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의 연 (1)
“…있었, 구나.”
눈물을 닦는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서는 닦아도 닦아도 계속 눈물이 흘렀다.
“왜, 이제야 온 거예요.”
월도입천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심상 그 자체는 볼 수 있다.
그리고 심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심어(心語)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얘기.
나는 심어를 통해 내 뜻을 전했다.
심어의 경우 두루뭉술하고, 장면 그 자체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아 언어로는 표현이 어려웠으나.
뜻 그 자체를 전하는 것이기에 바로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 그렇구나. 제가 조금만 더 버티고, 기묘성심전을 더 잘 수련했으면 진즉 볼 수 있었던 거네요. 아핫….”
김연은 지난 세월이 서러웠던 것인지.
웃으면서도.
감정을 토해 내듯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바보같이… 정말 바보같이… 뭘 해 온 건지….”
나는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김연은 계속해서 울다 웃으며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계속… 노력해 오고 계셨군요.”
그녀는 계속해서 내 심어를 정확하게 전달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월도입천에 이르지 못한 이들에게는 심어를 전달해 봤자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이 시야를 가지게 된 이들은 심어를 확실히 전달받는 것이 가능했기에, 누구도 모르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렇군요. 계속, 계속 버티고 있었군요.”
우리는 오랜 세월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괴뢰들 사이에서 지독한 고독감과 광기에 휩싸여 지냈던 그녀도.
500년이라는 세월 동안, 천천히 동료가 미쳐 버리는 꼴을 그저 보고만 있어야 했던 나도.
“고마워요, 오빠. 버텨 줘서….”
“아하하, 괴군한테는 심상을 숨기고 있었다고요? 어떻게 한 거예요?”
“역시… 오빠는 심상에 한해서는 괴군보다 더 높은 경지에 있는 거군요.”
“이렇게, 제대로 대화를 나눠 본 게 얼마 만인지… 하하, 오빠도 그렇다고요?”
“아, 그런데 우리. 누가 보면 저만 혼잣말하고 있는 줄 알겠어요.”
그녀는 깔깔거리며, 진심으로 기쁜 듯이 서 장군의 몸을 껴안았다.
“…뭐, 아무렴 어때요. 진실을 모르는 놈들은 신경 쓸 것 없어요.”
김연은 소중히 서 장군을 껴안으며 계속해서 대화를 주고받았다.
* * *
괴군은 문득 기묘성채의 최상층에서 괴뢰들의 일상을 지켜보던 중.
아래쪽의 한 곳에서 소중히 서 장군을 껴안은 김연이, 서 장군과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목격했다.
“…오오.”
괴군은 감격한 모습으로 그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아름답군. 드디어 괴뢰 속에 숨겨진, 진정한 마음을 보는 법을 깨달았구나. 그래, 훌륭하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옆에 서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보시오, 제자도 드디어 나와 한없이 가까워졌구려. 이제… 어쩌면 몇백 년만 더 기다리면, 당신을 완성할 수 있겠어….”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마치 유리 공예품을 쓰다듬듯, 천천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 * *
“…그나저나 오빠. 만약 오빠가 이런 상태라면, [그녀] 역시 어쩌면….”
김연은 내게 [그녀]에 대해 물어 왔다.
“…예? 정말인가요? [그녀]는 오빠처럼 아직 남아 있는 상태가 아니군요. 그렇다면, 괴군 그자가 중얼거리는 건 정말로 미쳐서였던 건가요?”
나는 내가 알아낸 사실들을 심어로 전달해 주었다.
“…미쳤군요. 영혼마저 제작하려 하다니. 그나저나 저는 그런 걸 알아차리지는 못했는데, 오빠는 어떻게 그런 걸 안 거죠?”
“아, 그렇군요. 직접 괴뢰가 되어서 보는 시야와, 인간의 시야는 차이가 있는 건가요?”
