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수선전-144화 (144/185)

연의 연 (3)

철컥철컥철컥철컥….

기관 장치들이 미친 듯이 움직이며, 하나의 풍광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운명은 곧 인력. 그 말은 곧, 운명은 뭔가를 끌어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지. 서휼의 계략에 놀아나던 먼 옛날, 놈과 함께 봉명성을 방문해서 운명의 인력을 느꼈을 때 떠오른 발상이다.”

사방의 풍광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괴뢰들의 몸에, 환영처럼 어떠한 형상들이 씌워지다, 종래에는 완전한 인간으로 변하였다.

기묘성채의 최상층에, ‘밤하늘’이 떠올랐고, 왁자지껄한 축제의 소리가 사방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운명이 형이상학적인 현상을 끌어오는 게 가능하다면. 어쩌면… 나의 과거, 그 시공간 역시 끌어오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김연이 서 있는 장소와 괴군이 서 있는 장소가 분리되었다.

아예 다른 이공간(異空間)이 창조되기 시작했다.

“봉명성의 모조품인 기묘성채를 만들었던 그날부터 꿈꿔 오고, 꿈꿔 왔다. 드디어….”

괴군이 환하게 웃으며, 괴뢰가 아닌 진정한 사람으로 바뀐 상대와 함께 부채를 들고 사위를 추기 시작했다.

조연이라는 인간이, 삶을 살며 가장 행복했던 순간.

두 남녀가 부채를 잡고 잔치를 즐기던 그때의 그 시공간(時空間) 그 자체가 기묘성채의 중앙에서 재현된다.

파츠츠츠츳…!

김연은 자신의 기력이, 눈앞의 시공간을 향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생명력까지 빨려 가면서도, 김연은 기묘성채를 움직이는 의식을 떼어 놓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와 은현 오빠를 지옥으로 밀어 넣고, 지금 뭘 하는 거야? 왜 당신만 행복해지려는 거야? 웃기지 마…!]

김연은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자신을 비롯해, 수억의 생명을 고통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악인이.

저 안에서 천국에 도달한 듯한 행복한 미소를 짓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었다.

기긱, 기기기긱!

기묘성채를 장악한 그녀의 의지가, 마침내 성채 최심부의 명령들에 닿았다.

철컥, 철컥….

기관 장치들이 하나둘 멈추며, 눈앞의 시공간을 무너뜨리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흠칫 몸을 떨었다.

‘생명이….’

눈앞의 시공간과, 그녀의 목숨이.

어느덧 완벽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으윽…!]

김연은 이를 악물었다.

어마어마한 기력이 눈앞의 시공간으로 빨려 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녀의 생명력이 모조리 빨려 죽을 상황.

‘안 돼, 안 돼…!’

하지만 그렇다고 눈앞에서, 그녀의 일생을 망친 악인의 목적이 이뤄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이럴 순 없어!’

그녀는 기묘성채의 기관 장치들.

그 움직임을 파악하며, 눈앞에서 구현되는, 과거의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을 것임을 짐작했다.

아마 저 춤사위가 끝나면, 다시 모든 것이 연기처럼 흩어질 터.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그녀의 기력이 빨리지 않아도 될 터였다.

생명력이 아슬아슬한 수준까지 떨어지겠지만, 그것만이 그녀가 살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김연은 그러기 싫었다.

‘왜, 왜 저 광인이 행복한 모습을 봐야 하는 건데?’

그녀와,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의 인생을 모조리 망쳐 놓은 악인.

그녀도 알고 있었다.

저 안쪽에서, 괴군 역시 생명력이 저 시간 속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아마, 괴군이 만들어 낸 이 시간이 스러지면 괴군 역시 빈사 상태가 될 터.

조금만 기다리면, 괴군은 그냥 죽을 터였다.

하지만.

‘저 미치광이가, 저렇게 행복에 휩싸여 죽는다고?’

뿌드득….

[용납 못 해…!]

파칵, 파칵, 파칵!

눈앞의 이공간을 향해, 그녀의 의식 실들이 점차 파고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김연은 점차 그녀와 눈앞의 이공간이 동화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푸콱!

그녀의 상단전이 과열되며, 그녀의 코와 눈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김연은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기어코 괴군의 작품을 파괴하려 손을 떨었다.

그때였다.

콰악!

김연의 손을, 억센 누군가가 잡았다.

서은현이었다.

* * *

나는 눈앞에서 만들어진 시공간과, 그것을 망가뜨리려 힘쓰며 기어이 자신마저 죽으려 하는 김연을 번갈아 보았다.

연이가 기묘성채를 장악한 후.

그 후부터는 웅성임이 사라졌기에, 비로소 이곳으로 올 수 있었다.

“연아, 그만해라.”

