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수선전-170화 (170/185)

이곳이 지옥이라도 (4)

그 손은 거대했다.

말 그대로 손 하나의 크기가 산맥 하나를 뒤덮을 정도.

그리고 그 거대한 손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붉은 광채가 퍼져 나가며 하늘을, 대지를, 천지간 모든 것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개전(開戰)은 빠르게 시작되었다.

“으오오오오오!”

현운이 결인을 맺자, 그의 등 뒤로 현신처럼 네 개의 원영이 나타났고, 그에게도 흑룡의 그림자가 들러붙었다.

그의 수행이 폭증했고, 그는 폭증한 수행을 바탕으로 법술을 펼쳤다.

츠츠츠츠츳!

사방에 물안개가 깔리는 듯하더니, 현운의 목소리가 마치 귓가에서 들리듯 상세하게 들린다.

아무래도 이 물안개가 그의 목소리와 의도를 더욱더 명확하게 전달시키는 듯했다.

현운의 지휘에 따라, 남아 있는 수만의 인족 패잔병들이 힘을 쓰며, 산맥 너머에서 결계가 있는 곳까지 다가오는 왼손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쿠궁, 쿠구구구궁!

원영기, 천인기 수사는 물론이고, 사축기 급의 전력인 나와 오현석, 그리고 몇몇 사축기 사령관들 역시 전력을 다해 공격을 한 결과

쉬이이….

존자의 왼손은, 전신에서 연기를 흘리며 잠시 자리에서 멈춰섰다.

‘통한… 건가?’

저 존자의 왼손이란 것.

저것은 당최 심상을 읽기가 힘들었다.

일반적인 존재들의 심상과는 아예 구조 자체가 달라서 파악이 힘들다.

하지만 어쨌든 존자의 왼손에는 그럭저럭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한 상처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통한다! 존자의 본체가 아니니만큼, 공격하면 부상을 입는다! 모두 결사의 각오로 임하면 질 수 없단 말이다!”

현운이 필사적으로 소리 지르며 아군의 사기를 끌어 올렸고, 다시금 그의 지휘에 따라 존자의 왼손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광한옥 결계는 합체기 급의 일격도 막을 수 있다! 아무리 존자라지만, 손 하나만 온 시점에서 사실상 합체기 태수 정도로 힘이 떨어졌을 것이야! 이 안에서 버텨 가며 일격을 먹여라!”

펄럭, 펄럭!

뒤쪽에서 현운이 소환한 물로 된 인형이, 커다란 검은 깃발을 휘둘렀다.

그러자 동시에 아군 전원의 귓가로 명령이 들렸고, 우리는 현운의 명령에 따라 대열을 재정비했다.

“정도 수사들 앞으로!”

척, 척, 척!

정도공법을 익힌 수도자들이 앞으로 나가, 각기 파사현정의 힘을 지닌 법술을 존자의 왼손에게 뿌려 대었다.

쿠구구구구!

쇄성기 존자의 왼손 역시 반격을 하려는 듯, 결계 바깥에서 마기를 끌어모으고 있었다.

“존자가 공격한다! 마수들은 앞으로 나서라!”

마도공법을 익힌 마수들이 앞으로 나서 방어진을 펼쳤다.

번쩍!

핏빛이 폭발한다.

그와 동시에, 어마어마한 충격이 결계진의 위쪽을 때렸다.

쿠릉, 쿠르르릉!

결계진은 단박에 무너지기라도 할 듯 미친 듯이 일렁거렸으며, 안쪽에 있는 마도 수사들 역시 그 충격파를 걷어 내는 데에만도 여념이 없었다.

촤륵, 촤르르륵!

무엇보다 절망적인 것은….

“노, 놈이 재생한다!”

“틈을 주지 마라!”

녀석의 표피를 뒤덮은 산호들이 꿈틀거리며, 점차 우리에게 공격을 맞은 부위가 다시 돋아나기 시작했다.

꿈틀, 꿈틀….

동시에 녀석의 손 곳곳에 돋아난 눈알이 뒤룩거리더니 우리 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오현석이 식겁하며 소리쳤다.

“모두 눈을 마주치지 마시오!”

그 다급한 말에 현운 역시 소리를 높였다.