“어쨌든 오빠의 말대로라면… 기묘성채를 벗어나려면, 오류를 만들고, 그 오류를 만들 때 괴군에게 틈이 생기는 순간을 노려야 한단 건가요?”
정겨운 대화를 나눈 후.
우리는 괴군의 손아귀에서 도망칠 방안을 의논했다.
철컥, 철컥….
김연은 왼손을 움직였다.
그녀의 왼팔은 어느덧 괴뢰로 개조되어 있었다.
“기묘성채 안에서, 괴군은 신(神)이나 다름없으니… 이 안에서 틈을 만들려면 오빠가 기묘성채 전체를 장악해도 부족해요. 차라리 외부의 원조를 기다리거나, 제가 경지를 올리는 걸 기다려야 해요. 하지만, 아무래도 둘 다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리겠죠.”
괴군의 괴뢰들 중 합체기 괴뢰들 역시 어마어마하게 늘어나 있었다.
거기에, 김연의 말에 따르면, 괴군은 어느새 쇄성기 괴뢰를 만드는 방법 역시 점차 찾아내는 중이라고 했다.
시간이 지나, [그녀]가 쇄성기 괴뢰가 된다면 정말로 막을 수 없다고도 하였다.
“물론, 1천~1천5백 년 정도만 있으면 저도 최소 합체기에는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어쩌면 그때가 되면, [그녀]가 아무리 강해도 한번 해 볼만은 하겠죠. 그 괴군조차도 쇄성기 괴뢰를 만드는 것은 지금 머리가 아픈 모양이니… 시간이 상당히 걸릴 거예요.”
김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기다리긴 힘드니, 어쩌면 외부의 도움을 받는 게 더 빠를 수도 있어요. 강민희 언니를… 토벌하는 토벌군이 민희 언니를 토벌하고 나면, 어쩌면 우리 역시 토벌하러 올 수도 있어요.”
강민희 대리는, 현재 굉장히 무시무시한 뭔가로 변태하기 직전이라고 했다.
그 때문에 합체기 수도자들이 모여 그녀를 토벌할 예정이라 했고.
강민희 대리를 토벌하고 나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뜻이었다.
“…참, 절망적이네요. 다들. 전 과장님은 미쳤고, 오 차장님도 미쳤고, 민희 언니는 불가사의한 괴물이 되었고, 혜서 언니는 감감무소식… 우리는 둘 다 미치광이한테 잡혀서 개조받았네요. 김 부장님은 죽었을… 예? 살아 있을 거라고요? 후후, 농담도. 비승도 못하셨잖아요?”
그녀는 내 말에 웃으며 말했다.
“회사에서는 서로 데면데면하셨으면서. 왠지 굉장히 김 부장님을 믿으시네요? 그분 굉장히 착하시긴 하지만, 회사 사람들이랑 모두 데면데면했어서….”
김연은 회사 이야기를 꺼냈다.
‘그랬던가.’
나는 오랜만에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잘 생각은 안 났지만.
그녀에게서 이야기를 듣자, 조금씩 생각나는 게 있었다.
확실히.
김영훈과는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그리고 김연과도 원래는 무난한 사이였다.
내가 그녀의 사수였고, 날 잘 따랐던 신입 사원이었던 게 김연이었었다.
‘굉장히, 오랜만에 떠오르는군.’
그녀와 오랜만에 대화를 나누다 보니.
아무래도 깊숙히 묻혀 있던 기억들이 조금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아니, 연이 입장에선 무난한 사이라고 하면 서운하겠군.’
나는 몰랐지만, 그녀는 꽤 열정적으로 호감을 드러냈던 모양이니까.
오랜만에.
평범한 인간이던 시절의 기억을 추억하였다.
김연과 처음 만났던 날.
그녀에게 일을 천천히 가르치던 날.
김연이 서류를 잘못 전달해서 사수인 내가 다 책임지고 서류를 처음부터 다시 제출했던 일.