[오빠….]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왜요? 왜 저자는 저렇게 행복하게 죽어야 하고, 우리는 저자가 망친 인생 속에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요? 너무, 그건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이럴 순 없어…. 저자도, 평생을 좇아온 목적이 눈앞에서 무너지는 고통을….]

“연아.”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인생은, 원래 불공평한 게 아니냐?”

[예…?]

“이 세상은, 그래. 지옥이다. 불공평하고, 미쳐 있고, 고통에 신음하는 곳. 그게 이 세상이다. 하지만….”

그리고, 나는 그녀를 껴안아 주었다.

“그래도, 너와 내가, 마음을 주고받지 않았니.”

그 옛날.

누군가가 내게 가르쳐 주었다.

사막의 유리는 빛이 비취면 아름다운 보석같이 빛나지만, 빛이 비취지 않으면 날카롭고 위험한 흉물이 된다고.

내가 그녀를 잊지 못하는 것은, 그녀가 내게 준 마음 역시 컸으나, 그녀와 마음을 주고받으며 얻은 삶의 가치가 더 컸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순간만큼은 그녀를 잠시 잊고, 김연을 더욱더 꼬옥 안아 주었다.

“사람의 삶은, 지옥이지만. 우리가 마음을 주고받았다면, 어쩌면… 저기 저 미치광이보다 더욱더 좋은 천국에 이를 수도 있지 않겠니.”

톡, 톡….

내 어깨 위로, 그녀의 눈물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지금껏, 나는 네 마음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딱딱하고 차디찬 꼭두각시의 몸이었지만.

그녀의 마음이, 그 고통이, 그 설렘이, 그 마음이 전해져 왔다.

“나는 인형 속에서 줄곧 마음을 받기만 하고, 아무것도 네게 줄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제 끝이 다가왔으니, 이제 네게도 내 마음을 줄 수 있으니….”

스르르….

새하얀 실들에 휩싸여 있던 김연은, 어느새 다시 연분홍빛 경장을 입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네 마음을, 받아 주겠다.”

“…고마워요.”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내 품에서 울며 말했다.

“고마, 워요. 정말….”

파츠츠츳….

그녀는 더 이상 의식으로 눈앞의 공간을 파고들지 않았다.

더 이상의 동화는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기력이 저 공간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녀의 기묘성심전이, 기묘성채를 발동시킨 그녀의 힘을 공간 안과 강제로 연결시켜 놓았다.

언젠가 저 이공간이 스러지면 김연도 무사할 테지만, 저 이공간이 김연의 생명력을 다 먹어 치우고도 멀쩡할지 그렇지 않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김연과 저 공간의 연결을, 끊어야 해.’

우우웅!

나는 서 장군의 왼손에 기력을 모아, 김연과 공간 사이의 기력을 향해 휘둘렀다.

하지만 기력은 잘리지 않았고, 도리어 더더욱 원활하게 그녀의 생명력이 저 공간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 모습을 보다, 생각했다.

‘평범한 공격으론 연결이 끊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예 끊고 자르는 데에 특화된 공격을 해야 한다.

우우우웅!

나는, 서 장군의 몸으로 개조당한 후.

굉장히 오랜 시간 만에 무형검을 꺼냈다.

우우우웅!

조금 어색했지만, 어찌 되었든 내가 몸으로, 영혼으로 익힌 무학인 탓인지.

내 무형검은 다시금 자연스레 예기를 드러낸다.

‘벤다….’

쿠구구구구구!

무형검에, 사축기 급의 기운을 불어넣는다.

우우우웅!

동시에 내가 장악했던 괴뢰들의 기운 역시 끌어와, 무형검으로 불어넣기 시작했다.

스르르릉!

무형검이 더욱더 투명해지고, 종래에는 쥐고 있는 나조차도 그 감각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허허로워졌다.

‘벤다.’

무형검에 사축기 최정상급의 힘이 깃들며, 벨 수 없는 어떤 것이라도 벨 수 있을 정도로 강화되었다.

‘벤다!’

그리고 마침내.

예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나는 무형검을 휘둘렀다.

부웅!

파아아앗!

무형검이 그대로 눈앞의 기력을 가른다.

벨 수 없던 것조차 베는 검답게, 기의 흐름 역시 그대로 베여 나간다.

하지만.

‘크윽….’

괴군이 만들어 놓은, 이 거대한 흐름을 전부 베는 것에는 실패했다.

수많은 인공 혼들이 만들어 낸 의념.

그 무수한 의념들의 장대한 흐름이 만들어 낸, 눈앞의 시공간.

그 시공간이 빨아들이는 그 거대한 흡입력보다도, 더욱더 강한 힘이 필요한 것이었다.

‘시공간, 시공간 그 자체를 잘라낼 수 있다면….’

그 정도의 힘, 혹은 기예가 있다면 베어 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다시 한번….’

나는 다시금 혼신의 집중력을 다해 무형검을 휘둘렀다.

부웅!

