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이 지옥이라도 (2)
덜걱….
왈칵!
나는 잔해 속에서 피를 한 움큼 내뱉었다.
“거헉… 크억….”
덜, 덜덜덜….
전신이 아프다.
몸 곳곳에서 찌릿거리는 느낌이 울린다.
‘이곳은….’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이곳은 무너진 총독부 건물이었다.
인근 점령지는 모조리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인족에서 지어 놓았던 모든 건물과 시설이 한 줌 재가 되었고, 조금 튼튼한 것들은 모조리 무너져 쓰레기 더미가 되어 있었다.
쑥대밭.
그래, 이곳은 쑥대밭이 되었다.
쿠릉, 쿠르르릉!
나는 한 곳에서 울리는 천둥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8차 점령지에 펼쳐진, 7개의 광한옥을 축으로 펼쳐진 결계진.
그 결계진의 중심부.
흑룡이 그려진 7개의 깃발이, 중심부에 결계와 같은 형태로 꽂혀 있었다.
‘저건….’
나는 비틀거리며 깃발들에게 다가갔다.
‘전명훈….’
깃발들은 하나의 진법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점령지를 덮은 결계의 힘을 빌어, 전명훈을 봉인하기 위한 진법.
우우웅….
나는 진법 결계에 걸터앉았다.
현신의 기운은 어디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전명훈을 상대로 남은 3개의 원영을 모조리 소진한 후 죽었던 것이리라.
거의 사흘 밤낮으로 싸웠었다.
전명훈이 익힌 뇌도공법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한 번 얻어맞으면 몸이 순간 마비되어 움직이지 못하며, 마비가 풀린 후에도 몸에 남은 뇌기를 쫓아 놈의 번개가 유도탄처럼 끝없이 쫓아온다.
거기에 진짜 번개에 비해 조금 느리다고는 해도 하나하나가 무시할 수 없는 속도였으며, 위력도 끔찍했다.
극한의 공격력을 자랑하는 뇌도공법을 상대로, 나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했다.
‘9할의 힘을 써서 겨우겨우 이겼다.’
나는 깃발 진법의 정중앙에 갇힌 전명훈을 바라보았다.
시커먼 음기가 사슬이 되어, 진법의 중앙에 있는 뇌구(雷球)를 가두고 있었다.
전명훈의 금단(金丹)이었다.
나는 착잡하게 전명훈의 금단과, 그 안에 갇혀 있을 녀석의 원영을 바라보았다.
“네가… 어떤 시간을 살아왔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파치지직….
“어쩌면… 그래, 내 잘못이다. 나는 분명 그때 창천개벽문이 아니라 금신천뢰문을 선택할 수도 있었으니까. 단순히 진선을 어찌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창천개벽문을 선택했다. 하지만….”
진선을 어쩌지는 못할지언정, 녀석이 어떤 삶을 살아갔는지는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힘이 없다는 이유로 비겁하게 이 녀석이 고통받을 것을 알며 일부러 방치했던 것일 수도 있었다.
시간을 돌리는 회귀자에게 있어, 너무나도 모순된 말이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은 시간이 돌아갈지언정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내 안에 남아 영원히 나와 하나가 되어 살아갈 것이다.
‘미안하다.’
전명훈은 이걸로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어쩌면 내 손으로 같은 세상에서 온 동료를 처음으로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푹 쉬어라.”
왈칵!
다시금 전명훈에게서 입은 상처 때문에 입에서 피를 내뱉으며.
나는 그렇게 녀석에게서 등을 돌렸다.
울컥, 울컥….
피가 몇 됫박이나 입에서 뿜어진다.
‘내가 보호하려 한 이들….’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원유를 통해, 견신과 함께 그들을 인솔해서 총독 관저 지하로 피신시켰다.
나는 다 무너진 총독 건물로 다가가, 잔해를 치웠다.
쿠웅, 쾅!
연체공법으로 강인해진 내 육신은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건물의 잔해쯤은 깃털처럼 가볍게 내던질 수 있었다.
나는 잔해를 치운 후,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를 찾았다.
저벅, 저벅….
천천히 지하로 내려간다.
얼마나 걸었을까.
나는 저 멀리, 녹빛이 비추는 것을 보았다.
저벅, 저벅.
녹빛의 너머에서는, 이곳에 살고 있던 마족들과 견신이 두런거리고 있었다.
“초, 총독님!”
“총독 아저씨!”
저 멀리서, 수인과 홍연이 피를 흘리며 걸어오는 나를 발견하고는 황급히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다들, 무사했구나.’
나는 그 둘의 뒤쪽에서, 내가 준 괴뢰에 올라타 황급히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견신을 보고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 * *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나는 전명훈과의 싸움을 복기하였다.