“놈이 멸혼음주(滅魂陰呪)를 쓴다!”

쿠구구구!

그와 동시에 존자의 눈알들에 핏빛이 모이는 듯하더니, 이쪽으로 쏘아져 온다.

“끄아아아아! 아아아….”

“아아아….”

몇몇 수사들은 불운하게도 찰나 간 저 존자의 눈알과 눈이 마주쳤고, 나는 옆에서 전투하던 수사들의 혼백이 그대로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저게 김연이 당한 그 술수인가?’

방금 죽은 수사들은 천인기 수사들이었다.

법술에 직격당하면 천인기 수사조차 여지없이 죽는다!

우우웅!

점차 왼손 쪽에서 뿜어지던 적광이 잦아들었다.

그제야 우리는 다시금 왼손을 쳐다보았다.

쉬이이이….

우리가 잠시 눈을 돌렸던 그 짧은 틈을 통해, 왼손은 그새 부상을 입은 신체를 전부 재생하고 다시금 마력을 끌어모으는 중이었다.

우우웅!

하늘이 불길하게 타오른다.

붉은빛의 하늘이 기이하게 일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모두 방진을 짜라!”

현운이 깃발을 휘두르며 명령을 내렸고, 수많은 수사들이 서로 뭉치며 방진을 짜기 시작했다.

‘잠깐, 저거…!’

그때, 나는 무언가 수상한 것을 눈치챘다.

“조심하시오! 저건 하나의 법술이 아니외다! 저 법술 뒤에 하나의 법술을 교묘히 숨겼소!”

촤라라라락!

백란축성문의 힘이 사방으로 퍼지며, 맑은 축복의 힘을 주변에 덧씌웠다.

“저주! 놈이 저주를 쓰려 하고 있소!”

느껴진다!

저주의 극의에 다다른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저 너머에서 느껴지는 진득한 악의의 힘이!

오오오오오!

일렁이는 하늘에서, 불길이 뭉치며 화염의 비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화염의 비는 허공에서 일렁이며 마력을 영력으로 바꾸었다!

마기가 영기로 전환되는 신통!

그 불의 비들은 영기로 된 결계진을 후려치며, 마기로 된 공격들보다 더더욱 좋은 효율로 결계진을 뒤흔들었다.

현운의 지휘대로 마도수사들이 앞으로 나서 충격파를 막아섰다.

그들은 차분히 충격파를 막아 낸 후, 내 경고에 따라 뒤이어 따라오는 저주 공격 역시 거뜬히 막아 내었다.

그때였다.

찌이이잉!

나를 포함하여, 오현석, 현운 등.

모든 수도자들이 일시에 비틀거렸다.

‘이게 무슨….’

나는 전신을 감싸는 기이한 마기를 통해 알아차렸다.

‘뭣… 2개가 아니라 3개였다고…?’

물리 공격 뒤에 저주를 섞어 보내고, 그 저주 안쪽에 또 다른 공격을 하나 더 섞어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공격은 결계진의 결계를 교묘히 돌파하여, 누구에게도 걸리지 않고 수도자들에게 도달했다.

나는 이 공격의 속성을 알 수 있었다.

‘정신 공격이다…!’

찌이이잉!

나는 어마어마한 격통과 함께, 의식이 저 아래로 침잠하는 것을 느꼈다.

‘제…길….’

정신력의 문제가 아니다.

신통의 구조상, 무조건 한 번은 정신을 잃게 되는 신통이다.

나는 바로 쇄성기 존자가 쓰는 신통의 본질을 알아보았다.

심마(心魔)를 촉발시키고, 그 틈새로 악의를 불어넣어 인간을 완전히 욕망과 악의에 가득 찬 괴물로 만들어 버리는 신통이다,

결국 자기 자신을 마주 보아야만 하는 신통이기에 어떤 존재든 상관없이 한 번은 걸리게 되어있다.

쿠웅!

나는 발을 디디며, 무너지는 몸을 부여잡았다.

‘아니, 아니군.’

몸을 부여잡았다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이곳은… 나의 심상 속.

투명한 도산지옥이었다.

주륵, 주르륵….

