 선택한 내가 대견한 듯이 빙긋 웃으며 나를 칭찬해 주었다.
나는 흑룡 진혈 한 방울을 하사받은 후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서휼 역시 빙그레 웃으며 내게 덕담을 쏟아부었다.
“역시 자네는 혜안이 탁월하군. 지족에서 용족의 힘만큼 존숭받는 힘은 없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했네. 더군다나 흑룡의 힘이라면 호풍성혈변에도 완벽히 궁합이 맞겠어.”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좋네, 이번에 해룡궁에 돌아가는 대로 즉시 자네가 흑룡 진혈의 연화를 빨리 이룰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주겠네.”
‘최선을 다해 도와주기는 무슨.’
하지만 나는 겉으로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마주 웃을 뿐이었다.
“서휼 님의 은혜에 늘 감사할 뿐입니다.”
돌아가자마자 나를 돕는다고?
미안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이번에 선수혈합에 참여하기 4개월 전에, 씨앗을 뿌려 놓고 왔기 때문이다.
‘이제 슬슬 소식이 들릴 때가 됐지.’
아니, 해룡왕이 딱 해룡궁에 도착하면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일부러 이 시간대에 소식을 들을 수 있게 조작해 놓았기 때문.
나는 선수 진혈을 받고 서휼과 함께 웃는 낯으로 다른 해룡족들과 해룡궁으로 돌아왔다.
“자아, 본 해룡족에 자네같은 경사가 났으니, 이번에 큰 잔치를 열어 볼까 생각 중이네. 아, 그리고….”
서휼이 뭐라고 떠들 때였다.
“음?”
그는 문득, 해룡궁이 자리한 운심호 바깥으로, 무수한 해룡족들이 나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흠, 다들 무슨 일로 나와 있습니까?”
“저, 그것이….”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해룡족의 원로 중 한 명이, 송구스러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해룡궁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하여 해룡궁 곳곳에서 여러 귀중한 보물들을 털어 갔습니다.”
“허어, 어찌 도둑 따위가 해룡궁에 침입하였단 말입니까?”
“그, 그것이… 송구하옵니다. 신 등이 열과 성을 다해 조사를 하고 있사오나….”
“우선, 도둑맞은 해룡궁 재산의 규모부터 고하십시오.”
“…해룡궁의 내탕금이 모조리 털렸습니다.”
“…뭐라?”
서휼이 눈꼬리를 씰룩였다.
그는 인간형으로 변하여, 지엄한 표정으로 원로들을 둘러보며 말하였다.
“지금 천인기 원로인 그대들이 철통같이 지키는 해룡궁을, 듣도 보도 못한 도둑놈들이 그리 쉽게 드나들며 도둑질을 했단 말인가?”
원로들을 대하던 그의 말투가, 종족의 원로가 아닌 자신의 신하들을 대하는 말투로 변했다.
“내 보아하니, 이는 바깥의 도둑이 아닌, 본 족 내부에 도둑이 있거나, 혹은 공조한 자가 있는 것인즉. 그대들 모두 내탕금이 전부 사라진 이 상황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것일세.”
“…송구할 따름입니다.”
지금껏 보아왔던 서휼의 모습에서는 처음 보는, 그가 ‘화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화난 척만 하고 있군. 별로 동요도 없어.’
서휼은 자기 내탕금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별로 아쉬워한다거나 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저 이 일을 빌미로 신하들의 기강을 잡으려는 듯 보일 뿐이었다.
‘심상이 악의로 가득찼지만, 물욕은 없군.’
나는 서휼을 자세히 관찰했다.
‘하지만 물욕이 없는 대신, 이런 기회를 살려서 자신의 정치력으로 바꾸는 데에 능한 자다.’
아마 당분간은 이 일을 빌미로 해룡궁 집안 정리에 바쁠 터.
그 정도면 된다.
며칠 정도의 시간만 번다면 나는 그 시간 동안 흑룡진혈을 서휼의 도움이 필요 없을 정도까지 연화할 수 있었으니 말이었다.
애당초, 해룡궁에 든 도둑은 내가 끌어들인 녀석들이었다.
해룡족에게 운심호의 패권을 빼앗긴 수많은 수저 요족들에게, 회로를 깔아 완전히 내 손아귀에 넣은 해룡궁의 곳곳을 열어 주고, 해룡궁의 구조를 그린 지도를 넘겨주었을 뿐이었다.