전투의 시작부터 끝.
그 사이사이에서 내가 부족했던 것들, 내가 잘했던 것들, 발전시킬 수 있는 것들.
그 모든 것들을 다시 돌아보며 나 자신을 발전시켜 갔다.
그러던 도중, 나는 문득 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뭔가… 뭔가 더욱더 높은 경지를 추구할 수 있을 것 같다.’
왜일까.
그저 기분 탓일까.
그러나 나는 단순히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분 탓이 아니다.’
명확하다.
뭔가 명확한 것이 나를 이 너머로 부르고 있다.
‘뭘까, 이건….’
나는 한참을 고민하던 중 드디어 깨달을 수 있었다.
‘아아, 그렇군.’
꿈 속이 찢어진다.
그것은 녹색의 박도(朴刀)였다.
먼 옛적에 보았던 압도적인 파괴의 흔적!
그때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어째서 굳이 이 순간 그 기억이 재생된 것일까.
이유야 뻔했다.
전명훈이 뿌리는 번개는 조금 미숙할지언정, 한없이 천겁(天劫)과 비슷했다.
그리고, 저 녹색의 박도도 마찬가지다.
‘저것 역시, 천겁과 같다.’
파괴의 속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파괴의 힘 자체는 함천존자라는 자가 삶을 살며 얻어 낸 자신만의 깨달음.
내가 느끼는 것은, 저 파괴의 일격이 만들어진 원리!
‘닮았다, 분명.’
함천존자의 일격은, 천겁(天劫)과 한없이 닮아 있었다.
‘정확히, 뭐가 닮은 거지?’
하지만 나는 그의 일격과 천겁이 닮았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정확히 무엇이, 왜 닮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것을 깨닫는 날 이 [너머]로 갈 수 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수도자들이 심족을 두려워하고 혐오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기오막측하고 알 수 없는 공법을 익혀서가 아닐 수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꿈속에서, 멍하니 함천존자의 일격과 전명훈이 내쏘는 천뢰에 가까운 벼락들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 * *
깜빡….
“아, 아저씨!”
“총독 아저씨!!!”
눈을 뜨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여기는.”
나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일어났다!”
“일어났어요, 총독님이 일어나셨어요!”
수인과 홍연, 두 마족의 말에, 주변에서 수많은 마족들이 달려왔다.
“아이고, 총독 대인!”
“일어나셨습니까?”
“이틀째 기절해 계셔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요!”
내가 얼떨떨하게 그들을 둘러보던 차.
[모두 비켜 보시게.]
철컥, 철컥, 철컥.
견신이 괴뢰의 머리에 올라타서 내게 다가왔다.
[서 대인, 괜찮으십니까?]
“아, 조금 쑤시는 곳이 있긴 한데 뭐, 괜찮소. 그나저나… 다들 반응이 왜 이런 거요?”
이전까지 마족들은 그렇게 나와 친하지는 않았다.
수인과 홍연 같은 아이들이야 그렇다 해도, 장성한 마족들에게 나는 악독한 인족 출신의 총독이었을 뿐이니.
심지어 최근에는 계멸천공진 계획 때문에, 마족들을 저 멀리 어딘가로 쫓아 버리려 한 악독한 이였으니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왜 다들 반응이 이렇단 말인가?
[제가 지금껏 동족들에게 구조 신호를 보내도 한참 동안 답이 오지 않았지요. 하지만 대인께서 전투하시던 중에 답변이 왔습니다.]
견신의 설명이 이어졌다.
[마계의 합체기 태수님들께서 최전선의 인족들을 사로잡아 심문한 결과, 계멸천공진 계획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것 때문에 총독께서 저희를 먼 곳까지 보내려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걸 마족들에게 알려 줬다는 건가.”
아무래도 진마계의 합체기 태수들에게 잡혀 결국 계획은 탄로가 났다는 모양이었다.
“그게 다들 이렇게 좋아하는 이유인가? 어찌 되었든 나는 자네들을 고향에서 내쫓고 착취해온 사람인데….”
[하하하! 착취라니요, 대인. 아직 제 말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계멸천공진 계획을 알게 된 것은 알게 된 것이고, 이번에 진마계에 어마어마한 일이 터졌다고 합니다….]
견신이 진중한 목소리로 촉수를 꿈틀거렸다.
그의 촉수 한쪽 끝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은 공령지였다.
[대인,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공령지라는 이런 귀중한 장소를, 진마계 측은 어째서 인족에게 이리 쉽게 빼앗겼으며, 진마계 마군 소속이었던 저는 왜 이 공령지에 대해 여태껏 한 마디도 대인께 말한 적이 없는지. 그리고 그 귀한 공령지가 어째서 인족이 점령한 점령지에, 가까운 간격으로 세 개씩이나 발견되었던 건지.]
