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회(百會) (3)
―…후대들을 위해 남겨 놓고, 마음을 내려놓고 비승하라. 이를 지키지 아니하는 자, 재앙을 겪게 될 것이다.
나는 이전 등선향에서 보았던 비석의 내용을 떠올렸다.
윗부분이 뜯겨 나가 볼 수 없었던 내용.
‘분명, 저 비석의 아랫부분이 뜯긴 모양을 볼 때, 저 비석이 그 비석의 윗부분이다!’
원립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였기에 생각이 닿지 않았었다.
생각해 보면.
흑색의 성 인근에서 [금신천뢰(金神天雷)]가 적힌 석현판을 본 지가 꽤 됐다.
‘상상도 못 했군.’
이 녀석이 그 금신천뢰문과 연관이 있었다니.
물론, 자세한 사항은 우선….
‘놈을 제압하고 들어나 봐야겠군.’
[이… 크웩…!]
놈이 피를 토할 때.
나는 바로 놈의 앞으로 쇄도해 갔다.
쿠구구궁!
어마어마한 속도로 휘두른 무형검이, 녀석의 방어막에 부딪힌다.
성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버리지 않는 이상, 이 안에서는 어찌어찌 원영기 급의 힘을 낼 수 있는 모양.
‘하지만, 지난 생과는 상황이 다르지.’
투쾅!
나는 원립을 그대로 걷어찼다.
녀석은 방어막을 치는 듯했으나, 무형검은 그대로 방어막을 투과하여 녀석의 배를 걷어찼다.
푸확!
녀석이 피를 한 움큼 내뱉는다.
그리고, 무형검에 걷어차인 녀석은 그대로,
이곳저곳이 뻥 뚫린 흑색성의 바깥으로 날아가 버렸다.
콰아아아앙!
성의 영역 바깥으로 가자, 결단기 대원만 수준으로 하강한 녀석의 수행이 드러났다.
[이, 이 노옴…!]
원립이 이를 갈며 저물법기에서 일곱 개의 족자를 꺼낸다.
그리고 저물대를 열어, 혈수로 이뤄진 두 귀왕을 꺼냈다.
일곱 마리의 요혼들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왕손 서란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서란의 목소리가 사막을 울렸다.
“바다의 자식들은 해룡왕의 혈손에 조아릴지어다.”
찌이이잉!
서란의 명(命)은 그대로 언령이 되어 요혼들을 얽어매었다.
해룡의 요혼은 두말할 것 없이 바로 바닥에 엎드려 조아렸다.
그리고 이어서, 서란의 명을 거부하던 요혼들 역시 움찔거리며 바닥에 몸을 조아렸다.
“결단기 이상의 요혼들을, 오래 잡아 둘 순 없습니다!”
서란이 다급하게 외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끼야아아아아!
―끄아아아아!
저 앞에서 혈수로 된 귀왕 둘이 각기 낫을 들고 울부짖었다.
하지만, 뒤쪽에서 다시금 우렁찬 목소리가 들린다.
[섭명함의 이름 아래에 명하노니.]
그리고.
[만귀(萬鬼)는 명하(冥河)를 건너는 나룻배 앞에 고개를 조아릴진저.]
쿠구구구구!
뒤쪽의 섭명함에서, 영체(靈體)에 대한 강한 흡입력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아!
―키야아아악!
두 귀왕은 비명을 지르며, 섭명함에 빨려가지 않기 위하여 자신들의 낫을 사막에 꽂아 넣고 버티기 시작하였다.
삽시간에 원립의 가장 큰 전력 중 셋이 무력화되어 버렸다.
‘서란과 송진은, 원립과는 상성이 최고로군.’
지난 삶에서, 서란이 호풍진혈변을 익힌 원립을 제압하는 것을 보며 느낀 것이었지만, 이번 생에서 보니, 그냥도 상성이 좋았다.
물론 원립이 제대로 혈영들을 회수해서, 원영기의 기운을 자신의 요혼들과 귀왕들에게 공급이 가능했다면 아무리 서란이나 송진이라도 이렇게 원립을 쉽게 무력화하기 어려웠을 터였으나.