‘안 그래도 해룡족에게 불만이 있었는데, 내가 이런 기회까지 만들어 주니 신이 나서 서휼이 선수혈합에 가 있는 동안 도둑질을 해 댔겠지.’
해룡궁에 이런 일이 생겼다면, 서휼 본인 역시 바로 나에게 집중한다거나 하진 못할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자네의 수행은 사흘 후에 봐 주겠네. 그동안은 일단 함부로 흑룡 진혈을 연화하려 시도치 말고, 최대한 생명력을 끌어올려 놓게나.”
“알겠습니다.”
서휼은 해룡궁 내탕금 문제로 해룡족 원로들과 상의를 하러 떠났고, 나는 일단 해룡궁 안으로 들어가, 우선 선수혈합에서 입고 있었던 혈체피갑을 해제했다.
촤르르륵!
내 몸과 합일해 있던 살덩어리가 떨어져 철퍽거리며 한 명의 인영을 형성했다.
원유였다.
나는 원유를 시켜 먹과 붓, 그리고 광한계에서 편지를 보낼 때 쓰는 질 좋은 비단을 가져오게 했다.
전음부라는 편리한 수단이 있음에도 구태여 편지를 보내는 것은, 자기보다 높은 사람에게 최대한 잘 보이고 싶을 때 쓰는 일.
사흘의 시간을 벌었으니, 이제 사흘의 시간동안 서휼에게서 벗어날 방도를 찾아야 한다.
회귀한 지도 벌써 10개월.
나는 서휼의 추천으로 인해, 해룡족에 속한 명백한 구성원이었다.
그러나 서휼은 내가 고작 축기기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이유로 나를 늘 해룡궁 바깥으로는 일부러 나가지 못하게 했다.
해룡궁 안쪽은 어차피 장악했다지만, 해룡궁 바깥으로는 나가지 못하는 바람에 해룡족과, 해룡궁 인근에 있는 수저 요족 몇몇을 제외하고는 안면을 틀 이들도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호풍성혈변 같은 걸 익힌다거나 하면 해룡궁은 나갈 수 있을지 몰라도, 서휼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을 터.
이쯤에서 해룡궁을 나가야 한다.
나는, 서휼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나와 안면이 있는 용족.
규련에게 편지를 보냈다.
―존경하는 규 선배님께.
후배 말학인 서 모가 서한을 보냅니다.
규 선배님의 배려에, 서휼 님과 해룡족 전원, 그리고 저는 운심호에 자리를 잘 잡고 평안하게 수행에 힘쓰고 있습니다.
서휼 님께서도 얼마나 규 선배님에 대한 감사를 표하시는지 모릅니다. 이번에 이렇게 귀찮게 서한을 보낸 것은, 이번에 선수혈합에 참가하여 얻은 흑룡 진혈의 연화를 도와주십사 부탁드리고자 함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규 선배님의 용족다운 기풍을 늘 경외하였고, 규 선배님께서는 저와 제가 속한 해룡족의 은자이시니 규 선배께서 흑룡 진혈의 연화를 도와주신다면 하늘에 대고 감사할 일일 것입니다.
만약 규 선배께서 흑룡 진혈의 연화를 도우신다면, 제가 해룡궁에서 서휼 님을 도와 업무를 처리하며 서휼 님께 보상으로 받은 영석 2만 개, 청해석(靑海石) 백 근, 오색염(五色鹽) 십 근, 비색산호(緋色珊瑚) 일곱 개, 그리고 서휼 님께서 탈피하신 비늘 조각을 은의의 표시로 드리겠습니다.
또한 저는 서휼 님께 신임받으며, 저렇듯 수많은 재물을 하사받는 몸이니만큼, 흑룡 진혈을 연화한 후에는 이 은의를 바탕으로 해룡궁에 규 선배님을 초대하고자 합니다. 서휼 님께서도 규 선배님과 만나 수행의 깨달음을 묻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시나 늘 적당한 자리를 만들기 힘들어 그러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후에 그 자리를 빌어 두 분이 깨달음을 주고받으실 수 있는 자리 또한 만들어 드릴 것인즉, 부디 후학이 진혈을 연화하는 것을 은의를 베풀어 도와주십사 청합니다.
