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수선전-169화 (169/185)

이곳이 지옥이라도 (3)

“역시 너는 틀리지 않았구나, 서은현.”

나는 군사인 현운과 인족 패잔병들을 받아들인 후, 넘어오는 패잔병들을 보며 오현석과 대화를 나눴다.

현재 오현석은 상당히 초췌한 모습이었다.

“나도 나름대로… 이 불합리한, 마족 학살의 흐름을 막아 보려고도 했다만…. 창천개벽문에 불이익이 갈 수 있다는 말을 들은 후, 제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너는 다르군. 제대로 옳은 길을 선택해서 끝까지 관철해 냈어.”

“책임감 없는 고집을 놓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 고집이 이제는 우리에게 희망으로 돌아왔지. 잘 버텨 주어서 고맙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저… 당연한 걸 했을 뿐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당연하다고 여겼던 모든 선의와 평화, 상식이 이 세계에서는 너무나도 하잘것없다고 여겨지더구나. 그 ‘당연함’이라는 건, 절대 당연하지 않아.”

“그렇습니까….”

그때, 오현석이 흠칫 몸을 떨더니 말했다.

“아니, 잠깐. 너… 기억이 안 난다고 하지 않았느냐?”

“아, 기억 말입니다만….”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드디어, 다 찾았습니다.”

“허허….”

그는 미소를 지었다.

“흐허하하하하! 그래, 그렇구나.”

쾅, 콰앙!

그는 마치 창호자처럼 호탕하게 내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서은현!”

나는 그를 보며 미소지었다.

“예, 형님.”

“좋아, 아주 좋구나. 이거 참 감격스럽군.”

그는 입꼬리를 올려 껄껄 웃었다.

그리고 얼마 후.

점차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래, 너라도 기억을 되찾아, 다행이구나.”

“…예.”

“김연마저 저리 되었는데, 너라도 기억을 찾아서… 정말, 다행이다.”

우리는 쓰디쓴 얼굴로 저 뒤쪽에 앉아 있는 김연을 바라보았다.

“에, 에헤헤헤….”

그녀는 혈음계 존자의 공격을 막아서던 도중.

의식에 엄청난 수준의 금제를 당했다고 했다.

덕분에 금제가 풀릴 때까지 그녀의 상태는 지금 백치 상태였다.

‘그 거대한 의식이… 모조리 꾹꾹 억눌러져 봉인되어 있다.’

마치 오행혈주번의 작용과도 비슷하나, 그보다도 훨씬 뛰어나고 정교하다.

내가 그녀의 금제를 풀어 보겠다고 도전해 보았으나 도리어 저 금제에 내 정신마저 삼켜질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금제.

‘저만 한 금제를 풀려면, 아마 괴군이 직접 와야 하겠지.’

기묘성채를 직접 끌고 와서, 기묘성채가 가진 광기로 금제에 충격을 주지 않는 이상, 그녀는 의식을 되찾을 수 없다.

‘오행혈주번과 그래도 비슷한 계통인 건 확실한데….’

신통술 자체가 그녀의 의식 깊숙한 곳에 박혀 있고, 의식 자체를 약화하고 축소한 후 봉인할 수 있게 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자력으로 금제를 극복할 수만 있다면, 금제를 연화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이용하는 게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아마 그때의 위력은 내 오행혈주번보다도 훨씬 더 강력할 것이라는 게 내 예상이었다.

‘물론 그것도 그녀가 저 금제에서 빠져나올 때의 얘기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녀가 금제를 자력으로 빠져나오는 걸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차라리 그녀에게 저 금제를 건 쇄성기 존자의 분체를 쓰러뜨리고 금제의 해주법을 전해 듣는 게 더 현실성이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그녀에게 가해진 금제는 상상 이상의 것이었으니.

나는 김연에게 다가가 다시금 금제를 관찰했다.

‘오행(五行)에 팔괘(八卦), 그리고 태극(太極)의 이치까지 더해졌다. 거기에 혈음계 특유의 사이하고 괴이한 마(魔)의 성질 역시 금제에 섞여 있어.’

오행혈주번과 음혼귀주문, 기묘성심전과 답천의 심어를 총동원하면 간섭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간섭을 통해서 금제를 해제하려면 각을 잡고 100년 정도는 걸릴 터였다.

‘아니, 사실 이 금제도 금제라기보다는 공격용 신통에 가깝다.’

내가 볼 때 이 금제 자체는 일반적인 사축기 수사조차 맞으면 그대로 의식이 흩어지고 혼백에 타격을 입으며 죽을 만한 저주였다.

하지만 오히려 동급 수사들보다 의식의 크기가 몇 단계나 더 큰 김연이었기에 의식이 봉인된 정도로만 작용이 그친 것이었다.

그녀의 능력이 오히려 상식 외로 커서 공격용으로 쏘아 낸 저주가 겨우 금제 수준밖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이라고 봐야 할 터였다.