흑색성 바깥으로 내쫓긴 이 녀석은, 이렇게나 상대하기가 쉬워지는 것이었다.
저벅, 저벅….
나는 무형검을 뽑아 들고 녀석을 향해 걸어갔다.
[크윽, 이놈! 이 빌어먹을 놈! 쉬이 당할 것 같으냐!]
부웅, 부웅, 부웅!
그의 주변으로 단검 법보, 창 법보, 수정 해골 지팡이 등이 떠오른다.
동시에 그의 위쪽으로 다섯 개의 오행혈주번이 떠올랐다.
촤라라락!
오행혈주번들이 내 머리를 노리고 날아왔다.
그리고, 나는 혈주번들은 그냥 맞아 주었다.
푸콱!
약간 따끔한 느낌과 함께, 오행혈주번들은 내 상단전에 자리 잡은 오행혈주번에 그대로 흡수되었다.
[뭣…!]
원립이 당황한 목소리로 몸을 떨었다.
저벅, 저벅….
나는 원립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 반응, 너도 오행혈주번을… 그래, 그렇다면…!”
열일곱 개의 단검 법보가 회전한다.
나는 무형검을 휘둘렀다.
법보와 원립 사이, 둘을 연결하는 법력의 끈이 그대로 잘려 나갔다.
법보들이 땅에 떨어졌다.
[이, 이익!]
핏빛의 창에서 핏빛 귀왕이 튀어나와 창을 잡는다.
그리고 귀왕은 창에서 나오자마자, 섭명함의 흡입력에 저항하기 위해 창을 땅에 박아 넣고 꼴사납게 버티기에 급급했다.
결국 녀석에게 남은 것은 수정 해골 지팡이뿐.
[크으윽…!]
원립은 침음성을 흘리며 법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촤좌좌좌좍!
지팡이에서 뿜어진 빛에, 혈목(血木)이 사막에 돋아나고, 혈해(血海)가 사방을 뒤덮는다.
혈해에서 피 구름이 솟구치며 녀석의 몸을 뒤덮었다.
삽시간에 사방이 녀석의 영역으로 화한다.
핏빛의 귀수들이 내게 쇄도했고.
피 구름에서 수많은 해골들이 내게 달려든다.
혈해에서 핏물들이 솟구치며 피의 화살이 되어 내게 날아들었다.
온 사방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나는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단 한 번의 참격.
그 참격에, 잡다한 모든 법술들이 전부 쓸려 나간다.
그러고도 참격은 힘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궤적을 바꾸며 뻗어 나가, 천지사방으로 가시덩굴처럼 뻗어 나간다.
원립이 수많은 법술들로 저항했으나, 궤적은 법술들의 강한 부분은 투과하고, 약한 부분을 베어 내며, 모조리 무화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촤학!
원립의 몸이 궤적의 폭풍에 휩쓸려 피떡이 되어 버린다.
물론.
촤륵, 촤르륵!
놈이 피 구름을 흡입하자, 육신이 꿈틀거리면서 재생을 시작했다.
하지만, 재생을 하는 시간은 너무나도 길었다.
무려 두 호흡이나 걸렸으니까.
두 호흡이면, 무형검을 몇백 번은 휘두를 수 있다.
콰아앙!
콰앙, 콰앙!
눈앞에 있는 잡다한 것들이 쓸려 나갔고, 나는 순식간에 재생을 하는 원립의 앞에 다가가 놈을 걷어찼다.
쩌어엉!
재생을 하던 놈이, 그대로 다시 사막 저 멀리 날아간다.
츄르르르륵!
바퀴벌레 같은 생명력을 자랑하듯, 놈은 날아가면서도
다시 재생을 하였다.
하지만, 어느새 나는 다시 놈의 위쪽에 올라가 있었다.
두 다리를 굽혔다, 그대로 펼치며 두 발로 원립의 몸을 내려찍는다.
푸콱!
발에 닿은 원립의 신체가 두 동강이 나 버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촤락, 촤라라락!
놈의 조각난 신체에서, 핏물로 이뤄진 물고기들이 나타나 내게 날아든다.