하지만, 여전히 마찬가지.

나는 눈을 감고, 예전에 능광도를 흉내 냈던 그 감각을 떠올렸다.

내 심상으로 들어가, 능광도를 떠올려 염상한다.

나는 투명한 도산지옥 위에서, 도산의 예기를 받아 손 안쪽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부족하다….’

이 도산 전체를 움직여도 과연, 미치광이의 이 거대한 업적을 베어 내는 게 가능할까?

‘연이의 생명을 빨아먹는, 이 공간의 흐름을 베어 내려면….’

능광도도, 무형검도 뛰어넘는, 더욱더 강한 힘이 필요하다.

‘더, 힘이 더 필요하건만…!’

그때였다.

‘…?’

나는 문득.

내 심상.

투명한 도산의 가운데, 웬 이상한 것이 끼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녹색의 박도(朴刀)였다.

하늘을 향해 끝이 솟아 있는 주변의 도산검들과는 다르게.

그 박도는 저 혼자만 손잡이가 위쪽으로 가게 정직히 박혀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박아 놓은 것처럼.

덩그러니.

그리고.

나는 어쩐지 그 박도에서 어떠한 끌림을 느꼈다.

잡아라.

잡아라.

잡아라….

내 심상 속.

나는 내게 끊임없이 소곤거리는 그 박도를 향해,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박도의 손잡이를 쥐고, 내 도산에서 그것을 뽑아 냈을 때였다.

파아아앗!

“…!”

내가 쥐고 있던 무형검이, 그대로 녹빛으로 물들며 한 자루의 박도가 되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뇌리를 울렸다.

[구현 2단계라니. 제 스승보다 뛰어난 특이한 놈 같길래 내 일격을 네 심상에 꽂아 두었다.]

녹색의 작은 소인이, 내 옆에서 내게 말을 거는 환영이 스쳐 지나갔다.

[너는 괴군에게 역심을 가지고 있지? 네가 내 일격을 뽑아 들 날은 아마 괴군에게 역심을 드러낼 그날일 터. 네 몸에 조금 무리가 가겠지만….]

그 녹색의 소인.

함천존자, 장익.

나는 그자가 펼쳤던 기수식과 똑같은 자세를 잡고, 멍하니 눈앞의 힘의 흐름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녹색의 박도가, 떨어져 내렸다.

[사용한다면, 충분히 네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게다. 어떻게 네가 심족의 방식으로 구현 두 번째까지 닿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네 심상을 보아하니, 훌륭한 한 명의 심족이구나. 하니, 도움을 주겠다.]

파괴(破壞).

오직 그 두 글자만이 뇌리에 떠오른다.

아아, 이것은.

오로지, 모든 것을 파멸시켜 버리기 위해 만들어진 투법(鬪法)이다.

눈앞의 상대를, 거슬리는 대상을, 자신을 억압하는 것을.

그 모든 것을 모조리 박살 내어 놓기 위한 경지.

나와 김영훈과는, 또 다른 해답.

콰가가가각!

녹색의 박도가 그대로 공간 그 자체를 찢어발기며 전진한다.

거대한 힘의 흐름?

이 앞에선 애들 장난일 뿐이다.

모조리, 모조리 파괴해 버린다.

녹색의 일도가, 그대로 남은 기묘성채를 다시 반으로, 공간째로 박살 내어 버린다.

콰드드득!

천지가 녹광으로 뒤덮이고, 서 장군의 영력 회로 중 양팔의 회로가 모조리 그 출력을 이기지 못하고 타 버렸다.

내가 한창 끌어왔던, 기묘성채의 다른 괴뢰들의 영력마저 모조리 소진되어 버렸고.

동시에.

쿠구구구구구!

김연이, 괴군의 공간에서 떨어져 나왔다.

촤아아아….

그녀의 의식과 생명이 공급되지 않자, 괴군이 만들어 낸 이공간은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나는 완전히 망가져 버린 두 팔에, 어떻게든 일단 무형검을 씌워 움직이면서 튕겨져 나가는 김연에게 날아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

쿠과과과과!

기묘성채의 남은 부위 중 절반이, 그대로 박도가 빚어낸 파괴흔.

공간이 찢겨져 나간 그 너머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허공을 밟으며 괴군의 공간 그 옆으로 우선 자리를 옮겼다.

푸쉬이이….

얼마간 일렁이던 괴군의 공간이, 마침내 천천히 흩어졌다.

“드디어….”

“끝이네요….”

나는 김연을 내려놓았다.

과거의 공간이 무너져 내린다.

다시금 기묘성채의 최상층에 남은 것은, 우뚝 멈춰 버린 괴뢰들뿐이었다.

[그녀] 역시 과거의 모습에서, 다시금 괴뢰의 형태인 지금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괴군은 아까보다도 폭삭 늙어 버린 상태로 [그녀]와 손을 맞잡고 웃고 있었다.

