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수선전-179화 (179/185)

지(地)의 종족 (4)

‘어둡군.’

서휼과 함께 도착한 봉명주의 최하층은, 시릴 정도로 춥고 어두운 곳이었다.

‘이곳이 봉명주 7층 중 마지막 층.’

봉명주 역시 봉명성처럼 총 7층으로 이뤄져 있었다.

서휼이 행정 업무를 보거나, 진룡맹의 회의가 이뤄지며, 요족들의 시장과 사교회 등 만남이 주로 이뤄지는 최상층인 7층, 생명의 층.

지족의 후기지수들, 혹은 원로들에게 제공되는 영맥이 풍부한 6층, 수행의 층.

지족의 일원이 수행의 경계를 넘기 전, 천겁을 맞기 가장 적절하며, 동시에 가장 안전하게 천겁을 맞을 수 있는 피난처인 5층, 결실의 층.

죽은 지족들의 사체가 모여 있는 영안의 4층, 죽음의 층.

봉명주의 동력실이자, 봉명주 전체에 흐르는 영기의 근원인 근원의 3층, 대지의 층.

동력실 아래에서 뭔가를 보관하는 역할을 하는 2층, 현재는 지족이 모은 보물들을 저장해 놓는 저장고 역할을 하는 저장층.

그리고 봉명주 최하층이자, 선수혈합이 벌어지는 비지가 있는 곳.

봉명주 1층, 허무의 층.

나는 허무의 층이라는 이름을 가진, 최하층에 도달하자 전신의 영기가 얼어붙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게 허무층의 한기인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다.

빛도, 열도, 공기도, 소리도.

심지어 영력마저 희박해, 한번 빠져나간 영력은 어두컴컴한 허공으로 흩어지기 일쑤였다.

까마득한 어둠을 앞에 두자, 나 말고 다른 지족들도 당황했는지, 나를 제외한 다른 지족들 역시 흠칫거리고 있었다.

서휼을 따라온 해룡족의 원영기들 역시 몸을 움츠리고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아니, 해룡족뿐이 아닌 곳곳에 도착한 다른 요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기가 선수혈합을 치르는 곳인가?”

“이곳에서 생존 시험을 치른다고? 쉽지 않겠군.”

“숨만 쉬어도 영기가 흩어지고 있어.”

그들이 모두 두런거릴 때였다.

번쩍!

문득, 어두운 최하층이 밝게 물들었다.

황금빛의 섬광이 사방을 비춘다.

그 섬광에 놀라, 최하층에 도착한 요족들 전부가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를 데리러 왔던 진룡맹 원로, 규련이었다.

“대강 다들 도착한 것 같군. 본 룡은 이번 선수혈합을 주관하게 된 시험관인 진룡맹 장로, 규련이라 한다. 우선 대형 종족에서 온 사축기 수사들이 있으면 모두 자기 종족을 보호하는 걸 멈추고 이쪽으로 오게.”

그 말에, 해룡족 측에 있던 서휼과 다른 장소 곳곳에 있던 몇몇 요족들이 하늘로 날아올라 규련의 옆에 섰다.

“으윽….”

“으, 으흐흐… 추, 추워….”

서휼이 사라지자, 주변에 있던 해룡족들이 몸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이, 이게 서휼 님이 보호를 멈춘 허무층의 추위인가….”

“혹독하군….”

“…?”

나는 주변에서 벌벌 떠는 해룡족들을 보며 순간 의아해졌다.

‘뭐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데.’

처음 왔을 때부터 끔찍하게 시리던 허무층의 온도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해룡족 후기지수들이 벌벌 떠는 것이었다.

나는 그 모습에서 뭔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서휼 놈. 나는 처음부터 보호를 안 해 주고 있었나 보군.’

정말로 간단한 사실이었다.

우우우웅!

사축기 지족들이 규련의 옆에 서자, 그녀에게서 뿜어지는 빛이 더더욱 밝아졌다.

‘이건….’

나는 규련에게서 뿜어지는 빛의 본질을 알아채며 흠칫 놀랐다.

‘생명력, 그 자체?’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허무의 공간 속에서.

규련은 가장 순수한 본원의 영력, 생명의 힘을 ‘생산’하고 있었다.

‘저게 사축기 수사….’

생명의 힘을 깨우친 이들이다.

사축기에 이르면 이전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수명을 얻는다는 것이 사실인 듯, 그녀는 생명력 자체를 뿜으며 어둠을 밝혔다.

‘아니, 혼자서 내뿜는 건 아닌가.’

주변으로 몰려든 사축기 수사들의 기운을 빌어, 더더욱 밝은 빛을 뿜고 있는 것이었다.