붕, 붕, 붕, 붕!
내 주변으로 무형검이 회전한다.
공방일체의 태세가 된 채로, 날아드는 물고기 떼를 전부 갈아 버리며 그대로 다시금 놈에게 떨어지며 내리찍는다.
철퍽!
두 쪽으로 나눠진 놈의 몸 중, 상반신이 그대로 터져 국물이 되어 버렸다.
하반신 쪽에서 놈이 다시금 상체를 재생시키고 있었다.
부웅!
등 뒤로 공기가 터져 나가는 게 느껴진다.
원립의 상반신을 핏물로 만들어 버린 나는, 어느새 상체를 재생 중인 하반신에 다가가 그대로 손을 올렸다.
콰아아앙!
그대로 손을 내리찍는다.
쿠구구구구!
재생되는 중인 원립의 몸과 함께, 놈의 아래쪽으로 계곡이 생기며 놈이 반 토막이 나 버렸다.
“계속 재생해라, 바퀴벌레 놈.”
츄륵, 츄르르륵!
반쪽이 난 녀석의 몸이 다시 붙기 시작한다.
화르르륵!
놈의 핏물은 혈화(血火)가 되어 나를 덮쳤다.
하지만, 무형검이 전신에 흐르는 나는 그대로 혈화를 뚫어 버리고 손을 뻗었다.
콰악!
내 손이, 원립의 머리통을 거머쥐었다.
“죽을 때까지 죽여 주마.”
그대로 머리를 잡고, 사막의 땅에 내리꽂는다.
투과앙!
놈의 상반신이 다시 참흔(斬痕)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쯤 되자, 원립의 재생력이 확연히 느려진 것이 보였다.
쉬릭, 쉬리리릭!
나는 꿈틀거리며 상반신을 재생하는 원립을 보며 발을 들었다.
[자, 잠깐….]
콰아아앙!
지난 생에는, 괴군과 서휼의 눈치를 보느라 너무 쉽게 죽였다.
빠르게 죽인 것이 다행이었다.
괴군이 수많은 천인기 수도자들 사이에서 조금 밀리는 기색이었으니.
그때도 이렇게 시간을 끌었다면 서휼이 직접 찾아왔으리라.
[기다….]
퍼엉!
놈의 얼굴을 다시 차서 폭발시킨 후.
녀석이 제대로 몸을 재생하려 할 때마다 마구 공격을 퍼부었다.
중간중간에 날아오는 법술들은 무형검이 흐르는 몸으로 그냥 때워도 될 정도로 허약했고, 그마저도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콰아앙!
놈의 얼굴을 한 번 더 터트렸을 때.
녀석이 한참을 지나서야 그럭저럭 재생한 것을 보며.
나는 놈의 배에 발을 올린 후 그제야 공격을 멈췄다.
“조금, 시원하군.”
[크, 크아아악…!]
“네게는 미안하게 되었다. 하지만 조금 쌓여 있던 게 있어서 말이지.”
[크헉, 커헉!]
“이제 재생력도 많이 떨어진 것 같은데, 그대로 금단을 밟아 깨 버리면 넌 죽는 거겠지?”
[크으윽….]
숨을 몰아쉬던 녀석이,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왜, 내게 왜 이러는 것입니까? 워, 원영기 수도자십…니까?]
“비슷하게 생각해라. 사실 바로 네 금단을 박살 내고 네 혼백을 베어 낼 수도 있었다만. 조금 때려 보고 싶어서 때려 봤다.”
[아, 아닙…니다.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녀석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내가 널 살려 준다고는 안 했다만….”
[사, 살려 주시면… 후회하지 않게 해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제, 제 성에는 재물이 많습니다…!]
“널 죽이면 어차피 다 내 것이 되는 게 아닌가?”
[제, 제가 익히는 마공도 알려 드리겠습니다!]
“난 마공에는 관심이 없는데.”
[뭐, 뭘 원하십니까! 저는 아는 게 많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다면 말씀해 보십시오!]
난 녀석의 머리채를 잡고 말했다.
“이제 조금 대화할 자세가 되었구나.”
저벅, 저벅….