기력이 전부 소진되어, 한 줌의 생명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는 괴군에게로 다가갔다.

털썩!

그리고, 우리가 괴군에게 다가가자.

괴군은 [그녀]와 함께 그대로 쓰러졌다.

“죽었군.”

“…그러네요.”

미치광이의 목적은, 죽은 이를 살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그 순간을.

그 시공간을 다시금 소환하여, 그 안에서 죽는 것이었다.

나는 주변의 괴뢰들을 바라보았다.

“…왜, 이 미치광이가 가짜 영혼을 만들려 했는지, 이제야 밝혀졌네요….”

김연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괴군의 기묘성채를 장악하고, 그녀의 손으로 이 시공간을 완성했기 때문일까.

그녀는 뭔가를 알아낸 듯했다.

“괴군은, 운명이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듯. 사람 역시 운명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으로, 지금껏 수많은 가짜 영혼을 만들었던 거예요.”

기묘성채를 완성시킨 그녀의 입에서, 기묘성채의 비밀이 흘러나왔다.

“수많은 가짜 영혼을 움직여, 운명에 영향을 미쳐 인력을 만들어 내고. 그 인력을 통해, 자신의 과거. 가장 행복한 순간을 다시 불러내어 재현하자. 그게, 이 광인의 목적이었던 거죠.”

김연은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나 역시 그녀의 옆에 앉았다.

영력 회로에 영력이 한 올도 없었다.

그녀 역시 어마어마한 일을 겪었던 터라 힘이 빠진 것인지.

힘없는 표정으로 내 어깨에 기대, 죽은 괴군과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다 끝났어요.”

“…그래.”

길었다.

정말 길었다.

우리는.

드디어 마침내.

괴군의 손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그녀는 작게 웃으며, 영력 회로가 타 버려, 이제는 움직이지 못하는 내 손을 꼬옥 잡았다.

“은현 오빠.”

“응?”

“할 말이 있는데요….”

그리고.

쿠구구구구구!

하늘 위쪽에, 거대한 결계가 펼쳐졌다.

파아아앗!

결계진의 중앙에는, 한 마리 푸른 용이 위엄 넘치게 그려져 있었다.

결계진의 너머에서, 서휼의 목소리가 들렸다.

[함천존자께서 말씀해 주셔서, 다행히 그분의 공격을 좌표로 잡을 수 있었습니다. 후후, 노야. 지금 살아 계십니까? 아니면 존자께서 숨겨 두신 일격을 맞고 드디어 눈을 감으셨습니까? 너무 멀어서 상황은 잘 모르겠군요.]

우우우웅!

결계의 중앙으로, 힘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런…!”

나는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힘이 풀린다.

함천존자의 일격을 쏟아 낸 직후인 탓인지.

전신이 망가져 있었다.

괴군의 기묘성채를 한참 발동시킨 김연 역시 손가락 하나 들지 못하는 상황.

그녀는 괴뢰들을 조종해 보려 했으나, 남은 괴뢰들조차 얼마 없었고, 그마저도 망가진 것들이 대다수였다.

[노야께서 돌아가셨을 수도 있으나. 만에 하나라도, 정말 만에 하나라도 노야께서 살아 계신다면 매우 곤란해집니다. 하오니, 질긴 목숨 붙잡지 마시고 이만 눈을 감으시기를.]

쿠구구구구!

결계진의 중앙에 있는, 용의 문양이 꿈틀거리며 살아 움직인다.

동시에 용의 주변으로 온갖 기이한 선수(仙獸)들이 나타난다.

[드디어 우리의 악연이 끝나는군요. 제 평생의 호적수에게, 이 서휼이 경의를 표합니다. 자, 그럼….]

쿠구구구구!

[부인, 발동해 주시지요.]

번쩍!

선수들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환영이 되어 진 아래로 나타났고, 그들이 각자 입을 벌렸다.

거대한 빛이 천지간을 메웠다.

나는 천천히 떨어지는 그 빛살을 보며, 옆의 있던 김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체념한 눈빛이었다.

“…은현 오빠.”

“…연아.”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한 가지, 허락을 구해도 되겠니?”

“뭔가요?”

“앞으로.”

나는, 눈을 감으며 말했다.

눈물이 말라 버린 몸이었으나,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만약 우리에게, 다음 생이 있다면… 그다음 생에도. 네가, 지금까지 나와 함께해 온 네가 아니더라도….”

주변이 하얗게 물들었다.

“계속, 계속 네게 이 마음을 전해도, 괜찮겠느냐?”

잠시 나와 눈을 마주치던 그녀가 빛무리 속에서 웃었다.

“은현 오빠, 제 비밀 말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엄청난 비밀 하나 알려 드릴까요?”

“잠깐….”

“저는 사실….”

잠시 머뭇거린 김연은, 어떤 꽃망울보다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은현 오빠가 너무나 좋아요. 그러니… 그렇게 해 주세요.”