여하튼, 사축기 수사들이 뿜는 황금빛이 주변을 물들이며, 어둠이 몰려가고 주위의 모습이 어느 정도 드러났다.

우리가 있는 곳은 모래사막 위였다.

모래사막 위로, 수많은 특이한 요족들이 뺴곡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해룡족을 비롯하여, 생전 처음 보는 종족들, 그리고 생명체가 맞는지 의심되는 돌멩이 같은 종족들까지.

무수한 요족들이 지천에 깔려 있다.

‘만 명? 만천 명? 넉넉잡아 만이천 명 정도 되겠군.’

심지어 저들 대다수가 결단기, 원영기였다.

축기기는 나 혼자밖에 없었다.

그때, 규련이 황금빛 속에서 말을 이었다.

“우선, 이 자리에 와 준 전 요족의 후기지수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대들 모두, 선수혈합에서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용기 있게, 고작 100명을 뽑는 선수혈합에 참여하였으니. 그러나 동시에 한편으로는 선배로서 걱정이 되기도 한다. 이 선수혈합은, 재차 말하지만 허무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극한의 생존 시험이다. 마지막으로 말한다. 선수혈합은 죽음을 동반한 시험이며, 포기할 이는 지금 당장이라도 포기하기를 권하는 바이다. 선수혈합을 포기할 이는 없는가? 당장 나와라.”

그러나 어떤 요족도 나서지 않았다.

규련은 그 모습을 보며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듯했으나, 나는 그녀의 의념에서 안쓰러운 감정을 읽었다.

“좋다. 포기할 이들은 없는 것 같으니 지금부터 선수혈합을 개최하겠다. 선수혈합의 내용은 정말 간단하다. 최후의 100명이 남을 때까지, 그저 살아남으면 된다!”

번쩍!

그녀가 손을 휘두르자, 황금빛 생명력이 주변으로 퍼져 나가며, 각 요족들의 팔, 다리에 기묘한 문양을 새겼다.

요족어로, 만삼천이백오십이(萬三千二百五十二)라는 숫자였다.

“그대들의 몸에 새겨준 숫자가, 현재 비지에 들어온 다른 선수혈합 참가자들의 숫자다. 한 명씩 줄어들 때마다 숫자도 그에 맞춰 달라지지. 그 숫자가 백(百)을 가리킬 때까지 버티면 된다. 하지만 그대들도 알다시피, 선수혈합은 중도 포기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들에게 나눠 준 숫자가 백 이하가 되려면 그대들 중 상당수가 죽거나, 혹은 경합 불능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거다. 자, 그럼 대강 설명은 끝났고, 뭔가 궁금한 게 있나?”

“저, 시험관님. 불능 상태라는 건 뭡니까?”

한 요족이 규련에게 질문하자 그녀는 냉랭한 눈으로, 그러나 속으로는 안쓰럽다는 의념을 흘리며 큰 소리로 답해 주었다.

“죽기 직전까지 몰려, 가사 상태에 이르면 선수혈합 불능 상태라고 인정되어 봉명주 2층으로 전송된다. 다만 보통 그런 상태까지 간다면, 십중팔구 수행이 몇 단계는 떨어질 테니 각오해야 할 거다.”

“…알겠습니다.”

“또 질문 있나?”

“있습니다. 한 가지 확실히 해 두고 싶은게 있어서 말입니다만… 남은 지족이 100명 이하가 될 때까지 생존하는 게 이 경합의 목표라면, 결국 선수혈합의 주 목적은 다른 경쟁자를 빨리 줄이는 게 관건인 게 맞습니까?”

마치 사마귀를 닮은 듯한 요족이, 살기를 흘리며 규련에게 질문했다.

규련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조금 다르다. 이 선수혈합이란 결국, 선수의 진혈을 받아들일 수 있을만큼 강한 ‘생명력’을 가진 요족을 뽑는 경합이고, 그런 만큼 ‘생존력’이 주를 이루는 경합이다. 아마 경합이 제대로 시작되면 이해할 거다.”

“예, 뭐… 다른 경쟁자들을 줄여도 된다는 의미로 알겠습니다.”

“마음대로 하도록.”

사마귀 요족은 킬킬거리며 살기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 요족의 주변에 있던 요족들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그에게서 한두 발짝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규련은 오히려 그 요족에게도 불쌍하다는 듯한 의념을 보내고 있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진짜 선수혈합이 시작되면 엄청난 생존력을 요한다는 거로군.’

어려울 건 없었다.

지난 6개월간, 나뿐이 아닌 원유 역시 수행을 되찾게 했다.