회식 자리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 나서 김연이 술에 꼴아 내게 매달려 엉엉 울다가 토했던 일.
믿고 의지했던 사람, 서로 싫어했던 사람, 나를 괴롭혔던 사람, 내가 좋아했던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은 누군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김연과 관련된 기억들만이 저 기억 너머에서 떠올랐다.
우리는 잠시 동안 회사 일들을 추억하며, 그에 대한 대화도 나누었다.
그리고, 나는 대화를 나누며 마음을 다잡았다.
얼마가 걸리든.
‘꼭, 탈출하자. 연아.’
“네. 은현 오빠.”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굳은 마음을 나눴다.
다시금, 500여 년이 흘렀다.
* * *
쿠구구구구!
기묘성채가 하늘을 난다.
광한계에 온 지도 거의 천여 년.
그 사이에 괴군에게 더욱더 개조받은 기묘성채는, 이제 어느덧 순수한 비행 성능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를 자랑했다.
쿠구구구구!
그리고, 기묘성채 뒤로 수십억에 달하는 괴뢰들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어느덧 합체기 급 괴뢰 역시 백여기에 달했고.
[그녀]는, 쇄성기 급에 도달했다고 하였다.
어디까지나 괴군의 말에 의하면 말이었다.
나는 김연의 옆에서 기묘성채의 괴뢰들을 통솔했다.
김연은 어느덧 사축기 중기에 도달했다.
이제 그녀의 전력은 사실상 합체기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래 봤자 괴군에게서는 아직도 벗어나기가 요원했으나.
나와 그녀의 마음은 상당히 풀려 있었다.
“…이번에는, 가능하겠죠? 이번에 있을 혼란을 생각하면.”
‘분명, 그럴 거다.’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후.
쿠구구구!
저 지평선 너머로, 수억에 달하는 종족과, 수백에 달하는 합체기 수도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에는 인족도 있었고, 요족도 있었다.
“하, 이게 누구야? 여기가 어디라고 이 뱀 새끼가 발을 들여?”
그리고.
요족 중에는 서휼 역시 사축기 최정상에 도달한 채로 나와 있었다.
“오랜만이군요. 지난 천 년간 광한계 전역에 명성을 떨치신 노야의 소식에, 같은 수계 출신으로….”
“아가리 닥쳐라. 입을 찢어 버리기 전에. 그나저나 이놈, 몸에 걸치고 있는 기이한 법보들이 많아졌구나? 그것들의 효용인 게야? 이전처럼 속이 안 읽히는데?”
김연도 그랬고, 나 역시 서휼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서휼은 천 년 전과 달리, 도저히 월도입천의 시야로도 속을 읽을 수가 없었다.
뭔가 희뿌연 장벽 같은 것이 시야를 차단시키고 있었다.
“하하, 광한계 종족들이 심족의 시야를 두려워한다는 거야 유명한 일이지요. 때문에 이렇게 심족의 그 눈을 가리는 법보가 개발된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나저나, 노야께서도 대단하시군요. 수계에 있을 때의 저는 심족이 뭔지도 몰랐습니다만, 노야께서 그때부터 심족의 눈을 가지고 계셨을 줄은….”
“흥! 속이 시꺼먼 놈이 아니랄까 봐, 누가 제 속을 알아볼까 차단 법보를 주렁주렁 차고 있구나. 흐히히, 이 몸과 같은 시야를 가진 놈들이 많은 광한계에 오니 불편해 미칠 지경이겠구나?”
“하하, 노야. 사담은 이만하도록 하고. 어쨌든 생각해 보셨습니까?”
“흥!”
괴군이 기묘성채 위에서 팔짱을 끼고 말했다.
“그래. 좋지. 천인경 요족들 일만이 모여 펼치는 만요계천진(滿妖界遷陣)으로 추후에 나를 도와 기묘성채를 완성시켜 준다는 게 정말이라면….”
“하하,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격스럽군요. 제가 살다살다 노야와 손을 잡을 날이 있을 줄이야.”
