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수선전-166화 (166/185)

잃어버린 것 (5)

아, 그렇구나.

나는 저 눈을 본 적이 있었다.

나는 저 시체 썩은 것 같은 눈 안쪽에서, 먼 예전의 동질감을 찾아내었다.

나도, 한때 저 눈을 하고 있던 적이 있었었다.

그리고 그 동질감을 깨닫자마자, 나는 전명훈이 연진을 찾아다니는 이유가 어쩐지 짐작이 갔다.

나는 짐작을 확인하기 위해 녀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상황을 설명해라. 어떻게 된 거냐.”

“다 잃어버렸다! 네가…!”

“진정해라!”

쿠르르릉!

나는 답천의 경지를 통해, 전명훈에게 심어를 강력하게 때려 넣어 놈의 발작을 일단 저지시켰다.

“제대로, 상황을 설명해라. 너는 ‘왜’ 연진을 찾는 거지? 내가 도와주겠다!”

“…!”

연진의 몸 안에 숨어 있던 연위는, 금신천뢰문이 멸문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수명이 20년 안쪽으로 줄었다고 했다.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했다.

아마 진선이 금신천뢰문을 멸망시키고, 금신천뢰문과 관련된 이들의 수명을 어떻게 조정한 것이리라.

내 고함에, 전명훈은 몸을 떨더니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 존재]가, 천겁을 내렸다.”

녀석의 얼굴이 음울하게 물들었다.

“천뢰번은 [그것]이 눈을 뜨자마자 [그것]에게 뺏겼다. [그것]은 천뢰번을 매개로, [위]에서 뇌령도 전체에 천겁을 내렸고….”

그리고, 절망의 의념이 전명훈의 의식을 잠식하는 것이 보였다.

“당시 금신천뢰문에서 임무 때문에 문파 안에 없었던 이들이나, 혹시 모를 생존자들. 금신천뢰문에 적(籍)을 둔 모든 이들. 금신천뢰문에서 사승의 인연을 맺었던 삼천세계 모든 이들에게, 천겁의 운명을 고정시켰어….”

뿌드득….

그는 이를 갈았다.

“길어도 20년… 그 안에, 금신천뢰문의 시조 양수진의 가르침을 이었던 삼천세계의 모든 존재가 천겁에 멸할 운명을 강제로 부여받았다…!”

“그렇군….”

나는 녀석이 연진을 찾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너는, 금신천뢰문의 생존자들을 구하려 하는 건가…?”

“…그래.”

녀석이 썩은 눈으로 내 옷자락을 붙잡으며, 절규하듯 목소리를 내뱉었다.

“연진을 찾게… 도와준다고 했지…? 도와다오, 제발 도와다오…. 다… 죽었다. 먼 곳에 파견 나간 제자 다섯을 제외하고, 인근에 파견 나갔던 제자들도… 금신천뢰문에 가까이 있던 순서대로 다 죽어 버렸어…! 마계로 파견 나간 제자인 연진, 명귀계로 탐사를 나간 나머지 넷을 제외하면, 이제 이 세상에서 살아 있는 금신천뢰문의 제자는 아무도 없단 말이다…!”

“…알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진은, 내가 준 천인기 괴뢰들을 가지고 너를 찾으러 광한계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괴뢰들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괴뢰들에게 연락할 수 있지.”

그 말에, 전명훈의 썩은 눈동자 안에서 조금씩 생기가 돋아났다.

“정말이냐… 서은현…!? 그게 정말이냐!!”

“그래, 연락이 닿는 것 자체에 시간이 며칠 걸리긴 하겠지만… 그래도 나흘 안에 연진 쪽에 연락을 넣을 수 있을 거다.”

콰악!

그리고, 전명훈은 내 어깨를 쥐며, 혼이 나간 얼굴로 몸을 떨었다.

“고맙다…! 고맙다, 서은현…!”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전명훈은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

‘이건….’

탈진(脫塵)이었다.

나와 싸우기 이전에 사축기 감찰관을 죽이고, 이곳에 와서 폭주할 때 쓴 몸에서 깃발을 뽑아내는 공법 역시, 상당히 몸에 무리가 가는 공법이었으니.

충분히 탈진할 만도 했다.

나는 기절해 버린 전명훈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전부.

이 세계에 떨어진 모두가 전부, 너 나 할 것 없이 변했다.

‘모든 기억을 되찾았다.’

