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수선전-135화 (135/185)

백회(百會) (4)

법기점은 내 기억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전히 그 때의 그 광경이었다.

까앙, 깡, 깡!

공방의 안쪽에서는 여전히 그녀가 뭔가를 만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잠시 법기점을 둘러보며 그녀를 기다렸다.

잠시 후, 공방의 문이 열리며 사람이 걸어 나왔다.

기억과 똑같은 새하얀 백의.

그녀였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어쩐 일로 찾아오셨죠?”

“저는….”

그리고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

부우우웅!

갑자기, 내 허리춤에 걸려 있던 옥빛 노리개가, 부르르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허리춤에 걸린 노리개 역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완벽하게 똑같이 만들어진 한 쌍의 법기.

물론 지금은 두 개가 아닌, 시간을 넘어선 물건 덕에 세 개가 되어 버렸으나.

그 기능은 여전히 공명하는 모양이었다.

“그건….”

그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당신, 당신이… 그 사람인가요?”

그녀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보며 노리개를 잡아들었다.

나는 말을 하지 못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그때였다.

파아아아앗!

그녀가 손에 든 노리개가 밝게 빛나더니, 갑자기 새하얗게 빛나며 빛무리로 변해 버렸다.

“…!!”

그리고, 빛무리는 내가 든 노리개로 날아들어, 그대로 스며들었다.

내가 가져온 것은, 시간을 넘어선 북향화 본인의 노리개.

한 마디로, 미래의 그녀의 것이라는 뜻이었다.

세계가 완전히 동일한 것을 허용치 않는다는 듯.

과거에 있던 그녀의 노리개는, 내가 쥐고 있던 노리개로, 그대로 빨려들어 와 흡수되었다.

피시식….

얼마 후, 북향화의 것을 흡수한 내 손의 노리개는, 어쩐지 더더욱 밝은 빛을 뿜고 있었다.

어쩐지 방금 전보다 더욱 더 단단해지고 더욱 더 신비한 느낌을 주는 듯했다.

‘같은 것끼리 겹치며… 법보의 격이 오른 건가?’

나는 신비한 현상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고, 향화 역시 놀란 눈이었다.

“같은 것들끼리 만나면, 그렇게 되는 거였나 보군요. 새로운 사실을 알았네요. 음, 그런데… 그 노리개는 제 어머니의 유품이기도 했는데….”

그녀는 어쩐지 안타까운 듯한 기색이었다.

저 표정, 몸짓, 행동, 습관, 숨소리, 심장 박동….

모두, 그녀다.

그녀가, 살아 있다.

“그나저나 노리개를 가지고 여기까지 찾아오시다니, 먼 길 힘드셨을 텐데 들어오셔서 차라도 한잔하시는 건 어떤가요?”

그리고.

나는 그녀의 말투에서,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사람은.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이, 아니다.

뚝, 뚝….

나와 같은 시간을 보낸, 나와 같은 감정을 나눈, 나와 같은 아픔을 나눈 그녀가, 아니었다.

“당신은… 저를 모르는군요.”

“예…?”

나는 무심결에 흐른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헛소리였습니다.”

예상은 했다.

제자들이, 스승님이, 무수한 김영훈들이.

그들과 만나지 못했을 때부터, 이런 순간을 각오는 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니, 가슴이 너무나 시린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를 보자 내 마음속에서 미친 듯이 풍랑이 일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노리개를 그녀에게 건넸다.

“어머님의 유품이 흡수되었는데, 제가 가지고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받아 주십시오.”

“예? 저야 상관은 없는데, 당신은… 운명의 증표를 그냥 주셔도 되는 건가요?”

운명의 증표라.

그걸 아십니까.

당신의 어머니가 당신과 이어 주려 했던 상대는, 이미 혼인을 했고, 죽었습니다.

‘진짜’ 증표는, 아마 월량의 손으로 그의 무덤에 묻혔을 것입니다.

“…노리개를 가져온 사람과 혼인을 하시기로 하셨다 들었습니다.”

나는 형언할 수 없이 복잡한 감정들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녀의 손에 노리개를 쥐어주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이 노리개를 드리고 다시 가겠습니다.”

“예…?”

“저는….”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안도했고.

그녀의 눈빛을 보며 슬퍼했다.

나의 그녀는 살아 있었지만, 그녀는 나를 몰랐다.