내 몸은 도산지옥의 유리검들에 찔려, 피를 흘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핏물은 점차 흐르고 흘러, 어느덧 내 앞의 그림자가 되었다.

그림자가 입을 열었다.

“네가 하는 일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나? 네가 정말 옳다고 믿나? 네가 한 일들에 어떤 가치가….”

그리고, 나는 그림자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이봐, 이봐.”

피식.

웃음이 난다.

심마?

“안 그래도 최근에 우리 얘기해 본 주제잖냐. 아무리 쇄성기 존자의 신통에 당했다고 해도, 조금 참신한 주제를 가져오면 안 되는 거냐?”

“….”

그랬다.

이미 극복한 심마를 한 번 더 불러일으켜 봐야, 그저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어떤 존재든 상관없이 한번은 걸리는 신통.

다시 말해.

어떤 존재든, 한 번‘만’ 걸리면 된다.

퍼엉!

나는 내 마음에 나타난 심마를 밟아서 터트렸다.

“너만 터트리면 끝이란 거군. 오랜만에 다시 만나서 즐거웠다. 잘 가라.”

철퍽, 철퍽….

내 발에 밟혀 터져 버린 심마의 조각이, 사방으로 튀며 꿈틀거렸다.

그리고는 내 심상을 장악하려 마구 버둥거리기 시작하였다.

질척, 질척….

심마, 아니 심마였던 그림자가, 내 심상 전체를 물들이며 오염시킨다.

삽시간에 주변이 더럽고 질척거리는 어둠으로 휩싸였다.

[선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세상은 지옥이다!]

[네 정신 상태를 보라고! 지옥을 살아가는 자의 것이 아닌가!]

[모조리 다 망해 버려도 싸다!]

[존자의 명을 받들자! 존자께서 지옥에 걸맞은 새로운 길을 네게 알려줄 것이다!]

“오호라, 정말 설득력이 높은 세뇌 작업이로구나. 이거 참 무시무시한걸.”

그리고, 나는 등을 돌려 도산지옥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푸콱, 푸콱!

한 걸음을 올라갈 때마다 고통과 함께 전신이 검들에 의해 꿰뚫린다.

그리고 내가 고통을 느낄 때마다 뒤쪽에서 나를 따라오는 질척거리는 악귀들의 속삭임이 들렸다.

[존자께 충성하자!]

[이 세상이 지옥이라면, 오직 지옥의 법도만이 제일 유용한 게 아니냐!]

[약육강식! 강자는 약자에게 무슨 짓이든 해도 된다!]

[너도 강자에게 학대받았던 기억이 있지 않으냐?]

[존자께서 너를 그 강자보다 강인하게 만들어 주시리니….]

저벅, 저벅….

저것은, 내 심마가 아니다.

내 심마를 통해 존자가 내 심상에 불어넣은 타인의 악의들.

그래, 악덕(惡德)이다.

인족들이 마계에서 행해 왔던 모든 악덕을, 존자가 가공하여 내 심상에 불어넣는 작업.

하지만, 나는 악덕들을 마주 보지 않고, 고통을 느끼면서도 말없이 도산지옥의 위를 향해 묵묵히 올라갈 뿐이었다.

등 뒤에서는 질척거리는 고함이 들리며 점차 존자의 술법이 나를 무섭게 압박하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도산지옥의 검을 밟으며 알 수 있었다.

‘내가 밟는 검들은, 모두가 곧 삶.’

그래, 이 투명한 검들 하나하나가 곧 나의 기억들이다.

그리고 기는 곧 의.

계위에 대한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그러한 사실을 알았으니, 한 마디로 바깥의 기와 안쪽의 심 역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게 가능하다는 소리.

‘어쩌면….’

나는 검들을 밟고 올라가며 생각했다.

‘만상인연도란, 결국 내 심상이 반영된 것이었을지도.’

이 검은 곧 고통이자 상처.

하지만 동시에 내 삶의 흔적을 반증하는 역사.

그러므로, 내 역사를 기록했던 만상인연도란….

우우우웅!

이 심상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을지도 몰랐다.

파아아앗!

점차, 내 뒤쪽으로 희미한 인영들이 나타났다.

심상을 통해 내 육신의 기(氣)를 느낀다.