나는 눈을 감고서 원영을 관조하였다.

좋았던 기억, 싫었던 기억….

저 무의식의 암흑 속에 침잠했던 모든 기억을 찾고, 기령 속에 기록해 두었다.

더 이상 잊고 싶어도 잊을 리 없는 기억.

그 기억 속에서, 전명훈은 솔직히 내게 별로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하나, 그럴지라도.

좋았던 일도 싫었던 일도 있었던 내 인생이었고.

전명훈은 내 인생에서 짜증 났던 축에 속했던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녀석은 나와 함께했던 인연이었다.

부스스스….

만상인연도에, 이번에 찾아온 전명훈이 모습이 기록된다.

‘솔직히 나는 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짜증 날지언정 이 녀석은 내 적은 아니었다.

악연이 아닌 그저 인연.

그렇기에, 나는 전명훈을 돕기로 하였다.

‘다 잃어버렸다, 라….’

거기에 이 녀석에게선 동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압도적인 힘에 의해, 소중한 이들을 잃어버리면서 무력감을 느껴야 했던 그 심정을 모르지 않았으니 말이었다.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오히려 더 돕고 싶은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기절한 전명훈을, 괴뢰를 시켜 총독 관저에 데려다 놓게 한 후.

아직까지도 결계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 마족들을 찾아갔다.

* * *

“견 도우, 이들을 통솔해서 잘 가실 수 있으시겠소?”

[뭐, 조금 분쟁이 생기긴 했습니다만, 그렇게 큰일은 아닙니다. 저 광한옥으로 된 결계가 문제긴 합니다만… 멀리서 총독 대인이 하는 것을 지켜보자니, 대인께서는 결계를 해체하실 수 있으신가 보군요.]

“맞소.”

[흐음….]

촉수를 꿈틀거리며 나와 눈높이를 맞추던 견신이 말하였다.

[총독 대인께서, 어쩐지 전과 달라 보이시는군요. 그 전부터 보았던 불안정한 의식 파동 대신, 확고한 의식의 파동이 느껴지십니다.]

나는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았소. 이제 더는 흔들리지 않겠소. 마족이든 인족이든….”

나는 견신의 뒤쪽에서 불안하게 두런대는 마족들.

그리고 그사이에 섞여 있는, 두 젊은 남녀를 슬쩍 바라보았다.

“내 앞에서 소중한 이들이 죽게 두지 않겠소.”

[축하드립니다. 번뇌를 덜어 내셨군요.]

“기준을 되찾았을 뿐이오.”

꿈틀, 꿈틀….

견신은 갑자기 촉수 두 개를 교차하여 가위 표시를 만들어 냈다.

[저희 유촉족은, 스스로를 굉장히 교양 있고 지적인 종족이라 자부합니다. 저희는 종족의 특성이 남에게 기생하는 것이다 보니, 늘 외관보다는 본질적인 것으로 스스로를 정의하기를 좋아하는 종족이지요.]

그의 의념에는, 나에 대한 어떠한 존중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 표시는, 유촉족에서 자기 스스로를 명확히 정의 내릴 수 있는 현숙한 족원에게 경의를 담는 인사입니다. 부디 받아 주시지요.]

우우웅!

견신의 가위 표시 촉수의 정중앙으로 희미한 영기의 빛이 서렸다.

아무래도 단순한 인사가 아닌, 어떤 특정한 신통인 듯했다.

그의 의념에서는 진솔함이 느껴졌기에 나는 감사를 표하며 견신이 쏘아 내는 영기의 빛을 받아냈다.

우우웅!

그와 동시에, 나는 내 원영에 기묘한 감각이 자리 잡는 것을 느꼈다.

‘이건….’

내 원영(元靈)에 특수한 감각이 맴돌았다.

나는 이전보다도 내 원영을 더욱더 명확하고 또렷이 관조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래도 견신은 아예 특수한 신통을 내게 부여한 것 같았다.

[저희 종족은 상대의 정신을 제압해서 기생하는 것을 주로 하여 살아가는 종족입니다. 대인께 드린 신통술은, 대인의 혼백의 일부를 저희 종족과 비슷하게 변화시켜 대인의 혼(魂)을 떼어 내어 상대의 원영에 기생시킨 후, 차후에 상대의 원영을 지배하여 제2 원영을 응결시킬 수 있는 기괴고(奇怪蠱)의 비술이지요.]

“이 비술은….”