차라리 그날 한날한시에 죽었다면, 황천에서나마 같이 있을 수 있었을 텐데.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눈물을 참는 것은 쉬웠다.

하지만 감정을 참는 것은 어려웠다.

아마 타인이 내 의념을 읽었다면 나와 함께 울어 주었을지도 모른다.

“운명을 기다려 주시며 증표를 보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겐 더 이상 그 증표는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에게 드릴 터이니, 부디 증표를 받으시고 자유롭게 살아 주시지요. 더 이상 기다리시며 살지 않으셔도 됩니다.”

“잠시만요….”

나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겨우겨우 억누르며 그대로 등을 돌려 법기점을 나갔다.

다소 짧고 굵었던 만남.

하지만 나는 억지로 발을 떼어 내며 등을 돌렸다.

지금 등을 돌리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 엎어져, 그녀를 붙들고 미친 듯이 흐느낄 것 같았으니까.

다시는 이곳을 떠나지 못했을 것 같았으니까.

타앗!

나는 법기점에서 나와, 섭명함에 올라탔다.

“빨리, 어디로든 가 주십시오.”

[오냐.]

위이잉!

귀무가 섭명함을 둘러쌌고, 우리는 그대로 다른 곳을 향해 넘어가 버렸다.

* * *

‘뭐지? 그 사람은?’

북향화는 갑작스레 찾아와 자신의 증표를 넘겨주고 간 그 남자를 떠올렸다.

당황스럽기도 했다.

몇 년째 연동된 법기의 신호가 잡히지 않다, 갑자기 두 군데에서 신호가 잡히기 시작했다.

법기가 망가졌나 했지만, 그녀가 뜯어 보았을 때 멀쩡하자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그리고 며칠 전 다시 두 개의 신호 중 하나가 사라졌다.

그녀는 몰랐지만, 월량이 자신의 고손자의 넋을 기린 사당에 노리개를 넣은 시점이었다.

그리고 다시 하나로 되돌아온 신호를 보며, 그녀는 은근히 떨리고 긴장했었다.

왠지 언제라도 그자가 찾아올 것 같았기에.

물론, 진즉 자신의 어머니가 지어 준 짝은 죽었을 수도 있고, 그저 제3의 인물이 법기를 주운 것이었을 수도 있었으나.

그녀는 근 며칠 동안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

그녀가 온갖 망상을 해 왔던 ‘그’가 찾아왔다.

그는 놀랍게도 그녀의 노리개에 얽힌, 증표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그녀는 놀랐다.

그 말인즉, ‘그’가 자신의 어머니가 말해 준 짝이 맞다는 뜻이 아니란 말인가?

그 사실을 알자, 묘하게 두근거리는 기분과 떨리는 기분이 공존했다.

하지만 그녀가 해 왔던 이런저런 기대들이 전부 무색하게.

‘그’는 그냥 자신의 노리개를 그녀에게 줘 버리고는 바로 뛰쳐나가 버렸다.

자신은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

사실 그녀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해 왔던 결과였다.

그녀가 노리개를 쥔 상대랑 결연을 맺거나 혼인을 하는 것은 어머니의 바람이었을 뿐이고.

사실 상대는 그 약속을 지킬지 안 지킬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약속을 안 지켰을지언정.

오히려, 그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 노리개를 전달해 주러 사막을 건너왔단 뜻이니, 사실 그것만으로도 상대의 인성은 짐작할 만했다.

‘좋은 분이셨던 것 같네….’

그녀는 최근 그녀를 쫓아다니는 후기지수들을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 사람이 보여 준 인품의 반 정도만 되는 사람이 있었어도 고민을 해 봤겠는데….’

그저 모두 철없는 후기지수들에 불과할 뿐이었다.

북향화는 잠시 바깥을 쳐다보다 노리개를 들여다보았다.

자신의 것과 그의 것이 합쳐져, 뭔가 더 신비로운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영근이 없는 범인이었지만 나름 기술을 익혀 법기를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나름 공묘천색의 혈통이라서인지, 법기 만드는 재주가 있던 그녀의 어머니는 썩 품질이 좋은 법기를 만들고는 했지만, 북향화는 어머니의 실력을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그녀의 재능으로 어머니를 뛰어넘은 지가 오래되었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가 만들었다는 노리개를 보며 생각했다.

