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수선전-180화 (180/185)

지(地)의 종족 (5)

머리가 얼얼하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것 같다.

뇌가 그대로 뭉개지는 것 같다.

버틸 수가 없다.

기이한 이명이 사방에서 울리고, 눈앞이 흐려진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하지만, 미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이제 그만하지.]

우뚝!

그 말을 들음과 동시에, 내 정신은 강제로 다잡아진다.

천장단애 아래로 떨어지려는 그때, 누군가가 내 머리채를 강제로 잡아 끌어올리려는 것 같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목이 뽑혀 나갈 것 같은 고통이 온다.

마찬가지로 나는 영혼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강제로 혼란 속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허억…! 흐억…!”

[내가 자네를 찾은 건 세 가지가 궁금해서라네. 세 가지만 답해 주면 물러가지.]

나는 강제로 정신이 다잡혔지만, 그래도 도저히 버티기가 쉽지 않았다.

‘버텨라, 버텨…!’

하지만 버텨야 한다.

버티지 않으면, 설령 회귀를 하더라도 몇천 년간, 몇만 년간 수많은 생을 정신이 나간 채로 낭비하게 될지도 모른다.

버텨야 한다!

“끄…으아아아아아!”

콰드득!

나는 내 팔을 들어, 그대로 입을 열고 팔목을 쥐어뜯었다.

붉은 피와 아릿한 고통이 들어온다.

고통이 생기자, 고통이 혼란을 중화하며 조금 정신이 들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하문…하십시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눈앞의 존재에게 말했다.

눈앞의 존재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정신력이 강하군. 아무리 종명자라도 이야기의 초반부에는 벌레나 다름없는데, 이렇게 빨리 제정신을 찾을 줄은.]

“….”

[좋아, 자세가 된 것 같으니 질문을 하도록 하겠네. 첫 번째 질문, 자네가 받은 명(命)은 무엇인가.]

“…!?”

발설하면, 안 된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문득 혼란스러운 뇌리 안쪽으로 그런 생각이 지나쳤다.

‘발설하면 안 되고 자시고, 뭔지도 모르는데?’

뭐라 대답해야 할까.

내가 멍청하게 가만히 있자, 봉명이 말했다.

[흠, 아직 모르나?]

“….”

[흠, 신기하군. 어떻게 자기 명도 모르는 종명자가 봉명추의 어둠 속에서 10년을 버티고, 내 앞에서 이리 빨리 의식을 찾는단 말인가?]

봉명은 의아한 듯이 읊조리고는 다음 질문을 이어 갔다.

[두 번째 질문, 자네는 자네를 데려온 존재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

“…?”

그건 또 무슨 말이란 말인가.

나를 데려온 존재?

내가, 우리가 이 세상에 떨어진 것이 그냥 떨어진 것이 아닌 누군가가 우리를 데려온 거라고?

내가 의아해할 때였다.

[이것도 모르나 보군. 하긴 명도 못 깨달은 종명자에게 많은 기대를 할 순 없지. 이야기가 더 진행되면 나중에라도 기억이 날 터.]

“….”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내가 아리송하게 그의 얘기를 듣고 있을 때였다.

[마지막 질문, 자네는 상제(上帝), 혹은 천존(天尊)을 만난 적이 있나? 직접적으로 만나지 않았더라도 그런 존재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적이 있나?]

“어…?”

그와 동시에.

뿌드드드득!

“끄아아아아아아!”

나는 머리가 폭발할 것 같은 고통에 휩싸여 비명을 질렀다.

봉명의 목소리가 뇌리를 파고든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에는 아무 반응이 없었건만, 세 번째 질문이 뇌리에 닿자 당장이라도 머리가 폭발해 버릴 것 같았다.

“흐아아아악! 끄아아악! 어아아악!”

당장이라도머리를폭발시켜죽어버리면조금편할까나는기억하면안되는것을지금기억하려하고있는지도모른다그때그마을에서나는분명히….

[진정하게.]

뚝―

“…?”

‘뭐였지?’

방금 뭔가 굉장히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났던 것 같다.