후배 말학 서 모 올림.―
규련이 서휼을 처음 본 순간, 첫눈에 두근거리기 시작해, 지난번 선수혈합에서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그에게 연심을 품고 있다는 것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거기에 재물까지 든든히 안겨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도 없겠지.’
물론 서휼에게 하사받았다거나 한 건 아니고, 당연하게도 인근 수저 요족들에게 해룡궁의 지도를 건네주고, 해룡궁의 방호벽을 열어 재물을 도적질하게 해 준 대가로 내가 수저 요족들에게 나눠 받을 재물들이다.
내일 중으로 수저 요족들이 몰래 재물들을 나눠 줄 터.
나는 서한을 쓴 비단을 잘 접은 후.
해룡궁 모처에 있는 용련소(龍聯沼)로 향했다.
용련소는 용족들의 거처에 있는 연락 수단으로, 용족끼리 멀리에서 회의를 하거나 연락을 할 때에 쓰는 연락 수단이었다.
우우웅!
밝게 빛나는 연못 앞에 선 나는 비단을 들어 올린 후, 규련에게서 하사받은 선수 진혈이 든 옥병을 꺼냈다.
용련소는 용족끼리 나누는 대화의 보안을 위해, 용족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용족이 용족의 기운을 불어넣어야 작동하는 것이다.
물론.
우우웅!
선수 진혈이 담긴 옥병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을 용련소에 불어넣자, 연못이 밝게 빛나며 해룡궁과 연결된 용련소의 용족들을 보여 주었다.
용련소에는 가장 많이 연락을 나눈 순서대로 용의 형상이 크게 떠올라 있었다.
가장 큰 형상은 흑룡왕 현음의 형상, 그다음은 해룡궁 밖에서 사는 해룡족 원로 몇몇, 그다음은 흑룡족의 사축기 수사, 그리고 천인기 원로들이었다.
‘흑룡족과도 굉장히 자주 연락하나 보군.’
그리고 흑룡족의 천인기 원로 다음으로 있는 것이 규련의 형상이었다.
“규련, 연결.”
츠츠츳!
규련의 형상이 커지며 용련소가 규련의 처소에 있는 용련소와 연결되었다.
“전송.”
우우웅!
나는 규련의 용련소와 연결된 용련소 위에, 잘 접어 놓은 비단을 떨어뜨렸다.
파아아앗!
연못이 빛나며 비단을 규련의 용련소로 전송시켰다.
나는 용련소의 발동을 취소시킨 후, 해룡궁을 조작하여 내가 용련소에 출입했다는 기록을 지워 버린 후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아마 사흘 안에는 답신이 올 것이다.
* * *
약 이틀이 지났다.
쿠구구구구!
해룡궁 위로, 거대한 규련의 거체가 나타났다.
나는 규련의 기운을 느끼며 해룡궁 위로 날아갔고, 해룡궁의 결계에 얼굴을 들이밀고 뭔가를 찾던 그녀는 나를 보자 눈을 빛내며 인간형으로 화형하였다.
파아앗!
갈의를 입은 여인의 모습으로 변한 그녀가, 결계 안쪽으로 들어와 내 앞에 서며 말했다.
“험험, 정말인 거냐? 정말 서신에 쓰인….”
어쩐지 얼굴이 붉어진 채 양손을 꼬며 내게 묻는 그녀를 보며, 나는 약간의 가책을 느꼈다.
‘사랑에 빠진 이를 이용하려니 조금 미안해지는군.’
어쨌든 그녀를 보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규련은 확실히 서휼을 좋아하고 있다.
“예, 당연하지요. 아, 그리고, 서휼 님께는 서신에 쓰인 일은 말씀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도 서휼 님께 깜짝 선물을 드리고 싶어서 말입니다. 하하.”
“아, 알겠다. 그것도 좋겠군. 그렇게 하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는 사이 해룡족 원로들이 그녀의 등장에 빠르게 해룡궁으로 날아왔다.
“아니, 규 선배님이 아니십니까?”
“해룡궁에는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아….”
그녀는 헛기침을 하며 나를 가리켰다.