‘두 개의 법기가 합쳐져서 하나가 된다고? 거기다가 이 기묘한 신령스러운 기운…. 어머니가 만든 게 맞는 건가? 이건 꼭… 법기가 아니라 법보(法寶) 같은데?’

그녀가 의아해하며 노리개를 자세히 들어 볼 때였다.

주륵….

“…어?”

향화는 문득 자신의 눈가를 훔쳤다.

“눈에 뭐가 들어갔나…?”

두근, 두근….

왠지 모르게, 그녀는 가슴이 아프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노리개를 보며, 갑자기 감정이 북받치는 것을 느꼈다.

“잠시만….”

주륵, 주르륵….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어쩐지, 자신도 몰랐던 감정이 마구 솟구친다.

향화는 가슴이 미친 듯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방금 나간 그 사람을 떠올렸다.

“아, 안 돼….”

그자를 잡아야 한다.

어쩐지,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벌컥!

그녀는 떨리는 다리로, 비척거리며 법기점의 입구를 향해 달려나갔다.

그리고, 그 주변 어디에도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휘이이이….

맑은 사막의 하늘에는, 어쩐지 새카만 귀무(鬼霧)가 허공에서 흩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귀신에 홀린 기분으로, 비행 법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사람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노리개를 들어 보며, 턱 끝에서 떨어지는 눈물방울들을 느끼며 생각했다.

‘왜지?’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다.

‘뭐지, 이 감정은?’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자를, 찾아야 해.’

그를 찾아서 물어봐야 했다.

도대체 이 감정은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북향화는 갑작스레 터져 나온 눈물을 닦으며 결심했다.

‘그자를 찾자.’

어디에 있든, 어디로 갔든.

찾아서, 물어볼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결심했다.

* * *

[누구를 만나고 온 거냐?]

“…그냥, 지인입니다.”

[그러냐.]

송진이 내게 말했다.

[너, 흑색귀골곡의 귀도공법을 배워보는 건 어떠냐? 네 영혼 곳곳에 쌓여 있는 죽음의 기운들… 그리고 방금 내보인 그 심한 감정 파동…. 본 곡의 공법과 최고의 상성을 자랑할 것 같다만.]

“…마공은 사양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나는 송진의 말에서, 그에게 받아야 할 것을 받기로 했다.

“혹시 흑색귀골곡에 ‘군마용갱권’이란 공법이 있습니까?”

[아, 있긴 하지. 아무도 안 익혀서 늘 서고 구석에 처박혀 있던 공법서였는데, 네가 어찌 아느냐?]

“예전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 혹여… 그 공법서를 주실 순 없으십니까? 한번 익혀 보고 싶군요.”

축기기 공법서 수준이었지만.

자신의 법보와 교감할 수 있는 공법서.

나는 노리개까지 향화에게 주고 온 지금.

무색유리검과 더욱 더 깊게 교감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그에게 말했다.

송진은 선선히 군마용갱권의 공법서를 주었고, 나는 군마용갱권의 요결을 머릿속에 넣어 둔 후 그에게 말했다.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몇 가지 더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만….”

나는 송진의 섭명함과 함께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너무나도 감정이 거세게 끓고 있다.

빨리 무슨 일이든지 해서 잠재워 버리고 싶었다.

* * *

벽라국 동남부.

그곳에 있는 벽씨세가.

나는 섭명함과 함께 벽씨세가의 상부에 도착했다.

‘여기서는 혈체를 써 볼까….’

나는 내 의식으로 조종하는 원립의 혈체를 일으켜 세웠다.

우우웅!

혈체를 통해, 혈체의 얼굴에 마기로 가면을 씌우니, 겉보기에는 원립과 완전히 똑같아졌다.

우우웅!

원립의 혈체가 허공으로 날아가며, 벽씨세가의 위쪽에 올라섰다.

그리고 얼마 후.

섭명함의 소란과 원립의 기운을 느낀 것인지.

벽천기와 벽씨세가 원로원이 허겁지겁 뛰어나왔다.

“혀, 혈목자 대인. 어쩐 일이십니까?”

벽천기는 황급히 주변에 방음 결계를 치며 말했다.

나는 혈체의 입을 통해 말했다.

[가문의 영석을 전부 가져와라.]

“예, 예?”

[말을 듣지 못했나? 가문의 영석이란 영석은 전부 가져오라고 명했다.]

“하, 하오나 어찌….”

[말이 많군.]