“흥! 나도 쇄성기에 오른 [그녀]의 성능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니 딱히 네놈과 손을 잡은 것은 아니다. 입 닥치고 안내나 해라.”
“하하, 알겠습니다.”
파아아앗!
괴군의 기묘군단(奇妙軍團)이 기묘성채의 뒤를 따라 움직였고.
서휼이 모아 온 수억의 요족 군단과 수백의 타 종족의 합체기 수도자들.
어마어마한 전력의 세력이 연합하여 한 곳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꼬옥….
김연이 내 손을 잡으며 작게 속삭였다.
“…이 정도라면, 분명히 기회가 생길 거에요.”
나는 씁쓸하게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분명.
이것이 나와 김연이 괴군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기회였다.
하지만….
‘미안하게 됐군.’
결국 우리가 벗어날 수 있다는 건.
우리가 그녀를 짓밟아 흩어 버린다는 것을 전제했다.
서휼이 모아 온 합체기 수도자 중 한 명이 소리를 쳤다.
“보, 보인다!”
쿠구구구구!
지평선 너머.
시커먼 구름이 올라온다.
끼야아아아아!
끄아아아아!
키야아아아아아!
수백, 수천억에 달하는 귀곡성이 천지를 울렸다.
찌릿, 찌릿….
저 구름.
구름으로 보이는 거 검은 것은, 구름이 아닌, 하나하나의 귀신들이었다.
합체기 수도자들의 눈에 긴장감이 어렸고.
괴군의 눈에 호승심이 어렸다.
어마어마한 수의 귀신 무리.
하지만 진정 무시무시한 것은, 저 귀신 무리 따위가 아니었다.
그 너머에 있는,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지닌 이.
쿠오오오오오!
[끼야아아아아아!]
“귀, 귀….”
사축기 수도자 중 한 명이 덜덜 떨며 외쳤다.
“귀도성모(鬼導聖母)다…!”
“귀도성모가 보인다! 모두 전열을 재정비하라!”
“귀모(鬼母)가 괴군과 일전을 벌일 동안, 후방에서 진을 짠다!”
쿠과과과과!
귀신 무리의 중앙에 있는 존재.
그 존재가 내지른 비명에, 대지가 그대로 뒤집히며, 천지사방이 음기(陰氣)로 가득 차올랐다.
마치 세계의 일부가 명계와 치환이라도 된 듯한 풍경.
김연은 착잡한 표정으로 그 존재를 바라보았고, 나 역시 서 장군의 안쪽에서 씁쓸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민희 언니….”
강민희 대리.
흑색귀골곡의 제자로 잡혀간 그녀는.
천 년이 지난 지금.
정신이 나간 채로 쇄성기 급의 귀물(鬼物)이 된 채, 수백, 수천조의 혼령을 부리는 괴물이 되어 있었다.
[아아아아아아…!]
쿠구구구구!
어둠의 중앙.
그곳에는, 시커먼 귀체(鬼體)로 변한 몸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시퍼런 눈물을 흘리며, 시퍼런 귀화에 휩싸여 있는 강민희가 있었다.
산발한 그녀의 머리카락은 천지사방으로 뻗쳐, 구름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고, 귀체가 된 강민희의 육체는 수 장 크기만큼 거대해져 있었다.
“이런 젠장! 원영기 이하는 저 괴물을 직시하지 마라!”
“살아 있는 이는 함부로 귀모의 비명을 들어선 안 된다! 감각 차단의 법술을 써라!”
키이이이익!
키에에엑!
강민희의 비명에, 기묘성채 뒤쪽에 있던 연합 중.
원영기 이하의 수도자들 상당수가 한 번에 그대로 귀물(鬼物)로 변이해 버렸다.
키이이이익!
끼야아아!
귀물이 된 이들은 그대로 강민희 쪽으로 날아가, 그녀의 주변에서 울부짖고 있는 검은 구름에 합류하였다.