나는 녀석을 끌고, 섭명함으로 걸어갔다.
철퍽!
나는 원립을 섭명함의 갑판 위에 올려놓고 말했다.
“너는 이제 내 노예다. 내 명에 거부할 수 없으며, 내가 죽이려 하면 저항 없이 순응해야 한다. 알겠느냐?”
[예, 예! 지, 지금 당장 살려만 주신다면….]
“섭명함에 대고 맹세해라.”
[…!]
원립의 의념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놈의 의념은 절망과 공포로 물들었다.
“진심으로 맹세한 게 아니군. 역시 지금 당장 죽여야….”
[맹세! 맹세하겠습니다! 섭명함에 대고 맹세합니다! 말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결국, 원립은 섭명함에 대고 귀도맹세를 하였다.
이제 녀석이 맹세를 어기면 녀석의 혼은 즉시 섭명함에 빨려 들어갈 것이다.
나는 놈에게 물었다.
“우선 기다려라.”
일단 저 비석의 내용부터 확인할 때였다.
타앗!
나는 아래로 뛰어내려, 그동안 궁금했던 비석의 윗부분을 읽어내렸다.
“도대체 무슨 내용인가….”
비석의 윗부분은, 아랫부분보다 조금 더 길쭉했고,
훨씬 많은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비석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후대들에게 경고하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선보(仙寶)는 결국 진선(眞仙)과 인력(引力)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채 진선과 관련이 된 자에겐 결국 재앙이 찾아올 뿐이니라.
이 흉측하고 기괴한 세계의 몇 아니 되는 장점 중 하나는, 그 불길함 덕택에 도리어 대다수의 진선이 천운을 읽어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니, 후대여. 선보를, 혹은 선계의 것을 우연찮게 얻었다면 이 세계에 두어라.
대경계에 이른 이들의 욕망과 권능을 우스이 보지 말아라.
선보를 가지고 비승하는 자, 어떤 곳으로 비승하든 진선에게 들키고 말리라.
특히 나의 후예여.
금신천뢰문에서 자라나, 혹여나 선보 천뢰번을 가지고 비승하려는 이여.
내 경고를 무시치 말고, 선보 천뢰번은….
거기까지가 비석의 내용이었다.
나는 비석의 내용과, 등선향에 있는 후반부의 내용을 이어 보았다.
―…후대들을 위해 남겨 놓고, 마음을 내려놓고 비승하라. 이를 지키지 아니하는 자, 재앙을 겪게 될 것이다.
“…그냥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격려가 아니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구체적인 경고였다.
그리고, 나는 각기 자신의 문파와, 문파의 물건을 깡그리 챙겨 가던 세 천인.
그리고 해룡궁에 상당한 보물을 남겨 놓고 간 해룡왕을 떠올렸다.
‘해룡왕은 이 경고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하.”
금신천뢰문을 위한 경고일 터인데.
정작 이번 대의 금신천뢰문은….
“선보(仙寶) 천뢰번(天雷幡)을 그대로 들고 가지 않았나?”
흑색귀골곡의 섭명함이야 선보의 ‘모조품’이고.
창호자의 청천갑이야 일반적인 법보를 뛰어넘은 ‘규격 외 법보’지만.
천뢰번은 엄연히 양수진의 ‘선보’라고 소문이 난 물건이었다.
‘전명훈, 이 녀석….’
나는 무심코 그 녀석이 걱정되었다.
서휼과 괴군에게 잡혀간 오 대리와 김 주임만을 제일 걱정했었다.
하지만 의외로, 가장 걱정해야 하는 건 지금 당장 대경계 존재와 얽혔을 전명훈이었을 수도 있었다.
파직, 파지직….
나는 눈앞에서 번개를 튀기며 떠 있는 비석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원립이 내 옆에 내려와 공손히 서 있었다.
“너는 금신천뢰문과 무슨 관계지? 이 흑색의 성은 뭐냐?”
[이 성은, 4만 년 전에는 등선향에 있던 성으로. 본디 금신자 양수진을 모시는 사당이었다 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사당을 관리하는 일족의 후손입니다.]
뜯겨 나간 성.