우우웅!

나는 혈체의 손을 통해, 벽천기와 벽씨세가 원로원의 머리에 박혀 있는 오행혈주번들을 감응했다.

‘몇백 년 전부터 암약해 왔다더니, 전부 머리에 꽂아 뒀었군.’

찌이이잉!

“…!”

“끄으으읍!”

“으으으으읍!”

오행혈주번의 위력 중 20분지 1 정도만을 끌어낸 탓인지.

벽씨세가의 결단기 수사들은 미칠 듯이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간신히 버티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말이 많구나. 대계를 위한 것이니, 잔말 말고 영석이란 영석은 전부 가져오기나 해라.]

“끄…읍…! 아, 알겠…습니다…!”

얼마 후.

벽천기의 명령에 의해, 벽씨세가의 수도자들이 몇백만 개나 되는 벽씨세가의 영석을 전부 가져와 혈체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게 본가에 있는 영석 전부입니다. 이것의 십분지 일 정도 되는 양의 영석들이 각 영지에 흩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을 모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려서….”

[됐다. 이것으로 족하다. 그리고 또 하나 말해 두자면….]

나는 혈체의 입을 빌려 그에게 말했다.

[조씨세가의 유적을 발견해서 그걸 연구하고 있다 했지?]

“…그렇습니다.”

[조씨세가의 유물들 중, 마도(魔道)에 해당하여 수도자는 물론이고 범인들의 인명을 희생하는 유물들이나 약방문, 혹은 공법서들 역시 전부 이 앞으로 가져와라. 함부로 복제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예.”

내가 오행혈주번을 움직이며 서슬 퍼렇게 경고하자, 벽천기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대답했다.

촌각이 지나지 않아, 그들이 혈체의 앞으로 그것들을 가지고 왔다.

우웅!

나는 혈체의 저물대를 열어 그것들을 전부 받아 냈으며, 혈체의 법술로 녀석들이 가져온 영석들을 섭명함에 전부 실은 후 말했다.

[됐다. 앞으로 조용히 지내고 있거라. 내가 다시 연락할 터이니.]

“알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혈목자 대인!”

벽씨세가의 결단기 수도자들은 허리를 굽혀 혈체를 향해 인사했고, 나는 혈체를 조작해 섭명함에 태운 후, 송진에게 부탁해 청문세가로 가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걸로, 지난 생에 받았던 배신은 잊어 주도록 하지.’

벽천기가 격천부 대신 봉천부를 던져 원립을 죽일 수 있던 그 순간에 초를 쳤던 것을 생각하면.

솔직히 치가 떨리기는 했다.

하지만….

‘벽문성이라는 녀석을 자제로 둔 걸 감사히 생각해라.’

나는 벽문성의 얼굴을 봐서, 벽씨세가는 딱 이 정도로만 넘어가기로 했다.

‘막리세가처럼 막장 마도 가문 역시 아니기도 하니….’

거기에 조씨세가의 유적에서 발견했다는 마도의 비술들이나 제련법 역시 전부 회수했으니 막리세가처럼 발전하지도 않을 터였다.

쿠구구구!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섭명함은 어느새 다시 청문세가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이번에도 원립의 혈체를 움직여, 청문세가에 모습을 드러냈다.

쿠구구구구!

원립의 뒤쪽에서, 월도답천의 기세를 꺼내며 청문세가를 짓누르기를 얼마나 했을까.

잠시 후, 청문세가 가주인 청문중진과, 청문세가의 원로원이 나타났다.

“워, 원영기 선배님이십니까?”

[그렇다.]

“청문세가에는 어떤 일로 방문하셨는지요?”

청문중진은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혈체를 향해 물었다.

나는 혈체의 입을 움직여 말했다.

[내가 눈여겨보는 자가 있으니, 청문세가의 청문령이라는 수도자가 그리 선각후통에 밝다고 하더군. 축기 3대 위인이라 하며 고명이 자자하니. 그가 쓴 책을 읽어 보고 감명을 받았다. 그는 진정 선각후통의 대가더구나. 하여 그와, 그의 가문인 청문세가에 후원을 하고 싶어 찾아왔다.]

쿠구구구구!

나는 벽씨세가에서 탈탈 털어온 몇백만 개의 영석들을, 청문세가의 앞마당에 꺼내서 쌓아 두었다.