‘이제 곧, 김연에게 이만한 공격을 쏘아 낸 쇄성기 존자와 맞서야 한다는 건가.’

존자

그 이름은 광한계는 물론이고 진마계, 혈음계, 그리고 수많은 중경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이름이었다.

신화의 존재나 다름없는 개열기 수사를 제외하면 모든 중경계의 최고봉은 결국 성반기 수사였고, 쇄성기는 그런 성반기의 바로 아래에 존재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쇄성기부터는 사실상의 신(神)이나 다름없다.

당장 나만 해도 쇄성기 급 존자, 함천존자 장익의 일격을 기억하면 그때마다 무시무시한 공포에 휩싸이지 않는가?

‘그 무시무시한 괴군조차 쇄성기 존자와 싸워 패배했다.’

그조차 본신이 아닌, 먼 차원계에서 먼저 보낸 분신 같은 것에 패했다.

‘이길 수 있을까….’

나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너무도 없다.

그러나 한층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내 옆으로 오현석이 다가왔다.

“그나저나, 서은현.”

“예, 말씀하십시오.”

“지난번 세 번째 색을 보게 된 후, 세 번째 이외에 무수한 색을 더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더더욱 많은 색을 볼 수 있게 되었지.”

그는 설명을 이어 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문득 이 색상들을 ‘합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더구나. 이 색상들을 합치게 된다면… 어쩌면 더더욱 새로운 영역에서 전투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

“너라면 왠지 그 경지에 대해 아는 것 같다만, 혹시 내가 향하는 방향이 맞는 일인지 알려 줄 수 있겠느냐?”

“…허허….”

나는 오현석을 보며 낮게 탄성을 질렀다.

어마어마하다.

설마 벌써, 벌써 오기조원의 영역에 발을 들이려 한다는 말인가?

‘무공 그 자체에 특화되지는 않았다만… 무공에도 재능이 나쁘지는 않아.’

김영훈처럼 말도 안 되는 재능은 아니지만, 그도 무공 자체에 순수하게 영재인 듯했다.

‘과연 현석 형님이 지닌 무공 자질은 어디까지인가.’

김영훈에는 절대 못 미친다.

하지만, 그도 단련시키면 등봉조극까지는 도달할 수 있을까?

쿠릉, 쿠르릉….

나는 저 멀리.

결계 너머의 마계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부터 하늘의 붉은빛이 점차 진해지고 있다.

현운의 말로는 혈음계 존자의 왼손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중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천기 현상이라고 했다.

아마 사흘 내로 혈음계 존자가 이곳에 도착할 터였다.

그렇다면.

‘그 안에 최대한 전력을 강화해 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나는 오현석을 도와 그가 오기조원에 완벽히 이르도록 돕기로 하였다.

* * *

그를 도와 오기조원의 깨달음을 확립시키는 것 자체는 어렵진 않았다.

이미 사실상의 모든 의념을 깨닫고, 모든 의념에는 경계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삼화취정의 극한에 도달한 셈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의념을 통합시키고 의식을 하나로 만들어 진화시킨 다음 오기조원에 이르게 하는 것뿐이다만….’

솔직히 걱정될 것도 없었다.

이미 그는 말 그대로 깨달음을 전부 얻었으니까.

‘그나마 영근이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그조차 사실 큰 문제는 없지.’

내가 그동안 연구해 온 바.

인족에서도 환골탈태와 오기조원 등에 대한 연구는 존재해 왔다.

무공 자체가 이 세상에서 진화할 여지는 없었지만,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여러 수도공법을 시도하다가 수렴 진화를 하며, 무공과 비슷한 결과를 내는 공법들도 많이 개발되었다고 했다.

애초에 기묘성심전 역시 그런 부류였고.

그리고, 오기조원과 환골탈태 등은 ‘요수공법’ 쪽을 인족이 연구하면서 생긴 결과였다.

요수공법은 지속적으로 숙련자의 환골탈태를 요구하는 공법이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요수공법은 오기조원과 비슷하게 오행영기를 받아들여 오행영근을 강제로 생성시키기도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영근을 생성시키는 요수공법은 천족 측에서는 거의 배우지 않는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결국 오기조원으로 오행영근을 얻으면 천영근이던 수련자는 잡영근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오히려 수행 자질이 퇴보해 버리니 단일 영근 입장에서는 끔찍한 일인 것이었다.

결국 그런 끔찍한 일을 방지하기 위하여 일반적인 요수공법에서 오행영근을 얻는 공정을 빼 버린 것이, 인족 측에서 익히는 일반적인 연체공법의 시초라고 했다.

‘하지만 오현석은 일문성체. 모든 속성의 공법을 전부 익히는 게 가능하다. 한 마디로, 오행영기로 추가로 오영근을 얻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

그러므로 내가 지도해 주어 오기조원의 경지를 얻게 해 준다면, 오히려 그로서는 전력이 조금이나마 늘어나는 일일 터였다.