“…그거 정말.”

빛에 휘말려, 전신이 사라진다.

나는 옅게 웃었다.

“굉장한 비밀이구나.”

조연의 연회 끝에서.

김연의 연심을 확인한 나는.

연(戀)의 연(緣)을 끝맺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천 년을 넘게 서로 함께해 온 두 인형은.

고통으로 점철된 삶의 끝에서.

빛무리 속에 잠겨, 마침내 입을 맞추었다.

그것이, 서은현의 열네 번째 회귀(回歸)였다.

14회차의 첫날

몇 번을 맡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불쾌한 감각.

죽기 직전의 상황과는 완전히 다른 모든 상황.

즈우웅!

발밑의 비선대에 결계가 펼쳐지며, 주변 공간 파동이 안정된다.

광한계로 비승한 직후의 상황.

그리고.

지난 생의 막바지에 들렸던, 그 역겨운 목소리.

“선택하시게. 우리는 이제 각자 광한계 선배분들의 인도에 따라 흩어질 것이니, 자네는 어떤 세력과 함께 가겠는가?”

나는 눈을 깜빡거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금벽호.

허곽.

청문선우.

서휼….

그리고.

괴군.

나는 주변을 한 번 쭉 둘러본 후.

괴군의 옆에 쓰러져 거품을 무는 중인 김연을 쳐다보았다.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나는 서휼의 답은 기다리지 않고, 바로 괴군의 옆에 쓰러져 있는 김연에게 다가갔다.

괴군의 눈에 이채가 어렸으나, 나는 그의 시선을 무시하고, 바로 기절한 김연의 요혈을 짚었다.

“으, 으헉!”

김연은 헛숨을 들이키며 자리에서 눈을 떴다.

“어, 어…? 여긴, 서 대리니….”

그리고, 나는 김연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

바로 그녀를 꼬옥 안아 주었다.

“호오오….”

괴군이 흥미로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고, 다른 이들의 눈에 당황이 서렸다.

“연아.”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좋아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좋아하겠다.”

지난 생의 그녀와 맺은 약속.

앞으로도, 후생으로 이어져도 계속.

다음 삶의 김연이 내가 아는 그녀가 아닐지라도.

몇 번이고 사랑하겠다고, 그렇게 말하였다.

그러니, 나는 거리낌 없이 그녀를 안고서 말하였다.

“예, 예…?”

김연은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듯.

얼떨떨해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 아니… 어, 꿈인가?”

나는 그녀를 껴안고, 무형검은 드러내지 않은 채 그녀의 몸에 혈체의 법력을 불어넣었다.

그녀의 체내에 작은 법술이 하나가 새겨졌다.

앞으로도 계속 그녀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을 터였다.

거기에 기묘성채의 영력 회로를 참조해 만든 것이라, 기묘성채 안쪽에 있는 한 괴군에게 들킬 염려도 없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녀를 조금 더 껴안아 준 후.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조연 대인.”

미치광이에게는 미치광이의 논리로 말하지 않으면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 미치광이와 함께하며, 미치광이의 논리는 충분히 깨달았다.

“연이는 훌륭한 괴뢰사의 자질을 지닌 이입니다. 그녀의 동료였던 저였기에 알 수 있지요.”

“호오…?”

“하니, 그녀를 훌륭한 괴뢰사로 키워 주십시오. 언젠가 제가 기묘성채에 들어가, 당신의 [주민]이 되겠습니다. 기묘성채의 [주민]이 된 채로, 괴뢰사가 된 연이에게 조종당하고자 합니다. 최대한 완전한 괴뢰사에게 조종당하고 싶으니, 그녀를 최대한 개조하지 말아 주십시오.”

나는 그의 앞에서 내 연심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괴뢰가 되어 부려지고 싶다.

괴뢰에게 미친 미치광이에게 이것만큼 잘 먹혀드는 논리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괴군은 두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마구 쳤다.

“아아아…! 아름답구나! 좋아, 좋아! 그렇게 하겠다! 내가 이 아이를 잘 가르치지. 한데, 그 말은 너도 지금 당장 [주민]이 되겠다는 것이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지금 상태의 저를 개조하시면, 그저 축기기 급 괴뢰 하나를 얻을 수 있으실 것입니다. 저는 그런 약한 괴뢰가 되어서 연이에게 부려지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하니, 더욱더 훌륭한 괴뢰가 될 수 있도록 수련을 하고, 언젠가 제 발로 기묘성채로 찾아가겠습니다.”

“아아아아아…!”

괴군은 감동의 눈물을 쏟아내었다.

“이 얼마나 훌륭한 녀석이란 말인가! 좋다, 좋다! 언제라도 너를 위해 기묘성채의 문을 열어놓으마!”