삽시간에 가문 하나분만큼의 영석을 받게 된 청문중진의 눈이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졌다.

“가, 감사합….”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여기 이 섭명함의 주인, 흑색귀골곡의 원로분이셨던 송진 선배님께 부탁하여 말해 놓겠다.

너희는 앞으로 영석을 내면 섭명함을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줄 테니, 목 속성 공법을 주로 익히는 청문세가 가솔들을 데리고 봉명성으로 자주 가서 영력을 쌓도록 하라.]

나는 내가 정리한 목 속성 공법에 대한 깨달음.

그리고 봉명성의 진법을 파훼할 수 있는 족자금제를 넘겨주며 말했다.

혈체를 통한 내 말에, 청문중진과 원로원은 물론이고.

어느덧 나와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청문세가 장로회 역시 내게 읍을 하였다.

“감사합니다, 선배ㄴ….”

[그만!]

나는 장로회 중.

느릿하게 허리를 숙이던 청문령을 슬쩍 보며 외쳤다.

‘역시….’

이럴까 봐 본체가 아니라 혈체로 대신해서 주게 한 것이었다.

청문령에게 ‘선배님’ 소리를 들으며 감사 인사를 받으면.

너무 가슴이 아플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역시나 혈체로 선배님 소리를 듣는다 한들.

가슴이 매우 시렸다.

[됐다. 감사 인사는 하지 말아라. 명령이다. 그럼… 잘 있어라. 청문령에게 지원을 최대한 해서, 그가 결단기에 좀 이르렀으면 좋겠군.]

나는 빠르게 내가 원하는 것을 전달한 후.

바로 섭명함에 탑승하여 송진에게 성제국으로 이동해 달라고 부탁했다.

쿠우우우우!

귀무가 섭명함을 뒤덮으며 공간을 이동했다.

* * *

“허….”

청문중진은 헛웃음을 뱉으며, 눈 앞에 쌓인 영석 무더기들.

그리고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청문령을 바라보았다.

“허, 허허허….”

그는 청문령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령아, 네가 해 온 노력이 헛되지 않았구나. 고명하신 선배님이 네가 쓴 책들과 이론에 감명받아 주고 가신 선물이니….”

“…그렇, 군요.”

“어깨를 펴라, 령아! 모두 들어라! 이번에 들어온 영석은 령이의 이름 아래에 들어온 것이니. 영석 중 삼분지 일은 령이의 것으로 쓰일 것이다. 불만 있느냐?”

청문세가의 장로와 후기지수들, 원로원 전원이 우렁차게 대답하였다.

“없습니다!”

청문중진은 껄껄거리며 말했다.

“일단 모두 영석들을 정리해라! 그리고 령아, 내가 최선을 다해 도와줄 터이니, 오늘부터는 기초법술보다는 결단기에 오르는 것을 힘써 보자꾸나. 선배님께서 네가 결단기에 오르기를 희망하시며 이 많은 선물을 주고 가셨는데, 실망하시면 아니 되니 말이다!”

청문령은 잠시 침묵하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 합니다.”

* * *

쿠구구구!

섭명함은 성제국.

진루세가의 위쪽에 출현하였다.

‘서방 삼국의 배신자 가문은, 진루세가가 마지막이군.’

막리세가는 갈아 버렸고.

벽씨세가에게선 영석을 뜯어 냈다.

‘하지만 진루세가는 어찌할까.’

벽씨세가는 내가 맺혔던 울분에 비해, 벽문성이 있었기에 그 정도로 봐준 것이고.

막리세가는 내가 맺혔던 울분에 더해 평소 해 오던 잔악한 짓이 있었기에 그리 끝낸 것이었다.

하지만 진루세가는….

평소 맺혔던 울분도, 잔악한 소문도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벽문성의 경우처럼 좋은 기억 역시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잠시 고민하다, 원립의 혈체로 진루세가에 내려갔다.

얼마 후.

진루세가 가주인 진루연천과 결단기 원로원이 나타났다.

“어머나, 혈목자께서 이런 머나먼 서쪽 끝까지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진루연천은 고혹적인 목소리로 혈체에게 다가왔다.

나는 혈체를 통해 결인을 맺으며, 그녀와 다른 원로원들에게 꽂혀 있는 혈주번을 발동시켰다.

찌이이이잉!

“끄읍…!”

“으으윽!”

한순간에 결단기 세력 전체가 무력화되었다.