“이번에 이 아이가 흑룡 진혈을 선수혈합에서 받아가지 않았느냐. 인족 주제에 선수인 흑룡의 맥을 이으려는 것이 매우 가상해 보여 본녀가 직접 진혈의 연화를 도와주러 온 것이다.”
“아….”
“험험, 그러시군요.”
그러자 해룡족 원로들은 당황하는 듯하면서도 일단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는, 왜 인족 따위인 나를 이렇게 열심히 도와주는지 납득지 못하겠다는 의문이 쓰여 있었다.
그때였다.
파앗!
서휼이 어느덧 장내에 나타나 미소를 지었다.
“이거, 규 선배님께서 이리도 따스한 마음씨로 해룡족의 구성원을 돌봐 주시니 감동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아, 서, 서 수사도 왔군. 뭐, 인족이라지만, 아직 경지도 제대로 오르지 못한 주제에 원영기 급 의식을 가지고 있고 흑룡 진혈을 선택한 인재이니, 내가 이리 돕는 건 당연하지.”
그녀는 서휼을 보며, 부끄러운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심박을 조종해 안색을 평온하게 조절하며 얘기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내 눈에는 서휼이 나타나자 좋아 죽으려는 그녀의 연심이 훤히 보였다.
“규 선배님께는 늘 감사드릴 뿐입니다. 제 직전제자로 삼으려는 서은현은 본족의 훌륭한 인재이니, 선배님께서 연화를 도와주신다면 너무나 감사한 일일 것입니다.”
서휼은 구태여 그녀가 내 연화를 돕겠다는 것은 막지 않고 허락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서휼은 규련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저희 해룡족을 이렇게 생각해 주시고, 제가 아끼는 서은현에게 이렇듯 따스하게 대해 주시니, 규 선배님을 향한 마음이 넘쳐 흐르는군요. 서은현의 진혈 연화는 원하신다면 해룡궁에서 하셔도 됩니다. 제가 자리를 마련해 드릴 테니, 녀석의 연화를 도우시며, 간혹 저와 차라도 한잔하시는 게 어떠신지요. 제가 감사를 표할 길이 없어 이렇게라도 감사를 표하고자 합니다.”
“…!”
서휼이 손을 잡자 규련은 심박을 조종하는 것도 실패하고, 얼굴이 폭발할 듯이 빨개졌다.
그리고 나 역시 속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제길, 서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고, 규련이 나를 그녀의 처소에 데려가 진혈의 연화를 도와주게 하여 이 일을 벌인 거다만….’
만약 그녀가 서휼의 제안을 받아들여 해룡궁 내에서 내 연화를 돕겠다고 한다면 곤란해진다.
‘용족은 어지간하면 자신의 동부에서 일을 처리하는 걸 좋아하는 습성을 믿고 부탁한 것인데….’
예전 서란과 함께 지내며, 그의 동부에서 호풍응룡변을 익힐 때 알아낸 용족의 습성을 통해, 그녀가 나를 데려갈 것을 상정하고 짠 계획이다.
하지만 서휼이 말하는데로 되어 버린다면….
그때였다.
“흠, 흠. 미안하지만, 최근 내 영지에 있는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해서 그것들을 제압해야 하니 말일세. 아무래도 그건 조금 힘들 듯하군.”
“아, 그렇군요. 정말 아쉽게 되었습니다.”
“그러게 말일세.”
“저도 며칠 전, 해룡궁에 도적이 들어 내탕금을 털어 가는 덕에 곤욕을 겪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규 선배의 일이 남 일 같지 않군요.”
“하여튼 최근에 분위기가 뒤숭숭하긴 하지. 혈음계의 차원 장벽에서 불온한 분위기가 보인다는 전언도 있고, 심족들의 활동도 점차 활발해진다는 얘기도 있으니….”
“정말 혼란스러운 시국입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규 선배께서 곤욕을 치르시는 것 같으니… 저희 해룡족 족원들을 규 선배의 영지에 파견해서 반란 제압을 돕겠습니다.”
“아, 정말인가?”
“예, 말씀드렸다시피 며칠 전에 도적이 들어 남 일 같지가 않으니 말입니다.”
서휼은 남 일 같지 않다는 핑계를 대며, 규련에게 해룡족 족원 몇몇을 붙여 주었다.