봉명이 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군, 벌써 두 번이나 접촉했군. 충분히 대답이 됐네. 대답에 응해 줘서 고맙군.]

“…??”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나는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이 존재는 침묵만으로도 뭔가 정보를 얻은 듯했다.

내가 이해를 못 하고 있자, 봉명이 내게 말했다.

[나는 의문을 풀었으니, 자네가 궁금한 것을 말하게. 벌써 6초나 지났으니, 4초 안에 전부 대답해야 할 걸세.]

“4초…?”

나는 순간 의아해했다가 봉명이란 존재 앞에서는 시간의 개념이 의미 없다는 걸 기억하고는 그러려니 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시간을 왜곡하는 게 가능하시다면 어째서 10초를 열흘 정도로 바꾸시지 않았는지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며 물었다.

[나는 분체(分體)고, 내가 영향력을 투사하는 봉명추는 폐기된 선보이기 때문이네. 그러니 왜곡의 정도가 적을 수밖에.]

“진선은 시간을 왜곡시킬 수… 아니….”

나는 쓸데없는 질문을 빠르게 넘겼다.

지금은 진선의 능력 같은 것보다 더욱 중요한 걸 물을 수 있는 기회다.

“종명자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 같은 존재가 더 있는 겁니까?”

[종명자가 무엇인지는 종명자들 자신밖에 모르지. 그래서 내가 아까 자네에게 명을 깨달았느냐 물은 것이고. 종명자들은 나보다도 아득한 시간 이전부터 쭉 있어 왔네.]

“양수진은… 전대 종명자…입니까? 그도 진선에 도달했습니까?”

[맞네. 그도 이야기 초반에는 자네만큼 약했지만, 이야기의 종장에는 진선의 한계에 도달하는 데에 성공했지.]

“이야기란 무엇입니까?”

[명(命).]

“….”

운명이라….

“혹시, 종명자를 찾아다니는 [뭔가]가 당신….”

[쉿.]

툭!

갑자기 입이 사라졌다.

문자 그대로였다.

[입]이 사라졌다!

[보아하니 선대 종명자가 남긴 전언을 받은 적이 있나 보군. 하지만 입을 조심하게. 생각을 조심하게. 떠올리는 것 자체를 조심하게. 내가 자네를 만나게 된 것은, 선보를 준비해 놓고 수많은 역사를 살며 깔아 놓은 안배이자 인력(引力)이지만, 선대가 자네에게 전한 방식은 말도 안 되는 확률의 기적이야. 내 방식은 종명자의 기적만큼 안전하진 않네.]

어쩐지, 만약 봉명이라는 존재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존재라면.

그는 지금 자신의 입에 검지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입을 다물라는 표시를 하고 있을 것만 같다.

물론 그를 직시할 수 없기에 자세히는 몰랐지만, 만약 저 존재가 인간처럼 생겼다면 왠지 그럴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자네가 뭔가를 들여다보려 하면, 그 뭔가도 자네를 자세히 들여다볼 걸세. 생각하지 말게. 떠올리지 말게. 입에 함부로 담지 말게. 종명자와 안전한 곳에서 대화하기 위해 굳이 하계에 이런 본원의 어둠을 남겨 놓은 것이니 부디 입을 열어 화를 부르지 말게.]

“….”

어느새 다시 내 입이 생겨나 있었다.

“…바깥에서는 함부로 입을 열고 다니지는 않았습니다.”

[좋군. 늘 경계하게, 삼천세계 삼라만상 [빛]은 [그것]의 끄나풀이니, 빛이 비취는 곳에서는 늘 다물게.]

빛?

“영원히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말씀…이시군요.”

[이야기의 초반부에서는 그것도 좋겠지.]

나는 경악했다.

빛?

빛을 조심하라고?

빛이 살아 있는 존재라도 된다는 듯한 저 말투.

그동안 평온하게 햇볕을 쬐고, 달빛을 쐬며, 별빛을 맞았던 그 모든 순간이 문득 공포스러워졌다.

‘그래서, 이 공간에 [빛]이 존재하지 않는 건가?’