육신의 기의 중심에 있는 금단과, 금단의 안에 잠든 원영.

그 원영이 품고 있는, 삼천 자루의 무색유리검.

그 무색유리검과 연동된 만상인연도가, 역으로 내 심상에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저벅, 저벅, 저벅….

나는 말 없이 산을 올라갔고, 그럴 때마다 등 뒤로 인영들이 계속 생겨나며, 나와 저 질척이는 목소리들의 간격을 넓혔다.

질척이는 목소리들은 만상인연도로 만들어 낸 인영들에게 막혀, 점차 나를 쫓아오는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이봐, 혈음계 존자.”

푸콱, 푸콱….

피를 흘리며 도산의 정상을 향한다.

나는 등 뒤쪽에서 부르짖는 존자의 신통술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맞는 말이다. 나는 분명, 지옥에 살고 있다.”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것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느꼈다.

저벅, 저벅….

푸콱, 푸콱….

“하지만….”

우우우웅!

점차 나와 녀석 사이에 인영들이 많아졌다.

그 수는 가히 세는 것이 불가능하여, 존자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이 인산인해를 뚫고 내게 도달하지 못했다.

푸콱!

나는 전신을 뚫고 들어오는 검들의 감각을 느끼며.

잠시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우우우웅!

그리고,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산!

무색으로 이뤄진 투명한 검들의 도산.

그리고, 무수한 인파로 이뤄진 인간의 산.

이것이, 나의 세계였다.

“…정말로 우리가 사는….”

파아아아앗!

그와 동시에, 만상인연도와 검의 산이 빛을 뿜었다.

그 새하얀 빛은 점차 형을 갖추며, 백란(白蘭)의 형태로 변화하였다.

저주의 극의에 이른 음혼귀주문.

그리고, 내 백란축성문은 그러한 음혼귀주문을 대성하고, 초월한 상태에서 나아간 공법이었다.

어째서 저주에서 나아간 깨달음이 축복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저주와 축복은 결국 한 끗 차이일지도 몰랐다.

저주도 축복도.

지옥도 천국도.

모두가 사실은 한 끗 차이.

그렇다면 그 한 끗이라는 건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파아아앗!

저주로부터 나아간 새하얀 빛에, 저 아래에서 나를 잡으려 헐떡이던 존자의 목소리들.

그 목소리들을 향해, 한 장의 꽃잎이 떨어진다.

그 꽃잎은 등 뒤의 인영들을 지나칠 때마다 점차 수가 많아졌다.

무수한 인연을 거치며 축복은 점차 거대해지고 많아지며.

마침내는 파도가 되어 악의를 덮쳤다.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한 끗은, 분명 사람과 사람이 주고받았던 마음들….

파츠츠츳!

만상인연도로 증폭된 백란축성문이, 새하얀 파도가 되어 어둠을 씻어 내었다.

존자의 신통이 일거에 쓸려 나가며 스러진다.

“이곳이 지옥이라도….”

그 모습은 마치.

시커먼 밤하늘에, 무수한 별들이 풀려나는 것처럼도 보였다.

밤은 분명 어둡지만, 그 안쪽으론 무수한 별들이 채우고 있어 어둡지만은 않다.

사람의 세상 역시 밤처럼 어두운 지옥일지언정.

서로의 마음을 존중할 줄 알고, 소중히 여길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선(善)이었고.

“선의(善意)가 아무 의미 없지 않다. 이곳이 설령 진짜 지옥일지언정, 그 선의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분명히….’

나는 아래쪽에서 나를 뒤따르는 만상의 인연들을 내려다보았다.

‘이곳에 있으니까….’

나는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더더욱 높은 곳을 향해 걸어나갔다.

파아아앗!

그와 함께, 정신이 번쩍 들며 나는 현실로 되돌아왔다.

“후우….”

나는 숨을 들이쉬며 허리를 폈다.

잠시 기절했었다.

그리고 그 짧은 찰나, 어느새 존자의 왼손은 결계 지척에 도달하여 힘을 끌어모으는 것이 보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수많은 인족 패잔병들은 존자의 술법에 당해 정신이 침식되는 중인 것인지.