[지금부터.]

나는 혈체의 입을 통해 말했다.

[북방 대초원에 오행혈주번을 꽂아 둔 세력들. 동방 국가들에 오행혈주번을 꽂아 둔 세력들을 네게 알려 주겠다. 너는 일단 북방과 동방을 돌아다니며 그들에게서 각각 이백만 개의 영석, 혹은 그에 준하는 것을 받아 내라.]

우우웅!

나는 혈주번의 법술을 혈체의 손에 들려 준 후.

혈체가 결인을 맺게 하였다.

우우우웅!

혈주번이 변화하며, 붉은 깃발 문신이 되어 진루연천의 손등에 내려앉았다.

[그것을 사용하면, 개인에게 세 번에 한하여 그들의 상단전에 꽂힌 오행혈주번을 발동시킬 수 있다. 그들을 찾아, 내 이름 아래에서 영석들을 받아 내 모은 후, 그 영석들을 전부 청문세가에 내 이름으로 전달하라.]

“처, 청문세가에 말입니까?”

[그래, 그리고 이것은, 모든 일이 끝나면 열어 보아라. 네가 할 일을 다 끝내고 나면 열리게 된 서신이다. 그 서신 안에 네가 다음으로 할 일을 적어 두었으니, 반드시 그대로 행하라. 네가 일을 다 끝내기 전에 서신을 열면, 서신에 쓰인 금제가 발동해서 내게 연락이 오게 됐으니, 함부로 열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나는 금제를 걸어 놓은 서신을 그녀에게 건넸다.

진루연천은 서신을 받아들어 소중히 저물법기 안에 넣었다.

[그럼 내 명을 시행하고 있도록 하라.]

서신의 안쪽에는.

‘모든 일이 끝나면 청문세가에 진루세가의 모든 것을 바쳐 청문세가의 산하 세력이 되어라.’라는 명을 적어 두었다.

진루세가에 대한 벌이기도 했으며.

‘아마 저 녀석도 좋아하겠지.’

진루연천도 행복해할 만한.

모두가 행복해지는 명령이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이다….’

나는 섭명함과 함께, 한 마을로 날아갔다.

익숙한 마을이었다.

‘지네 녀석에게 횡포를 당할 마을….’

나는 이번에는 본체로 마을에 내려앉았다.

마을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나를 보며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나를 바라보는 촌장에게 물었다.

“저 봉우리 너머에 지네 괴물이 살고 있지 않소?”

“그, 그렇습니다…. 그 괴물이 마을의 총각과 처녀들을….”

“내가 처리해 줄 테니,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시오.”

“어, 어떤 부탁입니까?”

“이 마을에….”

정순지력으로, 지지난 생 만나서 설화집을 읽어 주었던 아이의 얼굴을 그려 주었다.

“이리 생긴 아이가 있지 않소?”

“아, 책방네 딸애로군요. 있습니다만.”

“그 아이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소. 안내해 주시오.”

나는 촌장의 안내를 받아, 그 아이를 찾아갔다.

‘그 책, 분명 평범한 책은 아니었다.’

분명 뭔가 더 숨겨진 비밀이 있을 터였다.

지지난 삶에서는 분노에 미쳐 지내느라 딱히 더 비밀을 발굴할 생각을 못했었지만.

이번 생에서는 해 볼 법했다.

마을의 책방을 운영하는 이는 나이가 있는 학사였고, 딸애라는 아이는 옆에서 인형놀이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혹시… 설화집을 한 권 가지고 계시지 않소?”

그리고, 이어진 학사의 말에 나는 몸을 흠칫 떨었다.

“…설화집? 우리 집에서는 그런 애 같은 책은 취급 안 하오만.”

“…뭐라?”

나는 동화의 내용을 설명하며, 그런 설화가 담긴 설화집이 있지 않느냐 재차 물었다.

내 말을 들은 학사는 귀찮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방으로 들어가 책들을 한참을 뒤적였다.

“없소. 그런 책 같은 건 없소. 그리고 종명자 이야기? 내가 이 지역에서 이십 년째 살아오며 공부를 해 왔소만, 종명자 이야기 같은 전래동화는 들어본 적도 없고. 내가 아이들에게 그런 설화나 성어에 관련된 고사가 쓰인 책을 자주 읽어 주는 편이외만, 상제니 종명자니 하는 책은 정말로 본 적이 없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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