나는 등선향에 남아 있던, 뭔가가 뜯겨 나간 듯한 흔적이 있던 검은색의 건축물의 터를 기억했다.
그것이 이 성의 다른 부위였던 것이었다.
“너는 금신천뢰문과 관계가 없는 건가?”
[4만 년 전의 전쟁에서 사당이 등선향에서 뜯겨 나가 사막까지 날아온 후부터, 저희 일족은 금신천뢰문의 기억 속에서 잊혔습니다.]
“그런가….”
나는 녀석에게 계속해서 질문했다.
“네 원래 목적은 뭐였지?”
[…천인기 분들이 전부 비승하신 후, 전 대륙을 지배하고, 전 대륙에서 공급받은 자원으로 마공을 극한으로 익혀 천인기 대원만이 된 후. 봉명인의 축복을 받아, 저 승천문과 연결된 상계가 아닌, 혈음계(血陰界)라는 상계로 비승하려 했습니다.]
“혈음계?”
[예. 지금이야 양수진의 승천문 덕택에 모두가 승천문을 통해 비승하는 구조가 되었으나… 12만 년 이전의 고릿적, 그때에는 분명 익힌 공법에 따라 비승할 수 있는 세계가 달랐습니다. 승천문과 연결된 상계는 마공을 익히기에 적합한 곳은 아닙니다. 물론 이 세계보다는 수백 배 낫겠으나, 마공과 최적화된 세상은 아니라는 뜻이지요. 저는 봉명인을 통해 더욱더 전통적인 방법으로 비승하려 했을 뿐입니다.]
“혈음계라는 것을 들어 보니, 상계에 대한 정보가 있는 것 같은데. 읊어 봐라.”
원립은 내 눈치를 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관측 가능한 상계는 현재 여섯 개가 있습니다. 혈음(血陰), 진마(眞魔), 고력(古力), 명귀(冥鬼), 자금(紫金), 광한(光寒). 고력, 명귀, 자금의 계는 정보가 없습니다만 광한계, 진마계는 유명하지요. 광한계는 현재 승천문과 연결된 세계. 진마계는 광한계와 인접해 있는, 광한계와 전쟁을 벌이는 세계입니다.]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어느덧, 서란도 은근슬쩍 끼어들어 얘기를 듣고 있었고,
송진은 섭명함 위에서 팔짱을 끼며 원립의 얘기를 평가하듯 듣고 있었다.
[승천문이 없었던 때에는, 일반적인 선가공법이나 정도공법을 익히면 광한계로, 마도공법을 익히면 진마계로 비승했습니다. 진마계로 비승하면 진마계의 진마기를 받아들여, 마족(魔族)으로 전환이 가능하지요.]
“그럼 혈음계는 뭐지?”
[혈음계는, 본디 진마계의 일부였던 땅이었으나. 진마계에서도 특히나 사기와 음기, 탁기가 너무나 짙어 따로 떨어져 나간 세계라고 합니다. 진마계가 아니라 그곳으로 비승하면, 그곳의 힘을 흡수하여 진마계의 마족들보다 훨씬 고명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들 하지요.]
“흐음….”
말인즉슨, 이 녀석의 말은 말 그대로 전 대륙에서 대학살을 벌여, 마기를 극한으로 끌어모은 다음 더욱더 자신에게 맞는 특출난 상계로 비승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서휼은 도대체 이런 놈을 통해 뭘 하려던 거지?’
놈도 혈음계로 가고 싶었던 건가?
‘아니다, 놈은 이 세계에 수작을 부려 놓은 게 너무 많아.’
녀석의 목적은 상계가 아닌 이 세계다.
원립의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는 서휼의 목적을 추측할 수 없었다.
“너는 뭔가, 서휼에게 들은 말은 없나?”
[해룡왕에게 말입니까? 없습니다만… 해룡왕에게 들은 말은 아니고, 제가 그의 공법서와 피 한 방울을 훔쳐내긴 했습니다. 그 역시 원한다면 드리겠습니다.]
“…됐다.”
정작 이 녀석은 해룡왕에게 스스로가 이용당하는지도 모르고 있다.