“…위대하신 분…께서는 왜 저를 도와주시는 겁니까?”

[종명자는 기적을 일으키기 때문이지.]

“…?”

모호한 답이다.

하지만 나는 봉명의 말투에서 더 이상 자세한 질문을 불허한다는 기색을 읽었다.

아니, 읽었다기보단 그가 보여 줬다고 해야 하리라.

“만약 도와주실 거라면, 직접적으로 도와주시면 아니 되는 겁니까?”

[예를 들면?]

“소원을 들어주신다거나….”

[진선은 종명자에게 액(厄)을 제외한 그 무엇도 직접적으로 줄 수 없네. 횡액이라면 얼마든지 점지해 줄 수 있지.]

“….”

[이렇게 정보를 전달하는 정도가 한계야. 그리고 이마저도 벌써 시간이 다 되어 가는군.]

봉명이 내게 말하였다.

[마지막 질문을 골라 하게.]

“…당신들은, 종명자들의 능력을 전부 알 수 있습니까?”

[불가능하진 않지.]

“…!”

내가 흠칫 놀랐을 때였다.

갑자기 시야가 일그러진다.

동시에, 나는 내 몸이 녹아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아, 그렇구나.’

지금껏 내가 이 존재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이 존재가 그것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본래라면 본체도 아닌 분체를 마주하는 것조차 만나자마자 소멸했어야 옳다.

그와의 만남이 다하자마자, 그가 관심을 돌리자마자 이렇게 몸과 혼 자체가 붕괴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눈앞이 녹아들어 감과 동시에.

[본래의 시간으로 돌려 주마.]

봉명의 목소리가 들리며, 나는 의식을 잃었다.

* * *

춥다.

“…!!!”

나는 눈을 번쩍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허억…헉…!”

입을 벌리자마자 생명의 빛이 흘러나온다.

나는 팔뚝을 바라보았다.

백(百)자가 적혀 있다.

여전히 추웠으나, 나는 어쩐지 따스하다고 느껴졌다.

죽을 듯한 어둠과 한기였지만, 어째선지 상당히 밝고 따스하게 느껴진다.

어째서일까.

‘이것보다, 더욱 깊고 거대한 어둠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나는 방금 만났던 존재를 떠올렸다.

‘잠깐, 내가 누구를 만났지?’

[이름]이,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와 만났던 일들은 전부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가 누구였는지는 뇌리에서 지워진 듯했다.

오싹, 오싹….

너무나 공포스럽다.

아니, 차라리 이름을 잊은 건 다행일 수도 있었다.

‘뭔가를 들여다보면, 뭔가도 나를 들여다본다.’

내가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계속 떠올린다면.

그 역시 나를 계속 들여다보리라.

어쩌면 그것은 격외의 존재로서 필멸자인 나를 배려해 준 것이리라.

내가 가슴을 진정시킬 때였다.

번쩍!

저 위쪽에서, 익숙한 황금빛이 퍼져 나왔다.

“선수혈합이 끝났다. 마지막까지 남은 100명에게, 선수진혈을 부여할 것이다!”

규련이었다.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이제야 현실로 돌아왔음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황급히 외쳤다.

“어, 얼마나 지났습니까? 저희가 이곳에 갇힌 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습니까?”

“흠? 4개월 하고도 딱 나흘이 더 지났다. 어둠 속에 갇혀 있으니 시간 감각이 무뎌졌나 보군.”

“…4개월….”

규련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4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10년의 세월을 경험하고 온 것이었다.

체내의 혈맥에, 10년간 쌓아 올려 진화시킨 창령성광오채대법이 또렷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배려인지는 몰랐으나, 내가 10년간 소모한 만상인연도의 생명력은 10년 치가 아닌 딱 4개월 치만 소모되어 있는 상태였다.

직접적으로 내게 뭔가를 줄 순 없지만, 이런 식으로 간접적인 선물은 줄 수 있는 모양이었다.

‘진선들은 정말로, 무시무시한 존재다.’