모두 머리를 싸매고 거품을 물며 자리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애초에 내가 아니라면 극복하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했을 정도의 것이니, 이들이라면 쉽지 않을 터였다.

우우웅!

파앙!

나는 존자가 내 몸에 건 법술을 완전히 파해해 버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백란축성문의 기운이 몸에서 흘러나오며 존자의 술법을 역전시켜 버렸고, 존자의 왼손은 술법이 역전되자 잠시 힘을 끌어모으는 것을 멈추고 몸을 떨었다.

나름 회심의 비술이었던 듯, 한 사람이 법술을 떨쳐 내니 그 반동을 조금은 받는 모양.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지었다.

“이봐, 혈음계 존자.”

우우웅!

전신에 피어오른 백란축성문이, 점차 사방으로 번지기 시작하였다.

“방금 쓴 그 비술… 실패하면 반동이 조금은 있나 보지?”

그렇다면.

“이곳에 있는 모든 인족이, 심마를 극복하고 네 비술을 극복하면, 그 조금이 쌓여 너도 꽤 타격을 입을 것 같은데….”

파아아앗!

전신에서 피어난 백란축성문이 사방팔방으로 퍼졌다.

우우웅!

그와 동시에, 주변으로 수많은 희뿌연 기령들이 나타나며 백란축성의 기운을 증폭시켰다.

삽시간에 사방팔방이 축복으로 가득 차올랐고, 무수한 백란들이 사람들의 머릿속으로 하나둘 들어간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존자가 몸을 진동하기 시작했다.

존자의 왼손은 심상을 읽기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나는 대강 녀석이 격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꾸우우웅!

녀석이 다시금 일격을 쏟아부었다.

결계가 벌벌 떨리고, 그 충격파에 전신에서 피가 쏟아졌지만 나는 웃었다.

“화를 내는 걸 보니, 맞나 보군.”

파아아앗!

저주의 반대는 축복이다.

음혼귀주문으로는 상대에게 저주를 걸어,

저주인형, 고통 공명, 부식, 상처 전이 등 다양한 술법을 쓸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저주의 반대인 백란축성문은 어떤 효과를 지녔는가.

효과는 두 가지였다.

힘의 증폭, 그리고 정신의 인도(引導).

백란축성의 축복으로, 사람의 정신을 더더욱 올바른 곳으로 인도하여 정신을 회복시키고, 인간의 정신을 강화하며, 정신 공격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이것은 내 개인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닌, 집단 전체에게 가능한 것이었으며.

파아아아앗!

만상인연도가, 내 축복을 증폭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효과는 지금 극대화되는 중이었다.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그래도 네 덕에 확실히 백란축성문의 효용을 더 잘 알게 되었다, 존자!”

백목련의 파도, 그 중심에서.

나는 존자를 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만상인연도, 백란축성문. 이 두 가지가 있는 한… 내 정신은 무적(無敵)이다.”

쿠구구구구!

다시금 존자의 왼손이 일격을 날렸다.

나는 피를 한 움큼 토하며 충격파에 잠시 몸을 낮췄다.

‘결계가 버텨 줄 때까지, 이들이 일어날 수만 있다면….’

존자의 비술을 반전시켜, 존자의 왼손에게 상당한 타격을 줄 수 있을 터였다.

그때였다.

우우우웅!

“…?”

주변에 쓰러진 이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으…아아아….”

“끄…아아….”

‘이 자들….’

나는 눈을 찌푸렸다.

모두가 눈에서 붉은 안광이 깃들었다.

존자에게 조종당하고 있다!

“정말, 존자께서도 참 가지가지 하시는구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차분히 힘을 끌어올렸다.

쿠구구구구구!

사방에서 수많은 천인기와 원영기, 그리고 사축기 급의 수사들이 힘을 끌어올리며 나를 압박한다.

존자의 조종에 조종당하며, 내 백란축성의 힘을 등대로 조종에서 빠져나오려 노력하는 중이었기에.

전부 전력을 드러내고 싸울 수는 없으리라.

그렇다면….

파아아앗!

모두가 백란축성문에 의해 확실하게 정신이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될 뿐.

나는 이들에게서 버티기만 하면 된다.

“버티는 건 내가 제일 잘 하는 거라서 말이지.”

우우웅!