물론.
괴군과 김연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살아 있는 것이 없는 괴군의 진영에서는 그 어떤 괴뢰도 딱히 이상이 없었다.
인공 혼들이 진동하긴 했지만.
애초에 진짜 영혼도 아니었던 만큼 큰 영향은 없었다.
“크히힛, 자. 그럼 약속은 잊지 마라. 서 용가리 놈아.”
“하핫, 노야께서 귀모를 토벌하신다면, 노야의 지난 악행은 전부 덮기로 전 종족이 합의를 봤습니다. 귀모에 의해 광한계의 오십분지 일이 벌써 죽음의 땅으로 덮였는데, 노야와의 약속이 대수겠습니까?”
그리고.
괴군 조연과, 귀모 강민희가 부딪혔다.
부우우우웅!
수십억의 괴뢰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날아올라, 귀신 무리에 부딪혔다.
그리고 살아 있는 수도자들은 기묘성채의 후방에서 법술로 괴군을 지원하였다.
“…다녀오세요, 오빠.”
‘그래.’
이미 서 장군의 회로는 9할 이상 장악하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번 전투에서는 나가야 했다.
타앗!
나는 서 장군의 몸으로, 강민희를 감싼 귀신 무리 속으로 들어갔다.
우우우웅!
괴군의 의지가 기묘성채를 통해 전달되고.
기묘성채가 모든 괴뢰들을 통솔하였다.
나는 기묘성채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다른 괴뢰들과 움직였다.
우우우웅!
내 눈으로 영력이 몰렸다.
번쩍!
나와 다른 사축기 괴뢰들의 눈에서, 일제히 광선이 나갔다.
쩌엉, 쩌엉, 쩌엉!
검은 구름이 광선에 의해 뻥뻥 뚫린다.
귀신들의 숫자는 괴뢰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질 자체는 괴뢰 쪽이 우세하였다.
쿠구구구!
끼야아아아!
끄아아아!
물론, 귀왕급 귀물들 역시 존재했기에, 괴뢰들 역시 고전하긴 했으나, 전체적으로는 비등비등해 보이는 전력이었다.
그리고, 나와 귀물들이 싸우던 도중.
천지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와 강민희가 부딪히고 있었다.
새하얀 빛에 휩싸여, 창을 휘두르는 [그녀]가, 귀신들의 중심에 둘러싸여 마구 비명을 지르는 강민희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마치 빛이 어둠을 몰아내듯, 그녀가 한 번 창을 휘두를 때마다 천지가 찢어지며 시커먼 귀신들이 밀려났다.
나는 서 장군의 몸으로 귀물들과 전투를 벌이며, [그녀]와 강민희의 전투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둘의 격차를 분석했다.
‘[그녀]는 현재 최대 출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 자체만으로도 어지간한 합체기 수도자는 일격에 찢어발겨 버릴 법한 공격이, 강민희에게 수십 번은 내리꽂힌다.
하나.
‘강민희는, 비명만 지르고 있을 뿐…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어….’
그랬다.
강민희가 비명을 지르며 수많은 귀신들을 통솔하며, 수억에 달하는 귀신 무리들이 [그녀]의 공격을 막아 내긴 했지만.
정작 지금까지, 쇄성기 급의 힘을 지닌 강민희는 힘을 쓰는 모습이 없었다.
‘어쩌면….’
나는 희망을 품고서 둘의 전투에 의식을 집중했다.
그리고.
번쩍!
뒤쪽에서 서휼과 요족들, 그리고 수많은 종족의 연합군이 빛을 뿜었다.
그들이 짜고 있던 진법이 완성된 모양이었다.
쿠구구구구!
주변의 용맥을 끌어모은다.
천지간의 영력이 연합군의 방향에 몰렸다.
그리고.
파아아앗!
어둠을 찢어발기는 새하얀 섬광이 날아와, [그녀]를 도와 강민희를 요격하기 시작했다.