회귀 직후라서 수행의 기반 자체가 없는 나와는 달리, 원유는 본래 결단기였던 수행의 기반이 있었으니만큼 녀석은 순식간에 결단기 수행을 찾을 수 있었다.

이번 선수혈합에는 원유를 입고 왔으니, 생존력 자체는 걱정되진 않았다.

이내 몇몇 질문들이 더 이어졌다.

“100명이 남기 전에는 선수혈합은 안 끝나는 겁니까?”

“그렇다. 뭐, 뭘 걱정하는지는 안다. 몇 년이 지나도록 선수혈합이 질질 끌릴까, 그게 걱정인 거겠지? 그럴 일은 없다. 길어도 4개월 안에는 결판이 날 테니.”

몇몇 질문이 더 이어졌고, 얼마 후.

규련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더 질문은 없는 거겠지? 하면 이제, 진짜 선수혈합을 시작하겠다!”

“옛!”

수많은 요족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리고, 규련이 손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내리쳤다.

“지금부터, 선수혈합을 시작한다!”

콰과과광!

그와 동시에, 모래사막이 그대로 산산조각 나며 아래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건…!’

순수한 완력으로 쪼갠 것이 아니다.

나는 규련과 사막 사이에서 일어난 영기의 흐름을 보고, 이 ‘사막’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사막 자체가 규련의 법술이었던 건가?’

우수수!

사막이 쪼개지며, 그 아래로 시커먼 공간이 드러났다.

마치 허공간 같은 절대적인 어둠이 드러난다.

하지만 허공간과는 다르게, 계위를 읽어서 현계로 돌아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어둠 자체가 허공간이 아닌 현계의 공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싸아아아아!

‘흡!’

나는 몸을 엄습해 오는 정신 나간 한기에 순간 정신을 잃을 뻔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춥다.

선수혈합이라는 것이 만만찮을 줄은 알았다만, 이 정도로 시릴 줄은 몰랐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

절대적인 어둠!

차라리 우주 공간이 이럴까.

‘생명력 자체가 빠져나간다.’

이 시커먼 허무 속에서는,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생명력이 빠져나와 허공에서 흩어졌다.

나는 이 정신 나간 추위 속에서 견디며, 왜 규련이 경쟁자를 줄이려 하는 요족에게 냉소를 지으며, 동시에 그 요족을 불쌍히 여겼는지 알 수 있었다.

‘경쟁자를 줄여? 웃기는 소리군.’

그딴 짓은 불가능하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영혼까지 얼어붙을 듯한 추위다.

아니, 추위조차 아니다.

이것은 차라리 죽음이었다.

‘4층이 죽음의 층이라는데, 죽음의 층은 차라리 1층에 걸맞은 말이 아닌가.’

어느덧 우리의 대지가 되었던 모래사막도 어둠 속으로 흩어져 없어졌고.

빛을 비춰주던 규련과 사축기 수사들 역시 어딘가로 사라졌다.

나는 주변에 있던 다른 요족들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고, 우선 무작정 법력을 운용시켰다.

우우웅!

정순지력이 체내를 활발하게 흐르며 죽어 가는 내 몸을 일깨웠다.

웅웅웅!

몸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지며, 그제야 조금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대론 안 된다.’

그러나 나는 희미한 빛살마저 점차 어둠 속으로 흩어지는 것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뭔가 다른 방법이 필요해. 이대로는 생명력이 전부 흩어져 죽는다. 생명력, 생명력을 보는 시험이라.’

딱, 딱딱, 딱딱딱딱!

그동안 한 번도 제어되지 않은 적 없던 몸이, 저절로 이를 부딪쳤다.

의지의 문제가 아닌, [죽음] 그 자체가 목전까지 다가오자 몸 자체가 움직이는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무조건 죽는다.

‘그럴 순 없지. 생명력을 보는 시험이라면, 생명력을 활성화시키면 된다.’

그리고 생명력을 활성화시키는 데에는, 수행만큼 좋은 게 없다.

‘영기도 희박한 공간이지만, 차라리 잘 되었어.’

이런 공간이라면 오히려 서휼의 눈이 닿지 않는다.

즉, 얼마든지 제대로 수련할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영기가 없다는 것 역시 문제되지 않았다.

우우웅!

‘만상인연도.’

츠츠츳!

내 앞에 기령의 모습이 떠올랐다.

만상의 인연을 담은 무수한 기령의 군체는, 내 의지에 따라 다시금 ‘나’의 모습으로 변했고.

‘나’는 곧 내 몸에 겹쳐졌다.

즈우우웅!

기령의 체내에 저장되어 있던, 막대한 영기가 내 몸으로 전해져 왔다.

애당초 선수혈합이 생존 경쟁이었다는 걸 들은 순간부터, 최후의 100명 안에는 충분히 들어갈 수 있다고 여겼다.