나는 금단에서 그동안 소중히 보관해 두었던 것을 꺼냈다.

쿵, 쿵, 쿵, 쿵!

삼천 자루의 무색유리검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주변에 꽂혔다.

“그럼 어디….”

나는 저물도를 펼쳐, 그동안 모아 두었던 백홍주를 꺼내 한 모금 마셨다.

부우웅!

무색유리검들이 진동하며 나와 영혼 깊숙이 연동된다.

“목숨을 걸어 볼까.”

나는, 이번 생에서 처음으로 본명법보를 꺼내 들며 자세를 잡았다.

무형검이 무색유리검에 깃든다.

본래 무색유리검은 유리로 만들어졌기에, 그 강도도 역시 유리나 다름없었다.

물론 결단기 수사의 단화로 법보로 제련하며 조금 단단한 유리 정도로 올라갔지만, 그뿐이었다.

하나, 서 장군 시절의 1,000년은 금단을 통한 제련이 제대로 되지 않아 빼더라도.

이번 생의 100년.

그 시간 동안은 끊임없이 단화로 제련하는 데에 힘을 썼다.

그 결과, 본래 유리 정도의 강도를 지녔던 무색유리검은, 이제는 청동검 정도의 강도를 지닌 법보로 성장하였다.

청동검으로 비교하자면 굉장히 약했지만, 애초에 무색유리검의 진가는 유리검에 새겨진 회로들이 발하는 특수 능력이었기에 별 상관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예전처럼, 조심스럽게 쓸 필요가 없다.’

잘못 휘두르면 깨져 버리는 유리와 달리, 청동검 정도의 강도만 되어도 내가 무형검을 덧씌울 때에 훨씬 수월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전력의 수직 상승으로 이어진다.

쉬릭, 쉬리릭!

무색유리검들이 무형검을 씌운 채, 나를 중심으로 회전한다.

그 회전에 공기가 진동하며 살이 떨려 왔다.

무색유리검들은 전부 내 몸과 떨어져서 회전하는 것 같았으나, 실상은 무형검으로 인해 내 몸과 이어져 있다.

그렇기에.

“월수궁무록.”

슈팟!

무색유리검들이 일제히 월수궁무록을 사용하자, 나를 노리던 수도자들이 일제히 의아해하며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인지를 베어 수도자에게서 도망치던 무공.

그 무공은 나에 의해 점차 진화하며, 내가 수도자가 되고, 무형검을 얻어 계위를 가르며, 계위를 보는 눈을 얻게 됨에 따라 본래의 성능을 초월해 버리게 되었다.

부웅!

공간의 틈새 그 자체에 숨는다.

그리고 그 틈새의 사이에서 내게 향하는 세계의 흐름 그 자체를 베어 낸다!

오직 원영기의 시야를 가지고, 무형검을 펼치는 나만이 펼칠 수 있는 극한의 극한!

사축기 수사들은 그나마 얼핏얼핏 감지는 되는 건지 내가 있는 곳을 향해 공격을 날리기는 했으나, 정작 한두 호흡을 늦게 나를 발견했기에 공격은 절대로 맞지 않았다.

물론 광역기를 써 버리면 어떻게든 맞을 수밖에 없겠으나, 그런 강력한 법술은 존자에게 조종당하는 지금의 상태로는 쓸 수 없는 모양들이었다.

‘이대로 버티기만 하면…!’

그때였다.

뒤룩.

“…!”

존자의 왼손.

녀석의 몸체에 달린 눈알이, 월수궁무록을 펼치는 ‘나’를 정확히 직시하였다.

그리고, 녀석에게 조종당하는 수많은 인원들이 일시에 내가 있는 자리를 향해 공격을 퍼붓는다!

‘제길, 존자쯤 되면 이 정도의 월수궁무록도 아무 소용 없다는 거냐….’

수많은 인족의 수사들이 나를 몰아붙였다.

이렇게 시야의 우위가 사라진다면 나로서는 밀릴 수밖에 없었다.

부웅! 부웅! 붕!

쿵! 쿵! 쿵!

점차 내 발자국의 깊이가 깊어진다.

나는 우공이산을 펼치며 이를 악물었다.