김연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우리의 대화를 쳐다보았고, 괴군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감격에 젖은 채로 눈물을 훔쳤다.

미치광이의 논리에 잘 맞춰서 설명을 하니, 확실히 알아들은 모양.

‘이게 최선이겠지.’

나는 괴군에게 인사를 하고 뒤돌았다.

지금 당장 저 미치광이에게서 김연을 데려올 순 없다.

제 것을 뺏으려 한답시고 오히려 더욱더 발작하며 날뛸 게 눈에 뻔했기 때문이었으니….

나는 괴군에게서 등을 돌리고, 다른 세력들을 쳐다보았다.

누구에게 갈지는 당연히 정해져 있었다.

‘우선….’

“창천개벽문의 시조이시자, 대청문세가의 시조이신 창호자 청문선우 님의 명성은 예전부터 흠모해 왔습니다. 청문세가의 인물들과도 이전부터 연이 있었던 바, 창호자 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벽라국어로 말하며 창호자에게 포권을 취했다.

창호자는 호탕한 얼굴로 팔짱을 끼며 말했다.

“으하하하! 좋다! 본 창천개벽문은 사람을 가리지 않으니, 너도 훌륭한 본문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녹갑 목인이 지난번처럼 우리에게 각자 세력으로 가라고 말을 했을 때였다.

“싫어싫어싫어싫어… 내게 명령을 내리지 마라…! [그녀]가 말하고 있다! 조용!”

괴군이 발작을 하며, 상자를 열고 기묘성채를 꺼내 들었다.

쿠구구구구!

그리고, 지난번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서휼은 황급히 규련과 요족 무리들을 이끌고 달아났고, 창호자는 익숙한 표정으로 결계를 쳤다.

쿠구구구!

푸른 결계가, 내 주변을 뒤덮었다.

쩌엉, 쩌엉, 쩌어어엉!

하늘이 번뜩이며, 괴군과 사축기 수도자들이 부딪힌다.

그리고.

촤아아악!

괴군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녹갑 목인을 기묘성채로 포획하여, [그녀]와 함께 저 멀리로 도망쳐 버렸다.

[저 미치광이 놈!]

[놈에게 수배를 내려라!]

비선대에 있던 사축기 수도자들이 노한 표정으로 괴군을 향해 일갈했다.

괴군을 향해 길길이 날뛰던 사축기 수도자들이 분기탱천해 있던 중.

창호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너는 정말로 괴뢰가 되기 위해 저 미치광이를 찾아갈 거냐?”

나는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저, 그 옆에 쓰러져 있던 사람이, 제가 좋아하던 사람인지라 그리 말만 했을 뿐입니다.”

“하하하! 훌륭하구나! 동료를 생각해서 괴군 그 미치광이를 속여넘기다니!”

창호자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파스스….

창호자가 결계를 풀었고, 금벽호와 허곽 역시 결계를 풀며 웃었다.

“거 걸물이구나. 그 미치광이를 속여 동료의 안위를 보장하다니.”

“귀골곡으로 왔어도 잘 해 주었을 것을. 안타까운지로고.”

허곽은 특유의 중성적인 외모로 나를 쳐다보며, 혀를 핥았다.

나는 그에게도 예를 차리며 말했다.

“청색귀골곡의 원로, 송진 님과도 작은 친분이 있는지라 저도 조금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오호, 송 원로와?”

“예, 괴군과의 일전에서 박살 난 섭명함을 지키시기로 하시며 하계에 남아 계시기로 하셨던 대단하신 분이시지요.”

“허어, 이거 송 원로와도 안면이 있었다니, 정말 안타깝군. 이곳으로 왔다면 잘 해 줬을 텐데.”

“하하, 이전부터 청문세가와 안면이 있었는지라….”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허곽과도 잠시 안면을 튼 후.

바로 금벽호에게도 읍을 하며 말했다.

“금신천뢰문의 태상 장문인께, 이 서 모가 한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그래, 뭐지?”

우리의 대화를 흥미 있게 지켜보던 금벽호가 물었다.

나는 돌려 말하지 않고, 그대로 일단 물어보았다.

“혹여, 금신천뢰문의 선보, 천뢰번에 대한 것을 알고 계십니까?”

“…? 당연한 소리를. 본문의 신물인데 그럼….”

“그렇다면….”

나는 망설일 것 없이 바로 금벽호에게, 하계에 있었던 그 비석의 윗부분에 대한 내용을 들려주었다.

“…하여, 4만 년 전의 대전쟁으로 인해 그 비석의 윗부분이 훼손되었으며. 그 내용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선보 천뢰번을 지니고 있으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그리고.

콰르르르릉!

하늘에서 벼락이 나를 향해 내리꽂혔다.

“…!”

나는 이를 악물고 쓰러지며 벼락을 맞았다.