나는 견신이 준 비술에서 무언가 익숙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익숙함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알 수 있었다.

‘원립의 혈영(血靈)….’

자신의 원영을 쪼개, 혈영이라는 것으로 만들어 각 성의 용맥에 잠복시켜 둔 그 마도 신통과 비슷한 군데가 있었다.

‘과연 진마계는 마공의 본고장이라는 건가.’

원립의 혈영 역시, 유촉족 혹은 그 비슷한 종족에서 기인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고맙소. 다만 이 비술을 사용하려면 결국 타인의 영혼에 내 혼을 심어서 기생시켜야 한다는 건데, 나는 그런 류의 마공을 사용할 것 같지는 않군.”

[뭐, 사용하시는 건 대인의 자유입니다만. 그리고 애초에 그 기괴고의 본질은 타인의 혼을 무자비하게 착취하는 게 아닙니다.]

견신의 말이 이어졌다.

[먼 옛적, 진마계가 온전한 하나였을 때. 그 당시 마계는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요마(妖魔)와 천마(天魔). 그중에서 천마들은 그 특유의 기괴한 마공을 통해 요마족을 자원으로 갈아먹고는 했지요. 특히나 요마족의 정신을 침식시켜, 타락시킨 후 천마족의 영원한 노예로 부리는 비술들 역시 당시 천마들 사이에서 유행했었더랍니다.

저희 유촉족 역시 한때 천마족의 노예였으나, 유촉족의 시조 중 한 분께서 천마족의 정신 침식에 대항하여, 명확한 자신의 주관으로, 자신을 침식시키는 천마의 정신에 역으로 기생하여 서로의 정신력을 겨루는 비술을 만들어 낸 것이 기괴고의 시초이지요.]

“한 마디로, 천마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 이 신통이란 소리군?”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지금은 천마들이 거하는 혈음계와, 우리 요마들이 거하는 진마계로 두 세계가 나뉘었고, 광한계 분들은 천마를 볼 일도 없습니다만… 옛적부터 천마들이 광한계에 기이할 정도로 집착을 보였던 것은 진마계에서 유명한 사실입니다. 진마계에 오신 이상, 대인께서 혹시 천마를 만날 일도 있을지 모르니 비술을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제가 해 드려야 할 말이지요. 저희 마족들을 잘 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웃었다.

“…일단, 당장 내보내 드리고 싶지만 천기를 볼 때, 당장 며칠 후 흉(凶)이 이 인근을 뒤덮을 거요.”

나는 견신을 보며 말했다.

원영기에 이른 후, 천기를 보는 눈이 더더욱 성장했다.

그리고 그 눈으로 볼 때, 며칠 이내에 이곳 점령지는 흉을 품은 이들로 휩싸일 예정이었고, 견신이 이곳의 마족들을 통솔해서 점령지 인근을 빠져나가게 되면 그 흉을 품은 이들에게 붙잡힐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흉의 상태로 보아, 아마 높은 확률로 인족이다.’

견신과 같은 마족이었다면 나도 망설임 없이 그들을 내보내 주었을 터였지만.

아무래도 인족 총연맹 측에서 사람을 보내려는 것 같았다.

“아직은 보내 드릴 수 없으니, 조금만 더 참아 주시구려.”

[알겠습니다. 기다리지요.]

“그래도 내가 어찌할 수 있을 정도의 흉이니, 그들을 처리한 후에 보내 드리도록 하겠소.”

나는 견신에게 말을 전한 후, 점령지에서 영기가 진한 곳으로 가 며칠간 원영의 경지를 안정시켰다.

‘인족 총연맹에서, 나를 잡으러 오는 것일까.’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높으리라.

아마 이미 나는 인족의 배신자로 등록이 되어, 수배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 마음의 준비를 하자.’

천기를 읽을 수 있다고는 하나, 그것으로 자신의 운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천기를 읽을 수 있기에 애매하게 자신의 앞날을 알게 되고, 그 앞날을 대비하는 과정에서 변화하는 경우의 수를 전부 읽지는 못하기에, 천기를 아무리 읽어도 스스로의 운명은 알 수 없다.

내 앞날은 어찌 될지 몰랐지만.

‘어쩌면… 인류를 배신해야 할 수도 있을 터!’

미래를 각오하고, 당당히 맞서자!

나는 결의를 다지며 며칠을 기다렸다.

* * *

나흘 후.

전명훈이 깨어났다.