점차 강해지기는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규토장성도, 천린수해도, 음혼귀주도.

지금 상황에서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괴뢰들을 많이 만들어 놓았으면 조금 달랐겠지만, 너무 시간이 부족했다.

이렇게 압도적인 일 대 다수의 상황은 역시 힘에 부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콰아아아앙!

푸른빛이 내게 날아온다.

오현석이 양손에 창령격원결을 두르고 내게 쇄도한다.

가장 성가신 건 역시나 그였다.

그의 일격을 한번 받아칠 때마다 전신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콰아앙!

‘우공이산으로 점차 강화되고는 있지만….’

부족하다.

이대로라면 충분히 공격이 강화되기 전에 내가 말라죽을 터였다!

어찌하면….

문득.

김영훈의 환영이 내 앞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 상황에 맞는 무공을 만들어 내지 않았을까.’

나는 그럴 수 있는가.

‘못 하지.’

무공의 창조 자체는 무공을 수련한 세월이 있으니만큼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창조한 무공을 한 번에 극성까지 익혀 전투 도중에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김영훈이야 말도 안 되는 재능이 있으니 창조한 무공을 그 자리에서 대성해 버리고 사용해 댔지만, 나는 무공의 창조 자체는 가능해도 그런 짓은 힘들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어찌 타개해야 하나.

콰아아앙!

오현석의 일격을 공곡전성의 초식으로 되쳐 버린 후 자세를 잡고 무형검을 들어 올렸다.

무색유리검이 무형검과 함께 천변만화하며, 무형검의 경로를 보완한다.

수많은 초식이 삼천 자루의 무색유리검을 통해 펼쳐지며 사방을 초토화시킨다.

하지만 그 이상의 공격이 사방에서 들어오며, 전방에서는 오현석이 나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전세를 역전시킬, 단 한 번의 수만 있으면, 그러면 숨통이 트일 텐데!’

백란축성문의 힘이 점차 존자의 신통을 몰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내가 이긴다!

하지만, 이제는 그 조금만 더 버틸 힘조차 없다.

이대로 가다가는 필패!

대책을!

대책을!

김영훈이었다면, 오현석이었다면, 김연이었다면, 북향화였다면.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만약 어떻게 했을까!

뭔가 방법을…!

문득.

그러던 도중, 나는 무아지경에 빠져 한 가지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답천의 경지에 오를 때….’

나는 김영훈과는 완전히 ‘다른’ 길에 들어섰었다.

분명했다.

그의 인영이 아닌, 나 자신의 인영을 보고 답천에 들었으니까.

그런데 왜 나는 아직도 김영훈을, 또는 타인을 찾고 있는가.

‘…그런가.’

그동안 남에게 기생하며 살아왔으니까.

김영훈의 재능에 묻어가며 무공을 올렸고, 청문령의 깨달음에 묻어가며 수도에 입문했고, 북향화의 업적에 묻어가며 법보를 얻었으며.

괴군과의 천 년에 묻어가며 회로를 얻었다.

오직 묻어가기만 하며, 남의 것을 얻기만 한 삶.

어찌 보면 그것이 재능 없는 나의 인생이었다.

피식.

나는 어쩐지 그 사실을 깨닫자, 굉장히 웃기다고 느껴졌다.

필사의 각오를 다지고 얻은 깨달음이, 내가 얼마나 잘 묻어가는 놈인지라니.

‘묻어가는 인생이라….’

하지만 나는 뒤쪽에서 나를 지켜보는, 무수한 기령들을 보며 미소지었다.

‘나쁘지 않았지.’

무수한 이들의 은혜를 입어 온 몸이다.

은혜를 입기만 하는 게 내 재능이라면, 흉내 내고, 묻어가고, 타인에게 받기만 하는 게 내 재능이라면.

‘그렇게 해 주자.’

흉내 내자.

따라 하고, 뒤쫓아가고, 혹은 묻어가서라도.

‘그렇게라도, 지키자!’

나는 내가 살면서 보았던 가장 강력한 일격을 떠올렸다.

지난번 꿈을 꾸며 보았던 함천존자의 일격!

그것을, 재현해 보자.

츠츠츳!

그 압도적인 파괴!

그 말도 안 되는 힘!