‘이 녀석의 목적과 해룡왕의 목적이 합치했다는 건데. 이 녀석이 혈음계로 가기 위해 벌이는 학살 자체가, 뭔가 해룡왕이 원하는 건가….’
“흐음… 그렇지.”
생각해 보니, 이 녀석에게 얻어낼 게 남아 있었다.
“넌 봉명인의 비승의 축복을 받고자 하면, 봉명인을 얻고자 했겠군.”
[그렇습니다.]
“하면, 봉명성의 층을 무너뜨릴 방법도 가지고 있겠지?”
[예, 봉명성의 층에 흐르는 기운을 분석해서, 봉명성의 전 층을 무너뜨릴 진법도 전부 만들어 놓았습니다. 원하신다면 드리겠습니다…!]
원립은 자신의 저물대에서, 붉은 깃발 법기들을 꺼내서 내게 전해 주었고, 사용법을 알려 주었다.
나와 청문령이 만든 진법처럼, 딱 봉명성에만 적용되는 진법이었다.
“그래, 그리고….”
나는 원립에게 몇 가지를 더 물어보았다.
그리고, 나는 녀석의 보물 창고의 위치.
혈영들이 숨겨진 위치들을 전부 전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놈을 따라 이 흑색의 성 안쪽을 돌아다니며, 녀석이 숨기고 있던 것 역시 보게 되었다.
“이건….”
나는 커다란 핏빛 단지를 바라보았다.
단지는 새하얀 천으로 봉해져 있었고, 색깔은 붉었으나 원립의 다른 물건들처럼 피비린내가 나지 않았다.
도리어 향긋한 냄새가 풍겨 왔다.
“이 안에는 뭐가 들어 있지?”
[안에는… 제 혈체(血體)가 들어 있습니다.]
“…그 혈체라는 건 뭘로 만드는 거냐?”
[혈체의 경우, 기본적인 혈체 자체는 제 피를 영액 속에 배양하여 만듭니다. 그리고 추후에 특수한 기능을 추가하고 싶을 때는, 모아 둔 재료를 단지 안에 녹여 넣어 혈체에 서서히 합성하는 것이지요.]
“모아 둔 재료?”
[예, 인상 깊었던 적의 사체를 핏물로 녹여 놓은 용액이 있습니다.]
“…이 혈체라는 것에는 지금 얼마나 많은 ‘재료’를 녹여 넣었지?”
그러나 이어진 원립의 말은 나를 꽤 놀라게 했다.
[지금 혈체는 순수하게 법력을 쌓고 정순한 마기로 마공을 수련시키고 있기에, 합성한 것이 없습니다. 본래 혈영을 찾으러 가서 원영을 되찾고, 다음 봉명성이 나올 200년 동안 천천히 합성시키려 계획하였지요.]
“그렇군… 이 혈체에 대한 것 역시 전부 내놓아라.”
원립은 내게 혈체를 만드는 법, 조작하는 법, 혈체를 강화시켜 합성시키는 법 등등을 옥간에 적어서 건네주었다.
그렇게, 나는 원립에게서 들을 만한 것은 전부 듣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제 들을 만한 것은 다 들은 것 같군.”
[예, 전부 가감 없이 사실대로 말씀드렸습니다. 아 물론, 제 쓸모는 이게 끝이 아닙니다. 미리 오행혈주번을 박아 넣어 노예로 만든 녀석들도 있으며….]
그때였다.
지금까지 원립의 얘기를 듣고 있던 송진이 말했다.
[잠깐 놈의 머리를 조금 뜯어 보게 해 다오.]
[뭣…!]
[그럭저럭 맞는 말을 한 것 같다만… 마도 수도자들의 말을 왜 곧이곧대로 믿느냐. 당연히 꿍쳐 놓은 비밀이 지금까지 떠벌린 것들보다 훨씬 많겠지. 내가 놈의 상단전을 조금만 뜯어 보게 해 주면 있는 것 없는 것 다 토해 낼 수 있겠지.]
“음, 그렇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하십시오.”
[자, 잠깐!]
“가만히 있어라, 원립. 저항하면 죽이겠다. 섭명함의 맹세를 어길 셈이냐?”