월수궁무록으로 기척을 지운 채, 만상인연도의 영기만을 흡입하며 버티기만 하면 끝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혹독한 허무의 환경을 볼 때, 대다수의 요족은 허무의 공간 속에서 버티는 데에만 모든 생명력과 원기를 소진할 터였다.

월수궁무록을 쓸 필요도 없다.

만상인연도의 영기로, 차근히 수행을 하며 시간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우우웅!

나는 그동안 서휼이 의심할까 봐 제대로 수련하지 못했던 창령성광오채대법의 수행을 몸으로 가져왔다.

서휼은 창호자와도 아는 사이였기에, 창령성광오채대법을 수련하는 게 들키면 곤란할 확률이 높아서 지금껏 그의 공법은 수련하지 않았다.

‘6개월 동안, 사흘에 한 번씩 서휼이 불러내서 수련 진도를 확인하는데, 창령성광오채대법은 초기에는 몸의 변화가 심해서 바로 알아차릴 수 있으니 조심해야 했지.’

하지만 규련의 말에 의하면, 어쨌든 이 비지 속에서는 4개월 정도의 시간은 벌 수 있는 모양이었다.

‘4개월이면, 지난 생에 저장해 놓았던 창령성광오채대법의 기혈을 끌어올 수 있다.’

기(氣)는 곧 혼(魂).

그렇기에 내 혼에 매달린 법보와, 법보에 저장된 만상인연도의 수행이 시간을 넘어서 내게 나와 함께 넘어올 수 있었다.

기(氣)는 곧 생명(生命).

극도로 순수한 영기는, 생명력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영기를 극한으로 밀집시켜, 생명력을 극대화시키는 창령성광오채대법의 수행 역시 회귀 후로 가져오는 게 가능했다.

우득, 우드득!

막대한 생명력이 전신을 맴돈다.

“끄으읍!”

지난 생에 창령성광오채대법을 수련하며 겪었던 고통들이, 짧은 시간 안에 압축되어 내 뇌리를 강타한다.

“…!”

뇌가 얼얼해질 정도의 고통!

그러나 나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내며, 전신을 들이치는 생명력을 받아들였다.

막대한 생명력이 전신을 회전하며 기혈을 끌어올렸고, 지난 생에 만들었던 금강불괴의 육신을 다시 재현하기 시작했다.

우드드득!

나는 전신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을 겪으며 이를 악물고 수련을 계속했다.

전신이 으스러지는 것 같았지만, 그 격통은 최하층의 한기와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버틸 수 있다.’

나는 봉명주 최하층에서, 생명력으로 수행을 이어 나가며 미소지었다.

‘이대로라면, 끝까지 버틸 수 있어!’

전신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에 휩싸였지만, 도리어 고통이 주는 열기에 힘입어 한기를 몰아낼 수 있다.

선수혈합에서 끝까지 버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며, 나는 시간을 보냈다.

* * *

어느덧 팔에 기록된 숫자는 빠르게 줄어 나갔다.

며칠만에 만삼천에 달했던 요족들은 오천 명까지 줄어 버렸다.

그리고, 나는 왜 규련이 4개월 안에 결판이 날 거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군, 수가 줄어들수록, 어둠이 강해진다.’

이전보다 더 춥고, 더 황량해졌다.

허무의 층에 있는, 무(無)가 그 자체로 형상화되어 나를 잡아먹으려 드는 것 같았다.

‘아직까진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수가 더 줄어든다면 어둠이 더 강해질 것이다.’

그때가 된다면 창령성광오채대법을 수련하며 끓어오르는 생명력보다도, 몸에서 빠져나가는 생명력이 더 많아질 터였다.

‘과연 버틸 수 있을까.’

나는 이를 악물고 추위에, 이 죽음에 저항하며 버텨 냈다.

* * *

시간은 매우 느리게 지나갔다.

아무런 빛도, 열기도 느낄 수 없이 어둠 속에서 둥둥 떠다니며 버티기만 몇 개월째.

‘이제… 200명이군.’

추위와 어둠은 더더욱 진해졌다.

이제는 숫제 어둠이 눈코입으로 기어들어오는 것 같다.

혈관 자체에 피 대신 어둠이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다행히도 나는 만상인연도를 통해 다른 이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자원을 지닐 수 있었다.

버티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그리고, 마침내 규련이 말했던 4개월째.

“후우우….”

숨을 내쉬는 것만으로, 입에서 빛무리가 뿜어지며 어둠 속으로 흩어진다.

‘죽는다, 더 버티면 죽는다.’

정말로 죽음이 목젖까지 다가온 느낌이었다.