나는 천기를 보며, 앞으로 이틀 후면 인족의 사람들이 도착한다는 것을 읽어 냈다.

‘어쩌면 전명훈의 도움을 받아야 할 수도 있겠어.’

원영에 오르며,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시야’를 얻게 되었다.

이제는 계위 그 자체를 넘나드는 월수궁무록을 펼칠 수 있었기에, 합체기 태수가 직접 오지 않는 한 내가 생존하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마족들을 보호하는 것.

‘그 정도는 전명훈에게 맡겨도 되겠지…?’

이제 연진에게 연락이 닿았으니, 아마 답변이 올 터였다.

‘연진의 소식을 전해 준 후, 전명훈에게 도움을 청하자.’

사축기 수사를 죽여 버린 전명훈의 전력이라면, 상당히 도움이 될 터였다.

우우우웅!

나는 내 품에서 옥패가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벌써 답신이 돌아왔다고…?’

연진과 함께 간 천인기 괴뢰로부터의 답신이었다.

‘잘 됐군, 이곳으로 오겠다는 것이겠지?’

우우웅!

내가 옥패에 영력을 불어넣자, 옥패는 몸을 떨며 허공으로 한 개의 영상을 투사했다.

파아아앗!

“…어?”

―쿠르르릉, 쿠릉!

―번쩍!

천뢰(天雷).

그것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천뢰였다.

천뢰 속에서, 반백반흑의 머리칼을 지닌 연진과, 그의 몸에 들러붙어 있던 연위가 동시에 부스러진다.

그리고 천뢰에서 뿜어진 한 줄기의 벼락이 괴뢰를 향해 쇄도한다.

피시식….

그것이 영상의 마지막이었다.

“…이, 이게 무슨….”

나는 황당함을 느끼며 헛숨을 들이켰다.

‘그, 그사이에 죽었다고…?’

분명히 연위는 20년 안에 죽는다고 했었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아무리 빨라도 10년 안에 죽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20년 안쪽이면 언제든지 상관이 없었던 듯.

그들은 그대로 죽어 버렸다.

나는 이를 악물며 주먹을 쥐었다.

‘…미안하다, 연진.’

어쩌면 나 때문이다.

전명훈을 찾아가라고 괴뢰를 쥐어서 보내지 않고 여기에 붙잡아 놓았다면 오히려 전명훈을 만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는데.

‘전명훈에게는… 뭐라고 말해야 하지.’

이제 도움을 받는다거나 그런 것을 생각하기보다는, 녀석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가 더 걱정되었다.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거짓말을 해야 하는가.’

나는 전명훈을 찾아가기에 앞서,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고민했다.

‘뭘 말해 줘야 한단 말이냐!’

“….”

한참을 고민한 나는, 전명훈을 찾아갔다.

녀석은 이제야 기운을 회복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멍하니 총독부 밖을 보는 중이었다.

“…전명훈, 일어났나?”

“기절하고 얼마나 지났지?”

“…나흘.”

“그렇군. 나흘이면 연진에게 소식이 닿을 거라 하지 않았나? 답변이 오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하지?”

“…한 가지 묻겠다, 전명훈.”

나는 녀석을 쳐다보며 물었다.

“연진을 만나면 어떻게 할 거지? 진선… 이란 존재가 연진의 운명에 천겁을 고정시켰다고 들었다만….”

“내가 대신 막아 줄 것이다.”

그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스스로 경지를 올리며 부른 천겁이 아닌, 남이 인위적으로 부여한 천겁이다. 대신 막아 주어도 될 거야. 금신천뢰문의 내리친 천겁은 진선이 직접 내리친 벼락이었다. 하지만 그 녀석이 운명을 고정시켜 내리는 천겁은 진선이 직접 힘을 쓰는 게 아닌, 간접적으로 내리는 천겁이니, 분명 내가 막을 수 있을 것이야!”

“…그런가.”

“궁금한 걸 들었으면 답을 내놔라, 서은현. 연진에게 연락은 닿았나!?”

나는 전명훈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의념과 심상을 바라보았다.

시체.

시체의 밭이 펼쳐진 시산혈해!

그것이 지금 전명훈의 심상이었다.

녀석의 정신은 그 시산혈해 속에서 매우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여기서 내가 연진이 죽었다는 말을 하면, 어쩌면 녀석은 완전히 미쳐 버릴지도 몰랐다.

“…연진에게선, 아직 답변이 없다.”