말이야 규련을 도와 반란 진압이었지만, 의도는 뻔했다.
‘나를 감시하라는 거겠지.’
정말, 어떻게든 놈의 영향권에서 벗어났음에도 부득부득 감시를 붙이는 모습이, 정말 징할 정도였다.
“그럼, 이렇게 규 선배께서 자네를 도우시는 행운을 잡았으니 흑룡 진혈을 잘 연화하길 바라네.”
툭툭.
서휼은 내 어깨를 툭툭 쳐 주며 용기를 북돋웠고, 그러는 척 은근슬쩍 내 신분 패에 영기를 흘려보내 뭔가 수작을 부렸다.
‘규련의 동부에 도착하자마자, 신분 패는 어디 처박아 놔야겠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서휼에게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한 후 규련과 함께 그녀의 영지로 향하였다.
반 각 정도를 날아서 도착한 규련의 영지는 울퉁불퉁한 바위산이 잔뜩 늘어져 있는 절경이었다.
바위산 사이로는 새하얀 운무가 끼어 있어 마치 신선들이 사는 신선향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녀의 동부는 바위산 중 가장 높은 산자락에 뚫린 동굴에 있었다.
“자, 그럼 일단 내려 있거라. 그리고, 해룡족에서 온 전사들이라 했나?”
규련은 우리를 따라온 해룡족의 젊은 원영기 전사들을 보며 말했다.
“노예 종족이지만, 내 영지에 있는 놈들은 정말 폭넓게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다들 수고를 좀 해 줘야 할 터다.”
“명심하겠습니다.”
“반란을 일으켰다지만 그래도 놈들은 내 재산이니 되도록 학살은 지양하고, 반란의 수괴들을 잡아 오는 걸 주 목표로 삼아라.”
“예!”
“그럼 나는 서은현의 진혈 연화를….”
그리고,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규련의 앞에서 말했다.
“아니, 저도 해룡족의 구성원으로서 해룡족의 전사님들이 고생하시는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저 역시 이분들을 따라 반란을 진압하고 오겠습니다.”
“뭣?”
내 말에, 해룡족 전사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눈을 부릅떴다.
반란 진압은 명분이고, 실상은 나를 감시하러 온 놈들일 터다.
그렇다면 명분을 같이 없애 주면 그만이다.
“오오, 과연 인족이지만 해룡족을 생각하는 충성심 깊은 인재로군.”
규련은 내 태도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주고 오너라. 비록 종족은 다르지만, 같은 구성원으로서 조직의 일을 돕겠다고 솔선수범하는 모습이 보기 좋구나. 아직은 축기기지만 너도 선수혈합을 견뎌 냈으니 그 생명력과 힘은 원영기 수사에 필적하겠지.”
“예, 지금껏 해룡족에 은의를 베풀어 주신 규 선배님께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이 마음을 갚고자 했는데, 기회를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내 말에 그녀는 점차 기분이 좋아지는 듯 푸근한 미소를 지었고, 그 모습을 본 해룡족 전사들은 뭔가 말을 하려 했으나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우웅!
그녀가 손 위로 황금빛 영기의 구체를 띄워 올렸다.
“이 구체를 따라가면 현재 반란이 일어나는 영지의 구역이 나올 것이다. 가서 반란을 진압하고 왔으면 한다.”
“…예.”
해룡족 전사 셋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굴 바깥으로 날아올랐다.
나 역시 해룡족 전사 한 명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의 목에 올라탔다.
“그럼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규 선배님.”
“오냐, 그러려무나.”
그리고, 해룡족 전사가 비둔술을 쓰기 직전.
그녀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참! 비록 최대 전력이 축기기 수준인 약소 노예 종족이라지만, 조심하거라.”
“원영기 급 전력이, 이 녀석까지 합해서 넷입니다. 아무리 수가 많고 반란이 광범위해도 조금 귀찮을 뿐. 규 선배님께선 걱정을 다잡으시지요.”
“아니, 내가 듣기로는 노예 종족 중에서 심족(心族)이 나타났다는구나.”
그녀의 말에, 내 눈이 바싹 졸아들었다.
“비록 전해 듣기로는 결단기 급 전력밖에는 되지 않는 허약한 심족이라지만… 그래도 심족은 기오막측한 신통을 쓰니 모두 몸조심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