버티는 요족이 줄어들수록 어둠과 한기는 강해졌고, 이제 남은 요족의 수는 103명.

3명만 더 떨어지면 된다.

하지만 영혼까지 얼리는 듯한 이 한기에, 나는 선수혈합이고 뭐고 그냥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마음이 피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감히 의지력 같은 것으로 극복하기 힘든 추위다.

뿌드득, 뿌드드득!

나는 이를 갈며, 팔에 표시된 숫자에 정신을 집중했다.

백삼이었던 숫자는 다시 백이로 줄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이 정신 나간 추위는 지나간다.

다시 나갈 수 있으리라.

* * *

백일(百一).

이제 한 명만 더 가사 상태에 빠지면 선수혈합은 종료였다.

그러나 나는 그 숫자를 보며 자조섞인 웃음을 지었다.

‘생각 외로, 내 생명력이 질기군.’

아니, 내 생명력이 질기기보다는 만상인연도 덕이리라.

만상인연도로 창령성광오채대법을 수련하며 버티는 중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창령성광오채대법으로도 막기가 힘들 정도로 춥다.

단순히 음(陰)의 속성이 아닌,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허무의 공간이었기에 더더욱 버티기가 힘들었다.

정신 자체가 바싹 말려지는 느낌이었다.

‘4개월이 아니라 4년 같군.’

하지만 그래도 이제 곧 끝날 것이다.

나는 백일(百一)이라는 숫자를 보며, 빨리 일(一)이 사라지기를 바랐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친내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백(百).

‘드디어!’

선수혈합이, 끝났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뭐지?’

선수혈합이 끝나면 2층으로 전송된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아직 아무 일도 없는 거지?

분명히 규련이 말했다.

숫자가 백이 되면 선수혈합이 끝난다고.

‘그래, 조금 시간이 걸리는 것일 거야.’

뭔가 문제가 있을 리가 있겠는가.

나는 추위 속에서, 차분히 전송을 기다렸다.

* * *

열흘이 다시 지났다.

‘뭔가 이상하다.’

이럴 리 없다.

왜 선수혈합이 끝났는데 아직도 이곳에 있다는 건가?

‘서휼의 농간인가?’

서휼이 선수혈합에 참가한 요족들을 모조리 골로 보내 버리려 조작을 했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서휼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아니면 내가 추위에 정신이 나가 버려서 시간 감각이 이상해진 건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정신이 너무 또렷하다.

‘내가 미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금의 정신머리로 몇 번이고 생각해 봐도 서휼이 이럴 이유는 없다. 그리고 선수혈합에 참가하기 전 6개월간, 내 나름대로 알아본 바 선수혈합은 매번 공정하게 치러진 경합이다. 서휼이 개입할 여지도 없어….’

나를 죽이려고 일부러 이 짓을 하는 건 아닐 터였다.

내가 아무리 의심스럽다지만, 서휼의 성격이라면 최대한 이용하다가 죽게 만들지, 이렇게 아무 쓸모도 없이 죽이진 않을 터.

‘뭔가 잘못됐다.’

나는 추위에 떨며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다시 한 달이 지났다.

‘어쩌면… 극악의 확률로 하필 내가 참가했을 때 허무의 층에 이상이 생긴 건가?’

내가 미친 것도 아니고.

서휼이 나를 그냥 한번 심심해서 죽여 보기로 작정한 것도 아니라면.

그것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그것보다, 나는 만상인연도에 축적한 생명력으로 창령성광오채대법을 수련하며 버틴다지만, 다른 요족들은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선수혈합이 끝날 때가 된 지 더 2개월이 흘렀다.

그런데도 숫자는 아직도 백을 가리키고 있었다.

‘역시, 선수혈합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다. 제길, 이렇게 서은현 냉동식품이 되어 죽을 순 없어.’

나는 죽을 수 없다는 일념으로, 어떻게든 이곳에서 탈출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빠득, 빠드드득!

무형검을 꺼내 주변으로 휘둘러 보았다.

하지만 영기 자체가 없는 구역인 탓인지, 뭔가를 베기도 힘들었다.

허공에 떠 있는 상태로 영기를 끌어모아 분사하며 어둠의 공간을 돌아다녀 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광활하다.

그리고 춥다.

‘제발 선수혈합을, 이 허무의 층의 어둠을 발동시키는 뭔가를 찾아낼 수만 있다면….’

나는 이를 악물고 어둠 속을 헤쳐 나가며 방법을 찾았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 * *

‘….’

우득, 우드득….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려 해도 전신이 빠득거린다.

‘이대로는… 안 된다….’

뭔가 심각한 이상이 생긴 게 틀림없다.