나는 10년 동안 어둠 속에 갇혀서, 빛 한 점 보지 못했던 공포스러운 세월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내가 10년을 버텼기에 10초 정도를 준비했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 말인즉슨, 내가 버틸 수만 있었다면 [그]는 100년이고 1000년이고 시간을 왜곡할 수 있었다는 뜻이었다.

‘아니, 더 생각하지 말자.’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를 계속 생각한다면 [그]가 나를 들여다볼지도 몰랐다.

그 존재는 내게 우호적이었으나, 나는 그런 존재가 나를 들여다볼 수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공포스러웠다.

‘생각하지 말자,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지금은 그냥…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하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규련의 인도에 따라 봉명주의 최하층을 나갔다.

* * *

“…하여, 위 요족의 유망주들은 훌륭하게 선수의 혈통을 이을 수 있음을 증명하였으므로 진룡맹 최고회에서는 이번 선수혈합에 참가한 인재들에게….”

선수혈합이 끝난 후.

살아남은 100명 안에 든 나는 말 없이 봉명주의 2층에서 원기를 회복하며 선수혈합을 주관한 규련의 연설을 들었다.

하지만 솔직히 별 실감은 나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추위와 어둠 속에서 미쳐 버렸고, 지금 보고 있는 건 전부 환영일 수도 있지.’

그만큼 [그]의 존재감을 맨정신으로 받아 내는 일은 힘겨운 일이었다.

‘전명훈이 정신이 나가 버린 게 이해가 간다.’

[그런] 것이, 호의를 가진 것이 아니라 작정하고 악의를 뿌려 대며 천벌을 내렸다.

전명훈 하나 정도는 충분히 광인으로 만들어 버리기 충분한 존재감이었다.

나는 문득, [그]의 존재감을 생각하자, 천뢰번을 훔친다는 목표가 더할 나위 없이 두렵게 느껴졌다.

‘천뢰번을 훔치다가, 혹여나 내가 [그런] 존재를 직시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과연 나는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

과연 목표를 지켜 나가는 게 옳은 일일까.

‘내가, 과연 진선을 보고도….’

그때였다.

투욱….

서휼이, 내 어깨를 잡았다.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칭찬해 주었다.

“축하하네. 이제 진정 선수 진혈을 받아들여 우리 지족의 일원이 되겠군.”

그의 웃음은, 여전히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선수 진혈을 선택해 받고 나면, 지난번 주었던 호풍진혈변의 상위 판인 호풍성혈변(呼風聖血變)을 내어 주지. 호풍성혈변을 익히면 선수의 진혈을 자네의 몸에 빠르게 연화시켜 경지를 높일 수 있을 걸세.”

“…하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나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호풍성혈변.

이름만 들어도 서휼이 정겨운 뒤통수를 준비해 놓았을 게 뻔한 이름에다가, 내게 호풍성혈변을 제안하는 서휼의 심상은 온갖 더러운 꿍꿍이속으로 가득 차 있다.

“자네 동료인 오혜서, 그녀 역시 내가 익힌 호풍성혈변을 현재 훌륭히 수행 중이지. 자네도 그녀와 같은 공법을 익히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야.”

‘아….’

나는 뭔가를 깨달았다.

“…하해와 같은 은혜에, 늘 감사드릴 뿐이옵니다.”

알 수 있다.

오혜서는 지금 분명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고, 그런 그녀가 익히는 호풍성혈변이라는 공법을 익히면, 그때부터 나도 서휼의 노예 생활이 시작될 터.

‘…그렇군.’

“참가자 서은현은 앞으로 나오라!”

규련이 생존자 중 한 명인 나를 호명했다.

선수혈합의 생존자들을 가리는 단상 위에는 수 개의 선수 진혈이 한 방울씩 준비되어 있었고, 나는 올라가서 선수 진혈을 골라 받기만 하면 된다.

나는 등 뒤에서 눈웃음을 짓고 있는 서휼을 보며 웃었다.

“…정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서휼 님.”

“하하, 아닐세. 전부 자네가 노력한….”

나는 내 앞에서 사탕발림을 하며 떠드는 서휼의 거짓부렁을 모조리 흘려들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서휼에게 감사하다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고맙다, 서휼.’