[자, 잠깐 주인이시여!]
하지만 송진의 손길이 원립의 머리에 닿는 것이 더 빨랐다.
얼마 후.
[끄아아아아악!]
원립이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송진이 말했다.
[대부분 말했다만, 스스로 제 머릿속의 정보에 금제를 걸어 놓은 것이 몇 가지 있더구나. 금제를 거칠게 뜯어 보니, 대략 이런 내용이더군.]
송진이 말해 준 정보들은 대략.
혈음계의 고위 존재에게 제물을 바치는 방법.
혹은 혈제를 효율적으로 지내는 비술 등에 대한 것들이었다.
물론 그 외에도 원립의 개인사 등이 포함된 것 등이었다.
“별로 쓸모 있는 정보들은 아닙니다만.”
[어쨌든 감히 이놈이 수작을 부리며 네놈에게 숨겼다는 게 중요하지. 특히 혈음계의 존재에게 제물을 바쳐 소원을 이루는 방법은, 잘 쓰면 섭명함의 맹세를 벗어나는 것도 가능하기에 위협적이다.]
“흠, 그렇습니까.”
어차피 별 상관은 없었다.
[그리고….]
얼마간 원립의 머리를 뒤적이던 송진이 말했다.
[해룡왕에 대한 정보 말이다만, 모르고 있다는 것도 거짓인 것 같군.]
“…! 뭔가 정보가 있습니까?”
송진의 눈두덩이에서 귀화가 타올랐다.
[…없다.]
송진이 혀 차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내가 전성기의 힘으로 내리쳤을 때 보였던 서휼의 잔영. 그것이 발동된 순간, 서휼에 대한 정보가 자동으로 삭제되도록 만들어진 금제…. 그 금제가 이놈의 상단전에 박혀 있구나. 이놈도 모르는 사이 제 머릿속에 있던 정보가 지워진 것이야.]
“….”
결국 서휼에 대한 정보를 얻을 방법은 없다는 의미였다.
“그렇군요… 하면 그게 끝입니까?”
[끝이다.]
쉬이이익!
송진은 원립을 풀어 주었고, 원립은 머리를 부여잡고 자리에 쓰러졌다.
난 녀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좋다, 그럼 이제 쓸 만한 정보는 다 얻었으니, 죽어라.”
[자, 잠깐! 저, 저는 쓸모가 있습니다!]
“네가 숨겨 두었던 정보들까지 전부 다 빼냈다만?”
[아닙니다! 제가 이 세계 곳곳에서 암약하며 얻은 영향력은 이게 끝이 아닙니다!]
“그러냐?”
[서방 삼 가와 북방 네 부족, 동방 다섯 국가가 제 손아귀에….]
“그렇군.”
나는 무형검을 치켜들었다.
“잘 가라.”
[왜, 왜, 왜! 아, 안 돼! 그러지 마라! 죽기 싫다! 주인님, 주인님, 주인님! 이 개자식아아아!]
슈캉!
무형검이 빛나며, 원립의 영혼을 그대로 베어 낸다.
그렇게, 원립은 모든 것을 뱉어 내고 그대로 죽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다음부터는 희망 고문하지 않고 더 편히 죽여 줄 테니.’
나는 싸늘하게 죽은 원립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속으로 읊조렸다.
송진이 클클거리며 웃었다.
[배신을 왜 상관하지 않나 했더니. 처음부터 살려 둘 생각이 없었구나.]
“배신이 아니지요. 처음부터 같은 편이었던 적이 없으니까요. 그냥 적의 목을 벤 것뿐입니다.”
나는 놈을 바라본 후, 놈의 혈체가 담겨 있다는 단지를 바라보았다.
휘익!
단지를 봉한 면포를 열어 보니, 그 안쪽에는 지난 삶에 보았던, 익숙한 미인이 보였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이것.
나는 원립에게서 얻어 낸 법술로, 의식을 분리해 내 혈체에 집어넣었다.
번쩍!
혈체가 내 의식을 받아들여 눈을 떴다.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혈체는 새하얀 나신이었고,
흑단 같은 새카만 장발이 녀석의 주요 부위를 가리고 있었다.