선수혈합에 참가한 요족들이 전부 최하층에 봉인이라도 된 것일까?

1년째 아무런 희망도 찾지 못한 채.

나는 허무의 공간을 둥둥 떠다녀야만 했다.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할 텐데….’

이대로라면 출구를 찾거나 바깥으로 나가는 건 둘째치고.

어둠에 먹혀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추워서, 너무나도 아무것도 없어서 죽을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허무의 공간을 떠다니며 고민할 때였다.

투욱!

팔짱을 끼려던 순간, 내 품속에 있던 뭔가가 내 손을 스쳤다.

‘이건….’

작은 영석이었다.

나는 영석의 정체를 기억하고는 영석을 바라보았다.

지난번 요족 상인에게서 샀던 광한결(廣寒訣)이었다.

‘가장 기초적인, 요수공법의 기본이라 했나.’

나는 문득, 창령성광오채대법과 광한결을 함께 수련해 보기로 했다.

‘허무의 층을 벗어날 방법을 찾을 수 없다면, 구조될 때까지 최대한 버텨 보기라도 하는 수밖에.’

나는 허무의 층을 벗어날 방법을 찾는 대신, 최대한 버티는 방향으로 진로를 정했다.

‘버티자, 어떻게든 버티자. 서휼이 수작을 부렸든, 봉명주에 문제가 생겼든, 최대한 버티자!’

우웅!

이를 악물고 영석에 박혀 있는 요족어를 읽어내리며 광한결의 구결대로 영기를 운용한다.

우우웅!

처음에는 조금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허무의 공간에서 1년이 다시 지났다.

나는 영기를 운용하며, ‘요수공법’이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었다.

‘요수공법은 곧 폭발이다.’

호풍응룡변을 익힐 때도 느꼈던 것.

내단, 요수들은 요단 안으로 영기를 밀집시킨 후 폭발시킨다.

그렇게 폭발을 반복하며 점차 요단의 그릇을 넓히고, 그릇의 성장에 따라 더더욱 많은 기를 흡입하여 성장해 간다.

그것이 모든 요수공법의 기반이었다.

하지만 나는 광한결을 읽어 내려가며, 호풍응룡변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공법인지 알 수 있었다.

‘서휼 녀석, 호풍응룡변 같은 폭탄을 나한테 익히라고 던져 줬던 건가?’

모든 요수공법의 근간은 다음과 같다.

천지영기는 모두 음양(陰陽)이 태극(太極)을 그리며 회전한다.

그렇기에 영기의 본질을 보는 요족의 눈으로 볼 때 삼라만상이 곧 태극으로 보이는 것.

그리고 요수공법은, 이러한 태극을 요단 내에서 강하게 회전시킨 후, 그 태극을 강하게 부딪쳐서 폭발시키는 것이 핵심이었다.

음양은 서로 부딪히며 폭발하지만, 폭발함과 동시에 조화를 갖추어 순식간에 안정되기에 요수공법은 익히면 고통스러울지언정 그 안정성은 보장되었다.

하지만 서휼이 줬던 호풍응룡변은 태극의 순환에 대한 구결은 없고, 무작정 요단을 폭발시키는 방법만 수록된 것이었다.

‘빌어먹을 용가리 놈.’

나는 속으로 서휼을 욕하며 계속 광한결의 구결을 반복해 갔다.

3년이 더 흘렀다.

이제 어둠 속에서 5년을 보냈다.

요수공법은 정말로 단순했다.

연기기 수준에서는 미약한 기를 순환시키며 폭발시킨다.

축기기 수준에서는 자신의 생명력을 요단과 연동시켜 더더욱 강렬하게 태극을 순환시킨 후 부딪혀서 폭발시킨다.

결단기 수준에서는 인족의 금단과 같아질 정도로 튼튼해진 요단을, 몇 번이고 폭발시켜 재구성하며 기를 정련한다.

태극을 순환시켜서 부딪히게 하여 폭발시킨 후.

그 과정에서 정련된 순수한 영기.

즉 생명력을 끊임없이 몸에 채워 가는 것.

그것이 모든 요수공법의 본질이었다.

인족이 음양의 흐름으로 법화단전을 만들고, 다시 원영기에 이르러 음양신을 수련하는 것과 달리.

요족은 처음부터 음양의 흐름만을 무식하게 고집하고 원영기에 이르러 원영을 다시 음양의 흐름으로 순환시키는 것이었다.

‘미쳐 버릴 정도로 복잡한 구결을 외고, 제사 의식을 치르고, 하늘의 시운을 읽어야 했던 천족 공법에 비하면… 차라리 본능에 맡긴다고 할 정도로 간단하군.’