잠시 진선이라는 공포스러운 존재에게 쫓겨 내 목적을 잊어버릴 뻔했다.

하지만 서휼의 수작질을 보는 순간, 그 더러운 놈 특유의 의식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역겨움이 공포를 이겨 냈다.

‘천뢰번을, 반드시 훔쳐 낸다.’

전명훈을 위한 애틋한 마음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세상만사 제 잘난 줄만 알던 전명훈이 모든 것을 잃고 구슬프게 울던 그 모습은 얼핏 지난날의 나를 떠오르게 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심상을 가지게 되는 건, 괴군이나 서휼.

나 정도만 있으면 이제 충분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전명훈이 미쳐 날뛰게 되면, 이렇든 저렇든 무수한 인족은 물론이고 마족들도 낙뢰자 전명훈에게 학살당하게 된다.

전명훈에게서 시작되는 비극을 막을 수 있다.

‘천뢰번을 훔쳐서….’

쉴 새도 없이 역겨운 수작을 부리는 서휼의 주머니 속에 꼭 넣어 주기로 결심했다.

[그]와 대화했던 기억은 무시무시하게 공포스럽고 끔찍했다.

이런 좋은 경험을, 나 혼자만 누려서야 되겠는가.

서휼도 반드시 알게 해 주리라.

‘고맙다, 서휼.’

네놈 덕에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서휼을 뒤로한 채, 단상 위로 올라가 규련 앞에 섰다.

“선수혈합의 생존자로서, 그대는 총 일곱 종의 선수 진혈 중 한 진혈을 고를 수 있다. 어떤 진혈을 고를 것인가.”

눈앞으로 각각 한 방울씩의 핏방울이 떠올랐다.

각각, 선수 흑룡(黑龍).

선수 태호(太虎).

선수 청붕(靑鵬).

선수 유리공작(琉璃孔雀).

선수 음귀현무(陰鬼玄武).

선수 파산마원(破山魔猿).

선수 백익천마(白翼天馬).

“저는….”

핏방울에 영기가 서리며, 각각의 핏방울 위로 선수들의 형상이 아른거린다.

흑색의 비늘을 가진 용의 형상이, 거대한 범의 모습이, 청색의 붕조의 모습이,

칠채색의 공작의 모습이, 귀신을 거느린 현무의 모습이, 전신에 산이 돋아나 있는 원숭이의 모습이, 백색의 날개를 단 말의 모습이 핏방울 위로 스친다.

“이것으로 선택하겠습니다.”

나는 한 가지 선수진혈을 가리켰다.

작가의 말 :

전개에는 그렇게 큰 영향은 미치지 않는 사소한 설정집.

회귀수선전에 등장하는 선수들 간의 관계.

―흑룡과 태호는 성정이 맞지 않아 만나면 싸운다. 두 선수는 다른 선수들 대다수와 사이가 좋지 않아 만나면 으르렁거린다.

―청붕은 흑룡을 만나면 새끼를 잡아먹으려 하고, 태호를 만나면 기가 눌려 도망친다. 유리공작을 제외한 다른 선수들과는 사이가 좋다.

―청붕은 유리공작을 만나면 죽이려 하고, 유리공작은 청붕을 만나면 자기 알을 낳게 하려 한다. 청붕뿐이 아닌 태호를 만나도, 흑룡을 만나도, 마원을 만나도, 천마를 만나도 알을 못 낳을지언정 모두 교접하고 싶어 하기에 선수들 사이에서는 가장 평판이 나쁘다. 다만 음귀현무의 음기는 자기 알에 도움이 되지 않아 피해 다닌다.

―음귀현무는 파산마원을 만나면 귀신들을 데리고 와 신나게 함께 노닌다. 음의 기운이 강한 선수들 사이에서는 환영의 대상이나, 양의 힘이 강한 선수들에게는 경원시당한다.

―파산마원과 백익천마는 서로가 가진바 힘의 성질 때문에, 서로가 만나면 사이가 좋든 나쁘든 무조건 천재지변이 일어난다. 두 선수는 다른 선수들과는 늘 무난한 관계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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