수억에 달하는 종족과, 수백의 합체기 수도자들이 짠 진에서.
[그녀]의 일격 일격과 동급의 위력을 지닌 공격들이 뿜어진다.
쿠우우우웅!
그리고.
수억의 귀신 무리들이 자진해서 공격을 막아 냈기에, 지금껏 한 번도 공격을 허용한 적 없는 강민희가.
마침내 연합군에서 쏘아 보낸 빛에 얻어맞았다.
[아아아아아!]
강민희가.
귀모(鬼母)가 비명을 질렀다.
마침내.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움켜쥐고 있던 그녀가, 손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손에서 기다란 귀조(鬼爪)가 돋아났다.
그것이.
번쩍!
끝이었다.
싸아아아아―
연합군 전체의 소음이 가라앉았다.
지금껏 신나게 기묘성채를 통해 강민희를 밀어붙이던 괴군마저도.
나도, 김연도.
모두가 입을 닫았다.
[그녀]가, 반으로 찢어져 뒤로 훨훨 날아간다.
“안 돼에에에에에!!!”
괴군이 미친듯이 울부짖는다.
동시에.
귀모가 힘을 쓰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
쿠구구구구!
천지사방이 귀신으로 뒤덮인다.
조무레기 같은 귀신들만 있던 그녀의 주위로, 명실상부한 사축기 급의 귀왕들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번뜩!
귀모의 귀조가 번뜩이자.
대지의 절반이 공간째로 뜯겨 나갔다.
두 번의 손놀림.
그것으로, [그녀]의 반신이 뜯겨 나갔고.
연합군의 절반이 그대로 궤멸해 버렸다.
“이럴리없어이럴리없어이럴리없어…!”
괴군은 머리를 부여잡고 미친 듯이 발작했고, 서휼은 미소를 유지하며 연합군의 뒤쪽에서 명령을 내렸다.
“전군, 진법 변형.”
파아아아앗!
괴군을 지원하던 후방의 진법이, 괴군과 귀모를 그대로 가둬 버리는 울타리로 변모한다.
서휼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괴군에게 말했다.
“늘 감사드립니다, 노야. 저희는 다음 기회를 기약할 테니, 시간을 벌어 주시지요. 그럼 이만….”
“그럴 줄 알았다, 이 뱀 새끼….”
부우우우웅!
괴군의 괴뢰들이, 훨훨 날아오던 [그녀]의 반신을 받아 기묘성채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기묘성채, 포격!”
기묘성채에서 [그녀]와 동급의 힘이 모이더니, 서휼과 연합군이 쳐놓은 울타리를 향해 광선을 내뿜었다.
콰창창!
진법은 단박에 깨지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금이 갔고, 서휼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그녀]에게 문제가 생기면 우리를 미끼로 삼을 수 있을 성싶더냐? 어림없는 소리. [그녀]와 나의 세계, 그 자체인 기묘성채 역시 쇄성기에 버금가는 괴뢰다.”
콰아아앙!
다시 한번 기묘성채가 발사한 광선이 진법 결계를 두들겼고, 마침내 진법 결계에 구멍이 났다.
“네놈한테 뒤통수를 한두번 맞아 보느냐, 이 뱀 녀석아….”
“하하, 이번에도 노야를 곤란하게 만들기엔 역부족이었군요.”
“조금만 거기서 기다리거라, 방금 뜯겨진 [그녀]의 몸체로 네놈 몸을 개조해다가 붙이면 그만이겠구나.”
하지만 서휼은 여유를 잃지 않고 괴군에게 말했다.
“뭐, 해 볼 수 있으시면 해 보시기 바라겠습니다. 이제 곧 존자(尊者)께서 지원을 보내신다 하시니, 그분마저 넘고 오신다면, 그때는 제 최후의 패를 보여드리지요.”
우우우웅!
그 말과 동시에, 서휼과 연합군은 진법 너머에, 어느새 만들어져 있는 전송진의 빛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파아앗!