아니, 어쩌면 요족들은 본능에 맡겨서 요수공법을 익히는 게 맞는 것일지도 몰랐다.

본래 지성이 없는 들짐승들이, 영성을 얻어 영기를 보는 시야를 얻은 후.

자신들의 시야에 따라 체내의 음양을 순환시킨 후 폭발시킨다.

그만큼 단순하니 오히려 지성이 없었던 요수들이 익힐 수 있는 공법이었던 것이리라.

쿠웅!

나는 단전에서 폭발하는 영기를 느끼며 눈을 찌푸렸다.

‘만만찮군.’

비록 인족을 포함한 천족의 공법처럼 복잡하지는 않고 단순했으나, 그게 익히기 쉽다는 뜻은 아니었다.

요수공법은 연체공법처럼, 아니, 어떤 면에서는 연체공법보다 더 끔찍한 고통을 동반했다.

매번 단전에서 영기를 폭발시키는 게 수행의 일환이고, 결단경 요족은 요단 자체를 폭발시켜서 수행해야 하니만큼 매 순간 단전이 박살 나는 고통을 이겨 내야 하는 것이었다.

다시 5년이 지났다.

허무의 층에서 10년!

‘도대체 얼마나 시간을 낭비한 건지, 가늠이 안 가는군.’

본래대로라면 영기가 충만한 바깥에서 원영의 경지를 되찾았어야 할 시간!

하지만 나는 허무 속에서 겨우겨우 생존을 도모하며 요수공법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있을 뿐이었다.

꾸웅!

나는 단전이 으스러질 듯한 고통을 느끼며, 광한결과 창령성광오채대법을 동시에 수련했다.

어느덧, 허무의 층의 한기가 고통의 열기에 다시금 밀려나기 시작했다.

두쿵, 두쿵, 두쿵!

‘심장 같군.’

요수공법을 수련하고 있자니, 마치 단전에 심장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았다.

심장이 한 번 뛸 때마다 동맥을 통해 피가 전신으로 뿜어졌다가, 정맥을 통해 심장으로 돌아오듯이.

단전의 음양이 폭발할 때마다 그 폭발력이 전신을 쓸고 지나가며 몸을 단련시키고, 다시 단전 안으로 응축되며 정순한 생명력이 되어 몸을 회복시킨다.

‘생명은, 곧 폭발….’

두쿵, 두쿵, 두쿵!

광한결과 창령성광오채대법이, 폭발을 일으키며 내 생명을 끌어올린다.

그리고 어느 순간.

파아아아앗!

나는 내 내단을 축으로, 광한결과 창령성광오채대법이 합일(合一)하는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이건….’

창령성광오채대법이 진화한다.

아니, 아니다.

본래 연체공법이란 요수공법을 열화시킨 하위공법.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요수공법의 운행을 설명한 기초 요수공법인 광한결의 구결이 내단 안에서 운용되며, 열화판이었던 연체공법이 요수공법과 똑같은 조건이 되어 그 본질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게… 창령성광오채대법의 진짜 위력…!’

부우웅!

우득, 우드드득!

춥다.

너무나도 춥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내 몸 곳곳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깨달았다.

뿌득, 뿌드드득!

환골탈태!

오기조원에 이르며 천지영기가 내 몸이 어떻게 해야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는지 알려 주었듯이.

이번에도 천지영기가 다시 한 번 어떻게 해야 내 몸이 더더욱 올바르게 진화할 수 있는지 그 길을 알려 주기 시작했다.

뿌드드득!

‘이건….’

영기(靈氣)가 눈 앞에서 회전한다.

음양(陰陽)이 이지러지며, 체내로 들어가 이중나선(二中螺旋)을 그렸다.

‘아아….’

음양은 이중나선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로부터 쌓여 온 육신의 비밀을 파헤치며 올바른 진화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뿌드드드득!

나는 그 방향에 따라 육체를 맞추어 갔고, 마침내 환골탈태를 끝마쳤다.

그와 동시에, 나는 내 의식이 특정한 형(形)을 자연스럽게 취하는 것을 느꼈다.

‘그렇군.’

주변을 원형으로 뒤덮던 의식 영역이, 완전한 인간형(人間形)으로 화하여 나를 덮는다.

‘인간 역시 제사법을 찾아내어 천족이 되기 전까지는, 일종의 요수였다는 건가.’

꾸구국….

인간으로 변한 의식과 동시에 몸을 움직이며 주먹을 쥐자,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정도로 막대한 힘이 주먹에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후우우….’

드디어, 요수공법의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다.

그와 동시에 나는 김영훈에 대한 경외감에 휩싸였다.