[이 방자한 놈이, 듣자 듣자 하니 본문의 선보에 대해 네놈이 뭘 안다고 멋대로 지껄이는 것이야…!? 네놈 말이 사실이라는 증거가 있느냐? 만약 그런 걸 알았다면 왜 지난번에 만났을 때 말하지 않은 것이냐?]

쿠릉, 쿠릉!

금벽호의 전신이 황금빛 번개에 휩싸여, 마치 뇌인처럼 변모하였다.

[혹시 지난번 하계에서 만났을 때는 몰랐다, 이딴 소리를 지껄이지는 않겠지? 우리가 비승하는 며칠의 시간 동안 네놈이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금신천뢰문 옛 사당을 찾아내어 그 사당 한가운데에 있는 비석의 윗부분을 찾아내, 고대어를 해독해서 그 정도를 알아냈다는 말은 아닐 테고 말이다.]

“….”

정확하게 맞췄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자기를 능멸한다며 더욱 분노할 것이 어째 눈에 선했다.

[개벽문에 들어간 것을 다행으로 여겨라! 창호자의 체면을 봐주지 않았다면 당장 네놈을 잿더미로 만들고, 혼백을 뽑아 귀골곡에 팔아 버렸을 테니…!]

파지직, 파직…!

다시금 황금빛 번개를 체내로 들이마신 그는 등을 돌리며 비선대에서 멀어졌다.

그와 함께 올라온 금신천뢰문의 여러 천인기 수도자들 역시 그를 뒤따라 갔다.

“흠흠, 솔직히 네 말은 신빙성이 그리 높지가 않으니, 금 장문인이 저리 반응할 수도 있지. 차후에 네가 열심히 수련하여, 네 말이 무게를 가지게 되었을 때 다시 말해 보려무나.”

툭툭!

창호자가 내 어깨를 쳐 주자, 푸른빛 영기가 몸을 뒤덮으며 상처를 재생시켜 주었다.

“…감사, 합니다.”

우우우웅!

그리고, 하늘 위쪽에서.

괴군을 추격하다 실패한 모양인지, 몇몇 사축기 수도자들이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일단 다들 신분 증명 패부터 만들도록 하지. 다들 나를 따라오게.]

사축기 수도자의 안내에, 금신천뢰문, 창천개벽문, 흑색귀골곡.

그리고 정, 마 선파 연합 기타 등등이 그를 따라갔다.

우리는 비선대에서 내려가, 장소를 이동하였다.

* * *

[이곳은 건곤중역이라고 불리는 영역의, 건곤성(乾坤城)이라고 불리는 곳일세.]

피부가 푸른 이종족 사축기 수도자가 우리를 인솔하며 설명을 이어 갔다.

[광한계의 기운이 열리며, 하계와 이어지는 공간 균열이 있는 곳이기에 비선대를 짓고, 하계에서 온 이들을 관리하는 장소지. 수많은 종족이, 수많은 하계에서 비승하는 장소니만큼, 이곳에는 어떤 전쟁도 없고 어떤 분쟁도 없네.]

‘수많은 하계라….’

역시나, 수계 말고 다른 하계들도 존재했던 모양이었다.

‘지난 생에는 그저 꼭두각시로만 수많은 세월을 살아온 탓에 제대로 된 정보를 접할 길이 없었다.’

기껏해야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언제 일어나느냐, 그 정도만 알 뿐이었다.

우리는 사축기 수도자를 따라, 건곤성의 여러 문을 지나며 어딘가로 이동했다.

그리고, 건곤성의 문 중 커다란 푸른 옥빛 문을 통과했을 때.

와글와글….

우리는 어마어마한 인파들을 볼 수 있었다.

“호오, 이들은 뭐요?”

창호자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나는 살짝 질려 하며, 대전에 있는 이들을 쳐다보았다.

하나하나가 전부 천인기 수도자였다.

[자네들과는 다른 하계에서 비승한 이들이지. 자네들이 통과한 것과는 다른 비선대를 이용해서 올라왔네. 건곤성에는 비선대가 그곳 말고도 상당히 많으니까.]

말을 마친 사축기 수도자가, 대전 위로 날아가 소리를 쳤다.

[성계(星界)에서 비승한 수도자들은 저쪽으로, 부해계(腐骸界)에서 비승한 수도자들은 저쪽으로 향하게!]

그 말에, 수십 명의 수도자들이 각각 다른 곳으로 향했다.

창호자는 그 말에 사축기 수도자를 보며 물었다.

“성계는 또 뭐고, 부해계는 뭐요?”

[아, 자네들한테는 아직 설명을 안 해 줬군. 대강 알기 쉽게 설명해 주자면… 자네들의 땅은 평평했나, 둥글었나?]

“음…?”

[땅이 평평하고,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세계가 보호받는 하계는 부해계라고 통칭하고. 땅이 둥글고, 하늘로 무한히 뻗어 나갈 수 있는 하계는 성계라고 함세.]