전송진은 서휼과 모두를 한 번에 전송시켜 버리고는 바로 빛을 잃어버렸다.
“흐흐, 짜증 나는 놈. 전 기묘성채 주민들은 들으라! [그녀]가 회복에 들어가야 하니, 후퇴한다!”
빠드득, 빠득!
괴군이 손가락을 미친 듯이 씹어 대며, 광증이 번들대는 눈으로 괴뢰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제길….’
나는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너무 금방 끝났다.
괴군의 [그녀]가 아니라, 기묘성채 자체가 타격을 받았다면 도망칠 수도 있었겠지만.
괴군의 괴뢰들을 통솔하는 기묘성채가 멀쩡한 이상, 아직 도망은 요원했다.
나는 김연의 옆으로 귀환했다.
“어, 어떻게 하죠? 은현 오빠…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조금만 더 기다리자.’
너무 위험하다.
괴군의 전력이 대폭 약화되었지만, 나는 서휼이 배신할 때 최소한 괴군의 뒤를 거세게 노려 그의 기묘성채에 타격은 입힐 줄 알았으나.
모은 병력의 절반을 온존시킨 채 괴군과 싸우지도 않고 후퇴할 줄은 몰랐다.
‘지금은 위험해….’
“…네.”
김연은 입술을 짓씹고, 기묘성채의 부름에 이끌려 기묘성채를 따라 강민희에게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김연은 뒤를 돌아, 진법 너머에서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는 강민희를 보았다.
그녀는 딱히 우리를 쫓지 않았고, 방금의 일격으로 궤멸시킨 연합군 절반의 혼령들을 집어삼키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괴로워하고 있군.’
우리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광한계에 떨어진 모든 동료들 역시.
절망하고, 좌절하고, 고통을 겪고 있었다.
‘제기랄….’
모두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짙은 무력감에 빠져, 괴군의 패잔병들과 함께 광한계의 대륙을 가로질렀다.
그렇게.
괴군의 기묘성채와 함께 강민희에게서 최대한 멀어지고 있을 때였다.
우우우웅!
“음?”
괴군이 미간을 씰룩거린다.
괴군의 기묘성채가 향하는 방향에서, 공간이 쪼개진다.
그리고, 미약한 녹색 빛이 공간의 틈새 너머에서 튀어나왔다.
쿠웅!
‘그것’은 삼척동자만한 크기였다.
김연의 가슴께나 올 어린아이 같은 체형의 작은 녹빛의 존재는, 등 뒤에 두 자루의 박도(朴刀)를 매고 있었다.
‘사축기? 합체기?’
그 존재는 경지를 제대로 읽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 존재의 등장에 괴군은 얼굴을 굳히며 기묘성채를 멈추었다.
남은 괴뢰 군단 역시 일제히 그 자리에 멈춰섰다.
“네가 용가리 놈이 말한 ‘존자’냐?”
괴군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자그마한 존재에게 물었다.
녹빛의 두건을 쓰고 있는 작고 볼품없는 존재는, 두건과 마찬가지로 녹빛의 작은 손으로 팔짱을 끼며 말했다.
두 존재의 시선이 얽혔다.
[구현(具現)의 첫걸음을 밟았군. 음, 아닌가? 아, 그렇군. 그냥 의식을 단련하다 우연찮게 닿았어.]
“뭐라는 게야?”
[하긴 인족 중에 의식에 대해서 참오하는 놈이 많지 않은 걸 생각하면 그 정도만 닿아도 엄청난 거겠군. 스스로가 뭘 얻었는지도 모르고 있다니, 안타깝구나. 쯧쯧….]
갑자기 괴군을 품평하며 혀를 차던 그가, 괴군에게 물었다.
[그래… 일단 네가 수계에서 올라왔다는 괴군 조연이냐? 광한계 전역에 너와 귀모 때문에 대혼돈이 일어났다고 하던데….]