‘연체공법도 접하지 않은 무림인의 몸으로, 무공의 연원을 거슬러가 인간의 요수공법으로 가는 길을 찾아냈단 말인가?’

한때 김영훈이 등봉조극 너머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분투하며 찾았던 ‘또 다른 길’.

그것은 바로 요수공법이었던 것이었다.

서란의 서고에서 찾았던, 진짜 짐승들을 위한 요수공법이 아닌, 인간을 위한 요수공법!

그것이 김영훈이 무공을 진화시키며 찾아낸 또 다른 길이었던 것이다.

‘허, 결국 그 길은 제가 다다르게 되었군요.’

난 그 당시 회차의 김영훈을 떠올리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치이이….

‘여기까지인가보군….’

나는 환골탈태를 마치고, 전신에서 빠져나가는 생명력을 보며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환골탈태를 하며, 요수공법의 진의를 깨달은 건 좋았다.

하지만 환골탈태를 하며 체내에 있는 영기를 거의 다 써 버렸다.

만상인연도에 남은 생명력도 거의 없었다.

천지영기가 충만한 곳이었다면 바로 영기를 보충할 수 있었겠지만, 이 절대 죽음의 영역에서는 그런 것이 불가능했다.

‘이렇게 어이없게 죽는 건가….’

나는 점차 눈이 감겨 오는 것을 느끼며 웃었다.

‘뭐, 그래도… 김영훈이 발견했던 다른 길이 뭔지, 확인은 했으니….’

어쩌면 그렇게까지 허무한 죽음은 아니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그것이 내 열여섯번째 회귀인 줄 알았다.

* * *

[십 년을 버텼군.]

“…?”

타닥, 타닥….

나는 모닥불 앞에서 눈을 떴다.

‘여긴… 어디지?’

어둡다.

춥지는 않았지만, 이곳 역시 어두웠다.

하지만 뚜렷하게 잘 보였다.

하지만 ‘빛’이 없다!

이상하다.

눈 앞이 이렇게나 잘 ‘인지’되는데, 정작 ‘빛’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나 뚜렷하게 느껴진다.

‘뭐지, 이건?’

기이하다.

생물은 ‘빛’을 통해 사물을 인지한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빛’이 없는데도 주변의 모든 것이 인지되는 느낌이었다.

눈앞에는 모닥불이 있다.

하지만 모닥불은 ‘빛’이 없었고, 그저 ‘열기’만 있을 뿐이었다.

모닥불의 주변에는 수많은 조각상들이 세워져 있었는데, 하나같이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예술 작품들이었다.

내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할 때였다.

[앉게. 십 년을 견뎠으니, 본좌와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은 십 초뿐일세. 물론 진짜 십 초만 대화하면 서로 아무것도 못 건질 테니, 본좌가 시간을 왜곡시켜 일 초가 일 다경으로 흐르게 했네.]

“무슨….”

앞에 ‘누군가’가 앉아 있다.

나는 [그]를 보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 끄으으으윽!”

눈알이!

눈알이 갑자기 기화(氣化)한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상대를 ‘인식’하려 하자마자 눈알 자체가 증발해서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다.

아니, 눈알뿐이 아니다!

전신이, 전신이 기화한다!

‘주, 죽는….’

[앉게.]

다음 순간.

[그]가 앉으라고 하자마자 기화하던 육신은 다시 가라앉았다.

그리고 나 역시 어느새 주변의 조각상 중 한 곳 위에 다소곳이 걸터앉은 자세가 되어 있었다.

[본좌를 직시하지 말게. 본좌의 본체라면 자네 격에 맞추어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본좌는 본체가 남긴 잔념, 분체이기에 오히려 격을 조절하지 못해 죽을 수 있다네.]

“허, 허억… 허억…!”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본좌는 해방(解放)의 주인이니, 본좌를 직시한다면 자네를 이루는 본질이 모두 자네라는 틀에서 해방되어 기화해 소멸할 것이네.]

“다, 다, 당신은….”

머리가 어지럽다.

눈앞의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짐작하자마자, 갑자기 의식이 무너질 듯이 흔들렸고, 방향 감각이 사라지며 당장이라도 바닥에 처박힐 것만 같다.

10년의 세월 동안 허무 속에 처박혔던 고통은 순식간에 잊혔고, 새로운 공포와 경외, 숭배감이 뇌리에 덧칠된다.

[본좌의 이름은 봉명(奉命). 자네가 들어온 봉명추(奉命鎚)의 제작자라네.]

눈앞의 존재는, 최소 진선(眞仙)이다.

[자네와 이야기하기 위해 십 년의 세월을 왜곡하여 자네를 이곳으로 불러들였다네. 그럼 어디 얘기를 나눠 보겠나, 종명자(終命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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