그 말에 창호자와 다른 이들은 부해계를 바라보았다.

“그럼 우리는 부해계인가 보군.”

창호자가 부해계 비승 수도자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고, 금벽호와 백골귀마 역시 각기 문파 천인기 원로들을 데리고 그들 사이로 들어갔다.

다른 하계에서 비승했다는 천인기 수도자들은, 사축기 초기의 기운을 뿜어 대는 창호자, 백골귀마, 금벽호를 보며 슬금슬금 뒤쪽으로 물러났다.

[자, 그럼 신분 증명 패를 발급하겠네. 모두….]

창호자와 천인기 원로들, 그리고 그들을 따라온 원영기 수도자들은 각자 신분 패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하계에서 데려온, 수많은 종문의 제자들은 모두 증빙 패를 받을 수는 없다고 했다.

[이런 빌어먹을! 자기 종문을 데리고 단체로 비승했다는 게 말이나 된단 말이오!? 공간 압력이 정신 나간 수준으로 늘어날 텐데, 그게 가능하다고!?]

신분 증빙 패를 만드는 역할의 건곤성 사축기 장로가 얼굴을 찌푸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 보였다.

[수백만 명씩이나 다 되는 저놈들 증명 패를 내가 다 만들어야 한다고!? 미친 소리 하지 말아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도대체 어떤 괴물딱지들이 제 문파를 통째로 뜯어서 단체 비승한단 말이야! 아무리 저들이 압축 공간 내에서 진법을 펼쳐서 부담을 덜었니 뭐니 해도, 상리에 맞지 않는 말이야!]

얼마간 실랑이를 하던 장로의 말에 따라, 결국 세 종문의 제자들은 인족 영역으로 따로 가서 증명 패를 받기로 하였다.

그리고.

쿠구구구구!

우리는 각자 각 종족에서 마중 나온 사축기 수도자들에 따라.

건곤성에서 각 종족 영역으로 흩어졌다.

“허허, 미쳤군. 이번 비승에서 이만큼씩이나 우리 인족이 단체로 비승을 하다니….”

그리고, 우리를 마중 나온 사축기 인솔자.

허령이라고 하는, 흑색귀골곡의 선조 중 한 명이라는 자가 어이없다는 듯 우리를 보며 말했다.

“정말… 내 후대지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선조님께 허곽이 인사 올립니다.”

“…들었다, 올라오자마자 사축기에 올랐다고. 도대체… 이번 기수들은, 후우….”

허령은 잠시 우리를 둘러보더니, 혀를 내두르고는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럼 일단 다들 따라와라! 인족 영역으로 간다!”

그리고, 다른 하계에서 비승한 인족들을 비롯해.

세 문파의 사람들은 각기 비행법기를 꺼내 들어 인족 영역으로 향하였다.

파아아앗!

나와 오현석 차장은 우선 창호자가 꺼내 준 비차 법기에 타서 날아갔다.

나는 무형검으로 그대로 날아갈 수도 있었지만, 혹여라도 심족 첩자로 오해받을 수 있었기에, 무형검을 체내 안쪽에서 조금씩 풀어헤치며 없애 갔다.

사축기 수도자들이 맨 앞에 앞서 날아갔고, 나와 오 차장이 탄 비차는 창호자의 바로 뒤에서 그를 따라갔기에, 나는 사축기 수도자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선조님, 혹여 광한계에 대해 대략적인 설명을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래, 어렵지 않지. 너희들에게 내려 준 정보도 있겠지만, 우선 설명을 하자면….”

허령의 입에서, 광한계에 대한 정보들이 흘러나왔다.

“광한계는 삼 대 종족이 존재한다. 천족(天族), 지족(地族), 심족(心族).”

“음? 하지만 아까 있었던 대전에는 훨씬 더 많은 종족이 있었던 것 같은데….”

뒤에서 따라오던 천인기 수사 중 한 명이 의아한 듯이 혼잣말을 했고, 그 말을 들은 허령이 대답해 주었다.

“맞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종족이 있지. 하지만 그 모든 종족을 전부 알 수 없으니, 광한계에서는 종족들의 특징을 크게 셋으로 나눠, 천, 지, 심족으로 나눈 것이다.”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삼 대 종족을 나누는 기준은 딱 한 가지, 바로 [시야]다.

천족(天族)은 자기 종족에게 맞는 제사법을 찾아내, 하늘에 제사를 지내어 천기를 읽는 눈을 지닌 종족. 우리 인족도 여기에 포함된다.

지족(地族)은 육신을 단련하고, 단련해서 육신의 한계를 이끌어 내, 특정 감각을 개화하여 대지의 영기를 읽는 눈을 지닌 종족. 주로 짐승에서 태어난 요족(妖族)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심족(心族)은….”

나는 귀를 더욱더 기울이며, 허령이 말하는 심족에 대한 설명에 집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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