“이거 기이하군. 왜 합체기도 안 되어 보이는 놈인데, 네놈이 나타나니까 천기가 바뀐 거지?”
[흠,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아니면 듣던 대로 광한계에서 제대로 정보를 얻는 게 불가능한 놈이라 진짜 모르는 건지.]
오싹!
나는 본능이 미친 듯이 경종을 울리는 것을 눈치챘다.
나는 이 느낌을 알고 있었다.
강력한 수도자들.
사축기니 합체기 수도자니 하는 이들에게선, ‘괴물’을 만났을 때의 위기감을 느꼈지만.
저자는 달랐다.
마치, 절정 고수 시절 등봉조극의 달했던 김영훈과 싸웠을 때 느꼈던, 무인으로서의 위기감.
마치 잘 벼려진 칼을 눈앞에 둔 듯한 긴장감!
[꼬마야, ‘존자’라는 칭호는 말이다.]
스릉!
작은 녹색의 손이, 등 뒤에 차고 있던 박도 한 자루를 뽑아 들었다.
[쇄성기(碎星期), 혹은 그에 준하는 경지에 이른 이들에게만 붙는 칭호란다.]
“네가 쇄성기라고? 귀모에 비하면 한참 약해 보이는데…?”
[흠, 그야 당연하지. 내 본체는 지금 먼 차원에서 광한계로 귀환하는 도중이고. 백운성사께서 하도 급히 보채셔서 기운 일부를 떼어 낸 분신(分身)만 먼저 보낸 거니까.]
“흐히히히! 귀모는 육신으로 괴뢰를 만들기 애매했는데, 너를 잡으면 진짜 쇄성기 존재로 만든 괴뢰를 만들 수 있단 거구나!”
[이거… 소문대로 진짜 미친놈이군. 쯧쯧… 보아하니 마음이 잔뜩 썩어 있구나. 그 정신 상태로 어찌 살아 있는 거지? 한 가닥 희망만을 붙잡고 자살하지 않고 버티는 건가?]
그가 괴군을 보며 말했다.
쿠구구구구!
괴군의 기묘성채가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녀]가 부상을 입긴 했지만, 고작 합체기 수준 쇄성기 수사의 분신이라면 충분히 잡을 수 있다! 흐히히! 부족했던 쇄성기 수사의 자료 역시 너로 인해 보충할 수 있겠구나!”
[…흠. 확실히 기운은 그럭저럭 쇄성기 수준의 괴뢰군.]
그리고.
우웅!
녹색의 작은 몸을 지닌 그가, 박도를 들어 올렸다.
‘아아….’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전율했다.
김연도 괴군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오로지 나만이 그 자세를 보며,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뭔가 착각하나 보구나. 기운만 쇄성기 수사들을 흉내 내는 걸로 끝이 아니야. ‘진짜’ 쇄성기 수사들은, 슬슬 필멸자의 테를 벗어나 신(神)이 되어 가는 이들이다. 그리고….]
쿠구구구구구!
삼라만상의 모든 빛이, 저 박도 한곳으로 몰린다.
그 섬칫한 예기에, 내 영혼마저 꿰뚫리는 듯했다.
[나는, 쇄성기에 준하는 경지에 올랐을 뿐. 딱히 쇄성기 ‘수사’가 아니라서, 날 우연찮게 이겨도 네가 원하는 건 못 얻을 거란다, 꼬마야.]
“뭬야?”
[영광으로 알아라. 꼬마야. 본 존자는 심족(心族) 최고 지도자, 함천존자(陷天尊者) 장익(暲翼).]
파아앗….
박도가, 천천히 떨어진다.
너무나도 느린 그 일 수.
하지만,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지금까지 쌓아 온 모든 무학이 어그러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심족에겐 합체기 급이니 쇄성기 급이니 힘의 크기가 큰 의미 없으니. 이 일 수에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거라.]
다음 순간.
기묘성채가 쪼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