“…뭔가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건가.”
내가 굳은 얼굴로 묻자, 견신은 촉수를 까딱였다.
[대인이 잠드셨던 지난 며칠간, 마군 측에서 제게 연락을 준 바. 진마계에 어마어마한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어마어마한 소동?”
[그렇습니다. 저희가 보고 있는 이것은, 정상적인 공령지가 아닙니다.]
“정상적인 공령지가 아니라고?”
[예, 제가 들은 정보에 의하면, 눈앞에 보이는 것은 혈음계의 천마들이 진마계에 진입하고자 진마계의 차원 방벽을 바깥에서 긁어내느라 생겨난 흔적이라 하더군요.]
“뭣…!”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럼 저게 혈음계랑 연결되어 있다는 말인가!? 그, 그럼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 게 아닌가?”
들은 적 있었다.
혈음계의 천마들은 같은 마족이라고 해도 서로를 잡아먹기를 꺼리질 않으며, 진마계의 요마들보다도 훨씬 사이하고 악랄하며 교활한 이들이라 하였다.
그러나 견신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맞습니다. 저 공령지는 혈음계에서 만든 게 맞습니다. 하지만, 혈음계와 연결된 것은 아닙니다.]
“뭐?”
[혈음계 존재들은 부정하고 악한 기운을 먹고 자라나지요. 그리고 그러한 악덕(惡悳)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혈음계 존재들이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인족들이 마계를 침식시키고 점령하며, 무수한 마족들을 학살하고 단약화하면서 쌓은 악덕으로 인해, 혈음계 존재들은 8차 점령지가 아닌 다른 점령지에 있는 공령지를 혈음계와 연결시키는 데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8차 점령지의 공령지는 혈음계 천마들이 혈음계와 연결시키지 못했지요.]
녀석이 씨익 웃었다.
다른 마족들 역시 안도감이 깃든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마군에서 전하기를, 8차 점령지는 혈음계와 연결될 만큼의 악덕이 쌓이지 않은, 유일한 인족 점령지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서 대인, 당신의 선량함에 의해 이 점령지는 지옥이 되지 않았습니다.]
“….”
[이곳의 마족들을 지금껏 학대하지 않은 것에, 단약화하지 않은 것에 가슴 깊이 감사드리며… 당신의 선량함 자체에 머리 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서 대인.]
견신을 비롯하여, 혈음계 천마들에 대해 알고 있다는 무수한 마족들이 내게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나야말로.”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쩐지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전명훈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생각나는 것을 느꼈다.
뭔가, 이들을 보며 느낀 뭔가를 녀석에게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스스스….
지금 내게 감사를 표하는 이들의 모습이, 내 기령들에게 추가되었다.
나는 눈을 닦으며 이들의 인사를 돌려주었다.
“고맙다고 해 주어, 고맙다.”
세상이 지옥이라도.
―다 필요 없다. 모조리… 죽어 버려라.
모든 것이 의미가 없지는 않다.
이 세상이 고통과 광기에 차 있을지언정.
어쩌면 무언가 의미가 있는 것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언젠가, 지금이 아니더라도.
그것을 꼭 녀석에게 전해 주고 싶었다.
나는 차원이 비치는 공령지의 안쪽에서, 내가 구해 낸 무수한 마족들의 감사를 받으며 그런 생각을 다졌다.
* * *
“…이거, 장관이군요.”
무수한 행렬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거대한 전함들과, 무수한 광한옥을 실은 비차들.
그리고 수많은 인족 병사들이, 8차 점령지로 날아오고 있었다.
우우웅!
보랏빛이던 마계의 하늘은 어느덧 은은한 붉은빛이 휩싸여 있었다.
우우우웅!
비둔술과 함께, 익숙한 얼굴들이 8차 점령지의 결계 바깥에 내려앉았다.
“오랜만입니다, 참모장님. 아니, 이제는 군사님이라 불러 드려야 하나요?”
나는 누더기가 된 옷을 입고 있는 꾀죄죄한 꼴의 수도자를 보며 말했다.
“…놀리지 말고 결계를 열어 주시오, 서 총독.”
그가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혈음계 존자(尊者)의 좌수(左手)와 좌족(左足)이 강림했소. 그래도 서 총독이 공령지를 잘 사수해 준 덕분에 존자의 좌안(左眼)까지는 강림하지 않는다 하더군. 광한계 본토에서 지원이 올 때까지, 8차 점령지에서 농성할 예정이외다.”
그렇게, 지금까지 마족의 첩자이자 인족의 배신자가 다스리던 점령지는.
결국 인족 패잔병들의 마지막 희망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