‘원립의 본명마공을 익히고 있군….’
아직 200년 후의 그만큼은 성장하지 못했는지, 혈체의 수행은 결단기 후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승천문을 조사할 때, 썩 쓸 만하겠어.”
그래도 먼저 가서 죽어 줄 수 있는 인형이 하나 생긴 셈이니 썩 쓸 만했다.
거기에….
철퍽, 철퍽….
나는 혈체를 움직여, 원립의 혈포를 입게 하고, 녀석의 법보들을 착용하게 했다.
원립이 쓰던 법보들 역시 그대로 사용이 가능했으니 정말로 유용한 인형이 생긴 셈이었다.
“성 아래에 있는 영석이나 단약들은 송진 선배님께서 챙기시지요. 저는 저런 재물들은 딱히 필요 없습니다.”
[오, 그러냐?]
송진은 반색하며 원립의 보물 창고를 털어, 섭명함을 충전시킬 수 있는 영석들을 잔뜩 실어 날랐다.
그렇게 원립의 성을 뒤지던 도중이었다.
“이건….”
나는, 원립의 성 창고에 굴러다니던 것 중 익숙한 것을 발견했다.
옥빛의 노리개.
“….”
월량의 고손자의 것이었다.
‘진즉 잡아먹혔다고 했던가….’
나는 그 노리개는 월량에게 가져다주기로 결심했다.
얼마 후.
송진과 서란은 이제 내 부탁에 따라 다시 섭명함을 움직였다.
쿠구구구구!
섭명함은, 북방 대초원 곳곳을 돌았다.
북방 대초원 곳곳에 있는, 원립의 혈영들을 섭명함에 하나하나 먹이며, 원립이 혹시라도 부활할 가능성을 전부 없애 버렸다.
그리고 그러던 중.
나는 섭명함을 보고 당황하는 범인들과 수도자들 중.
익숙한 얼굴을 찾았다.
월량이었다.
나는 섭명함에서 내려, 그에게 다가갔다.
“네, 네놈은 뭐냐?”
월량이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노리개를 건네주었다.
“…이건….”
나는 얼마간 월량의 고손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답천사막에 살던 원립.
그가 잡아먹은 수많은 이들.
그리고 그 속에 있었던 월량의 고손자의 유품….
“…고맙다….”
월량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스럽고, 그리고 아주 약간의 후련한 의념을 흘렸다.
“정말, 고맙다…!”
나는 월량의 감사 인사를 얼마간 들어 주며, 그와 함께 원립에게 희생당한 이들을 잠시 묵념해 주었다.
* * *
섭명함은 계속해서 움직이며, 답천사막 인근, 북방, 동방, 남쪽 바다 인근, 그리고 서방의 벽라국 인근을 돌았다.
그리고, 섭명함의 뱃머리에서, 나는 익숙한 성을 발견했다.
쿠구구구!
섭명함은, 천색성의 위쪽에서 원립의 마지막 혈영을 향해 귀기를 드리웠다.
키이이이잉!
천색성 중앙에 박혀 숨어 있던 원립의 혈영이, 괴물 같은 소리를 내며 섭명함에 잡아먹힌다.
[휴우, 이제 다 끝났다. 혼을 벤 순간 어차피 부활할 가능성은 1푼 미만이었다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하다니. 네놈도 어지간히 독하군.]
“…원립이 부활하는 걸 경계하기보다는….”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 세상에서, 녀석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 버리고 싶었던 겁니다.”
나는 천색성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서 사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의 일상에, 조금이라도 원립의 흔적이 남지 않았으면 했다.
꾸욱….
나는 월량에게 준 노리개가 아닌.
내 법보가 된 옥빛 노리개를 꾹 거머쥐었다.
“선배님, 잠시 만나고 올 사람이 있어 그러니,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래.]
나는 옥빛 노리개를 쥐고, 천색성의 가운데에 있는, 익숙한 공방의 앞에 뛰어내렸다.
두근, 두근….
가슴이, 떨려 왔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나는….
그리고.
끼이익….
나는, 법기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