나는 이를 악물고 거짓말을 했다.

“답변이 돌아오려면, 돌아오는 데에도 시간이 조금 걸린다.”

8차 점령지에서 연진에게 들려 보낸 괴뢰에게 연결되는 데 시간이 걸린 것은, ‘연결’되는 데에 시간이 걸릴 뿐.

연결이 되고 나면 시간은 걸리지 않았지만, 나는 거짓을 말했다.

녀석에게는 희망이 필요해 보였으니까.

한 줄기 희망이라도 주지 않는다면, 그대로 무너져 미쳐 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렇군. 알겠다.”

“연진에게서 답변이 돌아오면, 다시 말해 주마.”

나는 비겁하게도 거짓말을 했기에, 녀석에게 나를 도와 마족들을 지켜 달라고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다. 어차피 이번에 보인 흉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흉이었으니, 최대한 내 힘으로 해결할 수밖에.’

나는 총독부 바깥으로 나와 다시금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이틀이 지났다.

“…왔다.”

원영을 관조하던 나는 눈을 뜨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웅, 웅, 웅….

결계 너머에는, 수 명의 원영기 수사와 천인기 수사들이 즐비하였다.

지난번 전명훈과 싸워서 구멍이 났던 결계는 어느새 자가 수복이 되어 다시금 닫혀 있었다.

쿠릉, 쿠르릉….

하늘이 음기로 충천하며, 먹장구름이 덮였다.

그리고, 하늘 아래로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음(陰) 계열의 공법이군.’

나는 그들의 대표로 보이는 한 천인기 수사를 바라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마족들에게는 일단 지하로 내려가 대피해 있으라고 한 상황.

점령지의 지상에 남아 있는 것은 이제, 나와 총독부에서 쉬고 있을 전명훈뿐이었다.

‘어떻게든 내가 해결한다.’

천인기 수사 셋.

그리고 원영기 수사 여덟.

이 정도라면, 내가 어떻게든 할 수 있었다.

우우웅!

하늘이 울리며, 음기를 두르고 있는 흑포의 천인기 수사가 두루마리를 하나 꺼내 펼치고는, 읽기 시작하였다.

[인족 총연맹의 사자, 현신이 전한다. 인족의 배신자, 전 임시 총독 서은현. 그리고 학살마 전명훈은 나와서 순순히 총연맹의 체포를 받으라!]

“음?”

학살마 전명훈?

[특히 학살마 전명훈은, 1, 2, 3, 4차 점령지에 있는 무고한 인족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총연맹에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혔으며, 인족의 감찰관으로 파견된 사축기 수사를 격살한 죄를 물어, 저항한다면 즉결 처형을 하겠다!]

“….”

나는 입을 벌리며 전명훈이 있을 총독부 건물을 바라보았다.

‘저 미친놈, 도대체 여기까지 오면서 무슨 짓을 벌인 거냐?’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현신이라는 자를 바라보았다.

“저… 이런 상황에서 조금 웃긴 질문이긴 합니다만. 4차 점령지가 전명훈에게 박살이 났으면… 본래 작전은 어찌 되는 겁니까?”

내 질문에 현신의 얼굴은 물론이고, 그와 같이 온 이들의 표정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인족 총연맹이 덕분에 난리가 났다. 저 미치광이가 폭주하며 작전 지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덕에, 지금 총력전 계획이 전부 파탄 나 버렸다! 저놈은 죽여서 그 혼백조차도 총연맹에 끌려가 재판을 받아야 하는 처지다! 물론 전 임시 총독, 네놈도 인족 배신 혐의가 있는 바 재판을 받아야 하니 그리 알아라!]

“…그럼 한 가지 더 여쭙겠습니다.”

나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현신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면 계멸천공진 계획도 무산된 겁니까?”

만약 그렇다면, 마족들을 급하게 피신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 이들을, 죽이지 않아도 된다.’

마족들을 급하게 피신시키려는 이유는, 계멸천공진 계획이 시작되면 나와 인연을 맺었던 이들과 그들의 땅이 흔적도 없이 소멸되기 때문.

만약 계멸천공진 계획까지 무산되었다면, 나는 얌전히 이들에게 잡혀 줄 요량도 있었다.

마족들은 괴뢰를 부려 천천히 탈출시켜도 되니 말이었다.

그러나, 현신에게서 들려온 대답은 절망적이었다.