우득, 우드드득!

나는 오현석의 옆에서, 그가 환골탈태를 마칠 수 있게 호법을 서 주었다.

그는 천천히 오기조원의 깨달음에 따라 천지영기를 인도하며 환골탈태를 마치고 있었다.

‘…잠깐.’

나는 오현석의 환골탈태를 보던 도중.

한 가지 상념에 생각이 이르렀다.

‘일반적인 연체공법은 요수공법에서 오행영기를 얻는 공정을 비롯해 몇몇 공정을 인족에게 맞게 개조한 거다. 창령성광오채대법의 오행장원전 역시, 일반적으로는 오행장원전을 전부 익히지 않고 한 속성 공법만을 익히고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스승님 역시 목도장원전을 기반으로 성광호체공과 창령격원결을 익힌 것이다. 그리고 추후에 원영 후기의 경지에서 오행의 속성을 지닌 법보를 통해 오행장원전의 힘을 미약하게 끌어내는 것이고.’

원영 후기에 이른 이들은 대다수가 경지의 특수성 때문에 오행 속성을 지닌 법보를 품는다.

하지만 오현석은 물론이고, 나 역시 오행장원전의 오행공법을 ‘전부’ 익혔다.

그렇다면….

‘지금 나와 현석 형님이 익힌 창령성광오채대법은… 원본 요수공법에 한없이 가까운 거 아닌가?’

거기에 나는 요단까지 생성이 가능하니….

‘흐음….’

지금껏 답천의 경지에 달한 이후로, 요단을 생성한 적은 없었다.

요단은 이미 무형검에 녹아서 내 몸 안을 흐르는 중인데 뭣 하러 내단을 굳이 또 만든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어쩌면 창령성광오채대법을 수련하며 내단을 형성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 역시 들었다.

‘창령성광오채대법은 원영기부터 제대로 수련할 수 있는 공법이다. 지금까지는 맛보기에 불과하다고 스승님께서 그러셨지. 그렇다면… 추후에 시간을 들여 그리 해 봐야겠군.’

나는 생각을 정리하며 오현석의 옆에서 호법을 섰다.

어느새 하늘은 점차 붉어졌다.

아마 쇄성기 존자가 그만큼 가까이 왔다는 증거이리라.

그리고 마침내 며칠 후.

오현석은 내 호법 아래에서 느릿하게 환골탈태를 마칠 수 있었다.

그는 김영훈처럼 무공 재능이 있는 것도, 나처럼 인체에 대한 의술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환골탈태의 속도가 확연히 느릴 수밖에 없었다.

“후우….”

쿠구구구구!

그리고, 환골탈태를 마친 오현석은 어쩐지 이전보다도 훨씬….

‘요괴 같은 느낌이 나는군.’

나는 요족 특유의 기질을 흘리는 오현석을 보며 쓰게 웃었다.

나중에 그가 등봉조극에 도달하면, 정말로 창령성광오채대법이 요수공법으로 진화하는 게 맞는지도 몰랐다.

“정말 끝내주는구나, 은현아. 그나저나….”

그의 시선이 시뻘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뿐이 아닌, 어느새 인족 패잔병들 상당수가 이 근방으로 나와, 저 멀리 산맥 너머로 다가오는 ‘무언가’의 기운에 집중하고 있었다.

현운 역시 이곳으로 도착하여 저 너머의 존재를 향해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는 중이었다.

“온다….”

현운이 침을 삼켰다.

오현석이 주먹을 쥐었다.

나는 의식을 집중하며 저 너머에서 오는 존재를 지켜보았다.

쿵, 쿵, 쿵….

거대한 산맥.

산맥 너머에서 울리는 진동.

거대하다.

저 너머에서 오는 존재가 거대하다는 것이 아닌, 저 존재가 지닌 존재감 자체가, 너무나 거대해 압사당할 것 같다.

“저것이….”

쿵, 쿵!

혈음계 쇄성기 천마.

존자(尊者)의 왼손.

쿵!

필멸자의 테를 벗어가는 존재의 분체.

“존자…!”

신이 되어 가는 이의 일부.

쿠구구구구!

하늘이 시뻘겋게 변한다.

분명 광한옥으로 침식시켜 두었을 점령지 전체에 마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저 존재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만으로, 천지영기가 침식당한다.

쿵!

산맥 너머로, 그것이 존체를 드러낸다.

산호!

붉은 산호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너울거리고 있다.

그런 산호의 군체가 표피를 덮고 있었으며, 그 표피 곳곳에는 거대한 ‘눈’ 같은 것이 수십 개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붉은 산호의 표피와 눈들이 둥쳐, 하나의 ‘왼손’ 같은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붉은 손길이, 산맥을 넘어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게, 혈음계 존자의 왼손과, 일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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