우우웅!

무형검이 명동한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디.

내 실력으로는 절대, 그 힘의 발뒤꿈치조차 따라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내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라도!’

파아아앗!

사방으로 흩어졌던 삼천 개의 무색유리검이 하나로 합쳐진다.

무색유리검, 총천(總天).

거기에 괴군의 회로를 덧씌운다.

창익천쇄의 힘을 집어넣는다.

백란축성을, 만상인연도를, 음혼귀주를, 천린수해를, 내가 익힌 모든 공법과, 모든 역사(歷史)를!

“단악검법(斷岳劍法).”

김영훈이라면 아마 잡스러운 잡기가 없이, 순수한 무(武)를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순수한 무공을 추구하기에는, 내가 삶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나도 크고, 또 많으니까.

“제이십오초(第二十五招).”

24초식으로 이뤄진 단악검법의 너머로,

내가 이뤄 온 모든 것을 바쳐 새로운 초식이 개화한다.

“의해(義海)!”

일순간.

나는 내 검(劍)이 무언가 다른 영역으로 접어들었다고 느꼈다.

‘이게… 답천의 [너머]인가?’

느껴진다.

나는 재능이 없다는 것이.

그렇기에 지금 보는 영역은, 오직 함천존자의 일격을 흉내 내고, 모든 힘을 쥐어짜 내 그 일격에 도달하려는 노력 때문에 일시적으로 도달한 영역,

하지만 이것이라면 충분하다.

“은산(恩山)!”

삶에게서 받은 은혜가, 살아오며 봐 온 모든 것을 흉내 낸 일격이 눈앞의 오현석에게 날아갔다.

파앗!

내 검은 그대로 오현석을 관통했다.

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아아….’

내 검이, 혼(魂)의 계위에서 정확히 오현석의 혼(魂)의 깊숙한 영역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의 혼을 파고든 검은 한 자루의 심검(心劍)이 되어, 백란축성의 성질을 품은 채 오현석의 심상 안에 자리 잡은 존자의 신통을 깨끗이 지워 냈다!

파앙!

이상하다.

나는 전신의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피를 토했다.

우공이산의 반동이 찾아온다.

어째서 파괴의 극한인 함천존자의 일격을 흉내 냈는데.

결과로 나온 초식은 파괴의 초식과는 전혀 다른 초식일까.

분명 흉내 내 오기만 했거늘….

‘아….’

나는 등 뒤에서 힘을 보내 주는 만상인연도의 기령들을 보며 알 수 있었다.

‘그렇군.’

흉내 내 오며 성장한 나의 역사.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어 흉내 내 오고, 모방하고, 따라 하기에만 바빴다.

하지만, 이제는 등 뒤로 무수히 많은 족적이 생기지 않았는가.

이제는 흉내를 낸다고 할지언정 흉내조차 나만의 색이 깃든 것일지도 몰랐다.

우우우웅!

심검(心劍)은 사방으로 전염되며, 존자의 신통에 전염당한 수많은 인족의 수사들의 심상을 훑고, 마침내 모두의 의식을 해방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너머]를 엿보았다.’

[너머]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단 한 번 [너머]의 일격을 재현해 보았으니, 언젠가.

자력으로 답천을 넘어선 그곳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나는 극도로 분노한 존자의 왼손이 마기를 끌어모으는 것을 보며.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정신을 차린 것을 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콰아아앙!

녀석의 일수에 결계가 마침내 박살이 났다.

“제, 제길! 존자의 왼손이 침입했다!”

“서은현! 괘, 괜찮은 거….”

오현석은 내게 달려와서 나를 부축해 주었고,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괜찮…습니다.”

“일단 피신하자! 놈이 결계를 부쉈어!”

“다… 괜찮….”

“그래도 네 덕분에 모두가 정신을 차렸어! 서은현! 괜찮으냐!? 눈을 떠라!!”

쿨럭, 쿨럭!

나는 피를 뿜어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웃었다.

“괜찮…습니다. 모든 게….”

늦었다.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시간은 맞췄다.

철컥철컥철컥….

저 멀리서, 기묘한 성채(城砦)가 허공을 날아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발버둥 쳤던 모든 결실이 하나하나 나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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