[무슨 소리! 계획이 파탄이 났다고 했지 무산되었다고는 하지 않았다. 본 사자가 속한 흑린어령문은 지족 중 흑룡족(黑龍族)과 깊은 관계가 있고, 다행히도 흑룡족의 합체기 흑룡왕(黑龍王)께서 이번에 본문과의 관계를 생각해 한 번 도움을 주신다 하니, 총연맹이 흑룡족에게 이권을 나눠 주게 될지언정 작전 자체는 크게 변하지는 않을 예정이다!]

“…그렇습니까.”

나는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한 가지.

‘이들을 제압하거나 죽인 후, 내 인연들을 빨리 피신시킨다.’

인족의 배신자가 되는 것을 감내하겠다!

내가 결의를 다졌을 때였다.

현신이 나와 전명훈의 기를 죽이려는 것인지, 버럭 일갈하며 외쳤다.

[여하튼, 죄인 서은현과 대역죄인 전명훈은 신성한 인족 총연맹의 체포에 순응하라! 응하지 않으면 서은현 네가 속한 창천개벽문도 불이익을 당할 것이며, 금신천뢰문의 마지막 생존자인 전명훈 네놈의 추후 행동에 따라, 금신천뢰문이 인족의 역사에 어찌 기록될지….]

그리고.

쿠르르릉!

총독부 건물이 폭발하며, 그 안에서 쉬고 있던 전명훈이 으르렁거리며 영언을 내뱉었다.

[…금신천뢰문의 마지막 생존자라니, 무슨 뜻이냐?]

[말 그대로다! 명귀계로 파견을 나간 금신천뢰문의 생존자들은 차원의 거리가 너무 멀어 생사불명이고, 이번에 진마계로 파견을 온 다른 금신천뢰문의 생존자 한 명도 최근 시운도에 있는 명적(命籍)에서 불이 꺼졌다!]

시운도는 인족에 속한 이들의 신분을 증빙해 주는 섬이었고, 시운도에는 명적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명적에는 시운도에 신분을 등록한 모든 인족의 생사를 알 수 있게, 인족의 생명반응을 통해 명적에 불이 들어오게 되어 있는 법술이 걸려 있었다.

인족의 생사를 총괄하는 명적은 인족 총연맹 소속 수사들만이 열람할 수 있었으며, 인족 총연맹은 명적을 통해 인족의 동향을 관리하였다.

그리고 현신의 말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런 젠장….’

결국, 전명훈이 연진의 죽음을 알아 버린 것이었다.

[다시 말한다! 두 죄인은….]

그리고 다음 순간.

파칙!

[신성한 총여….]

푸콱!

현신의 얼굴에, 세로로 핏줄기가 치솟았다.

잠시 후.

그의 몸이 그대로 절반으로 갈라졌다.

콰르르릉!

어느새 현신의 뒤에 날아든 전명훈의 손에는, 현신의 원영이 잡혀 있었다.

콰지지직!

녀석이 손을 움켜쥐자, 그대로 현신의 원영은 폭발했다.

쿠릉, 쿠르르릉!

현신이 불러온 먹장구름 안쪽에서, 시뻘건 번개들이 몸을 꿈틀거리기 시작하였다.

붉다!

전명훈의 경지는 원영기였으나, 어째서인지 놈의 의식의 크기가 점차 거대해지며 사방을 뒤덮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는 의념의 색을 보며 마치 시뻘건 핏빛이 천지를 덮는 듯한 착각을 느껴야만 했다.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지금껏 불안불안한 정신 상태로 휴식을 취하던 전명훈의 정신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명귀계에 간 동료들에게 가려면, 차원 간의 거리 때문에 200년은 걸린다. 그런데 남은 시간은 20년…. 그래서, 연진 한 명만이라도, 사문의 제자를… 단 한 명만이라도… 살리고자 왔거늘….]

뚝, 뚝….

전명훈의 두 눈은 흰자가 드러나게 뒤집혀 있었고, 눈가에는 피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 죽어 버렸구나. 모두 다… 그래….]

‘아아….’

나는 알 수 있었다.

전명훈의 정신이, 지금 이 순간.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나는 저런 정신을 가진 이들을 본 적이 있었다.

서휼과 괴군.

그리고 원립에게 북향화를 잃었던 나 자신.

심상이 암흑에 휩싸인 이들.

오늘.

[다 필요 없다. 모조리… 죽어 버려라.]

전명훈이, 완전히 미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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